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은 2015년 2월부터 9월까지 연재한 웹툰이며, 2023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한 드라마의 제목이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약 650억, 한국 드라마 역대 최대 제작비의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편수가 20편으로 많은 편이기 때문에 편당 제작수로 본다면 30억으로 역대 최고에 해당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제작비임은 변함이 없다.
오늘은 이 <무빙>의 성취와 한계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연하게도 높은 강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 규장각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슈퍼히어로. 오늘 날에 아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장르물의 이름이다. 스판 쫄쫄를 입고 다니며 초능력을 쓰는 이 존재들은 실사물에 있어서는 '아동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굳이 성인 코드를 꼽아보자면, 린다 카터가 주연한 <원더우먼>에서 다소 섹슈얼하게 표현되었던 주인공 원더우먼이 있을텐데, 이 작품도 전체적인 작풍은 만화지향적의 가벼운 작품이다. 슈퍼히어로에 좀 더 어른스러운 테이스트를 첨가하는 시도는 그 전에도 여러차례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를 크게 바꾼 것은 역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 그리고 불후의 명작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가 있다. 스파이더맨도 좋은 작품이고, 이 작품의 성공이 있었기 때문에 다크 나이트 같은 분위기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겠지만,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경우 업계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슈퍼맨에 <다크 나이트> 테이스트를 입히려 노력했을 정도고, 이후의 DC나 마블의 영화 작품들이 현실적인 분위기를 지향하게 된 데에는 이 작품의 공이 지대하다. 그만큼 잘 만든 작품 하나는 업계의 동향 자체를 바꿔버린다
액션은 원래부터 뛰어나지 않았고, 자랑하는 차량 스턴트 액션도 충분히 대체할만한 장면들이 나왔다. 현재 영화 산업의 최전선에 위치한 것이 슈퍼히어로 장르인 만큼, 15년의 시간 동안 발전해 온 기술의 성과는 눈부실 정도다. 하다못해 영 자리를 못 잡는다고 평가 받는 DC의 작품들조차 때깔만 본다면 <다크 나이트> 이상인 장면을 추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15년이 넘도록 <다크 나이트>가 여전히 업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이야기가 가지는 힘에 있을 것이다. 조커의 혼돈 이론과 정의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 그리고 배트맨의 결단까지. 한 영화에 담겨 있는 매끄러운 기승전결이 다른 영화에는 없기 때문에 단편으로는 이 영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리라.
<무빙>을 <다크 나이트>에 빗대려는 게 아니다. <무빙>에는 <다크 나이트> 만큼의 분위기도, 캐릭터도, 작품 전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즘은 시원치 않다지만 슈퍼히어로의 본고장에서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마블도 못 따라잡은 작품을 <무빙>이 따라잡았다는 건 국뽕을 한 사발 들이켜도 쉽게 꺼낼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슈퍼히어로물을 표방하면서, 소시민적인 발상과 전개를 보이는 점은, 분명 기존의 슈퍼히어로물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법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무빙>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는 작품이 나오리라고 충분히 기대가 될만큼. <무빙>의 어떤 점이 특별한가? 이들은 정의를 찾지 않는다. 악당을 눈앞에 두고도 정의 때문에 죽이지 못하고 고민하는 그런 모습은 <무빙>에선 찾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들은 임무라서 사람을 죽이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심지어 마지막화에는 도모지(물에 젖은 종이를 얼굴에 덮어 서서히 질식사 하게 만드는 고문법)까지 사용해가며 죽이는 모습이 등장한다. 초재생을 하거나 멀리 보고 멀리 듣는 오감을 갖고 있거나, 비행하기도 하는 이들은 분명 슈퍼하다. 하지만 히어로인가 라는 면에 있어서는 다소 의문점이 들게 만든다. <왓치맨>의 로어셰크 <퍼니셔>같은 다크 히어로 조차 아니다. 굳이 꼽자면 안티 히어로에 속하겠으나, 그렇다고 안티 히어로 하면 떠오르는 데드풀 같은 캐릭터들 역시 아니다. 결국 이들의 뒤에 붙는 '히어로' 라는 명칭 자체가 어색하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비범한 능력, 초월적인 장비, 혹은 엄청난 시련 등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영웅과 보통 사람의 차이점은 이타성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외면해야 한다. 피해에 휘말리는 것을 외면해야 하며, 남을 돕느라 내가 손해를 볼 상황도 외면해야 한다. 때로는 외면하는 것을 넘어 결과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는 것이 '내'가 잘사는 법이다. 영웅은 세상의 기준점을 나의 이익으로 잡지 않는다. 이들은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불구덩이에 달려들기도 하며, 취객을 구하려 지하철 승강장으로 뛰어 내리기도 한다. 나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그러지 못할 행동들이다. 남다른 무력과 두뇌, 장비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이 이타성이 있는가?에 의해 영웅과 그렇지 않은 자가 나뉜다고 생각한다. 다크 히어로, 안티 히어로라고 불리는 이들도 신념이 다를 뿐이지 결과적으론 나의 삶을 희생해서 이타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무빙>의 주역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임무기 때문에 수행하거나, 연인, 가족, 자식을 위해 움직인다. 영웅보단 시민의 삶에 더 가깝다. 이들은 우상시 할만한 영웅은 아니다. 하지만 공감하기엔 더 좋은 캐릭터임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보통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이타성이 아니라, 보통 사람과 같은 원리로 움직이니까. 강풀 작가는 극악의 그림체로도 스토리의 흡입력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작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시민적인 캐릭터들에 강풀의 흡입력이 더해지면 상당한 결과물이 나온다. 그 결과물이 <무빙>이다. <무빙>은 군상극의 형태를 띈 작품이다. 주인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명이란 이야기인데, 지면에 여유가 있는 소설이나 만화와는 다르게 분량이 제한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특히나 주인공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슈퍼히어로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장르다. 솔로 무비를 각자 할애해 개인의 서사를 다 정리한 뒤에 만들어지는 마블의 팀 업 무비 정도가 이런 군상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텐데, 단일 드라마에서 시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상당히 많은 주역을 조명한다. 최소한 6~7명 정도의 인물이 과거사에 분량을 할애 받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개인사를 제외하고 진행되야 하는 이야기들도 있음을 감안하면 인당 부여 받는 시간은 단순 계산으로도 2시간 남짓. 인물에 따라 비중의 차이가 있으니 ±가 있어야겠지만, 대략적으론 솔로 무비 1편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촉박한 시간을 가지고도, 개인사 부분은 상당히 괜찮은 타율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불호였던 건 이재만과 전계도 정도, 이재만은 진부함이 과할 정도라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았고, 전계도는 작품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고, 너무나 유치해서 왜 추가했는지 이해하기 힘든 오리지널 캐릭터였다. 심지어 전계도의 과거사에는 한 편을 통채로 할애했는데, 이건 결정적인 미스라고 본다. 전계도는 무빙의 이야기에 완성도를 높여주는 캐릭터가 아니라 오히려 떨어트리는 캐릭터였으니까. 결론적으로 이재만은 자식을 위해 움직인다는 행동 원리도 겹치고, 시간은 시간대로 부족한 장주원의 열화판이었고, 전계도는 그냥 빼는 게 나았다. 다른 캐릭터들은 다들 절박한 사유로 움직이는데 제3자가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것도 이미 분위기를 해치는데 그 캐릭터가 "번개파워!"나 외치고 있으니 이런 캐릭터가 작품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만 제외하고 본다면 앞서 이야기 했듯 장주원의 이야기, 김봉석의 이야기, 이미현의 이야기 등은 충분히 공감 가능하면서 흥미가 동할만한 이야기였다
이런 서사성 부여에 탁월한 면은 독이 되기도 한다. <무빙>은 한 편으로 어벤져스를 찍고 싶었던 작품이다. 각자의 주인공을 소개하고, 그들이 모여서 공동의 적을 무찌르는 그런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적의 이야기에도 지나치게 서사성을 부여한다. 아무런 이야기도 없는 빌런보다는, 고유의 철학을 가지고 나름의 사연도 있는 빌런이라면 절대 나쁠 게 없다. 오히려 아치 에너미로서는 탁월한 접근법이다. 문제는 빌런이 아니라 빌런들에게 이런 방법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많은 만큼 그 주인공들과 1:1을 벌이는 악당들도 많을 수 밖에 없다. 근데 그들의 대장격에게만 서사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그 악당 하나하나에 모두 이야기를 부여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막판에 몰아서
이야기는 산만해지고, 마지막 전투에 할애할 연출과 전투는 초라하고 급해진다. 어차피 퇴장할 적군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보다보면 이렇게 절박하게 생존을 위해 싸우는데, 그보다는 덜 절박한 주인공 측이 나쁜 놈들인가 싶을 정도. 이 부분 만큼은 실패한 변형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의의는 알겠다. 빌런이 북한군들인데, 이들도 사람이란 것을 강조하고 싶었겠지. 같은 사람일 뿐인데 윗선의 지시 때문에 싸우고 있는 안타까움을 그려내고 싶었겠지. 근데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서는 안됐다.
작품이 드라마 내내 강조해온 건 개인의 울타리이다. 가족을 위해 연인을 위해, 임무 장면이 나오긴 했지만, 그저 인물들 간의 연결고리가 되었을 뿐, 사명감에 대한 비중은 거의 없다. 분단의 아픔? 남측과 북측간의 전투가 등장하지만 그런 뉘앙스는 아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스케일에서 놀던 작품이 갑자기 적의 인간적인 과거를 조명하며 분단의 비극을 강조해봐야 뜬금없이? 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작가의 불필요한 사명감이 다소 교조적이고 진부한 이야기로 전락시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스토리적 한계를 떠나서, 후반부의 액션 연출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방패나 강철 슈트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사물이 들어가는 액션이라면 모를까. <무빙>의 액션들은 굉장히 평범한 육탄전의 모습을 띄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연출함에 있어서 미숙함이 굉장히 많이 느껴졌다. 기이한 것은 작품의 중반부까지는 이런 티가 잘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주원의 호텔 전투씬만 해도 충분히 드라마가 반영된 비장하고 처절한 싸움을 그려내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후반부에는 이런 퀄리티를 찾아볼 수 없다. 최악은 비행 전투 장면으로, 전투라기보단 공중 허우적거림에 가깝다. 뭐 그래도 이건 특이한 전투 방식에 해당하니 감안은 해야할 것 같다. 판타지를 극도로 배제해온 한국 미디어에서 공중 전투에 대한 경험치를 쌓을 곳은 흔치 않았을 테니까. <무빙>은 신체와 관련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다. 당연히 '몸'쓰는 연출은 더 신경 쓰고 잘 만들었어야 하는 게 맞다. 기본은 슈퍼히어로물의 골자를 따르고 있는 작품이니까. 결국은 사명감이 작품의 마무리를 망치며 전체적인 퀄리티를 크게 해쳤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잘 만든 작품이라도 끝마무리가 매끄럽지 못하면, 다른 파트가 부실할 때에 비해서 가장 완성도가 떨어져 보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빙>은 준수한 흥행 성적을 얻었고, 이미 웹툰 원작에도 후속작이 있는 만큼, 드라마의 후속작 역시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작품이다. 후속작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서, 더 좋은 완성도로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 어찌되었든, 슈퍼히어로란 장르에 있어서 신선한 시도이고, 그게 한국 작품이 이뤄냈다는 점에서 반가운 건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