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라는 직업
옛날 한국 저널리즘에 ‘신문 소설’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다. ‘신문 소설’ 삽화라는 일자리가 있었다. 나는 그 마지막 세대다. "최연소 신문 소설 삽화 작가"로 나는 문화일보에 이름이 실렸다. 지금 한국에는 ‘신문 소설’이 없다. 대신에 ‘웹 소설’이 유행이다. 나는 ‘웹 소설’ 삽화의 첫번째 세대였다. 『코인데스크 코리아』에 연재된 ‘웹 소설’에 일러스트를 그렸다.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하기 이전의 일이다.
지금 시장에서라면 나는 웹 소설 삽화를 그리지 못한다. ‘신문 소설’ 삽화를 잘 그리던 사람은 나보다 많다. ‘웹 소설’ 삽화를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신문 소설’ 삽화와 ‘웹 소설’ 삽화를 모두 그려본 사람은 한국에 나 말고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 환경이 무섭게 빠르게 변화하던 시대에 이십 년 넘게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이십여 년 전에도 내 직업은 만화가였고 지금도 내 직업은 만화가다. 내가 여러분께 뭔가 도움이 되는 글을 쓸 자격이 있다면, 그림을 잘 그려서라기보다 나의 서바이벌 때문일 것이다.
나는 늦게 데뷔했다. 최연소 삽화가라고는 했지만 서른 살이 코앞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회사에서 일을 했다. 대학 졸업반을 다니면서도 프리랜서로 일을 받았다. 회사원으로서 나는 나쁘지 않았다. 그때가 인터넷 붐이 일어나던 시절이었는데, 내가 하던 일은 웹 개발 기획이었다. 작은 회사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일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나는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만화와 관계되지 않은 일을 하나둘씩 끊어냈다. 회사도 다니지 않았고, 새로 들어오는 외주 일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수입이 줄어들었다. 연봉 2백만 원으로 생활하게 되었다(월급이 아니라 연봉이다). 그런 상태로 한두 해를 살았다. 그래도 크게 쪼들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데뷔하겠지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종이 신문 일러스트레이션과 ‘인터넷 만화’로 데뷔를 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웹툰 작가가 아니라 종이 만화 작가로 기억한다. 그렇긴 하다. 나는 이십여 년 동안 종이 신문과 종이책 만화에 힘을 쏟았다. 수십 권의 만화를 그렸지만, 웹툰 연재는 대여섯 번 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초창기부터 인터넷 만화를 그렸다. 내가 데뷔한 것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인터넷 판이었다. 미국에서 많이 올리던 초창기 인터넷 만화는 지금과 달랐다. 독자님은 가로 스크롤 만화를 혹시 아시는지? 옛날에는 세로 스크롤 대신 가로 스크롤이 많이 쓰였다. 가로로 긴 바에 마우스를 대고 한쪽으로 쭉 당겨가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쭉 당기다 보면 손등이 뻐근해졌다.
이런 방식이 유행했던 이유는 원래 기존의 종이 만화가 가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본 땄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요즘처럼 휠 달린 마우스가 많지 않았다. 만화를 한번 클릭한 다음 휠을 굴려 가며 아래로 스크롤하는 방법이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스마트폰은 없던 시대다. 세로로 휙휙 넘겨가며 본다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에 가로로 긴 만화를 두 행씩 올리고, 다음 버튼을 누르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연재를 했다. 상상이 되시는지?
내가 데뷔하던 해 두 가지 인터뷰를 했는데, 하나는 아까 밝힌 것처럼 신문 소설 삽화가로 인터뷰 했고, 또 하나는 ‘인터넷 만화가’로 인터뷰를 했다. 이때는 웹툰이라는 말도 많이 쓰이지 않았다. ‘인터넷 만화’라고 불렸고, 인터넷에 만화를 올리는 특이한 사람이 있구나 사람들이 놀라던 시대였다. 한두 해 동안 인터넷에 만화를 올리던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한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를 종이책으로 내면서, 그동안 올린 만화를 조금만 남기고 내리기로 했다.
종이책은 잘 팔렸다. 25만 부 팔렸다. 그래도 지금 같으면 상상 못 할 방법이다. 인터넷에 만화가 계속 올라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종이책이 더 팔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는 그게 맞는 방법인 줄 알았다. 20여 년 전의 일이니, 나의 어리석음을 너무 비웃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여 나는 웹툰 전업 작가가 아니라 신문 만화와 종이책 만화를 전업으로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웹툰을 계속 내리지 않고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지식 교양 만화의 포털을 운영하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로 공상을 해 본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착실하게 웹툰 작가의 길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오롯이 후회만 하지는 않는다. 착실한 웹툰 작가로 20년을 산다는 것! 강풀 작가 같은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동료지만 존경한다) 나 같은 만화가에게는 무리였을 것이다.
첫째로 일정을 맞추는 일이 너무 빠듯하다. 특히 지식 교양 만화의 경우에는 그렇다. 작업의 많은 부분을 혼자 해야 하는데, 자료를 공부해 가며 일주일에 70컷을 좋은 컬러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은 거의 무리였을 터이다.
옛날에 종이 만화 잡지 《팝툰》에 격주로 16페이지 가량의 지식 교양 만화를 연재한 적 있다.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라는 종이책으로 묶어 나왔다. 2주에 16페이지니 요즘 웹툰의 양보다 훨씬 적다. 그런데도 나는 마감을 하느라 상당히 고생을 했다. 처음 1주일은 자료를 공부했고, 다음 1주일 동안 그림을 그렸는데, 마감 무렵이 되면 50분 일하고 10분 자며 작업을 했다. 10분씩 새우잠을 잘 때 꾸는 꿈은 대체로 ‘20분, 30분씩 마음껏 자는 꿈’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지식교양만화 플랫폼 ‘이만배’의 배려가 고마웠다. 지식교양만화의 경우에는 원고의 양을 조금 줄여주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내가 그리는 만화는 웹툰의 호흡에 맞추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하나 내가 힘들었던 부분은 독자님의 반응 문제다. 많은 웹툰 작가가 안티와 악플에 시달린다. 그런데 나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를 인터넷에 연재할 때 악플보다 ‘선플’이 더 난처했다. 십자군 작업을 쉬는 이유와도 관계가 있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느니, 내용이 빨갱이 아니냐느니 단순한 악플은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예상대로일 뿐이다.
하지만 독자님이 내용을 오해하고 달아주시는 ‘선플’은 작가로서 고민이 된다. “기독교에 반대하는 만화 잘 보았습니다”, “역시 무신론이 좋은 것 같습니다”, “미국에 반대하는 만화 잘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해야 합니다”라는 반응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내가 이런 메시지로 오해받을 만화를 그려도 될까 주저하게 만든다. 독자님이 좋은 마음으로 달아주신 ‘선플’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꾸할 수도 없다.
안티에 대한 대응도 당연히 쉽지 않다. 내가 악플을 꺼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내게는 안 좋은 성격이 있다. 틀린 주장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써 놓은 내 만화에 대한 비판이나 악플을 보면 대부분 역사적 사실 관계를 잘못 알고 있다. 1차 문헌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매니아를 위한 대중서만 보고 자기 믿는 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강의 평가를 받는데 꼭 이런 학생이 있다. ‘나는 일본에 대해 잘 안다. 나는 닌자도 알고, 사무라이도 안다. 그런데 이 수업은 일본의 경제와 사회 따위 필요 없는 지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는 비판을 쓰는 학생이 학기마다 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성격 좋은 그 친구는 웃었다. 나는 그런 글을 보면 웃지 못한다. 어떻게든 고쳐주고 싶은데, 그렇게 대응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웹툰 전업 작가를 하지 않아 아쉬운 점은 두어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K-웹툰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경험을 해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만화가지만 웹툰 전업 작가가 아니니 말이다. 이 경험이 가장 아쉽다.
두 번째 아쉬운 점은 수익 문제다. 종이 만화책의 수입은 20여 년간 계속 줄어들었고, 원고료 수입도 줄었다. ‘웹툰 작가가 충분히 많이 벌지 못한다’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종이책 작가와 웹툰 작가를 다 해본 나로서는 웹툰 작가의 수입이 종이책 작가에 비해 여전히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책은 갈수록 안 팔리는 것이 현실이다.
웹툰이 종이 만화보다 인기라는 사실은 아쉬울까 아닐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이 달라지다 보니 독자도 변한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신문 소설 일러스트를 처음 데뷔했을 때는 매체가 많지 않았다. 매체는 적고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신문에 실린 것 봤다’라며 옛날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많이 왔다. 종이 만화를 내도 여러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세상이 변했다. 지금은 사람도 많고 매체도 많다. 요즘은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고정 패널을 해도 가족들도 잘 모른다. 웹툰을 해도 아는 사람만 안다. 그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만 좋아한다.
세상은 계속 변한다. 생성 AI의 시대가 되었다. AI 시대를 맞아 만화가라는 직업은 어떻게 달라질까?
내가 만화를 처음 공부할 때(거의 30년 전이다), 만화가는 스크린톤을 썼다. 스크린톤이란 다양한 무늬가 다양한 무늬와 망점이 인쇄되어 있는 시트지다. 이것을 만화에 잘라 붙여서 효과를 냈다. 내가 데뷔할 무렵 많은 만화가가 포토샵으로 갈아탔다. 그때만 해도 스크린톤을 스캔하여 포토샵에 넣어놓고 그림에 따서 붙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사이버 스크린톤이라고 할 만하다. 이십여 년이 지나 클립 스튜디오나 프로크리에이트를 쓰는 지금에 와서는 상상도 안 가는 방식이다.
만화 그리는 장비도 달라졌다. 지금은 작은 가방에 태블릿을 넣어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일을 한다. 옛날에는 다양한 장비가 필요했다. 나는 여행을 갈 때면 종이 뭉치와 붓과 잉크와 펜과 스캐너와 휴대용 프린터를 가방에 짊어지고 다녔다. 스위스 세관에 근무하던 분이 내 가방 속 스캐너를 보고 껄껄 웃으며, “내가 세관에 근무한 지 여러 해지만 스캐너를 본 적은 처음”이라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있다.
태블릿 PC와 아이패드의 보급으로 작업 도구가 모두 변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 생성 AI의 보급 말이다. AI가 가져올 변화의 성격은 옛날에 일어난 변화의 성격과 같을까, 다를까? AI는 그림을 대신 그려주는 도구일까, 아니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하나의 수단일까?
얼마 전 A대학에 ‘생성 AI의 활용’에 대한 강연을 나갔다. 청중분들께 물었다. “생성 AI를 얼마나 사용해 보셨나요? 미드저니, 스테이블디퓨전, 챗GPT, 클로드를 사용해 보셨나요?”
대답은 놀라웠다. 젊은 학생 중에는 사용해 보신 분이 별로 없고, 나와 나이가 비슷한 교수님과 조교 선생님은 사용해 보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젊은 작가가 생성 AI에 관심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전에는 O 고등학교의 미술 하는 학생분들 앞에서 강연을 했는데, 인사하면서 나는 말했다. “예비 작가님들, 요즘 생성 AI 나와서 힘드시죠?”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나는 학생분들이 웃으면서 “예!” 대답할 줄 알았는데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다들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리는 세대도 지금의 기술 발전을 반기는 것만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생성 AI와 함께 만화의 세계는 어떻게 바뀔까? 만화가라는 직업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나는 궁금하다.
만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유명한 편집자분을 최근 만났다. 덕담을 나누던 가운데 그분이 내게 말했다. “작가님도 여러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데 만화 작업, 웹툰 작업을 다시 하셔야죠.” 나는 대답했다. “요즘에도 저 만화 그리고 웹툰 그리고 있어요.”
그분이 원망스럽거나 야속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분이 요즘 편집하는 웹툰과 웹소설이 어떤 작품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렇게 다양하다. 먹고 살길만 끊지지 않는다면 이제는 뭘 해도 좋은 직업이 만화가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만화가라는 직업을 나는 사랑한다.
“작가님을 어떻게 소개할까요? 교수라고 할까요, 작가라고 할까요, 칼럼니스트라고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당당하게 대답한다.
“만화가입니다. ‘만화가’라는 세 글자만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