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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영상진흥원 지원사업에 대한 몇 가지 제언

건전한 만화 시장 발전과 함께 하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지원사업에 대한 몇 가지 제언

2024-01-15 김성진

20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하 진흥원) 지원사업 설명회에서 신종철 원장은 ‘한국만화의 모든 것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사업이 그만큼 다양한 영역을 지원하고 있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겠지만, 과연 진흥원은 한국만화의 모든 것을 지원하고 있을까? 현 진흥원의 지원사업 속에서 비어 있는 부분, 보완해야 할 부분은 없을까? 20여 년간 현장에 몸담아온 기획자이자 비평가로서 진흥원 지원사업을 둘러보고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 그림 1, 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지원사업 설명회 신종철 원장 - 이미지 출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공식 유튜브 ]


| 비전 및 목표에 드러난 진흥원의 가치와 지향 읽기

기관의 비전과 목표를 검토해 보는 것은 해당 기관의 가치와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가장 우선적인 일이다. 지원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기관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진흥원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기관의 미션과 비전, 5대 목표는 다음과 같다.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미션은 ‘만화로 행복할 수 있는 세상’, 비전은 ‘문화강국, 한국만화를 선도해 나가겠습니다’이다. 그 아래 5대 목표는 1) 만화도시 부천!! 문화 클러스터의 정교한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 강화, 2) 지역경제 중심!!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 강화, 3) 문화번영 증축!! 글로벌 경쟁력 및 산업 차별성 확보, 4) 만화매력 발산!! 일상 속 만화 문화 선도, 5) 공정균형 환경!! 문화예술 사회적 가치 실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목표마다 각 2개씩의 핵심과제를 설정하고 있다.

우선 진흥원의 미션과 비전은 모호성이 짙다. 좀 더 명확한 내용을 밝히고 있는 5대 목표에서 드러난 사업의 방향성을 살펴보자. 5대 목표에서 밝히고 있는 문화 클러스터의 확장,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 강화, 글로벌 경쟁력 및 산업 차별성 확보 등은 문화산업적 용어들이다. 이는 진흥원이 만화를 기본적으로 콘텐츠 사업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이 외에도 일상 속 만화 문화를 선도하고, 문화예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목표도 밝히고 있지만 그에 부속되어 있는 세부 과제들은 지엽적이거나 내용이 모호하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정관 제2조(목적)는 ‘진흥원은 만화문화의 진흥과 저변 확산을 통해 만화의 예술적, 교육적, 산업적 가치를 증대하여 한국만화산업을 육성·발전시키고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여 지역 주민에 대한 공공복리 증진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라고 기관의 설립 목적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기관의 설립 목적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예술적, 교육적, 산업적 가치 증대’라는 목적으로 설립된 진흥원이, 주로 ‘산업적 가치’만을 사업의 중심에 두지 않았냐고 묻고 싶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적 측면에서 만화는 예술작품이고,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만화는 콘텐츠이다. 콘텐츠로 바라보느냐 작품, 예술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 정책의 기준은 바뀐다. 한국 만화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 편중되어 있는 문화산업적 관점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 콘텐츠냐 예술이냐

만화가 콘텐츠이냐 예술이냐를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만화는 콘텐츠이자 예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같은 작품이 어떻게 호명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콘텐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주로 호명된다. 얼마나 많이 팔렸냐, 얼마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냐, 얼마나 많은 부가 가치를 발생시켰나...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지표들이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가치다. 한편 예술 작품으로 호명될 때는 이러한 경제적 가치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품 자체가 가지는 메시지, 예술적 성취, 동시대적 가치와 의미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많은 대중들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잘 팔리지도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이 존재하는 이유다. 물론 만화는 대중예술이기에 이른바 순수예술적 예술성만을 가지고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나 한국콘텐츠진흥원(전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등 한국만화를 지원하고 진흥하는 주요 기관에서는 오랫동안 만화를 문화산업적인 관점으로 다루어 왔다. 2013년이 되어서야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을 통해 만화가 비로소 예술로서의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으니 기관만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기관에서는 만화를 문화산업적 시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다. 만화를 콘텐츠와 예술로서 균형있게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기울어진 운동장의 밸런스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 비산업적 가치 지향의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 사업

진흥원의 문화산업적면에서의 지원 사업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 개관한 웹툰융합센터에서부터 창작, 공간, 수출, 인력양성, 아카이브 지원까지 각 분야에 걸쳐 규모도 크고 다각화되어 있다. 진흥원 사업 중에서 만화 예술적 측면을 진흥하기 위한 사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한국만화박물관 운영, 부천국제만화축제(예술+산업) 등 일상적, 정기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원사업 중에서는 만화 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업 내용 상으로는 예술로서의 관점이 담긴 지원 사업이라 손꼽았지만, 이 사업의 타이틀 역시 ‘만화 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이다.

만화 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 중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다양성만화 지원 사업을 한 번 살펴보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다양성 만화 지원 사업은 2014년 다양성 만화 전문 잡지 제작 사업부터 시작되었다. 2023년 현재 다양성 만화 지원 사업 공고에는 이 사업이 ‘한국만화의 지속적 발전과 생태계의 확대를 위해 만화의 다양성을 강화하기 위한 지원 사업으로 인기장르보다는 비활성 장르를 지원하며, 상업적 대중적 인기를 위한 만화보다는 대안적 성격의 만화를 지원하는 사업임’임을 밝히고 있다. ‘비활성 장르 지원’이라는 부분은 모호하지만, ‘대안적 성격의 만화를 지원’한다는 부분은 좀 더 명확하다. 산업적인 가치가 아닌 작품이 가진 예술적 가치로 작가 및 작품을 지원하겠다는 취지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올해 진흥원 지원 사업 설명회에서 이 사업의 규모를 조금씩 늘리고 확대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점은 반갑다. 작품이 가진 다양한 가치를 발견하고 지원하는 사업이 필요한데, 현 지원 사업 중에서는 이 사업이 가장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하여 다양성 만화 지원 사업의 취지 및 지원시스템은 좀 더 정교하게 재설계될 필요가 있다. 한정된 지면인 관계로 다양성 만화 지원 사례를 통해 지원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 비어 있는 지원 시스템에 대한 제안

우선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 사업은 문화다양성 가치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 동시대의 배경 속에서 시작된 사업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다양성의 핵심 가치는 상호문화주의에 입각한 ‘서로 다른 것들의 공존’, ‘기울어진 권력구조의 수평적 재편’이라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흥원의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 사업에서 ‘비활성 장르’를 지원한다고 밝히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우선 사업이 지향하는 가치 지향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활성장르’라는 개념 자체의 모호성 때문이다. 만화 장르의 구분 자체가 매우 어려운데다 동시대 작품들의 특성은 장르가 복합적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공고문에 게재된 비활성장르 예시도 주제에 따른 분류와 연령에 따른 분류가 혼재되어 있어 일관성이 없고, 여기에 ‘기성 플랫폼에서 다루지 않는 주제의 만화’라는 수식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예시의 장르들은 이미 대부분 기성 플랫폼에서 다루고 있는 장르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호한 장르로서 구분하여 지원하기보다는 지원 사업의 목적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문화다양성 가치를 담은’,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시도를 보이고 있는’ 등 가치 지향적 정의로 명확하게 사업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지원사업의 한계 중 하나는 작품에 대한 제작 지원은 하지만, 후속 지원의 형태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가치를 인정받아 지원사업을 받은 작품들이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작품에 대한 의미화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진흥원 지원 사업에서 비어 있는 영역은 제작 지원작에 대한 후속 지원과 관련한 부분이다. 현재 다양성 만화의 대부분은 독립 출판이나 독립 플랫폼을 통해 유통된다. 다양성 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독립출판만화들은 혼자 혹은 소규모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창작에서 유통, 마케팅까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작품만 하기도 어려운데 예전에 수 명~수십 명이 했던 일을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구조다. 특히 유통, 홍보, 마케팅은 작가들이 취약하고 혼자 하기에 한계가 있는 부분이다. 다양성 만화, 독립출판 만화들이 잘 드러나지 않고 묻히게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기관은 작가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들에 대한 지원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다양한 플랫폼과 접촉하여 유통을 돕고, 홍보·마케팅을 지원하고, 지원 작품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 등을 기획하고 지원할 수 있다. 양적인 지원을 넘어 질적인 지원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다. 



| 만화연구와 비평의 활용법

만화 연구자와 비평가들은 진지한 독자로서 동시대 현상을 바라보면서, 다양한 가치 기준으로 만화를 연구하고 의미화하는 사람들이다. 10년 전만 해도 만화 연구, 비평의 풀은 좁았다. 하지만 만화 관련 학과들에서 꾸준히 연구자들을 배출해 내고, 만화비평 공모전 등을 통해 비평가들이 배출됨으로써 현재 만화 연구와 비평의 인력풀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만화가 사회 속에서 갖는 문화적 지위를 높이고, 작가와 작품이 갖는 동시대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진흥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만화 전문 비평지 <지금, 만화>의 발간 지원 사업은 그러한 면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연구·비평가들은 매년 배출되고 있지만,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매체는 부족하고, <지금 만화>와 같은 의미 있는 성과물은 나오지만 일부 만화계 내에서만 회자되는 정도이다. 만화 연구와 비평도 다양성만화 지원 사업과 같이 다양한 플랫폼과의 연결, 홍보와 마케팅, 타 프로젝트와의 접목이 필요하다. 

 다양한 독립 연구자들의 활동 지원이나 진흥원 지원 작품과 연계한 비평 활성화, 만화를 통한 인문학적 책읽기, 만화예술론과 연계한 전시 및 교육 등 연구·비평을 연계하여 시도해 볼 수 있는 사업들은 많다. 한국 만화의 질적 성장을 위해 만화연구 및 비평의 활성화, 연구·비평을 활용한 새로운 기획과 지원이 필요하다.


| 스펙트럼형 지원을 위한 한 가지 방식

어떤 기관과 정책도 모든 것을 지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비어 있는 지원사업의 영역을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인가? 예측하지 못한 비어 있는 영역의 사업을 어떻게 시스템적으로 지원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다양한 스펙트럼형 지원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샘플링할 수 있는 열려있는 지원사업의 설계가 필요하다. 다양한 요청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규모 지원 사업을 설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사업은 세부적인 프로젝트 방식에 대한 제한보다는 ‘공공적인 의미를 갖는 프로젝트’라든지 ‘만화를 매개로 한 공공적 문화예술활동’ 정도로 사업 목적을 설계하고, 300~500만원 정도의 지원 규모로 소액다수 프로젝트 지원을 해 본다면 괜찮은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문화예술관련 지역문화재단이나 진흥원 등에서 실시하고 있는 무정산에 가까운 소규모 지원사업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참조하면 진흥원에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지원 사업을 설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업이 이루어진다면 만화를 활용한 다양한 활동들을 수용할 수 있고, 새로운 시도와 흐름들을 살펴볼 수 있으며, 그 중 꾸준히 성장, 지원할 영역이 발견되면 후속 지원 사업을 기획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다양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 글을 맺으며

이 글은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 작성된 글은 아니지만, 평소에 생각해 왔던 진흥원 지원 사업에 대한 아쉬움에서 몇 가지 제안을 담았다. 만화계에는 나처럼 다양한 개인들의 생각과 제안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이 의견이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정책적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공론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공론의 장에서 다양한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시너지로 더욱 좋은 지원 사업 모델, 정책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이렇게 민-관이 다양한 사업이나 정책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고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얼굴, 새로운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세대와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기관과 의견을 주고받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서 꿈꾸는 민간 거버넌스의 구축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