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 작가의 <닥터 프로스트>는 시즌4에 이르러 완결되었다. 전설의 심리학자가 사실은 내면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는 설정으로 시작된 이 만화는 2011년에서 2021년에 이르기까지 10여 년의 연재를 거쳤다. 개중, 시즌4에 해당하는 ‘우로보로스’는 본래 연재가 재개될 예정이었던 2016년보다 3년 늦은 2019년에 연재를 진행했다. 비교적 긴 휴재에는 ‘현실’에서 일어난 모 사건이 자리했고, 시간이 지나 잠잠해졌을 무렵에 연재를 재개한 것이다. 시즌4의 클라이막스가 광화문 광장에서 일어나는 소요 사태임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선택은 자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2월에는 광화문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시위가 있었다. 그러니까 혐오로 당겨진 방아쇠와 소요 사태를 묘사하기엔 현실이 묘해서, 만화는 어쩔 수 없이 공개를 미뤄야만 했다.
이 이야기에서 중점을 둬야 할 건 ‘광화문 광장’이라는 장소에 관해서다. 당시 광화문 광장이 시위 장소로 선택된 건, 청와대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근거리에 자리해서였다. 평소라면 보안이나 안전을 위해 더 거리를 두어야 했지만 당시 경찰은 이례적으로 이를 허가했다. 청와대를 향한 촛불집회가 100m 앞까지 이루어졌던 건, 법률이 허가하는 한에서 이루어진 최대의 행동이었다. 이후 2022년 들어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하고 청와대가 개방됨으로써 ‘대통령’과의 실질적인 거리는 줄어들었으나, 2016년 이후 한국에서 광화문 광장은 이전과는 다른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거시적인 흐름에서의 한국 사회와 그에 대한 분위기를 가리키는 장소, 혹은 공간이 된 것이다. 이때 ‘광화문’이 무언가에 반대하는 일을 가리키지만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히려 이 공간은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정확한 대목이 기억나진 않지만 <닥터>의 시즌4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닥터의 제자 윤성아가 한국사회를 둘러싼 음모를 쫓던 중, 자신의 주변인물이 사고를 당하자 절망감을 느끼는 장면이다. 그녀는 혐오에는 끝이 없다고 말하며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닥터는 시즌3의 사건을 언급하며, 혐오의 고리에서 빠져나오는 일에 대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닥터는 윤성아를 껴안고 윤성아는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건, 자기혐오의 감정은 결국 자신을 끌어안는 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닥터>의 시즌3가 정신병원에 갇힌 닥터를 통해 감정의 분리와 그에 대한 끌어안음을 보여줬다면, 시즌4의 이 장면은 무언가를 ‘혐오’하는 것 또한 자기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것이 결코 더럽거나 불결한 게 아닌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이 장면은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 말하며, 그것은 우리가 돌아와야 할 곳임을 말하고 있다.
<닥터>의 시즌4의 표제가 ‘우로보로스’인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트라우마가 시작된 장소를 다시 찾아온다는 것. <닥터>의 닥터가 문성현과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장소로 돌아오는 일은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의 2016년이 시작된 광화문 광장을 연상케 한다: 한국만화는 어째서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우리의 이야기는 2017년에 이미 끝났고, 이젠 청와대와 같은 정부청사가 자리를 옮겼음에도 광화문 광장이 이야기의 무대로 선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 <유레카>를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는 납치사건을 겪은 버스 기사와 아이들이 트라우마에 사로잡히는 일을 다룬다. 그들은 오래전에 사건이 끝났음에도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버스 기사였던 사내는 남매에게 버스 여행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사건 현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수를 돌린다. 사건 당시와 동일한 기종의 버스를 타고 말이다.
2000년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흔히 1996년의 옴진리교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정확하게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지만, 이 영화에는 어딘지 모를 애잔함이 있다. 일단 이들은 사건이 시작된 곳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떨쳐내진 못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남매 중 남자아이쪽이 살인충동에 휩싸여 사람을 죽이는데 이에 버스 기사는 아이를 호통치며, 그를 껴안는다. 이 껴안음은 ‘살인충동’을 느끼는 일이 소년 스스로를 가둬놓음을 인식하면서, 이조차 끌어안을 때 비로소 자신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사건이 시작된 장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다음의 두 가지를 가리킨다. 첫 번째는 어딜 가든 사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스스로를 가둬버린 상황에서 [세계]는 모두 자신의 몫이 되므로, 어딜 가도 자신에서 멀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딜 가도 자신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말은 트라우마를 잘 설명한다. 트라우마는 기억의 한 영역이거나 특정 지점이기보단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시작점에 가깝다. 트라우마는 우리로 하여금 그에서 멀어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나 그 자신을 가두어 놓은 방에 가깝다는 점에서 ‘바깥’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즉 트라우마는 ‘이후’지만 ‘바깥’은 아니다. 가령 <닥터>의 시즌3에서 닥터의 내면세계가 정신병원으로 묘사될 때 그를 상담하는 의사가 시즌1과 2의 사건들을 나열하는 일을 떠올려보자. 닥터의 병증에 대해 의사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닥터는 감정에서 멀어지려 하지만 방 안에 갇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때 이 방은 닥터의 내면세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는 이러한 기억들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닥터가 내면세계에서 돌아온 방법은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 사건이 시작된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일은 어떠한 사건에 사로잡혀 미래를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중심을 되찾는 일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두 번째는 ‘사건이 시작된 장소’를 바깥의 상실로 이해하는 일이다. 바깥의 상실이란 지금을 의식하는 일이며, 이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자고 말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세월호 침몰 사고나 이태원 압사 사고와 같은 현장에서는 관련자에 대한 처벌과 미래 재발 방지와 같은 건설적인 논의가 요구되지만,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며 추스르는 일도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때 이러한 일을 두고서 ‘미래가 보이지 않아 그저 슬퍼하기만 할 뿐인’ 일로 이해해버리면 여기엔 그 어떤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 트라우마를 재방문하는 일은 당시에 얽매이며 머무르는 일이 아니라 중심을 되찾는 일이다. 장소를 폐허로 이해하며 꺼리는 게 아니라 자기를 이루는 하나의 장소로 이해해야만 한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버린 곳이 아니라 시작되며 존재하는 곳으로 이해할 때, 트라우마는 우리의 현실로 존속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언급해보고 싶은 만화는 <재앙의 날>이다. 만화는 사람을 삼켜 기억과 외견을 흡수하는 괴물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람들을 삼켜 기억을 흡수한다는 점에서 구소련의 군사병기로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진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정 또한 그렇게 된 상태다. 수천 명을 삼킨 그에게 기억은 파편적이고, 그 안에서 ‘나’는 외부와의 관계 안에서만 존속한다. 그러던 중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던 상관이 내분에 휘말려 죽고야 만다. 이제 그는 사람들을 삼키며 얻은 분노와 증오를 삶의 원동력 삼는다.
괴물이 상관의 죽음을 목격하고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는 ‘나’를 잃어버린 대목이 묘사된다. 자아가 붕괴해버린 그는 외부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잃어버려서, 더는 ‘나’이기를 택할 수 없게 된 상태다. 그러던 중 상관이 생전이 선물로 주었던 메트로놈이 방에 들어온다. 이제 그는 메트로놈을 연결고리 삼아 과거의 현실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사람에서 배웠던 모든 증오와 혐오를 하나의 방향으로 정렬한다. 만화의 유쾌하지 않은 복수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일화는 트라우마라는 말이 하나의 정신병동으로 이해되기보다 모든 일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증오와 혐오를 통해 분산되었던 자아가 다시금 하나로 정렬되는 일은 세계에 만연하는 것들이 다시금 ‘나’로 귀결되는 대목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그 모든 감정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후 괴물은 한국으로 넘어와 광화문 한복판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킨다. 여기서도 광화문은 괴물에 의해 사회에 팽배한 감정들이 폭발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흥미롭다면 흥미롭다고 볼 수 있을 대목이지만, 이 만화에서는 광화문이 어떠한 자아를 지닌 것처럼 묘사된다는 점에 중점을 둬야 한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하나로 정렬해 폭발하는 게 ‘나’를 되찾는 일처럼 묘사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선을 구분 짓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는 인터넷 등을 통해 어떠한 사실이나 감정을 ‘자기’보다 더 빠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대상을 판단하여 받아들이는 ‘나’는 사건과 감정을 필터링하지 못한다. 이런 일들에서 우리는 어디까지가 자신인지를 알지 못한 채, 그 모든 사건에서 흐드러져 존재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우리는 대체 무엇에 화를 내거나, 슬퍼하고, 웃음 짓는 걸까?
자신을 구분 짓는 일의 중요성은, 그런 점에서의 ‘감금’처럼 보이지만 <닥터>의 그것과는 다르다. <닥터>가 억눌렀던 감정들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이야기라면, <재앙>은 억눌렀던 자기에서 감정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광화문이 있다. <닥터>가 개인의 사적 트라우마를 자신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이야기라면 <재앙>은 트라우마를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치유하려 드는 이야기다. 즉, 선을 나누지 않는 [세계]는 모두가 자신일 수밖에 없으므로 <재앙>에서 괴물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자기파괴인 셈이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나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플루토>를 마지막에 언급해두고 싶다. 이 만화는 최근 넷플릭스에 애니메이션으로 공개됐는데, 여기서는 그런 묘사가 등장한다. ‘99억 명의 인간을 학습한 로봇은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몰라 깨어나지 못한다.’ 즉 최고로 ‘인간적인’ 감정은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혐오’나 ‘증오’처럼 치우친 감정을 주입하는 것이다. 이는 <재앙>의 괴물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방식과 다르지만, 이들 로봇과 괴물 간에는 혐오를 ‘자기’를 정렬하는 도구 삼는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다움’에 대한 하나의 결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이들 만화에서, 사회의 여러 문제가 광화문에서의 소요 사태로 전개되는 과정은 마치 사회를 하나의 인격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다. 다채로운 감정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가 꼭 혐오와 갈등으로 시작될 이유가 있을까. 분명 혐오를 받아들인 인간이 타인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맞다. 우리는 항상 ‘자기’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반대로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일도 가능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