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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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없는 비평, 감상의 위력

만화 평론의 필요성과 발전에 대한 제언

2024-01-16 손유진


어떠한 예술 분야에도 비평 작업은 필수불가결하다. 비평 없는 작품은 관객 없는 영화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즉 전시-감상이라는 구도 안에서만 비로소 예술은 성립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의 장을 마련하는 일이 한 분야의 존속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순수 예술, 순수 문학, 나아가 대중 문화의 여러 갈래에서 비평의 장은 이미 넓게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내의 만화 비평은 그 구심점을 한눈에 알기 어렵다. 한국 만화계는 출판에서 웹 플랫폼으로 그 장소를 옮겨가며 큰 격동을 맞이하였다. 이는 치밀하게 설계된 계획도시로의 이주가 아니었으므로 만화 비평 또한 그의 자리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것이 미진한 가시화의 원인이라 볼 수 있다. 

비평이 필요한 대상은 비단 각각의 작품뿐만이 아니다. 비평의 힘은 예술이 창조해낸 고유의 시대를 반영하고, 산재하는 작품들의 보편적 의미를 포집하여 언어화 할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따라서 비평이란 대상을 개념으로서 포착하여 예술을 확장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총체적 작업인 비평은 여러 까다로운 필요를 만족할 때 성립한다. 비평은 예술의 크고 작은 맥락 내부에 존재해야 하며, 큰 맥락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다수가 동의할만한 보편성을 확보해야만 하고 작은 맥락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비평이 대상을 명료하게 반영해야만 한다. 전자의 이유로 비평의 장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하며, 후자의 이유로 그는 예술의 계보와 방법론을 정확히 지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두가지 필요조건은 만화 비평에서는 특히 확보가 어려운데, 웹툰 플랫폼 이용자의 특성이 그 이유가 된다. 웹툰 독자는 크게 두 분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통근 통학 등 자투리 시간에 여가로서 웹툰을 활용하는 라이트 독자층이며, 둘째는 만화라는 하위문화에 익숙한 소위 말해 ‘오타쿠’ 독자층이다. 문제는 두 독자층이 감상을 게재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필요조건인 보편성과 구체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둘 모두를 포섭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창구는 현재로선 댓글창이 유일무이하다. 그러나 댓글은 아카이빙이 용이하지 못하고 체계적으로 감상자의 논리를 담아내기 어려운 포맷이므로 또 다른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 다음으로 감상의 공유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로, 오타쿠 독자층이 자유롭게 장문의 감상을 게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나 공공성이 부족하여 자료들이 흩어지고 대중에게 널리 공유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댓글란과 커뮤니티의 단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 3의 대안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감상의 대안적 장소가 갖춰야 할 조건들을 확보했다. 첫째, 체계적인 감상을 작성할 수 있고, 둘째, 감상에 대하여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서브컬처 독자층 내부에서 이러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서브컬처 연구와 비평을 담은 독립 잡지가 몇몇 출판되기도 하였으며, 블로그 포스팅을 통한 장문의 작품 분석은 서브컬처 독자층 내에서 매우 보편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특히 그들이 주로 이용하는 종합 컨텐츠 플랫폼인 ‘포스타입’은 그 시작부터 서브컬처 향유자들을 타겟으로 두며 설계되었다. 이곳에 게재되는 감상문들은 독자층의 특성 상 만화에 대한 지식과 높은 이해도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품에 다른 텍스트를 연계시켜 감상의 맥락을 확장하거나, 인물의 심리와 행동기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여러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집결시켜 나름의 계보를 생성하기도 한다. 이렇듯 만화계에 대한 유기적인 지식을 감상의 형태로 정리하는 작업은 개인 단위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서브컬처 팬덤의 ‘사적인’ 비평 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팬덤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작품만을 소비하지 않고 다양한 인풋을 통해 만화의 총체적 맥락에 친화력을 가진다. 따라서 만화계의 최근 동향과 그 방향성의 변화 과정, 동시대 작품들의 범주적 차이성을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으며 이는 감상에 깊이와 폭을 더해준다. 특히 같은 만화계 팬덤에서도 주요 소비 장르는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고전 만화나 소년 만화, 순정과 로맨틱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한 깊은 분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서브컬처에 기본적으로 친화적인 팬층은 이에 더해 하나의 작품이 타 작품에 끼친 영향력이나 당대 만화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신에 대한 자체적인 연구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감상들은 개인 대 개인으로 공유된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그 스스로가 연쇄적으로 연장되는 성질을 가진다. 

둘째, 팬덤의 분석은 기본적으로 작품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삼기 때문에 감상의 질적인 측면에 그 관심도가 반영된다. 팬덤의 감상 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그 깊이와 전문성이 우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흥미와 관심이 적극 투영되기 때문이다. 또한 각계각층의 감상자들이 저마다 다른 관점과 분야에서 분석적 감상을 내놓기 때문에 인문사회, 나아가 정치학과 역사적 지식들을 반영하는 흥미로운 의견들이 산발적으로 작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삶을 소재로 하는 웹툰 <집이 없어>는 청소년 심리와 발달 과정 상의 특성을 다루는 감상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최근 대세를 이루고 있는 로맨틱 판타지 장르에 대한 여성학적 접근 또한 다수 발견된다. 학적으로 다원적인 분석을 제하더라도, 작품에 대한 내부적 해석 또한 높은 가치를 가진다. 작품이 암시하는 향후 전개, 작품 속에 주어지는 암시와 메타포, 인물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개연성 등 작품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의도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예술-비평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부합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렇듯 서브컬처 팬덤 안에서는 나름의 개방성과 전문성을 갖춘 사적 비평이 활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흩어진 감상들은 커뮤니티 내부에서 향유되는 것으로 그 수명을 다한다. 물론 서브컬처에 대한 학적 연구는 꾸준히 진행중에 있으나 문제는 서브컬처를 하나의 주제로 다루는 데 있어 문화비평 상의 합의가 미진하다는 점이다. 만화계에 접근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그가 서브컬처라는 일종의 팬덤 문화와 불가분한 한쌍을 이룬다는 지점이다. 피드백을 통하여 작품을 소비하는 팬덤 특유의 방식은 그 주체성과 영향력에 있어 만화계에 적지 않은 위력을 갖는다. 특히 ‘2차 창작’, 즉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운 내용을 창출하는 팬아트나 ‘캐해석(캐릭터 해석)’으로 지칭되는 독자적인 분석 방법론은 국내에서 작품이 지속적인 생명력을 얻는 동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 향유 방식을 배제하는 비평은 만화의 외부적 요소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온전한 정확도를 획득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흩어진 감상들에 장소를 마련하는 문제이다. 감상의 장이란 감상자의 목소리가 머무를 곳을 뜻할 터이다. 즉 팬덤의 감상을 공적으로 게재하고 기록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로 볼 수 있다. 우선 이를 위해서는 팬덤 자체에 대한 연구가 우선시되는데, 그는 감상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곧 팬덤 연구에 대한 방법론과 그들의 자체적인 방법론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팬덤의 자체적 방법론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각각 스토리텔링, 메타포, 인물에 대한 분석이 그것이다. 또한 작가 위주의 분석 또한 크게 작용한다. 스토리텔링의 경우 작게는 향후 전개에 대한 추측으로 시작하여 작품이 관통하고 있는 주제의식, 메시지에 대한 감상자의 해석과 가치판단을 위주로 한다. 예를 들어 여성서사 웹툰 <극락왕생>의 경우, 그 소재에 의해 여성주의적 독해가 중심이 된다. 여성 인물들이 인식하는 사회 현실과 그들이 처한 부조리가 작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만큼, 독자들은 인물이 겪는 위기가 페미니즘의 맥락에 의거하여 어떠한 해소 방식을 제시할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인공 ‘자언’은 신적 존재들에 의해 죽음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고 신적 존재 중 하나인 ‘문수보살’은 그에게 위력을 사용하여 정서적인 의존의 위협을 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언이 찾는 돌파구가 무엇이며 이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할지 이러저러한 토론이 감상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한편 메타포 중심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작품이 전개와 메시지 전달에 활용하는 매개들을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으로, 주로 난해하게 여겨지는 작품의 감상자들이 열중하는 방식이다.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복잡한 내용과 비유로 유명세를 얻었으며, 그 인기가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작품의 수수께끼 같은 전달 방식이 팬들에게 하나의 숙제로 주어져있으며 명확한 해답이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에 차용되는 모티프들에 집중하여 숨겨진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 주된 과제로, <에반게리온>의 경우 감상자들은 성서를 테마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품의 전개가 성서에 빗대었을 때 새롭게 드러내는 의미들에 집중한다. 

인물 중심의 분석은 등장인물의 특성과 상호작용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이는 특히 독자의 주관성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방법으로, 인물의 사고방식에 대한 추측과 관계한다. 관건은 어떠한 개별적 인물이 존재할 때 현실적 개연성을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 한 인물이 작품에서 보이는 행보와 언행이 그의 어떠한 개성과 기제에 의해 발생하는지, 또한 그가 다른 인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집중한다. 올해 개봉한 극장판으로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는 <슬램덩크>는 팬덤의 규모가 증가한 만큼 다양한 인물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극장판의 주인공 격인 ‘송태섭’의 과거 배경이 공개되면서 독자들은 그의 성장 과정과 가정환경이 그의 인격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하고, 그것이 다른 팀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경기의 결과와 관계하는지 등 인물을 현실에 존재하는 개인인 것 처럼 상정하여 삶의 개연성을 추측하는 작업이 인물 중심의 감상 방식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부의 방법론을 더욱 구체화하여 연구하는 것이 외부적 방법론으로, 상술한 방식들이 어떠한 경향성을 띠는지, 커뮤니티의 전체적인 가치관과 그것이 작품과 감상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만화 비평의 지평이 확장되리라 기대한다. 특히 감상자의 층이 다양한 만큼, 해석에 투영되는 관심사 또한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이는 현실의 흐름과 결부하므로 더욱이 그 의의가 크다. 그 중에는 퀴어 정체성, 정치철학적 견해, 현대적 윤리규범에 대한 고민들이 녹아있는 감상들 또한 존재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만화 비평에 팬덤 문화를 반영함으로써 인문적인 맥락까지 포섭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감상의 장을 마련하는 작업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팬덤 커뮤니티의 폐쇄성이 강할 뿐더러, 팬 자신이 날것의 감상을 정돈하여 게시하는 데에 있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팬덤의 감상을 아카이빙할 플랫폼이 기존재하는 만큼 그 가능성은 무궁하며, 기존의 장소를 적극 지원하고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비평이 감상과 공존할 새로운 방식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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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진

만화평론가(2019 만화평론 공모전 신인 부문 가작 수상)
텍스트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