본고는 '우리 <외지주> 그런 애 아니예요'와 이어지는 글로, 그 1편 원고든 웹툰 <외지주>를 포함한 박태준의 만화든 적어도 한 가지는 읽어둬야 원활한 이해가 가능함을 미리 밝힌다. 물리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글을 읽는 것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겠으나 높은 확률로 내 원고보단 만화가 재밌을 것이기에, 모쪼록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충분히 고려해 선택하길 권한다.
[ 박태준 만화회사 주요 캐릭터들 ]
주지시켰듯, 최근 몇 년간의 <외지주>는 외모지상주의나 학교 폭력에 동조한 혐의로 비판받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작품은 힘과 서사의 팽창을 거듭한 끝에 곧 우주에서의 전투도 가능할 만큼 현실의 중력을 벗어났고, 이에 따라 현실의 문제를 왜곡해서 재현하거나 어설픈 해답을 제시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음을 앞 글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정해야 할 것은 <외지주>의 변화가 통상 '박태준 유니버스'로 칭해지는, 박태준 만화 군단 전체의 무혐의를 의미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2019년 작인 <인생존망>, <싸움독학>과 최근작 <촉법소년> 등은 <외지주>의 창작 방향이 비현실 쪽으로 자리잡은 뒤에 연재를 시작했음에도, 또 다시 강력한 현실의 중력 속에서 이야기를 열었다. 더 정확히는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현실의 중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언급한 세 작품 모두 학교 폭력의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유튜브', '촉법소년' 등 이슈가 될 만한 사안을 소재 삼았다. 피해자 시점을 내세워 사이다 서사를 예고하는 동시에 실시간의 현실을 소재화함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진입장벽을 낮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외지주>를 통해 입증되었던 성공 비결이며, 이 비결을 따른 작품들 모두 흥행을 거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외지주>가 비판받아온 것과 꼭 같은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으로 재미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외지주>에서 개선됐다고 생각한 문제를 반복하거나 심지어 갱신하기까지 했다.
박태준 만화에 관해 웬일로 좋은 얘기를 하나 했더니 역시 또 싫은 소리 하는구나 생각했다면 오해다. 지금부터 좋다는 얘기를 하긴 할 건데, 솔직히 말하자면 제 발이 저려서 미리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상황이 이렇다보니 박태준 만화의 독자들에게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왜 박태준 만화(따위)를 보는가? 아마도 그 질문에는, 박태준 유니버스에 기거하는 독자들의 심미안과 윤리의식에 대한 심문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제도 지하철에서 몰래 가리고 읽었다.
서론이 자꾸 길어져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젠가 박태준 유니버스의 열람 기록을 당당히 공개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다양한 욕망이 비판과 긍정 속에서 건강하게 표출되는 미래를 기대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박태준 만화의 독자에게도 나름의 지성과 도덕이 있음을, 걱정하시는 것보다는 선량한 시민이자 독자임을 해명해보고자 한다.
박태준 만화의 독자들은 '대중'이라는 말로 치환될 정도로 그 수가 대단한데, 이를 달리 말한다면 그만큼 그 안에는 다양한 유형의 독자들이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유니버스의 모든 작품을 두루 즐기는 독자, 그냥 1위 작품이길래 어쩌다 챙겨보는 독자, <외지주>의 장수 독자, 가볍고 유쾌한 <싸움독학>을 즐기는 독자, <촉법소년>처럼 무게감 있는 작품만 선호하는 독자 등 그 양상이 꽤 다양하다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어떤 유형이 가장 일반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외지주>와 <인생존망> 등 작가와 독자의 개그가 끼어들 만큼 가볍고 느슨한 작품들을 선호한다. 그래야 자유롭게 떠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박태준 만화를 보는가? 그건 박태준 유니버스의 주민들과 웃고 장난치는 일이 재밌기 때문이다. 혼자라면 읽다 말았을 위기가 없지 않았는데, 함께라서 내내 너무나 재밌었다.
박태준 만화의 독자들은 눈에 띄게 냉소적이고 거칠다. 설정이나 감정선의 구멍을 절대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핀잔을 줘도 그냥 주지 않고 꼭 한 번씩 비꼬아 말한다. 욕설과 비웃음은 일상이다. 분노에 찬 비난과 건설적인 비판 사이에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박태준 만화더러 ‘일진만화’라고들 비난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독자야말로 작가의 전담 일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협적으로 댓글을 휘두른다.
진짜로 욕설과 비난이 섞인 댓글은 마음이 아파 이 글에 옮길 수 없어 제외하고, 비교적 순하면서도 하나의 유형이라 할 만큼 자주 보이는 것이 '찬물 끼얹기' 류의 댓글들이다. 이들은 작품의 격정을 따라 심각하게 스크롤 내린 일이 무색하게 무신경한 지적들로 기껏 고조되었던 분위기를 단박에 꺼트리는 재주가 있다. <외지주> 442화는 에피소드 제목부터 '장례식'으로, 잠깐이지만 멋있고 정의롭게 등장했던 인물들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비통한 눈물 속에서 진행된 장례식, 복수를 다짐하는 남은 이들, 어렵게 진입한 적의 본거지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옛날의 적이자 동지, 비장한 표정으로 적을 바라보는 주인공 박형석, 그런데... [갑자기 생각난 건데 얘네 학교 안 가냐?] 아~ 좀!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얘기를 꼭 지금 해야 하나 싶은 댓글이 달리는 것이다.
설정 오류나 전개의 비약을 지적하는 댓글들도 동류라 할 수 있다. 불법 또또 총판 혐의로 잡혀 들어간 서울 강서 지역 크루 '빅딜'의 No.1 김기명. 그에겐 사실 사연이 있다. 조폭 아버지를 둔 기명은 일진이나 조직이라면 질색을 했으나 빅딜의 (전) No.1 한신우와의 인연으로 조직원의 삶을 시작한다. 한낱 깡패놀이라고 생각했던 빅딜은 알고보니 타 조직에게 착취당하는 거리의 '언니'(강서구 상가 입주민)들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었고, 빅딜의 정의에 감동한 기명은 강서 한복판의 (누가 갖다놨지 싶은) 바다를 바라보며 영원한 낭만과 의리를 꿈꾼다. 하지만 영원할 줄 알았던 빅딜에도 갑작스런 위기가 닥... [박태준 작가 지금 불법 또또 편 잘못 그려서 진땀 빼는 중ㅋㅋㅋㅋ] [이쯤 되면 불법 또또 편 김기명은 그냥 동명이인 ㅋㅋ] [동명이인 김기띵이었던 거임]
'찬물 끼얹기' 류가 작품 내부의 허점에 딴지를 거는 댓글이라면, 아예 직접적으로 작가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유형도 있다. 바로 '소갈비찜 레시피' 댓글들이다. '소갈비찜 레시피' 댓글은 말 그대로 레시피를 적은 댓글로, 레시피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덧붙임의 말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 전개가 재미없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논할 가치도 없다', '이번 회차에선 재미도 감동도 놓쳤으니 레시피라도 얻어가겠다' 이러한 메시지 정도로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파업이랄까. 작품을 읽고 감상을 논하는 것이 독자의 권리이자 예의이거늘, 그러한 책무를 저버리고 요리 교실이나 열겠다는 것이다. 설마 소갈비 썰듯 네 작품도 썰어주겠다는 의미겠냐마는, 작품이 재미없다는 의사를 이렇게 단호하게 표현하다니 내가 작가라면 상당한 위협을 느낄 것 같다. 그러한 위협감은 공교롭게도 무기로 쓰일 수 있어서 '소년탐정 박범재'라는 외전 에피소드(19년 1월)에서 시작된 소갈비찜 댓글은 현재까지도 틈틈이 활용되고 있다. 소갈비찜뿐만 아니라 김치찌개 등 각종 요리 레시피와 노래 가사로까지 그 종류가 확대되었고, 조금 지루해진다 싶을 때면 "작가님, 레시피 필요해요?" 협박을 시도한다. 하여간 다들 놀리는 데는 어찌나 부지런하고 위협적인지 크루로 활동 안 하고 뭐 하나 싶다.
그런데 분위기를 깨고 위협감을 조성하는 이러한 댓글들이, 솔직히 나는 너무 웃기다. 심지어 어떤 회차들은 본편보다 댓글이 재밌다. 엉뚱한 방식으로 표출하긴 하지만 거기에 담긴 지적과 불만이 사실 틀린 소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는 스크롤을 내리면서 무수한 생각을 거친다. 거기에는 재밌다거나 감동적이라는 순수하고 깨끗한 감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문('얘 아까랑 말이 다르지 않나?' '갑자기 웬 전차? 서울이 아니라 경성이야?')과 불만('이번 편은 좀 지루하다' '전개 산으로 가네')이 불순물처럼 뒤섞이기도 한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가는 전개 속에서 자연히 떠오를 법한 생각들을 댓글에서 귀신같이 짚어주니 저항없이 웃게 되는 것이다. 궁색하게 순기능을 덧붙이자면, 작품이 불만스러워지는 시기에도 바로 저 댓글들 때문에 하차하지 않고 감상을 지속해나간다. 긴 연재 기간 동안 항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든 웹툰 환경을 생각하면 제법 의미 있는 기능이라 생각된다.
무엇보다 박태준 작가 스스로 이러한 독자 반응을 적극적으로 받아내고 있어 맘 편히 즐길 수 있다. 작품 안팎에서 독자들의 반응에 대한 작가의 반응을 직접적으로 드러냄에 따라 엉뚱하고도 날선 표현이 용납되는 것이다. 전개가 늘어질 것 같을 때 작중 인물이 "또 레시피 받고 싶어?"라고 묻는다거나 박태준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독자가 준 레시피로 소갈비찜 만들기', '악플 읽기' 등을 시도함으로써, 잡음이나 불링이 될 수 있던 말들이 과격한 농담, 나아가 콘텐츠이자 해당 작품만의 문화로서 자리잡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박태준 유니버스에는, 쉽게 말해 '놀거리'가 많다. 앞서 언급한 댓글 문화가 가장 핵심적인 놀거리다. 박태준 유니버스만큼 자체적인 유행어, 말하자면 '내수형 밈'이 발달한 곳이 또 있을까? 작품 속 대사와 상황을 모방해 감상을 표현하던 독자들의 장난이 무르익어, 이제는 대사만으로도 독자들 간의 소통이 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장기 연재작 <외지주>에 쌓인 소재만 해도 엄청난데 세계관을 공유하는 유니버스의 다른 작품들이 등장함에 따라 작품과 작품을 넘나들게 되었다. 한창 열이 올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싸움독학>의 대사 [제 1장 '흥분 금지']를 꺼내거나 멋있게 등장한 인물에게 [빅딜(<외지주> 김기명의 크루)로 들어와라!]고 외치는 식이다. 각 작품의 인물을 죄다 꺼내와 그래서 누가 더 센지 비교하는 일 또한 박태준 유니버스 주민들의 주요 일과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이 세상살이에 얼마나 통용되는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박태준 유니버스에 한해서는 정말로 본 만큼,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 (특히 <외지주>는 모든 후속작과 밈의 원료이니 필독서고, 각 작품 모두 최근에 올수록 타 작품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는 추세이니 다양하게 읽어둘 것을 권한다.) 지성과 행동력을 두루 요구하며 다채로운 놀거리를 제공하는 유니버스라니. 이쯤되면 유니버스가 아니라 유니버-셜 스튜디오라 해도 되지 않을까. 가본 적은 없지만.
이 글을 시작하면서 증명하겠다고 했던 지성이 이 지성이 아님을 나도 안다. 윤리의식도 보여주고 싶었으나 그 또한 실패한 것 같다. 분량상 슬슬 글을 끝내야 하는 지금 나를 가장 상심하게 하는 것은, 내가 박태준 유니버스를 통해 체험한 이 재미가 글을 통해 전혀 전달되지 않으리란 예감이다. 원래 유머란 것이 옮기면 재미가 없어지는 법이다. 맥락을 제거한 채 말만 옮겨선, 유머를 가능하게 했던 크고 작은 암묵적인 사전 지식들, 유머 주위를 둘러쌌던 왁자지껄한 분위기, 내부자들만이 아는 그때 그곳의 온도, 습도, 데시벨 하나하나 전달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꿋꿋하게 변명을 이어나가보겠다. 박태준 유니버스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특유의 재미가 있다. 그것은 막역한 죽마고우와 티격태격할 때만 누릴 수 있는 편안함과 즐거움처럼, 냉소적일 정도로 건조하고 짓궂은 분위기 속에서 감상 나눌 때만 얻을 수 있는 재미다. 오래 쌓아온 시간과 공통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농담은 생각만큼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친밀한 사적 대화에서나 통용될 과격한 언사를 공공장소에 가까운 댓글창에서 주고받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질문한다면 별도의 기나긴 논의가 필요함을 안다. 가학적이고 과격한 재미에 따르는 책임과 피해에 관한 고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재미가 과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이러한 재미를 완전히 포기하는 대신, 지키고 싶은 재미와 지켜야 하는 도리 사이 균형점을 찾아내자고 하고 싶다. 소리만 크고 아프지 않게 때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처럼, 타격감이 좋되 다치지는 않는 농담을 발견해내는 때가 오리라 기대한다. 적당히 건조하고, 허무맹랑한 유머를 좋아하며, 인터넷 문화과 만화에 절여진 독자들이 다치지 않고, 다치게 하지 않으며 이 안에서 오래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박태준 유니버스', 윤리적이지도 않고 참신하지도 않고
2) '박태준 유니버스', 우리 외지주 그런 애 아니에요
3) 박태준 유니버-셜 스튜디오 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