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쉽게 이해하려면 생물학을 공부하면 된다. 모든 생명체의 근원적인 욕구가 생존과 번식이듯 장르란 인간의 욕망이 생존하여 번식하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장르물은 그 자신의 생존 수단으로 재미를 택했고, 이를 토대로 천수를 누린다. 말하자면 ‘장르’란 그 자신의 번식을 위해 ‘재미’에 올라탄 생명체다. 이 맥락에서 장르란 미디어 전반에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사회적 분위기나 현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장르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장르가 우리를 이용할 뿐이라는 점에서, 개체로서의 ‘나’는 장르의 숙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말을 ‘우리의 삶이 장르에 지배되고 있다’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우리가 장르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장르를 통해 [세계]를 들여보는 것만큼이나 “장르 또한 우리를 통해 [세계]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며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자.
아이돌물이란 뭘까? 그리고 아이돌물이 2020년대 들어 한국 서브컬처에서 유행하는 이유는 뭘까?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해 나는 후자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장르에 대한 정의는, 큰 틀에서만 본류를 가져오며 줄곧 다른 종으로 분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아이돌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아이돌물이 아이돌을 무엇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물음은 그런 물음을 던지는 ‘우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선 큰 틀에서 보았을 때 현대적 의미에서의 아이돌물은 2005년의 [아이돌 마스터]가 본류로 제시된다. 여러 명의 캐릭터가 등장해 이들이 그룹을 결성, 아이돌로서 ‘무대’에 선다는 이 컨셉은 크게 보았을 때 뷔페와도 같았다. 캐릭터 모에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는 일본 서브 컬처에서 ‘많은 캐릭터가 한 자리에 등장한다’는 점은, “네가 좋아하는 것도 이 중에 하나쯤은 있을 거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잘생기고 예쁜 캐릭터가 많이 나올 뿐이라면 아이돌물은 소위 ‘동물원계’와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애니메이션에서 서사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한들, 작품을 끌어가는 최소한의 원동력이 있어야만 한다. 위에서 말했듯 작품이 독자에 올라타려면 그들의 욕망을 철저히 공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찰떡같이 들어맞은 게 바로 장르로서의 아이돌이다. ‘아이돌’의 형태는 각자 다르지만, 그들 흥행의 원류에는 항상 ‘우상’의 지위가 있기 마련이다. 우상숭배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우상’은 그게 진짜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모습, 즉 ‘욕망’에 가닿을 수 있는 형태로 세계에 전면화되어야만 한다. 즉, ‘아이돌물’이란 아이돌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 이전에 “자신을 보여주는 방법 혹은 과정”에 대해 말하는 장르이다.
<아이돌 마스터>와 <러브 라이브>, <뱅드림!> 같은 작품의 본류가 캐릭터 모에에 있다고 말한 만큼, 이들 작품에서 ‘자기’는 극을 끌어가기 위한 소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냥 최대한 다양한 캐릭터를 끌어들이기 위한 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돌물의 특징 중 하나는 작품 내에서 아이돌에 대한 입지와 구상이 우리가 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무대에서 사람들의 선망을 받고, 노래와 춤으로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는 일은 용사가 되어 마왕을 무찌르는 종류의 욕망은 아니다. 일차적으로 아이돌물에서의 ‘우상’은 다른 무언가에 등치될 필요 없이 직설적이다. 아이돌물은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말이 자신에게 적용되므로, 아이돌물이 묘사하는 세계란 살아가는 현실로서의 공간이기보다 개인이 바라고 선망하는 현실에 가깝다.
< 그림 1, 좌) 이세돌 3집 싱글 'kidding', 우) 니지가사키 학원 스쿨 아이돌 동호회 >
바로 이 현실이야말로 아이돌물이 여타 장르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장르가 무언가가 ‘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미리 만들어진 포지션을 제공한다면, ‘아이돌물’에서 중요한 건 “내가 되고 싶은 건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고 아이돌물은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모두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이돌물은 여타 다른 장르보다 개인의 참여를 요구한다. 자신이 되고 싶은 것에 대한 동경이 없다면, 아이돌물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이돌물은 남들 앞에 자신을 빛낸다는 점에서 개인의 삶과 욕망에 충실하지만, 그런 욕망의 무대는 구체적인 역할이나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다. 아이돌물이 바라는 현실은 [이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인 셈이다.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호는 무엇보다 이들 캐릭터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는 SF나 판타지 같은 현실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들 세계에서 개인은 단계적인 수행이나 절차를 밟으며 강해진다는 왕도를 따르지만, 아이돌물의 서사는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가치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아이돌물에서는 변화와 발견 모두 자기에서 이루어진다. 2020년의 판데믹 이후 전개된 ‘버츄얼’ 열풍이 아이돌물과 결합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아이돌물에서 [세계]는 개인에 우선하지 않는다. 아이돌이 등장하는 곳은 이세계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러브 라이브>처럼 ‘학교를 살리자!’는 부류의 슬로건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우마무스메>처럼 실존 말을 모에화한, 경마에 아이돌 활동을 결합한 무언가이기도 하다.
이는 즉 아이돌 자체를 소재로 한다기보단, 아이돌 ‘활동’에 방점이 찍혀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아이돌 활동이란 개인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무대’는 어디든 구애받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이돌물의 발전사는 곧 무대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이런 설명에서 우리는 왜 판데믹을 계기로 버츄얼과 아이돌이 한 자리에 놓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버츄얼이 우리에게 말해준 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일”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이기도 했다. 개인이 삶을 향유하는 영역이 온라인으로 확장됨에 따라 ‘가상’은 우리가 도피하여 숨어있는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에서 ‘아름다운 가상’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하며 불완전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일에 대한 슬픔을 말했지만, 오늘날 가상은 이조차 끌어안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돌물은 현실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전제 삼는다. 여기서 현실은 [세계]와 구분되는데 가령 이런 경우다: 삶을 영유하는 일에서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는 크게 두 갈래다. 내가 달라지던가, 아니면 삶의 터전을 바꾸던가. 둘 중 뭐가 더 나을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아이돌물은 전자를 택한다. “내가 세계를 살아간다고 보기보다, 그들 또한 우리를 통해 살아간다”고 보는 일이다. 즉 2020년대 아이돌물의 특징은 사람들이 원하는 일에 부응하기보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 위에서 언급한 <우마무스메> 같은 사례도 마찬가지로, 이 게임에서 아이돌 활동은 경주에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만 무대에 선다는 의미에서 동기부여가 되어주고 있다. 이른바 이 게임에서 1등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여 실현하는 문제라고, ‘아이돌’ 컨셉은 말한다.
< 그림 2, 좌) 반짝이는 프리채널, 우)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위닝라이브 >
무대의 문제로 넘어가 보고 싶다. 아이돌물이 무대의 변천사와 함께한다는 점에서 2020년대 전후의 이후의 버츄얼 아이돌 활동은 뜻깊다. 우선 틱톡이나 유튜브와 같은 채널의 글로벌 흥행은 기존에 투고 형태로 운영되던 몇몇 ‘얼굴 없는 가수’ 활동을 확장했다. 니코니코 동화 등지에서 활동하던 우타이테 가수들이 트위치 등의 방송 플랫폼으로 대거 이동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타이테와 버츄얼 기술의 결합이다. 기존에 우타이테 가수들은 익명으로 활동하고자 각자의 캐릭터를 내세웠는데, 이는 팬 문화의 연장선이었다. 캐릭터는 이들 가수에 대한 선망과 열광이 응집하는 곳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2D 캐릭터는 기술의 발전으로 3D화 되어, 가수 본인의 모습을 캐릭터로 대체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버츄얼 기술을 활용한 1인 방송이 가능해짐에 따라 이들 방송은 ‘무대’가 되었다.
특히 [이세계 아이돌]의 결성과정이 시사하는 건, 버츄얼 아이돌의 가능성 이전에 가상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세계의 거주민이 되는 방식으로써 ‘버츄얼’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다. 아이돌물의 유행은, K팝의 흥행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선망하고 따를 수 있는 장소로서 인터넷 공간이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오늘날 온라인은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사람들의 의견이 표출되고 욕망이 투영되는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온라인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되었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공식도 온라인으로 확장된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거나, 학창시절에 접한 세대에게 온라인은 명실상부한 삶의 한 영역이며, 이는 자아를 찾고 실현하는 무대로서의 온라인이 가능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터넷은 기존에도 ‘재능’을 뽐내는 곳으로써 노래나 춤의 영상 투고가 활발했다. 현시대의 버츄얼 방송은 더 좋은 기술을 통할 뿐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무엇보다 2020년대 아이돌물의 특징은 역시 ‘영역전개’다. 버츄얼 아이돌 활동은 무대의 위치를 특정한 현장에 두지 않는다. 시청자도 그렇지만 아이돌 활동을 하는 당사자도 장비만 있으면 어디서든 방송을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아이돌물의 양상이 현실 세계를 토대로 가상 캐릭터를 세우거나 하는 식이었다면, 버츄얼 기술의 응용은 G-STAR나 AFG와 같은 오프라인 행사에서 팬들과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이를 따라 성지순례 문화는 팬미팅 등의 형태로 발전하며 이는 곧 덕질의 요소 중 하나인 ‘실시간’을 충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버츄얼 아이돌은 저작권이나 기타 현실적인 문제로 금지되었던 ‘실제 현장’을 소환해낸다.
이러한 현장성은 우리가 앞서 말해두었던 [세계]의 문제를 따라간다. 우리가 장르에서 살아갈 [세계]를 유추하는 만큼, 그들 또한 우리를 통하고자 한다는 점 말이다. 무엇보다 아이돌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들 [자기]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우리]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돌물에서 ‘우상’은 단순히 믿고 섬기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진짜 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이돌물에서 캐릭터는 ‘가짜 나’가 아니라 자신만이 가진 고유함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며, 이는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현실 속에 숨쉴 틈을 제공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현실의 범주에 인터넷이 포함됨으로써 벌어지는 일들에 주목해야만 한다. 젊은 세대에게 ‘불완전한 현실’의 범주는 인터넷을 포함하고, 네트워크는 개개인을 이어주는 하나의 다리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