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 작지만 소중한 문화의 불꽃
힙합은 문화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다. 1973년 미국 땅에서 창조된 이래 흑인 사회의 정신이자 삶의 방식으로서 발전해 왔다. 그래서 힙합은 단지 음악만을 일컫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이가 4대 요소를 떠올릴 것이다. 래핑(rapping), 디제잉(DJing), 그래피티(graffiti), 비보잉(b-boying, breakdancing). 그러나 시대가 흐르며 구성엔 변화가 생겼다. 랩이 장르로 인정받고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지면서 모든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던 과거와 상황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그래피티는 이제 힙합보다 미술의 범주로서 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우며, 비보잉에선 춤을 추기 위해 힙합보다 펑크(Funk)나 브레이크비트를 주로 활용한 지 오래다. 디제잉 쪽에서도 래퍼들의 백업 역할로 굳어지는 분위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부 디제이들의 노력 끝에 턴테이블리즘(turntablism)이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이렇게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4대 요소 간의 접점은 희미해진 대신 패션과 래퍼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중요한 요소로 올라섰다. 또한 랩과 힙합 프로덕션은 2000년대를 기점으로 완전한 주류 대중음악이자 트렌드가 되었다.
현재 한국 힙합 씬에서 수용하고 부각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랩 음악을 시도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현진영 등을 통해 처음 소개된 힙합은 드렁큰 타이거, 솔리드, 업타운 등을 거치며 어느 정도 대중에게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음악 장르 중 하나일 뿐이었다. 타이거 JK를 비롯한 몇몇 교포 래퍼들이 방송에 나와 ‘힙합은 문화입니다.’를 외쳤으나 실제로 와 닿는 것은 없었다. 이후 PC통신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생겨나고, 2010년대를 넘어서며 씬이라 부를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비로소 ‘한국 힙합’이 정립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에서 힙합을 음악이 아닌 문화라 부르기엔 어색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미국, 그것도 야만적인 인종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겪는 중인 흑인 사회에서 탄생한 힙합과 전혀 다른 환경 및 사회적 맥락을 지닌 한국에서의 힙합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래퍼들이 설파해온 주장에도 근거가 부족했다. 미국 힙합에서 통용되어온 문화론을 별다른 고민없이 말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한국 힙합을 문화라 부르는 것은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다소 공허한 외침 같이 들렸다.
지금도 물론 오리지널 힙합 문화와의 거리는 멀고 펼쳐지는 광경도 다르다. 하나 대중, 특히 청년 문화에 힙합이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럼 이제 한국 힙합만의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를 제대로 논하기 위해선 먼저 힙합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경로로 문화가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니까 ‘힙합’과 ‘한국 힙합’의 차이부터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아주 옛날부터 흑인과 음악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였다. 백인 기득권에게 사회적·경제적 접근을 철저히 탄압당해온 그들에게 음악은 중요한 표현방식이자 생존을 위한 무기나 다름없었다. 1960년대에 벌어진 역사적인 흑인민권운동의 현장에서도 소울 음악은 분위기를 북돋우는 걸 넘어 흑인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개체로서 역할했다. 그리고 1970년대 뉴욕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에서 힙합이 생겨난다. 드넓은 미국 땅 중에 왜 하필 사우스 브롱크스였을까? 이곳이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몰려든 유색인종들의 집결지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철로 건설과 함께 불어닥친 근대화 열풍은 브롱크스를 새로운 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남쪽 지역은 황폐화를 피하지 못했다. 흑인들의 이주는 계속됐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우스 브롱크스의 고립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최악으로 치닫는 현실에 힘을 합쳐 대응하며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서였다. 그 안에서 흑인 특유의 문화적 양식이 하나둘 꽃피웠다. 힙합이 바로 그중 하나다. 힙합이 탄생한 건 흥겨운 파티장이었지만, 그 파티가 열린 곳은 고립과 빈민화가 심각한 슬럼가였다. 마약과 범죄가 난무하는 현실이었기에 갱 집단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 더불어 그들의 언어 또한 자연스레 힙합 문화에 녹아들었다. 갱 문화와 힙합의 상관관계는 한국 힙합 문화에 대입했을 때 가장 괴리가 클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처럼 힙합은 사회적, 계급적으로 전혀 다른 특수한 환경에서 생겨난 이후 정립되고 발전해온 문화였기에 한국에서 온전히 뿌리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 달리 최초 한국에서 힙합을 제대로 접하고 전파한 이들 대부분이 강남 중산층 이상의 가정, 혹은 유학 경험이 있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란 사실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한국 힙합은 표면적인 부분만 이식되는 단계를 거치며 여러모로 한계점을 안고 출발했다.
그런 가운데 최초로 한국대중문화 속에서 힙합의 영향력이 나타난 건 패션 분야였다. 1990년대 초반 가요계에 랩 댄스 열풍이 일어나면서 아티스트들이 착용한 힙합 패션이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당시 강남을 위주로 유행한 힙합 특유의 오버사이즈핏 스타일은 방송국 뉴스와 각종 신문 및 잡지의 메인을 장식할 정도로 굉장히 화제였다. 패션으로 시작된 힙합에 대한 관심은 곧 춤으로 이어졌다. 역시 랩 음악을 선보이던 가수들의 영향이 있었지만, 김수용 작가의 만화 [힙합]도 빼놓을 수 없었다. 특히 <힙합>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힙합의 주요 요소인 비보잉을 다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연재가 시작된 1997년만 해도 한국에서 힙합에 대한 인식은 비주류 음악 장르, 혹은 커다란 사이즈의 패션이 전부였다. 그런데 [힙합]이 인기를 얻으면서 비보잉과 비보이를 향한 관심도 점점 커졌다. 작가가 댄서 출신이었기에 작품의 초점은 비보잉에 맞춰졌지만, 힙합의 또 다른 요소인 래핑을 묘사하고 아예 래퍼 캐릭터까지 투입하면서 조금이나마 문화 전반을 다루고자 노력한 흔적이 돋보였다. 당시엔 이 만화를 보며 비보잉을 흉내 내거나 힙합 댄서의 꿈을 키운 청소년이 꽤 있었다. 추후 <힙합>에 열광하던 세대에서 출중한 실력을 지닌 비보이가 대거 등장하고, 세계 무대를 놀라게 한 현실을 고려하면, 작품의 영향력이 새삼 크게 다가온다.
자 그런데 힙합이 대중문화 깊숙이 침투하는 계기가 마련된 건 그로부터 훨씬 더 시간이 지나서다. 2012년에 첫 방영된 엠넷의 힙합 프로그램 <쇼미더머니>가 기폭제였다. 다이나믹 듀오, 드렁큰 타이거, 에픽하이 등등,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이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이센스, 버벌진트, 딥플로우, 더콰이엇, 팔로알토, 빈지노, 도끼 같은 각자의 스타일과 실력을 갖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세력을 확장해가던 가운데 상업적으로 급격히 상승하게 되는 불씨를 당긴 게 <쇼미더머니>다. 많은 신인 랩스타가 배출됐고, 경연곡들이 음원 플랫폼 차트의 상위권을 점령하면서 한국 힙합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래퍼를 꿈 꾸는 청소년들의 수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동경의 대상이기만 했던 래퍼가 장래희망이 된 셈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적인 회사에 취업하여 좋은 연봉을 보장받는 것이 보편적 성공의 기준이 된 한국 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음악)을 하며 부와 명예를 얻는 래퍼들의 성공 서사는 치열한 경쟁 모드에 놓인 청소년들에게 상당한 울림이 되었다. 더불어 인터넷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신조어와 비속어를 비롯하여 다른 장르의 음악에서는 듣기 어려운 표현과 주제로 점철된 가사 역시 어필 요소였다.
그러나 <쇼미더머니>를 통한 힙합의 부흥엔 부정적인 영향도 뒤따랐다. 힙합의 탄생과 발전 과정에서 살펴야 할 본질적인 부분과 특수한 현실은 곧잘 간과되거나 무시되었고, 힙합 음악과 문화에 대한 왜곡된 정보가 무분별하게 전파되었다. 예를 들어 국외에서는 사망이라는 비참한 결과까지 초래하는 디스전을 단순히 힙합 문화의 일부라며 미화하는가 하면, 경연 래퍼들의 가사에서 불거진 사회적약자 혐오 논란엔 힙합에서의 남성성을 내세워 대중이 장르에 무지하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쇼미더머니> 덕분에 한국에서 힙합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안티 팬을 형성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그런 가운데 10대부터 20대 중반 사이에 포진한 힙합 팬층은 더욱 견고해졌다. 한국 힙합이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문화란 주장이 뒤따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엔 함정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여전히 행해지는 힙합에 대한 왜곡과 사회적약자 혐오 역시 문화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한국 힙합에서 문화를 논하는 것에 마냥 비판적이었다. 1년 전, 특별한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매년 제주도에선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주최로 ‘제주청소년 문화예술 진로캠프’를 진행한다. 영상, 공연, 전시, 제작 분야 중 하나에 지원한 청소년들이 2박 3일동안 진로 모색과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한 행사다. 난 2021년부터 힙합 분야 강사로 참여해왔다. 캠프는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의 공연으로 마무리된다. 그전까지 우린 주제를 정해서 가사를 쓰고 플로우를 디자인한 다음 무대 동선을 짜고 라이브 연습을 반복한다. 아이들 대부분은 직접 가사를 써보거나 사람들 앞에서 공연해본 경험이 전무했다. 그저 랩/힙합이 좋아서 왔을 뿐이다.
다만 랩을 하게 된 동기는 다양하다. 공부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분출하기 위하여, 외동으로 크면서 느낀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10대로서 살아가며 직면한 문제점을 얘기해보고 싶어서, 개인적인 여러 감정을 표현해보고 싶어서, 단순히 랩 하는 행위가 재미있어서, <쇼미더머니>를 보고 래퍼가 되려고 맘 먹어서 등등. 선호하는 비트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붐뱁, 트랩, 이모랩, 팝랩…. 이처럼 서로 다른 동기와 취향을 가진 친구들이 하나의 주제 아래 뭉쳐서 곡을 만들어내고 한 팀으로서 공연까지 선다. 비록 그 모습이 많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3일이란 짧은 기간에 아이들이 연출해낸 영화 같은 광경을 보는 건 귀중하고 짜릿한 경험이다. 이듬해에도 캠프가 진행됐고, 새 친구들과 새로운 결과물을 완성했다.
그런데 작년은 달랐다. 절반이 2022년에 참여한 아이들이었다. 게다가 새로 지원한 아이들과도 전부 아는 사이였다. 더 놀라운 점은 크루를 결성하고 공연을 함께해왔다는 사실이다. 2022년 캠프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아이들이 각자의 학교에서 힙합을 좋아하고 뜻이 맞는 친구를 서로에게 소개하며 의미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이미 호흡을 맞춰온 만큼 아이들은 따로 요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한 팀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랩을 통해 한국의 10대로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하는 바를 가감없이 뱉어냈다. 이 친구들이 약 1년 사이에 보여준 행보는 한국 힙합의 문화적 영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일관하던 나의 스탠스에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동안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한국 힙합이 ‘젊은 세대의 마음과 목소리를 대변’하는 문화라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는 너무 안일한 논평이다. 경직됐던 한국대중문화계에 랩/힙합이 처음 소개된 이래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소리다. 근거도 희미했다. 대부분은 우리와 전혀 다른 미국 힙합의 특징을 무리하게 대입하여 얼버무리곤 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미국 힙합 씬과는 애초에 비슷한 결을 지닌 문화로서 생성되거나 정착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힙합이 굉장히 정치적인 음악이란 사실만 고려해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캠프의 아이들이 보여준 행동과 결과는 한국 힙합도 문화로서 존재하며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 사례였다. 한국 힙합의 주류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수의 청소년들에 의해 힙합이 어째서 (한국에서도) 문화인가에 대한 답이 제시된 셈이다. 무엇보다 캠프의 아이들을 포함한 래퍼를 꿈꾸는 현세대 힙합 팬 대부분이 한국 힙합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동안 한국 힙합 문화의 의미를 너무 거대한 사회 현상 속에서만 찾으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작지만 소중한 문화의 불꽃이 일고 있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