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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만화의 성립 조건과 의미

'명품'의 조건과 함께, 어떤 만화에 ‘명품’이라는 표현을 붙여볼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2023-09-21 서찬휘

근래 어떤 브랜드가 화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의 척도인 양 비추어지는 것이 바로 오픈런(Open Run) 여부다. 오픈런은 본래 공연 따위가 끝을 정해놓지 않고 무기한 진행한다는 원래 뜻과는 달리 언젠가부터 매장이 개장하자마자 달려가야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뜻으로 정착 중인데, 아예 특정 매장 앞에서 밤샘 대기를 불사하는 모습들이 뉴스 등을 타면서 그 자체가 판촉 요소로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근래는 한 재일교포 유튜버가 촉발한 하이볼의 인기와 함께 소주의 인기를 위협하고 있다는 위스키가 그러하다. 한 때 웃돈 줘야 먹을 수 있는 과자가 된 적이 있던 허니버터칩이나, 씰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빵은 거들 뿐이라는 포×몬 빵의 사례도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줄 서는 맛집’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유명한 식당들은 어딜 가나 최소 20~30분 정도의 대기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얼마 전 다녀온 완주의 한 식당은 점심시간이 1시간 넘게 남은 시각에 대기 줄이 한 층 아래 계단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요즘은 그쯤 되어줘야 아 이건 진짜구나 하는 심정이 들 정도다.

온라인에선 안 그럴까? 해외에서 막 출시되었을 때 국내에서는 당장 구할 수 없는 물건을 해외 배송을 통해 구입하는 행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리어댑터라 불리는 이들은 남보다 먼저 어떤 물건을 취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는데, ‘누구보다 먼저’에 찍히는 것 같지만 그럴 만한 게 아닌 대상에 그들이 움직일 리도 없고 보면 결국은 그 물건이 얼마나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명품’의 조건

그런데 화제는 사실 단기간에도 획득할 수 있다. 특히 최근 같이 대상 그 자체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소셜 네트워크 인증용으로 소비하는 데에 익숙한 이들이 많은 경우, 그에 철저히 영합하는 경우들도 왕왕 만날 수 있다. 맛은 없는데 사진 찍기는 좋은(또는 매우 독특한) 찻집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단발성 화제는 단발성이라서 오래 갈 수가 없다.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목적으로 간 사람들은 그곳을 결코 다시 찾지 않는다. ‘다들 하니 따라한다’ 정도는 끌어낼 수 있어도 그 다음이 없다. 현실의 운영은 틱톡/인스타그램 챌린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폭풍 같은 유행이 지나간 다음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유행이 지나간 다음을 버티게 하는 건 언제나 본질이다. 화제 다음에 필요한 건 다시 찾게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다. 일정 이상의 정가를 굳건히 한 채 이를 납득할 만한 품질/맛/성능을 담보한 후, 선택에 대한 만족감을 안고 가게 만드는 것, 그리고 이를 오랜 시간에 걸쳐 관철시켜 내는 것. 이렇게 하여 살아남아 가치를 인정받을 때 비로소 세상은 이 대상을 가리켜 ‘명품’이라는 상찬을 허락한다. 명품은 이렇듯 단순하지 않은 경로를 밟아 탄생한다.

하지만 이 생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 비단 질에 해당하는 부분만일까?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은 사실 본질이기에 너무나 당연히 기본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게다가 사람들은 또한 너무나 당연히 질 좋은 제품을 기대보다 싼 가격에 구입하길 원한다. 많은 이들에게 할인가는 정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런 가운데 오히려 비싼 값을 감당하면서 자랑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는 선택을 했음을 공유하길 바라고 그만한 가치에 적잖은 돈을 썼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렇게 설정된 가치 평가에 자신에 대한 평가가 결부되기를 은연 중 바란다. 이 물건 한 개와 명품의 간극을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브랜드만의 개성과 구매자의 차별화, 스토리텔링이다. 명품은 특정 분야에 매우 특출난 디자인 또는 성능을 보여줌을 확신케 하는 이름임을 끊임없이 확인시키는 한편 너나할 것 없이 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또한 구매(의향)자가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제공해야 한다.

일례로 숙성을 시켜야 하는 특성상 물량을 마구 쏟아낼 수 없고 숙성 정도만큼 맛이 깊어지는 통에 가격 단위가 달라지기 일쑤인 위스키는 명품만의 개성이 만들어내는 희소성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인데, 10대 소년 존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 일을 돕기 위해 시작한 식료품 가게에서 만든 블렌디드 위스키에서 비롯해 처음 시작한 1820년 이래 ‘계속 걸어간다(Keep Walking)’을 모토로 삼았다는 조니 워커나 지금까지도 100여년전 그대로 전 공정을 오로지 장인들의 손으로만 진행해 극소량의 최상품을 만들어낸다는 발베니 위스키의 이야기는 시간과 함께 신뢰를 자아내는 역할을 한다.

위스키는 근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오픈런 품목이 되어 가격이 더더욱 상승하는 추세인데, 공급 대비 수요 증가로 가격이 뛰면서 오히려 더욱 사람들 사이에서 흥미를 돋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한으로 말미암아 생긴 관심이 가치 상승을 이끄는 셈이다. 이게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은 한 때 코인 소리를 들을 정도로 웃돈 줘야 먹을 수 있다가 생산량을 늘리자 곧바로 안정화(?)한 허니버터칩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면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비롯해 극단적인 폐쇄 생태계를 유지 중인 애플은 과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매킨토시 시절 출판 및 디자인 전문가들의 전용기기 제조사 같은 인상으로 다가왔지만 스티브 잡스에서 시작하는 혁신과 고집의 스토리가 일종의 시대적 아이콘으로 부각되며(부각시키며) 스마트폰 시대 이후 안드로이드라는 범용 스마트폰 OS 탑재기들과의 차별성을 보이는 독자적 브랜드로 목하 인식되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품 브랜드라 하더라도 개성을 잃으면서 가치가 하락하는 경우도 있다. 구찌는 100년이라는 적잖은 시간동안 구축해 온 브랜드의 가치를 1970년에서 1990년 당시까지 물경 2만 여 개를 넘는 라이센스를 남발하면서 박살냈고 이를 회복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써야 했다. 물론 구찌는 현재에 이르러 이와 같은 ‘폭망과 복구’의 역사까지도 고스란히 브랜드에 대한 흥미로 돌리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시간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와 개성의 희소성을 제공하지 않는 브랜드는 명품으로서의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 단순히 가격만 높인 고급화 라인이 냉큼 명품 소리를 듣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명품을 향한 종교적 선망이나 형편에 맞지 않는 과소비의 요인이 되는 건 언제나 문제고 많은 이들의 믿음과는 달리 명품의 가치가 소유자의 가치를 결정하지도 않지만, 현실 속에서 명품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는 분명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라는 말에 압축되어 있는 우려의 정반대에 놓여 있기도 하다. 명품은 분명 일면 허명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세월 속에서 빚어낸 이야기를 통해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론을 세운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명품 로고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목적인 이들이 분명 있겠으나, 한편으로 많은 이들은 안정적으로 가치를 확인하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싶어 하기도 한다.



만화에 명품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러한 기준점을 놓고 어떤 만화에 ‘명품’이라는 표현을 붙여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이 지면이 특정 작품을 명확히 콕 집어 이게 명품이다, 라고 이야기할 자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명품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어떤 만화여야 할까를 논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쉬 생각하면 고급 장정으로 나온 책이면 명품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다. 출판만화가 중심이던 시기엔 ‘책을 비싼 가격으로 온갖 옵션을 다 붙여 찍어도 넉넉히 팔릴 만한 만화’가 기준점이 될 만도 했고 애장판 완전판 류의 이름이 붙은 책들은 그만한 시장성을 확인한 작품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이제 웹툰 시대에 이르러 만화책이 고급 굿즈로 소비되는 시점이고 보면 이 또한 구분이 쉽지 않은데다 어지간히 잔뼈가 굵은 출판사들조차 책 출간에 크라우드 펀딩의 힘을 빌리는 마당이니 시작점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상황이다. 즉 ‘책 출간’이 명품 만화의 기준이 될 여지는 사라져 있는 상황인 셈이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명품의 조건들을 빌려 와 논해 보자면, 일단 첫 번째로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만화로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인기 소재를 찾기보다 작가가 자기 만화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인기 소재에 편승하기보다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가 성립하는 작품이어야 한다.

판매고, 또는 웹툰으로 치면 클릭수나 페이지뷰로 가늠되는 시장성은 상업 예술로서는 당연히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의 이유를 시간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의 인기를 끄는 것도 중요하나 계속해서 그 작품이 그 때 왜 있었는지가 회자되고 끊임없이 재소환되지 않으면 그 작품은 명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위스키가 숙성을 거쳐 가치가 올라가듯, 만화는 그 때 왜 그 작품이 있었는지를 이해받고 또한 그 시기와 함께 소환되며 세대를 거듭해 서사에 해석을 덧붙여 나가야 한다. 그 시기에 있어야 함직한 자리에 그에 필요한 작품으로서 자리했던 만화는 그 시기와 함께 계속해서 언급된다. 엄혹한 시대에 만화로서만이 아니라 한 세대의 등대와 지표가 되어주었던 작품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만화는 작품 안의 스토리텔링만이 아니라 작품에 얽힌 스토리텔링이 중요하고, 이를 만들어가는 건 작가 개인만이 아닌 독자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독자가 작가의 의도에 덧붙여 만들어낸 시대와의 조응을 빼놓고 명품 만화의 조건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며, 또한 어느 한 순간 박제되지 않은 채 이 조응이 현재에도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는가 없는가도 중요한 덕목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숱하게 박제된 채 지금과는 괴리된 과거의 영광들을 보면 작가의 경력을 향한 경의를 표할지언정 존경을 담아 책장에서 꺼내들기가 힘들다.

마지막으로 개성이 만들어내는 희소성이란 측면을 만화로 놓고 보자면, 단지 ‘압도적인 필력’과 ‘연출력’만이 아니라 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색깔을 그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균질성 있게 계속해서 보여줄 수 있는가라 할 수 있다. 만화가 중에 단지 그림을 잘 그리기만 하는 사람은 많다. 그들은 정말 기계처럼 정확한 데셍이 돋보이는 그림을 그릴 줄 안다. 하지만 그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데에 그림의 엄정함이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을 지키면서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래서 만화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또한 이야기만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를 잘 조합- 위스키로 치면 블렌딩 -해 들쭉날쭉하지 않게끔 잘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예술이다. 소위 장인정신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나의 이야기와 그에 맞는 그래픽을 나의 손으로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신뢰감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남들이 다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색채를 보여주는 것. 명품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을 만한 만화는 이러한 신뢰가 시간과 함께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신뢰할 만함이 확인된 작품은 새로운 회차나 신간이 등장할 때면 질세라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오픈런이 별 것이랴?

정리하면 명품 만화란 지금 당장의 인기가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할 이유를 시대성과 함께 획득함으로써 독자를 설득해야 하며, 작가가 구축한 이야기 위에서 독자들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과 함께 계속해서 쌓아 올림으로써 현재와 함께 숨 쉴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그림 솜씨와는 별개로 그 작가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와 그에 가장 잘 맞는 그래픽을 조합해 꾸준히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당장의 수익이 명품의 증거일 수 없고, 오로지 경력만으로 대가의 명작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를 독자와 함께 계속해서 증명해 나가는 작품만이, 또한 작가가 집필 시에 견지한 바를 자신의 삶 속에서 배반하지 않는 작품만이 명품으로 회자될 수 있고 이윽고 점차 고전으로서 기억될 것이다. 

당대의 즐길거리를 넘어, 독자와 함께 의미를 덧대며 시대 속에서 숙성해 갈 수 있는 작품, 또한 그럴 수 있는 독자를 확보한 작품, 그래서 어떤 형태로 다시 나와도 결국 또 지갑을 열며 행복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작품! 비단 옛 이름난 작품들만이 아니라, 여러 과정을 거쳐 명품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음을 확신케 하는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이야말로 만화 독자의 큰 보람이다. 명품이란 낱말 자체는 역시 일면 허명이기도 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불교의 섬뜩한 경구처럼 말 껍데기 그 자체에 집착해서도 아니될 것이나, 나와 시대를 함께 숨 쉬며 계속 찾을 만한 작품 정도로 생각한다면 어떨까 싶다. 내게는 그런 작품들이 있고 또한 계속 나올 것임을 안다. 만화 독자의 행복이 다른 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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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찬휘

* 만화 칼럼니스트. 
* 《키워드 오덕학》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덕립선언서》 등 저술.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와 백석문화대학교 출강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