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웹툰의 성별?
‘남자’ 웹툰과 ‘여자’ 웹툰이 있다면, 무엇이 어떠한 웹툰을 여자로 또는 남자로 만드는 것일까? 웹툰에 여성향과 남성향이라고 이름 붙이고 성별로 범주화하는 것이 시대착오적 또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분류 방법이라는 지적은 수 차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글은 그러한 지적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의 도덕적 또는 정치적으로 부당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웹툰 플랫폼이 그것을 활용하고 있다면 왜 활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범주에 의해 분류되는 것에 실패한 ‘기이한(queer)’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남성향 웹툰과 여성향 웹툰을 구별하는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거의 대부분이 암묵적으로 그 기준을 알고 있다는 것에 있다. 가령 제육볶음이 남자 음식이고 떡볶이가 여자 음식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의 대부분이 동의하는 분류이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남자가 아무리 음식에 성별이 어딨냐고 외쳐봤자, 여자 음식을 좋아하는 남자에 불과한 것이다. 음식에까지 성별을 부여하는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미묘한 부끄러움 또는 미묘한 자부심을 느끼지만, 선호하는 음식의 경우는 (성별과는 무관한) 취향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떡볶이를 좋아하는 남자’는 여자 음식과 남자 음식이라는 우스갯소리에 적합한 주제가 대화의 화두에 오를 때 ‘미묘한 부끄러움’을 느낄 뿐이다.
이제 ‘미묘한’ 감정에 집중해보자. 사회에서 부여한 성별 역할극에 부합하지 않도록 성별을 수행하는 NG 같은 연기가 지시하는 바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구성해내는 무대다. 남성은 무협 웹툰을, 여성은 멜로 웹툰을 선호한다는 통계적-진실 앞에서 갈 곳을 잃은 기이한 존재들은 무대에서 반복적으로 좌절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적어도 이 글은 남성과 여성이 선호하는 장르가 다른 것이 ‘생물학적’이라는 환원주의에 또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구조주의적 담론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집중할 것은 그것이 발생시키는 결과이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범주화 방법인지 여부는 적어도 이 글에서 중요하지 않다. 현실이 통계에 기반하여 웹툰에 성별을 부여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을까?
1. 남성성과 여성성
[ 그림 1, 네이버웹툰 실시간 인기 웹툰(기준 2023년 11월 30일) - 좌) 여성, 우) 남성 ]
태어날 때부터 남성은 액션을, 여성은 멜로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그것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고정관념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그들이 외면할 수 없는 것은 통계적으로 남성은 액션을, 여성은 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남성’과 ‘여성’이라는 명사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성별에 따라 좋아하는 장르가 다르다는 기준점으로서의 성별과, 액션을 좋아하는 것을 ‘남성적인 속성’으로, 멜로를 좋아하는 것을 ‘여성적인 속성’으로 재생산하는 통로가 그것이다.
남성과 여성 각각에게 부여되는 속성의 가치(남성은 이성적, 능동적이지만 여성은 감정적, 수동적 등등)가 비대칭적이라는 지적은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반복되어 왔으며, 웹툰영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로맨스 웹툰에도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여성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며, 남성 캐릭터들은 주체적인 캐릭터보다는 ‘키링남’과 같은 캐릭터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다. 웹툰에서 ‘남성적인 속성’과 ‘여성적인 속성’을 상호 교환하거나, 여성에게 남성적인 속성(주체성, 이성적)을 부여함으로써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복을 꾀하거나, 인물의 성격은 성별과 무관하다는 도덕적으로 지극히 올바른 테제를 웹툰을 통해 반복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즉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에 부합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 뿐인 듯 보인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허구적인 판타지일뿐 성별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길과, ‘여성성’과 ‘남성성’을 전복하는 길이 그것이다. 여성주의적 전략으로서 후자를 채택한, 즉 남성과 여성의 속성을 교환시키자는 주장을 ‘진지하게’ 제시한 사람을 ‘진지하지 않게’ 검토해보자.
발레리 솔라니스(Valerie Solanas)가 쓴 <The S.C.U.M Manifesto(1)> 는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쏟아낸다. "여자란 불완전한 남자(2)"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장을 "남자는 불완전한 여자"라고 변용하며, 남자라는 성을 없애자고 말한다. 솔라니스는 단순한 변용을 넘어 남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혐오하기로 결정한다. "남자라는 것은 결함이 있다는 뜻이며,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남자는 감정적 절름발이다(3)" 이런 무차별적인 솔라니스의 남성 혐오는 폭력적인 듯 보이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노숙을 했고, 학대당했고, 길거리에 나앉아 중얼거리기만 하는 실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솔라니스의 남성 혐오를, 저명한 철학자들의 여성 혐오와 동일한 남성 혐오로 읽는것이 아니라, 실패한 자의 분노와 유머로 새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솔라니스의 글에서 남성 혐오를 넘어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솔라니스는 남성 체제의 함락과 파괴를 목표로 자본과 금융 시스템을 폭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남성 체제의 몰락을 위해 남성이 얼마나 여성적인지를 말한다. 그녀는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은 뒤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적인 특징들인 허영심, 경박함, 찌질함, 우유부단함은 사실 남성의 것이며, 남성적인 특징이라 불리는 독립성, 단호함, 박력, 결단력, 시원시원함 등은 모두 여성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솔라니스가 남성과 여성의 속성 자체를 교환하는 방식은 놀랍게도 새로운 여성혐오를 생산한다.
2. 여성으로 여성을 혐오하기
남성을 전부 죽이고 남성의 자리에 여성이 앉길 바라는 솔라니스가 여성을 미워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아버지와 딸의 관계, 드랙퀸의 존재, 자궁 선망 등에 관한 솔라니스의 비판도 굉장히 흥미롭지만, 수동적인 여성에 대한 솔라니스의 공격이 제일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솔라니스는 S.C.U.M 의 여성들과 '아빠딸'로 기능하는 수동적인 여성을 대립시킨다. SCUM에 속해 있는 여성들은 "지배적이고 안정적이며, 자신감으로 가득하고 심술궃고 폭력적"인 '사회적 남성성이지만 사실은 여성성인 것'을 가지고 있다. 반면 '아빠딸'로 존재해온 수동적인 여성들은 "억눌려 있고 의존적이며 겁에 질려 있으며, 불안정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위와는 정 반대의 것을 가지고 있다. 솔라니스는 왜 모든 여성을 포옹하지 않고, SCUM만 포옹하려고 했을까? 이는 솔라니스의 선언문의 처음에 등장하는 돈의 혐오와 연관된다. 이연숙 평론가가 지적한 것(4)처럼, 솔라니스는 남성의 권력을 혐오했고, 남성의 권력에 돈에서 나오기에 돈을 혐오했다. 그렇기에 중산층의 수동적인 여성들은 남성의 돈에 기생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녀는 체제에 순응하는 여성을 누구보다 미워한 것이다. 솔라니스의 선언문을 통해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전복이 또 다른 여성혐오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천착했다. 솔라니스는 여성을 위해 여성성을 남성성으로 대치했으며, 새로운 여성을 만들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솔라니스에게 여성은 오직 SCUM이며 그 이외의 여성은 '남성적인 여성'이다.
3. 여성적 속성
안드레아 롱 추는 [피메일스(5)]에서 여성의 속성이라 일컬어지는 여성적 속성을 부정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더 이상 여성이기를 원하지 않는 페미니즘.’이라 말한다. ‘여성성’과 (생물학적) ‘여성’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해서 여기서 모두 서술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성과 ‘여성성’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리오 버사니(Leo Bersani)의 지적처럼 남근중심주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일차원으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 속성’이라 여겨지는 수동성과 무력함에 대한 억압을 그 근본에 둔다. 수동성과 무력함을 여성에게 귀속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혐오가 재생산되어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여 위와 같은 속성들을 남성에게 귀속시키는 방법은 솔라니스가 이미 채택하였고, 새로운 여성혐오로 귀결된 실패한 방법이다. 그렇다고 여성성과 남성성이 생물학적 성별과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통계를 외면해야만 가능한 대답일 것이다.
그런데 남근중심주의가 ‘여성적 속성’이라 여겨지는 수동성과 무력함에 대해 억압하는 것을 그 근본적 특징으로 둔다면 저 속성들이 억압되어야만 하는 속성은 맞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수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적어도 몇 개의 영역에서는 무력하고, 수동적이게 되지는 않는가? 나아가 모든 영역에서 무력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이 지시하는 반-미래지향적 삶은,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의 미래지향적 삶의 가능성보다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안드레아 롱 추가 반복하는 진술인 ‘모든 사람은 여자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를 싫어한다.’는 말이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을 구성하는 수 많은 타자들, 즉 ‘내가 원하지 않는 나’를 억압하면서 구성되는 것이 단일한 정체성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단일한 정체성을 내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력하고 수동적인 것. 그것이 여성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여자고, 그것을 싫어할 필요도 없다. 변주하자면 멜로를 좋아하는 것이 여성적인 것이라면, 남성 또한 여성적일 수 있고 그것이 생물학적 성별과 일치할 필요도 없다.
4. 남성향과 여성향
남성향과 여성향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에 기반하여 나누어지고 있으며 동시에 남성향을 선호한다면 ‘남성적인 사람’으로 여성향을 선호한다면 ‘여성적인 사람’으로 순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멜로를 좋아하는 남성’은 ‘떡볶이를 좋아하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미묘한 불일치감을 느낀다. 이 ‘미묘한 불일치감’은 헤테로토피아의 세계에서도 생물학적 성별로 포획되지 않는 ‘기이한’ 취향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남성이 남성 아닌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여성 또한 여성 아닌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한다면, 남성향 여성과 여성향 남성과 같은 기이한 존재들까지도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이러한 사실을 위해서 (개인의 취향 차이를 성별로 설명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오래된 기제였다는 합리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별이라는 기준점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통계가 제시하는 생물학적 성별의 기준점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우리는 ‘생물학적 성별로 포획되지 않는 개인적 취향’까지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성별과 무관한 자신만의 취향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발견하는 것은 오래되고 진부하다고 여겨지는 ‘남성향’과 ‘여성향’의 분류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 각주 >
(1) S.C.U.M 은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로 국내에서 '남성 거세 결사단'으로 번역되었다. 원문은 https://www.ccs.neu.edu/home/shivers/rants/scum.html를 참조했다. 이하 원문은 SCUM으로 표시
(2) Ibid 173p
(3) 같은 곳
(4)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1/급진적-부정성을-위해서/
"이는 그녀가 ‘돈’을 혐오했던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경제력을 가진 남성들에게 ‘기생’하는 중산층, 기혼 여성들은 기득권(남성 체제)의 수호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 안드레아 롱 추 : 피메일스, 역-박종주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