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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통해 재현되는 한국의 전통음식

“그것은 서울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니라 시골 문화의 어울림이다. <식객>”

2024-09-12 김한영

만화를 통해 재현되는 한국의 전통음식

그것은 서울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니라 시골 문화의 어울림이다. <식객>”

  <식객>(2003, 허영만)을 다시 소개하는 것이 자칫 게을러 보이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20년이 지나 다시 읽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이 작품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불편해졌기 때문이었다. 가령 주인공 성찬은 공용 찌개에 개인의 숟가락을 담가 먹는 것을 정이라고 말했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제는 위생 문제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노포의 비위생에 대해 작품은 살아있는 역사라도 표현하지만, 오늘날엔 역사와 별개로 그냥 지저분한 것으로 분리해 평가한다. 이런 요소가 있음에도 여전히 <식객>이 유효할까?

우공(牛公) 죽어서 좋은 데 가시게"
(<식객 3> 비육우 편)

  딱 7칸이다. 작중 미미백화점 소고기 납품회사 선정 제5차 평가회의 시합은 비육우 도축이었다. 이 경합은 사실상 주인공 성찬의 라이벌 오봉주와의 1, 2등 대결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경합이었기에 성찬은 축사를 돌며 까다롭게 식자재가 될 비육우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소를 사랑으로 키운 한 목장에서 소 다섯 마리를 구매했다. 최고의 식자재라 성찬을 좋아했고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소를 도축장에 보낸다. 그런데 딱 7. 성찬은 우공(牛公) 죽어서 좋은 데 가시게.”라고 말하며 콧등에 입을 맞추고 엉덩이 쓰다듬으며 애도를 표한다. 그러자 도축장으로 들어가던 소가 고개를 돌려 성찬을 응시하곤 죽으러 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소는 도축 후 의무적으로 24시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낸다.”라는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경합이라는 긴장감 속에서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가 내뱉는 여운이 남았다. 시간은 다시 흐르는데 내 호흡은 갑자기 그 속도와 따로 쉬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돈만 내면 쉽게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한 생명을 죽이고 피비린내를 참아가며 뼈와 살을 분리해 내는 작업을 누군가 대신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식용 소를 키우고 도축업자가 정형을 해서 요리사가 요리하는 과정의 수고가 소고기 가격에 포함된 것이다. 따라서 먹기 위해 소를 죽이는 행위는 너무나 당연하다. 동시에 목적을 위해 한 생명을 빼앗는 것에 가책을 느끼고 애도하는 것도 당연하다. <식객>은 그 애도의 크기를 딱 7칸으로 정의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다. 여전히 <식객>은 건재하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음식을 기록하는 행위는 우선 섭취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분류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손에서 손으로 전수되었던 요리법을 글로 기록하는 작업이었을 것이고 이것이 그림 사진을 거쳐 시사교양 방송 같은 영상 매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즉 음식을 기록하는 행위는 정보 전달의 측면이 강했다. 그런데 이 정보 전달은 단지 요리법의 공유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음식은 한 집단의 상징성이 되기도 한다. 가령 전주의 콩나물국밥, 안동의 찜닭, 부산의 돼지국밥, 강릉의 초당두부, 대전의 성심당 등처럼 음식이 지역을 상징하기도 하고 궁중요리, 파인다이닝과 같이 음식이 신분, 소득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특별한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남들은 누려보지 못한 특별한 지역, 신분, 소득을 상징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더 비싼 차를 타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은 심리처럼 더 희귀한 음식, 더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게 된다. 이러한 과시는 같은 요리더라도 더 맛있게 만드는 음식점, 요리사를 따지게 되면서 미쉐린 가이드처럼 요리의 서열화를 만들어 냈다. 정리하면 음식을 기록하는 행위는 요리법과 더 우월한 음식점과 요리사를 알리는 정보 전달이라 볼 수 있다.

  “요리만화 역시 요리를 기록하는 행위로서 위 성격을 그대로 따른다. 장르 내에서도 몇 가지로 세분되어 있지만 공통으로 요리 방법과 재료에 대해 정보를 기술하고 이 정보에 해박한 인물(요리사)들이 요리 대결로 우열을 가르거나 이러한 인물들이 실존하는 음식점을 방문하여 맛 평가를 하는 내용을 다룬다. 이런 서사를 통해 요리 만화는 주인공의 특별함을 강조하여 우상화한다. <미스터 초밥왕>(1992, 데라사와 다이스케)의 세키구치 쇼타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지를 발휘하는 천재성과 포기를 모르는 노력형으로 묘사되며 <요리왕 비룡>(1995, 오가와 에츠시)의 비룡은 절대 미각의 소유자로 이미 13살에 특급요리사 시험에 합격한 인물이다. <따끈따끈 베이커리>(2002, 하시구치 타카시)에서 아즈마 카즈마는 몇몇 제빵사만 갖고 있다는 태양의 손소유자로 표현된다. 국내에서도 <대장금>(2003, 이병훈), <제빵왕 김탁구>(2010, 이정섭)가 이 서사를 빌려 성공한 작품으로 꼽는다.

  <식객> 역시 지금은 차장수를 하고 있지만 성찬은 원래 대령숙수의 음식솜씨를 이어받았다는 식당 운암정의 후계자 후보라는 비범함을 갖고 있다. 대령숙수 에피소드에서 성찬은 스승의 아들이자 동문수학한 오봉주와 대결 구도를 형성하여 음식 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식객>의 이 대결 구도는 주인공이 다양한 요리 고수들과 대결하여 배움을 얻고 성장하는 내용과는 다르다. 대결하다가도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사형수를 만나고 또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한과를 만들고 있는 등, 운암정의 진정한 후계자를 놓고 대결하는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식객>에서 요리 대결은 단지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전략 정도로 이해된다. 성찬과 오봉주의 생태 맑은탕 대결은 낚시태와 그물태를 쉽게 비교를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고, 청주 에피소드에서 김일목 형제간의 술 담그기 대결은 청주를 소개하고 술을 빚는 장인들의 노고를 표현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음식 정보 전달 면에서 보았을 때, <식객><맛의 달인>(1983, 카리야 테츠, 하나사키 아키라)과 종종 비교된다. 분명 두 작품이 취하는 이야기 구조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소소한 갈등이 발생하면 전문가가 등장해 전문 지식을 근거로 그 갈등을 정리한다. 그 후 요리가 나오고 맛을 평가하며 미학을 논하는 결말로 끝이 난다. 특히 <식객>은 만화라는 매체치고 활자가 많아 <맛의 달인>에 비해 정보 전달 목적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객>은 정보 전달이 재료와 관련된 드라마로 연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앞서 성찬이 소를 우공(牛公)이라 칭하며 예를 갖추는 것처럼 <식객>은 기본적으로 음식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성찬은 진수와 함께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요리와 재료에 대한 정보를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그 이유는 그 재료를 만드는 사람의 노력이 얼마나 값진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염전 에피소드는 우직하게 염전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통해 염전에서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주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옛날 사람으로, 모두가 고작 소금 따위에 수입산과 국내산 구분이 필요하냐며 혀를 차며 아버지를 무시한다. 이때 성찬이 등장하여 국내산 소금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왜 더 좋은지 설명해 준다. 성찬의 설명을 통해 별것도 아닌 소금에 기본을 지키고자 한 장인 정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 재평가되고 아들도 그렇게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염원이 얼마나 대단한 부성애인지 알게 해준다.

  <식객>의 다소 장황한 정보 전달 방법은 FTA 체결로 식품 시장이 개방되면서 우리 식재료가 가격경쟁에서 밀려나고 외국 요리가 우리 식탁을 대체하고 있다는 위기에 따른 방어기제로 읽힌다. 신토불이를 미덕으로 한 <식객>의 진짜 대립각은 국내산과 수입산 재료의 대립과 도시와 시골의 대립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인 고구마 편은 고구마를 잘 찌우는 법조차 알려주지 않는, 요리 만화라기보다 한 편의 신파 드라마이다. 이 에피소드는 한 사형수의 회고로 시작한다. 이 사형수는 어릴 적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고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할머니 곁에서 자라게 되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찾아갔지만, 어머니는 다시는 오지 말라며 남의 자식 패듯 마구 때렸다. 그럼에도 아들은 계속 찾아갔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몰래 삶은 고구마를 숨겨두었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들은 결국 그만 사람을 죽여 사형수가 되었다. 성찬은 그가 어릴 적 삶은 고구마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마지막 사식으로 고구마와 동치미를 준비해 준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식사를 통해 사형수는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은 후 회개한다. 모두가 사형수의 속내를 모르고 있을 때 오직 성찬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성찬이 전라남도 해남 사람이기 때문이다.

  <식객>의 전통음식 재현 방식은 단순히 요리법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시골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같다. 단순히 전통 요리를 재현한 후 품평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통 요리가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식재료 때문이며 그 식재료는 시골에 있는 어떤 장인의 노고 때문이라고 귀결된다. 그런데 그 시골의 정서와 문화가 도시화와 세계화로 사라지고 있으므로 성찬은 장황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역전! 야매요리>(2011, 정다정), <오무라이스 잼잼>(2010, 조경규), <공복의 저녁식사>(2014, 김계란), <백수세끼>(2019, 치즈), <하루달콤 하루쌉사름>(은유 2021) 등 오늘날의 요리툰과 비교하였을 때, <식객>의 신토불이는 지나친 국수주의로 보일 수도 있다.

  PSY에 이어 BTS로 이어지는 한류열풍을 타고 K-Food라는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2010년대까지만 해도 한식의 세계화는 매 정부의 빠지지 않는 국책 사업이었다. Kimchi, bibimbap, Bulgogi 등의 우리 음식은 항상 ‘Do you know’와 묶여 어떻게든 구미에 대한민국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열등감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문화개방과 함께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국 음식으로부터 우리 것의 지키고 위대함을 알리고자 했던 신토불이 정신이기도 했다. 2020년대, 이제는 우리도 우리 것인지 몰랐던 음식들도 K-Food로 소개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렇게 K-Food가 유명해지게 된 이유는 국가사업이 성공했다기보다 한류 콘텐츠에서 우리 음식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먹방이라는 인터넷 방송 플랫폼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먹방은 영어로 “Mukbang”으로 표기할 만큼 그 자체가 고유명사가 된 한국의 방송 콘텐츠이다. 진행자는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외국의 시청자는 한국의 음식을 따라 먹고 싶어지면서 우리 음식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맵다고 유명한 불닭볶음면이 해외에서는 챌린지가 되어 불닭볶음면이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이렇듯 OTT, 숏폼이라는 영상 매체를 통해 한식의 세계화는 우리 주도적이기보다 외국인들 선택당하고 있다.

  요리툰의 이야기 구조는 <식객>을 계승한 것이 아닌 먹방 그리고 브이로그와 닮았다. 트레이싱으로 묘사하거나 사진으로 대체한 맛있는 요리가 등장하면 주인공은 정보 전달보다 맛 평가에 집중한다. 더 맛있게 먹는 장면을 집어넣어 독자들의 식욕을 자극하는 것이 재미 요소다. 혹은 요리와 관련 없는 주인공의 어릴 적 추억이거나 힘들었던 오늘 하루를 적은 일기를 서술하다 마지막엔 요리로 귀결되는 방식이다. 브이로그, 공감툰, 힐링툰, 일상툰 계열로 연결되는 이런 장르 방식은 요리가 치열한 도시 생활에 작은 위로가 된다.

  최근 들어 음식 인문학 콘텐츠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스타 셰프 유행이 지나고 연예인들의 맛집 탐방이 범람하면서 푸드포르노에 지친 참이었다. 문득 내가 매일 먹는 요리가 어떤 유래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서 음식은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의 결과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식객>의 전통음식 재현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소를 이라고 칭하는 표현에는 시골에서 소가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하는지를 함축한다. 삶은 고구마마저 <식객>에서 전통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가난 때문에 삶은 고구마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시대상 때문이다.

  전통음식을 다루는 만화가 굳이 한식의 세계화에 힘쓸 필요도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감히 누가 짜파구리와 달고나가 K-Food로 소개되어 해외에 알려질 줄 상상이나 했을까? 수십억을 들여 전통음식을 해외에 광고하는 것보다 곧 공개될 <오징어 게임 2>에 한식 한 끼 먹는 장면을 넣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한식의 세계화는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선택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당연하게 먹던 음식에 습관적으로 물음을 가져보기로 결심했다. 어릴 때 당연히 먹었던 해남의 꼬막무침과 파래김, 달래장에는 이제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사랑이 있을 텐데 도시에 사는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시골에서 서울로 음식이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전통음식의 재현, 그것은 서울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니라 시골 문화의 어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