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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수상작(우수상)_로맨스의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 – 순끼론

순끼의 대표작 <치즈인더트랩>과 <세기말 풋사과 보습학원>에서 로맨스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다양한 조건들이 어떻게 제시되는지 살펴보고, 이를 각각 시대와 세대, 계층, 젠더의 측면에서 분석했다. 나아가 이를 통해 로맨스 작가로서 순끼가 지닌 미덕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했다.

2024-11-16 구자준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수상작(우수상)

로맨스의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 – 순끼론

1. 들어가며

  사랑은 달콤할 뿐만 아니라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적으로 취약해지기에 손쉽게 상처를 입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방황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깨달은 미스터 다아시의 첫 고백이 그토록 뻣뻣했던 것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이 엘리자베스의 빈한한 처지 등에 대한 스스로의 객관적판단을 마비시켰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계속해서 이어갈 때 이러한 불편함과 불쾌감은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에 빠지기 전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스스로가 자신하던 이성이 얼마나 오만했을 뿐만 아니라 편견에 가득 차 있었는가를 새삼 깨달으면서.

  그리고 순끼는 이와 같은 사랑의 이중성에 깊이 천착한 로맨스 작가이다. 순끼는 사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대한 객관적 탐구를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에 빠진 인물들이 바로 그 사랑을 통해 도약을 시도하는 순간들을 계속해서 포착한다. <치즈인더트랩>(이하 <치인트>)로맨스릴러라는 장르적 애칭이 붙었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치인트>의 로맨스 는 조금은 위험하고 오싹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폭력과 위협이 난무하는 캠퍼스에서, 연애는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인물들에게 새로운 짐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까지 변화시킬 힘을 익히며 조금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다. <치인트>2010년대를 통과하는 청년 세대의 사랑이 지닌 딜레마를 세심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그럼에도 로맨스가 여전히 하나의 해답으로서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하며 우리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치인트>의 완결 이후 순끼가 세기말 중학생들의 풋풋한사랑을 다룬 <세기말 풋사과 보습학원>(이하 <세풋보>)로 돌아온 것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 주변의 세계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사랑에 대해 고민하기에는 너무나 어리게 느껴지는 중학생들의 로맨스를 굳이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얘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순끼는 시대적 모순에 괴로워하는 당대의 청년 세대에 대한 재현에서 1990년대 말이라는 근과거를 통과하는 명랑한 청소년들의 세계에 대한 재현으로 나아가게 되었는가. 얼핏 생각했을 때 <세풋보>의 밝고 명랑한 풍경에서 <치인트>가 보여주는 복잡하고 어두운 관계와 감정들에 대한 묘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세풋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과 감정선이 단순하고 명확한 것과 달리, 작품을 그려내는 순끼라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다층적인 세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세풋보>를 통해서 그리고 <세풋보>와 함께 <치인트>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순끼라는 작가에 대하여 새롭게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자 한다. 로맨스를 ()가능하게 만드는 무수한 조건들이 우리를 촘촘하게 제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끼의 작품에서 여전히 사랑이 우리에게 가능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치인트><세풋보>를 서로에 대한 거울로 삼아, 두 작품이 그려내는 로맨스의 조건들을 각각 시대와 세대, 계층, 젠더의 측면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2. ‘IMF 키즈가 보는 세계 

  <치인트>의 주인공 홍설은 명문대 경영학과를 다니며 매 학기 학과 수석을 다투는 우수한 학생이지만, 그럼에도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홍설은 빠듯한 돈과 시간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나 캠퍼스에서 생겨나는 여러 사건들은 번번이 홍설의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학과 공동체의 중심에 있던 남자 선배 유정이 갑자기 홍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유정의 적극적인 접근으로 인해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하지만 유정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홍설에 대한 태도를 왜 갑자기 바꿨는지는 베일에 감춰져 있기에 둘의 관계는 언제나 위태로워 보인다.

  여기서 홍설이 겪는 불안은 당시 청년 세대의 불안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반영하는 88만원 세대론이나 삼포 세대 혹은 오포 세대론 등이 유행하던 시기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연재된 <치인트>는 바로 이 시기의 대학생이 또래 집단 내에서 살아가는 양상을 포착하는 서사였기에 그토록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다양한 세대론적 논의들이 청년 세대 전반을 시대의 피해자로 다소 거칠게 호명했던 것과 달리, <치인트>는 다양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섬세하게 재현함으로써 청년 세대 내부의 차이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치인트>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조별 과제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조원 각자의 나이와 성별, 계층 등의 차이로 인해 모두의 협력은 번번이 무산되고, 뻔뻔한 무임승차자와 부당한 짐을 짊어지게 된 조장, 무책임한 교수 간의 갈등이 반복될 뿐이다.

  물론 이제는 누구도 청년 세대를 ‘88만원 세대로 부르지 않으며, 당시의 청년 세대 역시 어느덧 청년이라는 틀로만 지칭하기 어렵다. 나이가 든 청년들은 MZ의 몰개성적인 ‘M’으로 편입되었고, 새로운 청년들은 개성적이지만 규율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Z’로 문제시된다. 그러나 <치인트>가 포착했던 원자화된 사회로서 캠퍼스, 그리고 그 캠퍼스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Z세대에 대한 다양한 편견들은 사실 현재의 사회가 새롭게 진입하는 청년들에게 무엇도 보장하지 않으며, 청년들 역시 기성세대에게 더는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상이기도 하다. <치인트>가 보여주는 사회적인 것이 붕괴한 이후의 사회가 더는 새롭지 않은 이유는, 이 숨 막히는 캠퍼스의 풍경이 사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대중문화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1990년대로의 귀환은, 이처럼 현재의 시점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 잡은 각자도생의 생존 경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그 기원에서 돌아보고자 하는 시도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1)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가 아는 현재의 한국 사회가 시작되었다는 인식과 2) 소련의 붕괴와 문화적인 격변이 진행되었던 1990년대는 아직은 많은 것들이 유동적이었던 가능성의 세계였다는 기억, 그러나 3) 1997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추구했던 가치나 한국 사회에 주어졌던 가능성이 급격하게 일원화되었다는 판단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 시기가 삶이 찬란한 원색으로 기억되던 물론 실제로는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 유년기처럼 우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1990년대의 기억으로 다시 향한다.

  즉 <치인트><세풋보>는 어떤 의미에서는 “IMF 키즈의 생애(이 표현은 안은별의 인터뷰집 제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안은별은 자신의 책을 “1997IMF 당시 10대의 나이로 한국의 공교육을 받고 있었던, 20년이 지난 2017년 현재 30대 성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곱 몀을 인터뷰해 그들의 삶을 기록한 책이라고 설명한다. 안은별, IMF 키즈의 생애, 코난북스, 2017, 7. 즉 안은별의 인터뷰집을 2017년의 시점에서 IMF 시기 청소년기를 통과한 특정한 세대의 삶을 기록하고자 하는 일종의 인류학적 시도로 볼 수 있다면, <치인트>에서 <세풋보>로 이어지는 순끼의 작품들 역시 유년기 IMF를 겪은 세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추적·복원하는 문예적 시도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를 그려내는 두 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치인트>IMF 이후 확고하게 형성된 세계를 수용한 청춘의 상에 대한 이른 발굴이었다면, <세풋보>는 아직은 모든 게 굳어지기 전, ‘여전히 세계를 모르는아이들의 로맨스를 통해 우리가 새롭게 볼 수 있는 과거의 가능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에 가깝다. <치인트>의 청춘들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약간의 선을 넘는 일에도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면, <세풋보>의 청소년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잠정적인 경계들을 폴짝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세풋보>의 아이들이 우정 혹은 로맨스를 통해 뛰어넘을 수 있는 경계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경계를 뛰어넘는 모습들을 통해 순끼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3, ‘문턱으로서 학원과 우정

(바흐찐은 시공간을 의미하는 크로노토프(Chronotope)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길이나 응접실, 문턱(threshold)의 크로노토프 등이 지닌 특성을 논의하는데, 이때 각각의 크로노토프는 서사의 단순한 배경으로 작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의 인물과 주제, 장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길에서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살롱이나 응접실에서 복잡한 책략의 교환과 대화가 오간다면, 문턱에서는 새로운 만남과 인생의 위기, 삶의 중요한 결정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미하일 바흐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외 옮김, 창비, 1988, 260~262, 450~458. 순끼의 작품에서 학원은 특권적인 위치를 지닌 시공간으로 제한적이나마 바흐찐이 논의한 문턱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 글에서는 문턱이라는 표현을 통해 학원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황미애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고 순정만화를 탐독하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가장 큰 고민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성적이 조금 떨어져서 엄마의 압박이 심해졌다는 것인데, 미애가 사는 1999년의 (아마도 수도권 어딘가인) ‘비평준화지역에서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시험을 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미애는 혼자서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모의고사를 망친 다음 결국에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멀리 떨어진 허름한 보습학원에 등록하게 된다. 다소 수상쩍은 ‘S에서 미애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다른 학교 아이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앉아있는 소년 김철과 다시 만난다.

  현재 연재 중인 <세풋보>세기말1999, 중학생 황미애가 이웃집 친구이자 같은 반 짝궁일 뿐만 아니라 보습학원까지 함께 다니게 된 김철과 계속해서 엮이면서 생겨나는 풋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김철은 이웃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전학을 온 학생으로, 자신을 둘러싼 험악한 소문과 큰 덩치, 과묵한 성격으로 인해 대마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은 계속되는 시비에 지쳐 있으며 스스로와 친구들을 안전하게 지키기만을 원하는 마음 여린 소년이다. 김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애가 좋으면서도 부담스럽고, 번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김철은 미애가 자신과 가까워졌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거리를 두고자 하지만, ‘친구가 되자며 자신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미애 때문에 종종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간질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둘의 풋풋한 로맨스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김철도 황미애도 자신의 마음을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기에, 둘은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늦은 밤 이불만 걷어차며 부끄러워한다. 고등학교 입시를 둘러싼 둘의 상황 역시, 둘이 항상 옆에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가까워지기 어렵게 만든다. 한편으로 이는 순끼가 둘의 만남과 감정선을 빠르게 전개하는 데 집중하는 대신, 미애와 철이가 속한 작은 세계를 정교하게 묘사하며 서로가 점차 더 서로와 많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느리지만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의 이름이기도 한 능금 보습학원19화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미애가 보습학원에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순끼는 미애와 미애네 가족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미애가 속한 그룹의 학교 친구들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모두 번쩍번쩍한 학원가에 있는 입시명문인 대박학원에 등록한다. 그러나 미애는 왜인지 모르게 학원에 등록하는 걸 꺼리며, 혼자서 잘 공부할 수 있다고 가족에게 계속해서 큰소리친다. 결국 미애는 모의고사를 망치고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서 학원에 다니게 되지만, 다른 친구들과 달리 미애가 등록한 곳은 다소 허름한 건물에 위치한 능금 보습학원이다. 매달 29만 원의 학원비를 내야 하는 대박학원과 달리, 능금학원은 22만 원의 학원비만 내도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외동인 황미애가 부모의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7만 원을 아끼기 위해 허름한 보습학원을 다니게 되는 상황은 미애네 집안의 처지가 어려움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물론 미애네 집은 여전히 딸을 학원에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은 있으나, 서민과 중산층의 모호한 경계 위에 있거나 중산층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약간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서사 내에서 2년 전의 IMF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다만 109화 이후 게재된 특별편에서는 황미애와 김철의 가정환경이 소개되는데, 여기서는 IMF 때 아버지가 정리 해고를 당한 이후 예전보다 형편이 어려워진 미애네 집의 상황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세풋보>의 사람들은 IMF의 여파에서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다니게 된 능금학원의 S반에는 이웃 중학교에 다니는 김철의 오랜 친구들뿐만 아니라 오타쿠혹은 불량한 날라리로 보이는 아이들도 섞여 있다.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끼리 자연스럽게 무리를 지어 다니던 학교와 달리, S반에서 미애는 평소에는 친해질 리 없는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된다. 미애의 활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김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원 친구들과는 생각처럼 쉽게 가까워지지는 못한다. 학원은 미애네 집안의 다소 아슬아슬한 상황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만 아니라, 미애가 자신과는 다른 환경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일종의 문턱으로도 기능하는 셈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이는 <치인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치인트>의 배경이 되는 A대 경영학과가 다들 유사한 환경에서 비슷한 사회적인 성취를 목표로 하는 또래 집단으로 그려진다면, 홍설이 여름방학 동안 잠시 다닌 SKK 영어학원은 이와는 이질적인 집단에 속하는 이들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홍설은 학원에서 자신과 다른 계층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나이 많은 아저씨와 수상쩍은 교제를 하는 중일지도 모르는 옆자리의 친구 송성은과도 친해질 뿐만 아니라, <치인트> 어디에서도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서브남주백인호와도 학원에서 다시 마주친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학원에서만 잠시 마주쳤다가 스쳐 지나가는 이들로 남을 뿐이다.

  특히 백인호는 <치인트>의 로맨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설과 맺어지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일정한 주거와 직업도 없이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서사에서 마치 유령과 같이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린 시절 백인호는 잠깐 을 넘었다가 유정에게 버림을 받은 기억이 있기에, 유정과 홍설의 세계 주변을 기웃거리면서도 다시는 암묵적인 경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순끼가 그려내는 세계에서 백인호와 같은 인물들을 위해 마련된 적절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원은 낯선 두근거림의 공간이지만, 학원과 같은 곳에서만날 수 있는 백인호는 충분한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이는 순끼의 로맨스가 결국 세계의 유사한 풍경을 공유하는 연인들이 서로의 진심과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처럼 계층을 넘나드는 로맨스는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끼가 여전히 학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묘사한다는 점 역시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끼가 학원과 같은 장소나 그곳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백인호와 같은 인물을 통해, 자신이 상세히 포착하는 어떤 작은 세계의 풍경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사실까지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비록 일시적일지언정 학원에서는 와 조금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과도 마주칠 수 있다. 학원은 순끼의 주인공들이 자기 주변의 세계 바깥의 인물들과 만나고 때로는 조그마한 일탈이 가능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때 가능한 접촉의 양상과 변화의 가능성이 긍정적으로만 그려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치인트>의 영어학원에서는 홍설과 백인호의 관계에 대한 악의적인 헛소문이 퍼지고, 학원에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인 송성은조차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상황을 겪으며 홍설은 바깥 세계의 악의와 질투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배운다. 마찬가지로 <세풋보>에서도 미애와 다른 아이들의 관계가 극적으로 진전되지는 않는다. 젓가락에 담배를 끼워 골목 구석에서 몰래 흡연하는 전소라의 세계는 좌충우돌하면서도 모범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김철이나 황미애의 세계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소라보다는 미애와 조금 더 친해진 용희 역시 단지 학원에서 마주치는 짧은 순간에만 친근하게 대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리고 말랑말랑한 <세풋보>의 청소년들은 <치인트>의 대학생들보다는 조금 더 함께 어울리는 순간들, 접점을 찾아가는 순간들을 만들어갈 수 있다. 하나로 뭉치는 일이 좀처럼 없는 S반 학생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유행하던 <스크림> 비디오를 구해서 학원 옥탑에서 함께 보거나 오락실과 실내 서바이벌장을 몰려 다니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은 서로의 세계에 섞이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처럼.

 

△ <세풋보> 50

4. 여성성/남성성의 모방과 사랑

  이처럼 학원이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문턱으로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인트><세풋보>에서 외부와의 접촉으로 인한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것 역시 명확하다. 순끼는 자신이 그려내는 세계의 경계를 솔직하게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턱 바깥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지는 않는다. 대신 순끼가 집중하는 것은 문턱 안의 로맨스(를 포함한 다양한 갈등)에서 인물들의 여성성/남성성이 문제시되는 양상이다. 인물들은 연인 혹은 사회와 갈등을 겪으며 스스로의 행동과 가치관에 대해 새삼 질문을 시작하고, 다양한 질문들을 통해 그 자신이 체현하고 있는 여성/남성다움에 대해 고찰하며, 이는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자기 나름의 답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래윈 코넬의 고찰에 따르면 남성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층이나 사회 및 시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한 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남성성이 복수로 존재하고 서로 경합할 수 있다.(래윈 코넬, 안상욱·현민 옮김, 남성성/, 이매진, 2013.) 이는 사회 집단의 차이 혹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자가 서로 다른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남성적인 것이라 생각되었던 특징들이 여성화되며 가치를 부정당하는가 하면, 여성적이라 여겨지며 무시당했던 특성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남성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재조명되기도 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는 사실 유동적이지만,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굳건한 위계가 그러한 변화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치인트>의 유정과 홍설, 홍설과 손민수 사이에서 거듭되는 모방은 여성성/남성성의 경계를 교란하며 로맨스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논의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서로를 향한 흉내 내기는 <치인트> 중후반의 핵심적인 주제이다.(<치인트> 속 모방의 문제에 관해서는 구자준과 이연숙이 논의한 바 있다. 구자준, 변화하는 남성성과 젠더 수행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65, 2018.; 이연숙, 여성의 질투엔 이유가 있다, 한국일보, 2022.1.2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11914400001707. (확인일: 2024.9.6.) 구자준의 논문이 유정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모방하려는 홍설의 시도에 관해 논의한다면, 이연숙의 칼럼은 홍설의 외양을 흉내내는 손민수의 시도가 손민수하다라는 유행어를 만들 정도로 화제가 된 이유에 대해 고찰한다. 이 비평은 위의 논의들에서 이루어진 분석을 참고하되, 나아가 <치인트>라는 작품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하는가를 검토한 다음 <세풋보>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 의식이 변주되는 양상까지 함께 살펴봄으로써 논의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는 사회에서 승인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따라하면서 공동체에서 자신의 몫을 확보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욕망과 관련되어 있는데, 남자주인공 유정이 보여주는 차갑고 계산적인 남성성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홍설의 시도가 대표적이다.

  유정은 부유한 환경과 잘생긴 외모, 여유로운 태도를 바탕으로 언제나 남성중심적 학과 공동체의 핵심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을 대상화하며 형성되는 남성들의 연대와 우정에 진정으로 몰입하고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구자준, 앞의 글. 327.) 단지 그는 다른 남성들을 곁에 두며 자신의 지배적인 위치를 공고하게 유지할 뿐이다. 이처럼 무엇에도 진심이지 않은냉소적인 면모는 일견 작품의 주인공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특성으로도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태도로 인해 유정은 홍설을 여자라는 이유로 대상화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대신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며 로맨스의 남주가 될 수 있었다.(이러한 유정의 특성은 차도남과 같은 밈의 속성과 함께 논의되기도 했다. 위의 글, 329~330.)

  하지만 이처럼 합리적인 계산에 기반한 냉정한 남성성은 누구에게나,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유정의 지배적인 위치만을 욕망했던 오영곤과 같은 남자 후배가 끝내 실패했던 것과는 달리, 영리한 홍설은 유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심히 분석하며 그를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이 어린 여성이라는 위치로 인한 일상적인 손해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감수하는 대신, 마치 유정처럼 인간 관계를 저울에 올려놓고 냉정한 거래를 거듭하며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방은 유정에게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며 둘의 로맨스를 위기로 이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유정은 자신만이 홍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가능하게 한 자신의 고유한 성적 특성이 연인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당황하고 만다.(위의 글. 334.)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는 홍설의 여성성을 모방하는 손민수가 있다. 손민수는 <치인트>3,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개학한 날부터 갑자기 홍설과 유사한 스타일로 자신을 가꾸고 나타나는 인물이다. 손민수는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나름대로 주변의 인정도 받는 홍설을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하기에, 머리카락의 색과 모양에서부터 옷차림까지 홍설의 스타일을 모조리 베끼고자 시도한다. 유정에게 은근한 충격을 주었던 홍설의 변화와 달리, 손민수의 모방은 홍설과 홍설 주변의 모든 이에게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연숙의 지적한 바처럼 홍설이 - 그리고 손민수하다라는 유행어를 만든 독자들이 -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여성적인 기표란 아무것도 없다는 실존적인 충격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이연숙, 앞의 글.)

  물론 유정과 홍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치인트>는 여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남성적인 것 안에도 본질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의 나를 항상 만들어가는 중이며, 의식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게 있을지도 모르나 그 한계 역시 누구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서사에서 유정의 차가운 남성성을 모방하고자 하는 홍설의 시도는 승인됨에도 불구하고, 홍설의 중성적인 여성성을 모방하고자 하는 손민수의 시도는 일방적인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의 특성을 모방하며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흐리는 시도들 속에서, 로맨스의 새로운 가능성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치인트>는 모방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별개의 과정이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홍설은 유정의 행동을 모방하며 그와 경쟁하는 대신, 유정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으며 어떤 고독함을 느꼈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유정 역시 자신을 따라 하는 홍설의 변화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이를 연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 홍설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모방은 단순히 서로의 차이를 지우는 행동으로 그치는 대신, 그럼에도 끝내 같을 수는 없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변화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남성성의 내면까지 훔친홍설과 달리, 외면의 여성성만을 참조한 손민수의 모방은 거칠고 조악하다. 손민수는 홍설이 왜 중성적인 스타일의 외양을 선호했는지, 이를 통해 여성을 품평하는 문화가 일상화 되어있는 학과 공동체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어떻게 만들고 지키고자 했는가에 대해 알지 못하며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모방을 통해 어쩌면 자신이 홍설과 친해지거나 혹은 홍설의 위치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기뻐할 뿐이다. 손민수는 끝내 타인을 이해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 만약 손민수가 조금만 더 세련된 모방자였다면, 나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홍설의 악몽 역시 조금은 다르게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반면 <세풋보>의 세계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탐구는 <치인트>와 같은 스릴러나 미스터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아직 어리고 미숙한 <세풋보>의 주인공들은 홍설이나 유정만큼 자신의 흔적을 능숙하게 지우고 표정을 관리하며 마음의 선을 긋지 못하며, 누군가를 흉내 내고 모방하는 복잡한 게임을 시작할 필요도 없다. 대신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사회의 규범적 압력은 더 노골적이기에, 이에 대한 순응과 반발 역시 보다 직접적이고 가시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련된 모방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예컨대 <세풋보>의 미애는 지금까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축구를 배우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용기를 발휘한다. 능금학원에 다니는 철이의 친구들은 항상 축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데, 미애는 남자아이들이 서서히 형성해 가는 남성들의 세계를 거부하고 떠나는 대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철이까지 친구로 만들고자 한다. 김철 몰래 자신에게 가장 배타적으로 굴었던 배홍규를 찾아가 축구의 기본기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하고, 철이에게 자신도 축구 경기에 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어쩌면 이는 <세풋보>가 아직 서로의 경계가 완고하지 않은, 어린 청소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계 넘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애의 용감한 시도들이 반복되면서, 철이 역시 자신을 대마왕으로만 바라보는 타인의 편견과 시선에 갇히지 않고 점차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미애의 시도가 남성성 자체를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일상의 위계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미애는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대신, 현재의 질서를 어느 정도 승인하면서도 자신에게 부과된 사회적 압력을 넘을 수 있는 절충안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홍설이나 황미애와 같은 주인공들의 노력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또래의 남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둘은 자신을 옥죄는 사회적 시선의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와 같은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성취를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홍설이나 황미애가 보여주는 여성성/남성성의 경계에 대한 탐색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제한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그친다. 아울러 홍설처럼 현명하거나 황미애처럼 저돌적이지 못한, 혹은 유정과 김철처럼 듬직한 남주의 조력을 받을 수는 없을 누구나 그러한 변화를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치인트><세풋보>는 이처럼 작은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했는가를, 인물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타인과 맞서고 스스로를 검열하는 시선에 저항하며 연인과 대화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어떻게 감내해야 했는가를 꼼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조용한 갈등과 치열한 고민이 일상에 짓눌린 우리들의 모습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에, 작지만 중요한 변화를 약속하는 순끼의 로맨스 역시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나가며

  순끼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항상 다정하지만은 않았던 세계의 풍경을 세심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일상의 다양한 제약에 묶여 있던 인물들이 사랑을 통해 변화하는 양상 역시 섬세하게 그려낸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지금껏 이해할 수 없었던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자신도 사랑에 빠지기 전과 조금은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홍설과 유정이 사귄 다음에 오히려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도, 황미애와 김철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그렇게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던 것도, 그들이 누구보다도 서로를 충실하게 사랑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아직 그들 스스로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깨닫지 못한 순간에도.

  순끼의 작품에서 회상/과거 시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웹툰의 일반적인 경향에 따라 인물을 단숨에 소개하고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하는 대신, 순끼는 현재와 관련된 과거의 사건들을 중간중간 적절히 보여주며 서사를 착실하게 쌓아 올리는 데 집중한다. 그렇기에 인물들과 독자들 역시 계속해서 각자의 과거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고민하며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아갈 수 있었다. ‘로맨스릴러라는 애칭이 의미하는 것처럼, <치인트>의 로맨스는 언제나 누군가의 비밀을 향해 은밀하지만 끈질기게 접근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세풋보>에서도 1999년의 재회는 계속해서 1993년 여름의 첫 조우를 소환한다. 황미애는 김철의 무뚝뚝한 현재만을 보고 편견을 가지는 대신, 과거와 견주어 보며 어설프나마 김철의 진정한 마음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면 2010년대의 <치인트>에서 세기말의 <세풋보>로 나아간 순끼의 여정 역시, 계속해서 나와 당신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작가의 일관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유정과 홍설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김철과 황미애의 가능한 미래 중 하나라면, 그들이 사회에서 무엇을 잃고 배우며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순끼는 IMF라는 가까운 기원으로 향하게 되지 않았을까. 자기 세계 바깥에 선 이들을 이해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더는 (다시) 다가가지 못하는 유정이나 홍설과는 달리, <세풋보>의 김철과 황미애에게는 아직은 더 많은 우정과 사랑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치인트><세풋보>의 묘사가 그 시대의 문화를 폭넓게 경험하며 자라난 세대 전반의 일상적인 기억과 감각에 폭넓게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끼의 로맨스는 누구나 자유롭게 머무를 수만은 없는 제한된 사회를 무대로 삼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순끼는 이를 자신의 한계가 아닌 미덕으로 만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순끼는 인물들 사이를 순환하는 미묘한 감정과 갈등을 탁월하게 포착하며 독자들을 사로잡으면서도, 자신이 재현하는 세계의 숨겨진 한계와 경계 역시 담백하게 그려낸다. 무엇보다 사랑에 빠진 <치인트><세풋보>의 인물들이 자신과 상대뿐만 아니라 연인들을 둘러싼 주변의 세계까지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순끼의 로맨스가 지닌 가능성은 아직까지도 모두 다 발굴되지는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필진이미지

구자준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웹툰과 웹소설, TV 드라마를 보고 연구한다. 「‘식민지 로맨스’의 네이션과 젠더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중심으로」, 「책빙의물과 게임방송물 웹소설의 자기반영성 연구 -『전지적 독자 시점』과 『납골당의 어린 왕자』를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김칸비』(만화웹툰작가평론선), 『흙흙청춘』(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