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수상작(우수상)
우리의 복수 서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1. 무엇이 우리의 복수 서사를 추동하는가
‘정의는 그 안에 분노를 지닙니다.’
「레 미제라블」 1부 ‘팡틴’에서 혁명의회 의원 G는 미리엘 주교에게 프랑스 대혁명에서 나타난 분노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이처럼 말한다. 여기에서 보듯 ‘정의’와 ‘분노’는 얼마간 결속돼 있으며, 이들의 관계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더욱 강한 결속력을 갖는 듯 보인다. 나락, 참교육, 사이다, 캔슬컬처, 엄벌주의… 근 몇 년간, 특히 2024년 들어 사회.문화 전반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 단어들은 비도덕적 행위나 범죄 같은 부정의한 상황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보여준다.
‘정의’와 ‘분노’가 서사적으로 가장 잘 활용되는 장르가 복수(復讐)극이다. 일반적으로 복수극은 정의로운 피해자의 시점에서, 가해자의 악행에 강렬한 분노를 느끼고 그 악행을 갚아주는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수 서사는 2010년대부터 다양한 매체와 장르로 확산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웹툰에서 복수를 다루는 방식이 2010년대와 2020년대 간에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2010년대에 연재된 「모범택시」(2014-2017), 「국민사형투표」(2015-2016), 「비질란테」(2018-2021)를 보면 ‘복수’는 작중인물이 자신의 복수 대상뿐만 아니라 다른 범죄자들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해당 인물의 복수심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기보단 초반부나 후반부에 단편적으로 나타나며, 자연스레 독자는 ‘사적 복수’보다 ‘범죄자들에 대한 사적 제재’에 더 몰입하게 된다. 복수물로 보기는 힘들지만 2010년에 이미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살인자o난감」과 더불어, 이 작품들 모두 드라마로 IP를 확장한 것은 사적 제재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를 짐작게 한다.
‘복수’보다 ‘범죄자 처벌’에 주목하는 만큼 2010년대 복수 서사는 상대적으로 ‘분노’보단 ‘정의’에 초점을 맞춘다. 분노와 복수의 대상을 범죄자 전반과 사회 전반으로 넓히면서 작품의 주제를 사회적 정의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사법기관과 같은 국가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를 방증한다. 이 배경에는 2010년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공인의 부도덕한 행위나 범죄 뉴스가 빠르게 전파되면서 적절한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공분과, 2014년 국민적 트라우마를 안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를 향한 불신이 있다. 즉 2010년대 복수 서사가 상대적으로 정의와 범죄자 처벌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국가와 시스템을 향한 대중의 사회적 요구인 것이다.
반면 2020년을 전후해 등장한 복수물 웹툰들은 ‘사회적 정의’보단 ‘개인적 분노’와 ‘특정 대상을 향한 사적 복수’에 초점을 맞춘다. 2010년대 작품들이 차별받는 사람들과 피해자들을 위한 공분을 대신 발산해준다면, 2020년대 웹툰들은 주동 인물 자신을 위해서만 복수극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인데, 그중 하나는 웹툰 소비 방식의 변화이다. 웹툰 소비 매체가 스마트폰으로 고착화되면서 웹툰의 전개가 더 가볍고 빨라졌으며, 이에 따라 복수 서사는 그 장르적 특징인 ‘복수라는 명확한 목표’, ‘선형적 플롯 전개’, ‘선악 구도에 따른 평면적 인물’을 극대화하는 식으로 변화에 발맞추었다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2010년대에서처럼 다양한 인물의 서사와 복잡한 고구마 전개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또한 2010년대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 웹소설계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회빙환’ 장르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은 ‘청년 세대가 느끼는 절망과 무기력, 그리고 욕망의 표출’ 정도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 회빙환에서 자주 사용되던 서사 중 하나가 복수 서사이고, 2010년대 후반부터 웹소설이 웹툰으로 IP를 확장하면서 2020년대 웹툰의 복수 서사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회빙환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는 20년대 복수물 웹툰에 대한 연구로 자연스럽게 이양된다. 그런데 20년대 복수 서사는 한 발 더 나아가 회빙환의 목적인 ‘절망의 해소’나 ‘욕망의 성취’보다도 ‘분노의 표출’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여기서 우리는 20년대의 복수 서사가 10년대 복수 서사로부터 ‘안티 테제’로 출현한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2010년대에 작품과 독자들은 ‘정의’를 추구하는 복수 서사에 호응하며 사회적 변화에 대한 갈망을 표출했지만 이는 현실에서 무력하게 좌절되었고, 그에 대한 반발이 2020년대에 이르러 ‘정의가 빠진 복수’, 곧 ‘분노만이 남은 복수’의 서사로 체현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수서사의 변화를 정반합으로 이해할 때, 2010년대와 2020년대 복수 서사를 통합하면서도 극복한 ‘진테제’로서의 복수 서사는 어떤 양상일까? 이를 논하기엔 우린 아직 20년대의 중간쯤에 있으며 ‘분노의 복수’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획일화·양산화된 작품들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악’과 ‘보복’을 강조하기 위한 자극적인 연출에 회의감을 느끼는 독자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2020년대 복수물에서도 주인공은 법과 정의를 외치고, 복수물을 소개하거나 광고할 때 흔히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해당 작품을 감상하며 독자의 정의관이 바로 세워지고 분노감이 정화될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볼 영역이다. 오히려 ‘정의’가 복수 서사를 추동하고 있다는 믿음 아래 각종 폭력과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지는 않을까? 진테제로서의 복수 서사는 2010년대부터 이어진 복수 서사의 한계와 문제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본 평론에서는 2020년을 전후해 연재된 두 복수물, 고태호의 <당신의 과녁>(2019-2021)과 강태진의 <아버지의 복수는 끝이 없어라>(2020-2021)를 비교하며, 이들이 2010년대 및 2020년대 복수물들과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지, 서사적 측면과 ‘복수’의 개인적·사회적 차원에 집중해 살펴볼 것이다.
2. 복수 서사가 플롯과 인물의 평면성을 극복하는 방식
<당신의 과녁>과 <아버지의 복수>에서의 복수는 개인적 차원의 ‘사적 복수’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2020년대 복수 서사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두 작품은 개인적 차원의 복수를 다룸에도 ‘복수 대상’이라는 한 가지만을 비틂으로써 다른 복수 서사와 완전히 멀어진다. <당신의 과녁>에선 연쇄살인마 석규남이 그 복수 대상인데, 행복한 삶을 살던 순진한 최엽에게 자신의 모든 살인행적을 뒤집어씌워 무기징역을 받게 함으로써 엽에게 복수의 동기를 제공한다. 문제는 엽이 형기를 채우는 사이 석규남은 노환으로 평안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뒤늦게 석규남이 진범으로 밝혀지며 엽은 17년이 지나서야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지만, 엽이 복수할 대상인 석규남은 사라지고 없다. <당신의 과녁>은 복수 대상의 부재로 인해 ‘복수가 불가능한 복수’임을 3화만에 알림으로써 엽의 복수심은 어디로 향할지, 복수가 가능하다면 그 복수는 정당할지에 대한 거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럼에도 <당신의 과녁>은 ‘복수자’와 ‘복수 대상’이라는 일대일의 구도를 취함으로써 여타 복수 서사와 공유하는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반면 <아버지의 복수>는 복수가 갖는 주요한 특징인 ‘복수의 연쇄’를 중심으로 인물과 서사를 축조함으로써 일대일의 양자구도를 해체한다. 극초반에는 도훈 부부의 시점으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찾으며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할머니집 지하에서 의문의 남성이 발견되면서부터는 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식의 횡적인 시점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30여 년 전 과거의 이야기들이 밝혀지면서는 종적인 시점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아버지의 복수>는 이처럼 끊임없이 시점과 시공간을 변화시킴으로써 주인공 한 명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는 복수극의 강점을 포기해버린다. 다만 스무 명 남짓의 모든 등장인물을 ‘복수’라는 거미줄로 탁월하게 엮어내는 작가 강태진의 솜씨 덕에 독자는 특정 인물이 아닌 복수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처럼 모든 인물이 주인공/복수자인 동시에 복수의 대상이 되는 전개는 복수의 현실성을 잘 반영한 것이다. 복수란 복수자를 피해자로 상정하며 시작되지만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그를 가해자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피해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사적 복수는 주관적 감정과 판단을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피해와 가해의 연쇄는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고 연쇄되며 확장된다. 이는 서사적으로 여러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복수 서사의 필연적 약점인 ‘인물과 플롯의 평면성’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복수 서사는 ‘복수’라는 명확한 목표로 인해 선형적인 플롯과 선악 구도의 평면적 인물을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복수>는 수십 년 동안 연쇄되어 온 ‘복수’들을 상황에 맞게 꺼냄으로써 입체적 플롯을 형성하고, 이는 흡사 잘 만들어진 추리극의 플롯처럼 새로운 긴장과 갈등, 반전들을 계속적으로 확보해간다. 또한 인물들은 가해자의 위치와 피해자의 위치를 오가며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 입체성을 갖게 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질문, 즉 ‘무엇이 선과 악,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만들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웹툰으로 주간 연재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빠르고 가벼워진 웹툰 소비 방식과 더불어, 일주일에 한 화 분량, 영상으로 치면 5~10분 남짓의 분량밖에 보지 못하는 독자 입장에서 복잡한 다 대 다 구도는 따라가기 벅찰 수 있다. 모든 인물에게 시점이 부여된다는 것은 입체성이라는 강점과 함께 모든 인물에게 거리를 발생시키며, 강태진 특유의 정적인 컷 연출과 맞물려 작품 속에 몰입하기엔 지나치게 차갑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실험적인 연출들은 작품성과 주제의식을 분명 강화하지만, ‘웹툰’과 ‘복수물’이라는 장르적 관점에서 볼 때 잃는 것도 분명하다.
한편 <당신의 과녁>은 최엽이라는 선인(善人)과 석규남이라는 절대악의 1 대 1 구도를 취하여 뜨거운 감정선과 몰입감을 유지하면서도, 인물과 플롯에서의 평면성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고 있다. <당신의 과녁>에서 인물과 플롯은 매우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관계 맺는다. 인물의 입체성이 플롯의 입체성을 강화하고, 다시 플롯의 입체성이 인물의 입체성을 강화하는 식이다. 이때 이들의 입체성을 형성하는 요인이 바로 ‘17년’이라는 시간이다. <당신의 과녁>처럼 감옥에 들어갔다가 복수를 계획하는 서사는 현대 복수극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부터 21세기 대표적 복수극인 박찬욱의 「올드보이」까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서는 십수 년의 수감 시간이 복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계로서 적지 않게 묘사되는 반면, <당신의 과녁>에서 최엽이 수감되고 출소하기까지의 17년은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17년’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주인공 최엽이 아닌 그 주변인물들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입체성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교도소를 나온 최엽이 주변인들을 차례로 만나는 동안, 독자는 최엽과 같은 정보량을 가진 채 시작하여 각각의 만남으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고 해당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인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길 17년이, 희대의 살인마로 낙인찍혀 언론과 대중의 포화를 받은 엽의 주변인에게는 더 거세게 작용함으로써 양쪽 시간대의 인물 사이에 깊은 괴리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헌데 <당신의 과녁> 초반부는 이 시간에 대한 묘사를 생략했기 때문에 이를 드러내는 몫은 결국 출소 후에 전개될 플롯에 달려 있다. 그리고 작가 고태호는 이 몫을 아주 훌륭하게 감당해낸다. 예를 들어 세 친구들을 각각 찾아가는 에피소드들에서, 초반엔 독자들이 그들을 배신자로 믿게끔 연출하지만 중반을 지나면서는 대사나 과거 회상을 통해 거기 숨겨진 반전을 드러낸 후 여운 있는 마무리를 통해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식이다. 물론 반전을 자주 사용할 경우 독자의 예측가능성이 높아져 감동이 반감되기 마련이지만, <당신의 과녁>의 반전은 계속해서 변주되거나 더 큰 반전으로 이어지며 독자의 예측을 빗겨간다. 매 화를 끝맺는 시점도 영리한데, 이때 특히 자주 사용되는 무언 연출, 즉 말풍선 없이 컷만으로 인물의 시간과 감정을 표현해내는 연출은 고태호의 시그니처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다.
3. 우리의 본성은 복수를 향하는가, 연민을 향하는가
이러한 소구점에도 불구하고, 복수극에서 통쾌한 사이다를 바라는 독자에게 이 작품들은 밋밋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주인공의 화려한 지적·신체적 능력을 통해 복수가 확실하게 성공했냐 안했냐 하는 능력주의와 결과주의의 풍토에서 두 작품은 찝찝하게 성공했거나 실패한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복수물의 기능이 현실에서 직접 실행할 수 없는 복수를 대신해줌으로써 카타르시스, 즉 감정의 정화를 선사하는 것이라면 이 두 작품은 복수물의 기능을 상실한 실패작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반론을 들 수 있다. 먼저, 복수 서사를 감상하며 극중 인물과 함께 분노를 과잉시키고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 실제로 분노감과 복수심을 해소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부터(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화에 대하여』, 김경숙 역, 사이, 2013, 44-48,92-98쪽 참고.) 현대의 뇌과학에 이르기까지(나카노 노부코·시와다 마사토, 『감정본색』, 노경아 역, 플루토, 2015. 119-139쪽 참고. 뇌과학자 나카노 노부코는 이러한 분풀이 방식이 도파민 쾌락에 젖은 일종의 마약중독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분노에의 잦은 노출은 분노의 문턱을 낮춰 더 쉽고 습관적으로 분노하게 하는 만성화로 이어지게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어떤 작품이 카타르시스를 통한 치유 기능에 적합한지 선별하고자 할 때 볼프강 이저의 세 가지 변증법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데(확정성이 지나치게 결핍되거나 과잉되진 않았는지 2) 화음만 있거나 불협화음만 있진 않은지 3) 지나치게 친숙하거나 낯설기만 하진 않은지(김한식, 「문학과 카타르시스」, 『프랑스어문교육』 제8집, 프랑스어문교육학회, 2004, 455-456쪽.)), 이 기준에 비추어볼 때 최근 웹툰의 복수 서사는 확정성이 과잉돼있고, 화음만 있으며, 친숙하기만 하다는 점에서 독자의 분노감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마지막으로, 흔히들 말하는 카타르시스는 단순한 ‘통쾌함’이나 ‘희열’이 아닌, 비극의 슬픔에서 연민을 느낌으로써 그 슬픔을 정화한다는 개념에 가깝다.
△ 그림 1 <아버지의 복수>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의 이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분노는 기본적으로 고통에 대한 반응이며, 고통이 인간의 숙명이듯 분노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기준에서 <아버지의 복수>와 <당신의 과녁>은 정확히 대조된다. 먼저 <아버지의 복수>를 보면 작중 등장하는 수많은 복수 중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복수는 ‘짱구의 복수’와 ‘덕수의 복수’이다. 두 복수는 모두 성공한 복수이며, 그 수행자인 짱구와 덕수의 술회를 통해 복수가 성공한 소감이 언급되는데 두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그림1>). 곧, 복수를 실행하지 않는 한 복수심은 사람을 떠나지 않으며, 그렇게 복수만 생각하는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중에서 TV 드라마 대사, 노래 가사 등이 인물들의 배경으로 곧잘 활용되는데, 그런 배경의 소리에서도 복수의 서사와 감정이 나타남으로써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는 ‘복수심’들이 드러난다. 즉 <아버지의 복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수란 자신이 받은 피해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인 반응이며 인간은 그 복수를 실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인간의 본성적인 복수심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된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윤리관을 형성한 유교와 기독교에 의해 우리는 ‘복수에 대한 부정’과 ‘무조건적 용서’를 강요받는다. 하지만 복수심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일단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심리학자들의 의견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통찰은 바로 복수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에서 복수를 실행하려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과 자기 가족이 받은 피해,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한 분노를 동력 삼아 움직인다. 복수를 망설이던 덕수가 끝내 복수를 실행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도 자신이 받은 피해를 재인식하고 분노를 폭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 장에서 다뤘듯 이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자신이 받은 피해가 축소되는 것 같고 맘껏 분노할 수도 없을 것만 같다. 반대로 분노와 복수심을 끌어올릴수록 가해자로서의 자신은 가려지는 것 같다.
이는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만 부풀려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은 어떤 영역에서는 해를 끼치며 살아간다. 대중이 나락과 엄벌에 열광하는 데에는 정의를 추구하는 마음과 더불어, 가해자로서의 자신은 축소시키고 피해자로서의 자신은 부풀리기 위한 분노 또한 적지 않게 작용한다.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축소시키려는 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춘의 ‘정신 승리’이다. 덕수의 아버지를 실수로 죽인 이후 30년만에 나타난 영춘은 부처처럼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정신 승리’를 주창한다. 이는 자신의 가해 사실과 죄책감을 무화시키고 자신의 마음만 편하면 장땡이라는 현실 도피지만, 영춘이 죽을 고비 앞에서 자백하듯 이것은 거짓되고 불완전한 대응이다. 그리고 현실 도피가 더 극단화된 것이 영춘의 엄마 귀녀에게 나타난 치매, 즉 기억 상실이다. 결국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분노로 그것을 덮어버리든, 정신 승리로 혼자만의 평화를 누리든, 기억 상실로 모든 과거를 무화시키든, 어떻게 해도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한다.
<아버지의 복수>가 보여준 것처럼 인간이 해를 가하는 동시에 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받은 피해에만 갇혀 분노와 복수로 살아갈 것인가, 가한 해에만 갇혀 죄책감과 현실 도피로 평생 살아갈 것인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양쪽 정체성을 인지하고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각 개인의 삶과 우리 사회는 더 나아지리라 믿지만, <아버지의 복수>가 보여준 회의주의적 인간관은 우리를 인간 본성에 휩쓸려가는 무기력한 존재로 피투(被投)할지도 모른다.
이에 관해 <당신의 과녁>이 내놓는 상반된 인간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엽의 복수 계획은 석규남의 외손녀, 엽의 젊은 날과 똑 닮은 20살의 전인아를 납치해 자신이 감옥에서 보낸 17년을 똑같이 갇혀 지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전인아를 납치하기 직전, 뉴스에서 떠들던 성폭행범들이 먼저 전인아를 납치하게 되고, 엽의 한 친구는 이 상황에 대해 엽을 위한 하늘의 뜻, 즉 천벌이니 우린 모른 척하자고 제안한다. 피해와 가해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이러한 제안은 자신이 받은 피해를 상대방이 그대로 되돌려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손익 계산에 따른 합리적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엽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자신의 선한 본성에 의거하여 전인아를 구출하기 위해 뛰어간다. 결국 엽은 전인아를 구출해내지만 복수 대상에게 가해가 아닌 선행을 베풀었다는 이 사실은 엽 스스로에게 복수 능력이 거세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삶의 유일한 목적인 복수가 불가능해졌을 때 엽이 할 수 있는 것은 밧줄에 목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때, 절대 끊어질 리 없던 밧줄이 끊어지고, 뇌졸중으로 절대 깨어나지 못할 거라 여겨졌던 엽의 엄마가 의식을 되찾는다.
누군가는 이 불가사의한 기적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작품의 개연성을 깨뜨리고 갈등을 손쉽게 봉합했다며 비판할 수 있다. 무신론자가 현실에서 이와 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이는 그저 매우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 겹쳐 일어난 것뿐으로 해석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기적이 엽의 선제적인 선행이 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적인 분노와 복수, 폭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듯, 인간의 본성적인 연민과 선의, 선행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다고. 복수라는 분노의 악순환에 빠져있을 때 그 순환을 깨는 힘은 연민과 같은 감정, 그리고 본성을 뛰어넘는 의지에서 나온다. 서두에 등장했던 「레 미제라블」 속 의원G의 대사 뒤에서, 주교는 이런 답을 한다.
“재판관은 정의의 이름 아래 말하고, 사제는 연민의 이름 아래 말합니다. 그리고 연민은 한결 높은 정의, 바로 그것이오.”
4. 희생양과 분노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
그렇다면, 이처럼 개인이 내면의 본성과 감정을 돌아보고 선한 의지로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걸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걸까? 2010년대 이후 무기력하게 탈각된 사회적 차원의 변화는 그저 그 상태로 둬도 괜찮은 걸까? 개인이 변화되더라도 만약 사회가 구조적으로 분노를 유발하고 복수를 자극한다면 개인은 금세 보복의 나선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는 법과 집행에 관련한 국가기관의 구조만을 개선하자는 말이 아니다. 엄벌주의가 범죄율을 낮추지 못한다거나, 소위 ‘국민정서법’이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방점을 여기에만 둘 경우 책임을 ‘국가’에만 지우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외면하려는 심리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2010년대와 2020년대의 복수 서사를 통합하고 넘어서는 복수 서사에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도 이전과 다른 외침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을 해석하고 사회 구조를 비춰볼 도구로서 르네 지라르의 ‘희생 이론’을 살펴보자. 지라르에 따르면 인류는 집단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무고한 희생양을 만들어 진짜 잘못을 저지른 대상은 잊히게 해왔다. 희생양에 집중시킨 작은 폭력을 통하여 집단 전체의 폭력적 충동을 해소하고 결속력을 강화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역사와 신화, 문화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방식이 각 종교에서 실시해온 희생제의이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처형이다.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당신의 과녁>에 적용한다면 누가 희생양일까? 비교적 손쉽게 그것이 주인공 최엽임을 알 수 있다. 최엽은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되지 않을 수많은 정황이 있었지만, 더 큰 화제성을 원했던 한 신문사 기자는 ‘식인’과 같은 허위사실을 섞어 엽을 악마화했고, 정치권의 압력으로 희생양이 필요했던 강력반의 한 경장은 CCTV 영상을 증거 인멸해버린다. 하지만 <당신의 과녁>은 이들 집단이나 기관에 대해 이 이상으로 비판하거나 주목하지는 않는다. 최엽을 희생양으로 만든 진짜 주체는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 그림 2 <당신의 과녁> 74화 중
‘당신의 과녁’이라는 제목은 작중 나타나듯이 구약성서 「욥기」에서 가져온 어구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비슷한 어구가 작중 등장하는데 2화에서 석규남의 과거회상 중 석규남이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며 독백할 때이다. 석규남은 자신의 살인 충동과 행각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임을 역설하며 따라서 자신을 심판할 ‘당신의 화살’이 날아올 것을 기다린다. 즉 욥기의 맥락과 석규남의 맥락 모두에서 ‘당신’은 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 내포된 전제는 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고 그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욥기」의 욥과 <당신의 과녁>의 엽 모두 의롭고 선한 인물임에도 모든 것을 잃는 고통을 겪는다. 즉 이 두 세계관에서 ‘선악’과 ‘공의로운 심판’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으며 에피쿠로스의 말마따나 이러한 신은 ‘선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는’ 무의미한 존재이다. 그러나 <당신의 과녁>은 이 불일치에서 손쉽게 신을 부정하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엽의 자살 기도가 기적적으로 실패하고 엽의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이 신의 뜻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에필로그 마지막 장면에서 진심으로 웃는 엽의 얼굴은 엽이 적어도 자신의 내면에선 끝내 이 불일치를 해소한 것으로 이해된다.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할 장면은 마지막 화의 마지막 컷이다. 1화에서 엽이 혼자 올라가 자기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노래했던 장소, 엽이 연쇄살인 용의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산을, 마지막 화에서 일상을 회복한 엽이 다시 홀로 올라간다. 그리고 자신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신을 원망하며 안광 없는 퀭한 눈으로 쳐다봤던 하늘을 이제는 안광이 비치는 밝은 눈으로 평화롭게 쳐다본다. 그러다 불현듯 표정이 바뀌며 다시 안광 없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그림2>이다. 이때 엽이 쳐다보는 대상은 바로 ‘당신’이다. <그림3>과 같이, 1화에서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선고받기까지의 컷들에서도 엽은 항상 ‘당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엽과 눈을 맞추고 있는 화면 밖 존재이기도 하지만, 엽의 뒤에서 엽을 욕하고 엽의 가족을 괴롭히고 엽에 대한 각종 악플로 커뮤니티를 채운 인물이기도 하다.
△ 그림 3 <당신의 과녁> 1화 중
즉 <당신의 과녁>이 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가해자로 지목하는 대상은 불특정 다수의 우리, 대중이다. 엽은 ‘신의 과녁’이 아닌 ‘당신의 과녁’이자 ‘우리의 과녁’이다. 인터넷과 언론은 그 빠른 속도를 활용해 희생양을 지목하고, 우리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볼 생각 없이 그 대상을 쉽게 매도하고 혐오하며 비난함으로써 우리의 폭력성과 분노를 해소한다. 하지만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희생제의가 끝난 후 사회는 한동안 질서를 찾아야 하는데, 현대 사회를 보면 대중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은 채 곧바로 다른 희생양을 찾는 듯 보인다. 이처럼 전통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이 폭력성을 해소하지 못하게 된 현대의 모습을 지라르는 ‘희생 위기’라고 명명한다.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정보의 양과 속도가 급증하면서 희생양에게 신성성 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누군가 사회적 매장을 당할 때 그에게 ‘희생’과 같은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희생당한 사람은 있지만 희생시킨 사람, 즉 가해자는 없다.
이 은밀해진 희생양 메커니즘은 <아버지의 복수>에서 더 깊이 은폐된다. <아버지의 복수>는 <당신의 과녁>보다도 경찰의 개입 같은 사회적 요소를 최소화함으로써 다양한 인간 군상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듯하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다중시점을 통해 인물과 거리를 두고 관찰하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몰입도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사회를 효과적으로 부각한다. 인물의 말과 행동, 선택에서 독자는 그렇게 된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사회를 발견하는 것이다. 과잉된 감정만 따라가다가 진짜 주목해야 할 사회적 원인을 도외시하게 만드는 것은 2020년대 복수 서사가 놓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복수> 속 희생양은 누구이고, 그렇게 만든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작중 복수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복수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복수와는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귀녀의 며느리이자, 영춘의 아내, 도훈의 어머니인 ‘명자’이다. 명자는 매매혼이라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영춘 집안의 소유물이 되며,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갖은 학대를 당하다가, 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두 남자로부터도 학대를 당하거나 결국 죽임당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주변 모든 인물의 분노와 폭력성을 홀로 감내한 ‘희생양’이다.
그런데 이 희생양 메커니즘에 작용한 ‘힘’은 무엇인가? 귀녀 또한 폭력의 주체라는 점에서 남성적 근력은 아니다. 진짜 힘은 바로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이다. 가정폭력과 학대가 어떤 남성에게도 문제시되지 않고 자행되는 이유는 가부장제 아래 남성에게 그러한 권위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돈을 주고 며느리를 사온 사실은 가부장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명자와 같이 ‘집이 없는 여성’은 물건처럼 이 집, 저 집 옮겨다니다 ‘출산’이나 ‘정절’ 같은 가치를 잃으면 버려진다.
이 사회적 힘과 폭력은 명자가 죽임 당한 30년 전, 시골이기에 작용했던 걸까? 그 다음 세대인 도훈을 보자. 가부장제는 도훈에게 엄마와 가정을 잃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상실을 일으킨다. 도훈 또한 엄마를 따라 피해자로서 집 없이 떠돌며 살아왔지만, 기억을 지움으로써 복수의 동기와 의지를 스스로 거세해버린다. 가부장제라는 수직적인 제도 아래서 힘이 없는 자는 기억 상실과 같은 극단적 방법으로 복수의 연쇄를 빠져나와야 한다. 기억과 함께 소거된 가부장제의 자리를 대신하여 도훈이 천착하는 힘은 신자유주의적 힘이다. 도훈은 유산을 얻어볼 요량으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를 찾아가거나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를 대접한다. 도훈에게 있어 가부장적 가치인 ‘효’는 자본으로 환산해야만 유의미해진다. 도훈이 ‘짱구의 복수’에 있어 무고한 피해자임이 밝혀져 짱구에게 분노할 때도, 짱구가 미안하다며 부동산과 돈으로 보상해준다는 말에 도훈은 더 이상 분노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는 그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약자를 양산하고,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희생-침묵-기억상실이거나, 분노를 폭발시켜 복수의 연쇄 속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손익 계산이 빠르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은 전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 복수의 나선에 빨려들어간다.
5. 분노와 복수의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많은 사람들에게 2024년은 살면서 전쟁 뉴스를 가장 많이 접한 한 해였을 것 같다. 특히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경과를 보면 ‘복수’의 주체가 ‘국가’ 혹은 ‘권력집단’으로 확대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엿보게 된다. 더 많은 전쟁 뉴스를 접하거나 전쟁의 당사자가 되고 말 해가 언젠가는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한 거대하고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희생양이 되거나, 분노에 차 새로운 희생양들을 끝없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걸까? 복수 서사가, 웹툰이, 예술이 조금 달라진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 앞에 얼마나 효용이 있는 걸까? 김수영 시인의 표현처럼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며 ‘조그만 일에’도 ‘분개하는’ 우리가, 개인과 사회에 걸친 이 분노와 복수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복수>와 <당신의 과녁>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세 가지 태도를 전하고 싶다. <아버지의 복수>에서 ‘아버지’들은 명자를 ‘요물’, ‘더럽은 년’이라 부르며 죄악과 복수의 원인 취급을 하지만, 도훈은 유일하게 명자를 희생양으로서 바라본다. 그렇게 희생양을 직시할 때, ‘아버지’들을 비롯해 복수에 얽혀있던 앞 세대의 모든 인물은 ‘자신의 정의를 실행하는 복수자’가 아닌 ‘한 명을 희생시킨 가해자’로서 재조명된다. 이때 도훈은 그들에게 마냥 분노만 하지 않고 이렇게 질문한다. “안 미안해요?”
작중에서 도훈과 같은 세대의 인물로 희도의 딸, 재경이 있다. 재경은 아버지 희도가 칼에 찔려 병상에 있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추리소설가를 준비하는 재경은 그렇게 된 희도나 죽은 엄마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은 채, 마치 탐정처럼 ‘진실’을 파헤쳐 나갈 뿐이다. 그녀는 마지막화에서 자신이 알아낸 진실을 기반으로 추리극을 완성시킨다. 재경에게 있어 ‘서사’는 마냥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을 재료로 직조되며 또한 새로운 진실을 직조해내는 수단이다.
한편 <당신의 과녁>을 복수 서사가 아닌 다른 관점으로 볼 필요도 있다. 그것은 엽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 서사’로 보는 것인데, 그 ‘잃었던 것’이란 바로 ‘행복’이다. 최엽의 수많은 주변인물들은 복수 장르의 전형적 등장인물인 ‘조력자’나 ‘방해자’ 중 무엇으로 보든 애매한 구석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최엽에게 있어 ‘행복’ 자체인 존재라 생각하며 작품을 본다면 결국 최엽의 작중 행적은 잃었던 행복들을 하나하나 되찾는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분노와 사이다에 가득찬 여타 복수 서사의 댓글들과 달리 <당신의 과녁>의 댓글엔 유독 엽의 행복을 기원하는 독자가 많았던 이유다.
진정으로 희생된 존재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를 희생시킨 존재가 나는 아닌지, 다른 누구이거나 사회 구조는 아닌지 밝혀내는 것, 그리하여 그에 합당한 사과를 전하고 이러한 희생을 반복하지 않도록 예술로, 댓글로, 각자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을 꿈꾼다. 무엇보다 타자의 악함과 약함에 집중하며 복수·정죄·혐오로 점철된 삶을 살기보다, 나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아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길 꿈꾼다. 복수와 전쟁의 종식을 꿈꾸며 헤르만 헤세의 말을 전한다.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바로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