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백>과 프로의식: 한때 나였던 것들에 관해 말하기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룩백>은 학급만화를 그리는 4학년 후지노와 쿄모토의 우정을 다룬다. 만화를 그리는 작가로서 후지노는 콘티를 짜며 이를 활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친구들의 감탄사나 칭찬을 들으며 우쭐해하는 그녀에게 만화는 삶의 낙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다가와 그녀에게 말한다. 쿄모토라는 친구도 만화를 그리는데 지면을 조금만 양보해줄 수 있겠냐고. 후지노는 은둔형 외톨이인 그녀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쿄모토의 작업을 보며 재능을 고민하는 후지노는 여러 노력 끝에 그녀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 절필에 이르고야 만다. 이후6학년이 된 후지노는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 졸업장을 그녀에 전한다. 문을 열어보지만 안에 사람이 없고, 그렇게 돌아가려던 찰나 후지노가 안에서 달려나온다. “후지노 선생님의 팬입니다.” 쿄모토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후지노, 논두렁을 가로지르며 춤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꿈이 이어진다. <룩백>의 전반은 두 소녀가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다룬다. 서로에게 동경하는 상대가 되어주는 모습에서 만화에 관한 열정과 매혹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공을 들여 그려진 해당 장면에서는 경쟁 상대에게 인정받은 일에 관한 짜릿함이 느껴진다.
만화를 그리는 만화라는 점에서는<바쿠만> 같은 작품이 떠오르기도 한다. <데스노트>의 작가 팀이 연재한 이 만화는 작가의 명성 외에도 ‘만화 그리기에 관한 만화’로 이목을 끌었다. 만화업계의 속내를 전하면서도, 창작자로서 겪는 고충 등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룩백>은 이 만화의 여성 버전이면서 동시에 유년기를 다룬다고 보면 좋다. 오시야마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를 불러모았고, 작품의 메시지가 창작자의 공감을 샀다. 이를테면 두 소녀,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만화가를 꿈꿨다면 공감할 구석이 많다. <바쿠만>이 만화 업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룩백>은 그보다 더 순수했던 시절을 다룬다. 돈을 벌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만화의 소재나 질감, 주어진 재능 등에 고민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창작에 관한 ‘진심’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한다면, 창작자의 고민에는 그런 게 있다. 현실에 치여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돈을 받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그런 와중에는 개인 작업을 할 시간이 나지 않는다. 만화를 연재하면 어느 순간 작품이 자신을 떠나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삶도 그렇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사적 경험이 담기기도 한<룩백>은 한 만화가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를 말한다. 작품 초반에 실의를 잃은 후지노가 폐관수련을 하는 대목, 후지노의 친구가 그녀에게 말한다. “슬슬 그림 그리는 건 졸업하는 게 좋아.” 이 말은 후지노의 꿈이 유년기의 일탈로만 치부되는 일을 보여주면서도, 만화가 마무리되는 지점을 장식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유년기의 꿈이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성인이 되면서는 이에 자유롭지 않다. 작품의 결말에 후지노가 연재를 재개하는 모습은 그녀가 자신의 유년기와 함께 쿄모토를 떠나보냈음을 보여준다. 이제 후지노에게 만화는 보다 성숙한 태도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려서 만화에 품었던 마음이나 동경심을 다시 느끼기는 어려울 테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한 시대에 ‘칸’을 씌우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감정이 하나의 시대의식이기도 하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자신의 단편집 후기에서 <룩백>의 배경이 된 감정에는 대학 새내기 시절의 봉사경험이 있다고 밝힌다. 동일본 대지진 복구에서, 아무리 해도 복구되지 않는 이 환경에 무기력감을 느꼈다는 그에게 ‘창작’은 정작 아무것도 태어나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그냥 여기에 앉아만 있어도 되는 걸까? 무언가 밖에 나가 정말로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만화를 그리는 일은 무언가를 새롭게 하거나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는 없는 건가? 예술을 하는 사람에겐 늘 이런 고민이 따라붙는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이런 감정들에 자신을 분리하기란 어렵다. 어쩌면 만화를 그리는 일은 이런 감정을 자기에서 분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만화의 형식이 자전만화라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자전적인 내용을 만화에 담는 일은 자신에서 분리될 수 없는 감정을 끌어낸다. 삶을 살아가면서는 감정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지만, 만화를 그려 칸을 나누면 이런 감정들과 멀어질 수 있다. 한때 나였던 것들에 관해 말한다는 점에서 만화는 뒤를 돌아보는 일에 적합하다. 특히 유년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만화는 다음 두 가지로 고려된다. 프로가 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꿈을 향해 노력하는 아마추어가 공감할 구석이 있다. 먼저 프로의 관점으로 보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작가인 후지모토 타츠키부터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있다.
<룩백>은 만화를 그리는 이유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같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만화에 동시대의 사건이 등장하는 이유에 관해 ‘위기감’을 들고 있다. 어느 위기, 범지구적이거나 사회적인 재난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만화도 결국 한 사회에 속한다. 칸을 쳐서 어느 정도 상상에 제한을 둔다 하더라도 ‘만화’는 결코 그리는 사람의 시기나 환경, 감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말에 등장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상상의 범주를 키우기보다, 사람들이 마음의 벽을 세워야 한다고 봤다. 그렇다면 만화를 그리는 일은, 감정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마음에 벽을 세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위의 일화에서 후지모토 타츠키는 아무리 퍼내도 바뀌지 않는 일을 경험했다. 매한가지로 마음이 메마르다면 이를 채우고자 벽을 세우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칸’ 만화의 형식은 이 점에서<룩백>의 주제의식인 ‘유년기’를 구성한다. 만약 만화가 한 개인의 유년기라면 작품의 결말에 후지노는 어른이 됐다. 독자를 등진 채 앞을 바라보는 이 모습은 쿄모토의 죽음과 자신의 유년기 모두를 끝낸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어른이 되는 일이고 프로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프지는 않지만, 지쳤을 뿐
매체로서 만화의 장점은 역시 자유분방함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만화라는 단어에서 만(漫)은 유원하고 아스라한 것을 뜻한다. 한자로서 ‘흩어질 만’은 중심부를 찾기보다는 사방으로 달려나가는 인상이 있다. 만화를 그린다는 건 상상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현대 만화의 주요 형식인 칸은 이와 같은 성질에 대비된다. 20세기 초 신문이 대중화될 무렵에 칸 만화가 대중화되었다. 신문기사가 소식을 압축해 전하듯 만화도 한 세계를 담았다고 보면 좋다. 닿지 않는 곳에 소식을 전하는 신문처럼 만화도 한 세계를 담았다. 영화가 한 세계를 거니는 인상을 줬다면 만화는 한눈에 보이도록 했다. 흐르는 것을 담고, 밖으로 넘치지 않게 하는 이 작업은 어떤 면에서 마음을 담는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후지모토 타츠키의<룩백>이 다루는 내용이 그렇다. 모종의 소란이 지나고 난 마지막 장면은 후지노의 작업실을 보여준다. 구도는 늘 그렇듯, 만화를 그리는 뒷모습이다. 사건을 등지고 계속 살아가기를 마음먹은 이 장면에서, 후지노의 앞으로 빌딩의 통유리가 펼쳐진다. 이 창은 그동안 보여줬던 후지노의 유년기를 마무리하는 것만 같다.
쿄모토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후지노에게 이 현실은 가혹하다. 혹시 나에겐 재능이 없는 건가, 이대로 대중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기만 하면 ‘진짜 나’는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후지노는 항상 재능을 생각했다. 만화에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아마 후지노는 프로가 되어서도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만화를 연재하는 과정은 모험을 떠나는 것과도 같아서, 처음에 의도했던 방향으로만은 흘러가지 않는다. 이야기를 짜면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생길 수 있다. 최악은 독자의 반응이다. 독자는 만화가인 자신을 좋아하고 또 지지하는 집단이지만, 팬이기 전에 고객이다. 한 번의 공개로 끝나는 게 아니라면 만화가는 연재 내내 외부반응에 시달린다. 지금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게 되면 혹시라도 독자의 반발이 있지는 않을까하고. 독자의 반응을 따라가면 결국 자기가 처음 떠올렸던 꿈이 망가지고야 말 것 같아서. 만화를 처음 구상하는 일은 몹시 즐겁지만, 이내 상상은 ‘칸’이라는 현실에 가둬지고야 만다. 만화가는 주간연재로 몸이 아플 수도 있고, 개인사에 시달릴 수도 있다. 꿈을 현실에 가두는 것은 만화를 그리기 위해 거쳐야 할 숙명과도 같다.
<룩백>의 마지막 장면이 상징적인 건, 그녀가 만화를 다시 그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후지노가 쿄모토가 죽지 않은 세계를 구상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허리가 잘린 네 컷 만화에서 시작된 상상은 네 컷 만화를 돌려받음으로써 끝이 난다. 감금됐던 한 현실이 찢기는 일이 만화 같은 상상으로 이어진다. 그 상상 속에서 후지노는 만화를 그리지 않았고 그래서 쿄모토를 구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상상은 만화가가 현실에 구애받지 않을 때를 가정한다. 어렸을 때 후지노는 만화를 잘 그리고 싶어서 도리어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서점에 가서 만화 작법 책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만화가가 되지 않은 후지노는 자신의 꿈이 현실에 가로막혔다고 여기지 않는다. 주변의 조언을 따라 현실을 따랐던 후지노는 아직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후지노에 의해 구해진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만화를 왜 그만두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답한다. “만화를 다시 해보려고 한다.” 만화가 꿈을 현실과 타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면, 이 가정에서 후지노는 만화를 위해 현실과 타협한 것이다. 칸 만화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가두었듯 말이다.
아마 만화에만 한정된 경험은 아니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답을 찾고 있다. 독자를 위해 쓰는 글과 자기만의 욕심으로 가득한 글,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에 대한 시원섭섭함 등. 꿈을 향해가는 일에 관심이 있어 그림 그리기 강의를 보곤 한다. 유튜브에는 프로 일러스트레이터가 사연자의 고민을 피드백하거나 그림에 관한 조언 등을 올리는데, 사연자의 질문이란 게 공감 가는 구석이 많다. 이를테면 그림을 좋아하는 것과 이걸 업으로 삼는 일은 분명 다르다는 점이 그렇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기만 해서는 만화를 그릴 수 없다. 만화 연재는 시간과 효율의 싸움이라서 최소한으로 최대를 뽑아내야만 한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마감을 못 맞추면 끝이다. 결국 만화를 그리는 일에서는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걸 마주하게 된다. 말하자면 만화를 그리는 일은 자신이 꿈꾸는 것보다 더 초라한 모습으로 현실에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뜻한다. 마감을 마치고서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 작가가 있을까? 누구나 최고를 꿈꾸지만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모든 상상이 끝나면 후지노는 방문을 연다. 쿄모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이 전경으로 보인다. 만화에서 칸이 어느 정도 현실을 유지하려는 시도라면,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후지노는 쿄모토를 가두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다. 만화가로서 후지노의 능력이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상상은 거둬져야 한다. 우측에는 쿄모토가 모아온 후지노의 만화가 보인다. 두 사람이 서로 왕래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쿄모토는 여전히 후지노를 좋아했다. 후지노 또한 팀이 해산되었음에도 ‘후지노 쿄’라는 필명을 여전히 사용 중이다. 뒤를 돌아보면 문에 걸린 사인이 보인다. 졸업장을 전해주던 날 후지노가 쿄모토의 등에 해주었던 사인이 바람에 나부낀다. 다시 문을 닫고 나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만화가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다. 쿄모토가 죽었다는 현실을 닫고 나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더는 만화를 그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프로의 작업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하게 살며 만화를 그렸던 후지노에게, 다시금 현실의 족쇄가 채워지는 순간이다. 프로가 된다는 건 자기였던 한 때를 떠나보내는 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