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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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수상작(최우수상)_기억되기 위한 미완의 서사

역사적 사건의 재현은 불가능성과 당위라는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사건이 기억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을 분유하기 위해서는 재현은 불가피하다. 본고에서는 박건웅의 저작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과 <그해 봄>을 통해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의 윤리적 태도를 고찰하고, 역사를 재현하는 작품이 갖는 시대적 의의에 대해 사유하고자 한다.

2024-11-23 박근형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수상작(최우수상)

기억되기 위한 미완의 서사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단언은 재현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재현에 관해서라면 아마 가장 널리 알려졌을 이 테제는, 아우슈비츠로 환유되는 쇼아 이후의 예술의 재현 불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후 아도르노는 이에 대해 재현 불가능성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예술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의미를 모두 시사하고자 하였음을 밝혔다.(박명림,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은 시를 써야 한다”, 네이버 열린연단, 2016518, https://m.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115449&rid=253) 두 명제의 의미 그대로, 기억을 다루려는-특히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의 고통을 다루려는 예술가는 결과적으로 재현의 불가능성과 당위 사이의 딜레마에 놓인다. 재현의 불가능성은 실재를 진정으로 재현할 수 없음을 표상한다.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폭력이나 고통, 타인의 삶과 같은 영역에서보다 엄격히 적용된다. 이에 재현의 윤리에 보편 강령을 선언할 수 있다면 제1강령은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지 말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고통, 폭력적인 기억, 잊힐 수 없고 잊혀서도 안 되는 역사적 사건의 상흔은 타자를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고서 어떻게 말해져야 하는 것일까. 설명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부조리함과 공포, 그 어둠을 예술은 감히 재현할 수 있는가. 재현의 윤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있다.

  1945년은 인류 역사의 ‘0으로 불린다.(박명림, 위의 웹페이지) 세계 2차대전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재앙과 파괴를 불러왔다. ‘0이라는 개념은 역사는 이성에 의해 진보해왔다는 믿음, 인류는 발전해가고 있다는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진 폐허를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한국전쟁, 제주 4.3, 5.18. 광주민주화운동,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까지, 끝없이 ‘0으로 회귀하게 하고야 마는 사건을 계속해서 조우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미증유의 비극적인 사건들의 피해자-타자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충분히 애도하고 기념하고 있는가?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지 말라는 금언에 의해 도출된 재현 불가능이라는 판단이 또 다른 침묵을 강요하게 될 우려가 있지는 않은가? 혹시 사건으로 말미암은 타인의 고난을 우리는 피로감을 핑계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에서 타자의 서사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사회에 대해 모두 무의식적으로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공범자(오카 마리. 기억·서사. 교유서가, 2024. 104.)라고 지적하며, 이를 타자의 부인이라는 내셔널리즘적인 욕망과 결부하여 설명했다.(오카 마리. 앞의 책. 108.) 대상의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또 다른 관점으로는 특정 대상을 재현 불가의 영역에 두는 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웹진 <>에서 진행된 대중매체를 통한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대담에서 개진된 바 있다.(웹진 <> 편집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 <2>-‘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 2019319, https://kyeol.kr/ko/node/153)

그러나 재현의 당위성이 윤리적인 사유 없이도 재현의 불가능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을 때, 황정아 평론가가 지적했듯 “(...) 스스로의 정치성에 대한 탐구와 질문을 접어둔 채 협소하게 규정된 정치적으로 올바른문학에 속박당할 위험(황정아.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vol.194, 2021 겨울호, 20.)에 빠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문학 만이 아닌 예술 일반에도 적용될 수 있는 명제다. ‘재현해야만 하는예술은 진실의 중층성이나 복잡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그 메시지를 함몰시킬 수 있다. 예술은 이처럼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윤리와 당위가 그리는 좌표를 탐색하며, 진실이 놓인 자리를 부단히 찾는 작업이다.

  다시 불가능성에 관한 논의로 돌아가 보면, 재현의 불가능성을 고수하는 것은 여전히 어떤 윤리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건의 기억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전승이다. 세대를 이어가지 못하는 기억은 망각되고 만다. 사건의 재현 없이도 사건이 기억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망각은 기억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사건의 폭력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폭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예술의 윤리적 태도는 재현 가능 여부보다는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구축된다고 보는 것이, 보다 건설적인 담론을 생성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역사적 사건의 재현은 일반적으로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서사적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예술은 발언할 권력도, 기회도 없었던 서발턴의 목소리를 역사의 어둠에서 길어올리고 침묵의 증언을 대신한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작품들은 주로 고발적 성격을 띠며, 만화의 경우 사회참여 만화, 르포르타주 만화, 다큐멘터리 만화, 저널리즘 만화, 민중만화, 논픽션 만화 등으로 장르가 명명되어 왔다.

  오늘의 우리만화상(2011), 11회 부천만화대상 대상(2014) 등을 수상한 박건웅 작가는 상술한 작품군에서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단편 및 장편으로 한국의 근현대사의 비극들을 집요하게 호명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 한 권 한 권이 모두 소중하나, 본고에서는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그해 봄>을 중심으로, 재현의 딜레마에 대한 윤리적 응답으로서의 박건웅 작가의 만화를 읽어보고자 한다. 이 두 작품을 특별히 주목한 이유는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그해 봄>이 역사적 사건을 재현함에 있어 여타 저작들과 다른 방향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역사 테마 소설집 벌레들(2013)의 동명의 단편을 각색한 작품으로 보도연맹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그해 봄>은 인혁당 사건(1975)을 소재로 한 그래픽노블이다. 이 두 작품은 박건웅 작가의 대부분의 다른 저작과 달리 작품의 화자를 사건의 직접적인 경험 당사자로 설정하지 않았다. 독자의 몰입과 공감을 유도하는 가장 용이한 방법이 화자와 독자를 동일시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할 때, <물푸레나무><그해 봄>은 재현의 목적에 이르는 데 있어 여타 작품들과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화자와 청자의 위치 설정은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어떤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를 원하는지, 어떤 효과를 얻기를 바라는지를 내포하고 있다.

  화자를 사건의 당사자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독자인 는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가 될 수 없기에, ‘나의 기억을 말한다라는 허구를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재현할 수 없음을 표방한다. 사건의 당사자를 작품의 화자로 지정하는 것이 이러한 허구성을 무릅써서라도 그의 목소리를 복원한다는 것-그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함과 달리, 화자와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의 불일치는 재현물의 생래적 한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우의적 성격을 지닌 단편선인 <삽질의 시대>, <괴물들>을 제외하면 <아리랑>, <제시이야기>, <어느 혁명가의 삶>, <짐승의 시간>, <옌안송> 등이 전자의 방식을,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그해 봄>은 후자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폭력의 리얼리티 드러내기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소설에서 만화로 미디어가 변용되면서 23페이지 분량이었던 소설은 만화로는 300페이지에 가깝게 분량이 증가했다. 문장은 분절되어 연속된 컷에 배치되기도 하고, 혹은 여러 컷을 건너뛰어 배치되기도 한다. 분절되는 문장 사이로 텍스트를 재해석한 이미지가 틈입하고, 그 사이로 다시 한번 칸과 홈통이 틈입한다. 만화라는 미디어의 특성상 그림과 글, 칸과 홈통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가 되므로, 독자의 시선이 지면에 머무는 시간이 증가할수록 그만큼 사유와 성찰의 시간도 연장된다. 이는 감각적 동일시가 아닌 거리 두기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의 화자인 물푸레나무는 인간사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 불인(不仁)의 태도로 관망하는 존재로 설정됨으로써 학살의 잔인성을 부각한다. 학살의 순간을 지근거리에서, 학살이 끝난 후에는 몇백의 사체가 포개어져 있는 골짜기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존재는 자연, 혹은 신 외에는 없을 것이다. 참혹한 현장을 산수화의 구도에서, 그것을 풍경으로 조망할 수 있는 존재(박건웅.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북멘토, 2015. 252-253.), 깊은 밤, 철사에 묶여 끌려가는 수백의 사람들과 제복들을 모두 같은 원근에서 바라볼 수 있는(박건웅. 앞의 책, 36-37.) 이는 초자연적인 존재뿐이다. 그에게는 학살의 현장에 모여든 생령들과 주검이 다를 바가 없으므로 생령과 주검은 같은 크기의 도상으로 그려진다.(박건웅. 앞의 책, 225-226.) 화자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동일시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한 거리 두기 효과를 유발한다. 이 같은 장치는 참담한 폭력을 시각화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정동의 과잉에서 벗어나, 한걸음 물러나서 사건의 전말과 폭력의 구조를 고찰하게 한다.

  ‘가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하는 알 수 없음의 한계를 존중하는 것이 재현의 윤리다. 때로 어떤 작품들은 이 한계를 시각적 리얼리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역사를 재현하는 데 있어 어느 수준의 리얼리즘은 사건의 고증과 이입에 있어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사건의 본질적인 리얼리티를 증명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시각적 리얼리즘은 성찰이 부족한 서사의 면피 또는 면죄부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지나치게 세부적인 사실이나, 폭력에 있어서의 리얼한 묘사와 같은 것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윤리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수잔 손택은 충격적인 이미지에서의 타자는 (...)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하(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도서출판 이후, 2011. 113.), 그것을 보는 이들은 이미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나 맥락, 정보가 아닌 그 이미지만을, 이미지가 주는 충격만을 기억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재현의 목적은 서사적 진실을 구축하고 전승하는 것에 있으므로, 사실성은 진실의 일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실을 대체할 수는 없다.

  코믹 저널리즘을 주창한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에서 이와 관련된 장면을 삽입하였다. 학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두려워하며 가까스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노인 앞에서, 조 사코는 정문의 철조망이 어디 있었는지, 언제 촌장이 나왔는지, 지프가 어디에 주차돼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해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했던 노인들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이 학살의 그날에 대해 거듭된 자료조사로,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자만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뭔가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음을 고백한다.(조 사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글논그림밭, 2012. 405-407.) 이처럼 리얼리즘은 저널리즘적 사실로서의 기능할 수는 있어도, 폭력의 구조와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 특히 작가의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그려진 이미지에서 사실적인 디테일을 놓치지 않겠다는 욕망은 반대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폭력의 한가운데에서, 세세하게 표현된 상황과 인물은 만화로 이야기하자면 작가와 독자의 포르노그래피적 욕망(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흐릿한 이미지와 마주했을 때, 관객은 시선을 돌릴지언정 완전한 이미지가 시야에 펼쳐지기를 원한다. 오랫동안 카메라와 관객은 이러한 포르노그래피적인 욕망의 공모자였다.” 안시환. “[안시환의 영화비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려는 것”, 씨네21, 201634, http://m.cine21.com/news/view/?mag_id=83240)의 반영이거나, “폭력적인 사건이 리얼리즘에 의해 재현 가능하다는 환상(오카 마리. 앞의 책. 49.)일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영화 <사울의 아들>(2016)에서, 낮은 화면 심도로 흐릿해진 이미지들에 관해 그것은 두려움을 시각적으로 운반하는 일(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만일, 2016. 51.)이라고 이야기했다. 흐릿한 이미지들은 강제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은 시야 안의 모든 것을 또렷하게, 제대로 목도할 수 없는 생존 조건에 놓여있었음을 의미한다. “공포가 전적으로 포위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시선은 단거리의 짧게, 지속되는 시선이었다.(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앞의 책. 47.)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약 일주일간 산골 마을 골짜기에서 일어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원작 소설은 빠른 호흡의 단편이나, 만화로 변용되며 사건의 재현에 시각화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져 사건을 보다 다각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수백 명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학살당하는 현장에서 골짜기의 풍경이나 얼굴을 제외한 인물의 디테일은 선택적으로 생략되거나 어둠에 덮인다. 공포 속, 총을 든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의 가시거리는 지척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학살 당하는 민초의 낯낯이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때는 총성과 함께 화약이 폭발하면서 뿜는 불빛이 그들의 면면에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내는 순간이다.(박건웅. 앞의 책. 88.)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절체절명의 순간의 명도와 심도를 재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둠으로 사건의 실재성을 확보한다. 독자가 사건의 현장을 전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학살이 완료된 후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62-63

  지척만 알아볼 수 있는 가시거리, 그 암흑 속에서 가해자는 개별성을 지운다. 시간적 배경이 낮으로 바뀌어도 볼 수 없는 가해자의 얼굴은 전짓불(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에 등장하는 전짓불을 의미하였다.) 뒤에 숨은 국가권력을 의미한다. 손발에 철사가 묶이고 총구가 들이밀어진 절명의 현장에서 전짓불 뒤의 제복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그의 인간성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에서 루돌프 회스가-그의 육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을 저지르고 있음이 갑작스러운 구토로 표상되듯이, 학살 현장에서 총을 쏘던 제복중 하나가 갑자기 토악질을 하며 실성하고 나서야, ‘이목구비 위치가 뒤죽박죽이 된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잃어버린 인간성을 겨우 증언할 뿐이다.

  가해자의 얼굴이 총구 뒤로 숨음으로써 인간성을 지운다면, 피해자의 인간성은 다른 방향으로 상실된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인용한 시몬느 베이유의 에세이의 한 구절-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뒤바꿔 버리기 때문에 잘못된 것(수전 손택. 앞의 책. 30. 구제적인 내용은 원문 참고.) - 그 말 그대로, 학살의 과정 속에서 피해자들은 바가지, 호박, 수박, , 돼지, 굴비와 같은 것들로 치환되며 인간이라는 존재성을 잃는다. 이처럼 사건의 재현은 손상된 육체가 주는 충격, 그뿐이 아닌 폭력의 본질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재현의 윤리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아닌 것으로 치환되어 학살당한 육신은 초여름의 더위에 빠르게 부패한다. 벌레와 버섯, 짐승들-생령들이 찾아와 사건의 증거를 후멸(朽滅) 하는데 박차를 가한다. 며칠이 지나서야 한 노파와 며느리가 현장을 찾아와 목놓아 울고는 그 지옥도를 헤매며 시신을 찾는데, 이것은 망자의 존엄을 찾는 제례 행위임과 동시에 사건을 잊히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으로도 읽힌다. 학살은 기존 정체성을 파괴하고 기억을 말살하는 극단적 수단으로 작용(태지호. 기억문화 연구.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 79.)하므로, 주검이 생령에 의해 분해되는 것은 유일한 사건의 증거인 육신마저 사라지면 기억조차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225-226쪽의 도상화된 생령들은 노파에 의해 모두 쫓겨나고(247), 그럼으로써 사건은 비로소 기억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225, 226, 247.

흔적과 침묵하는 얼굴들

  <그해 봄>사법 살인이라고도 불리는, 19752차 인혁당 사건을 다룬다. 사건의 피해자인 인혁당 사형수 8명의 이야기가 각 한 챕터를 이루는 구조다. 1975년 사형 집행일이 프롤로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이 에필로그로 배치되면서 형식은 명백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해 봄>은 그때로부터 지금, 민주주의는 얼마나 진보했는지 묻는다. 이것은 매일, 매월, 매년 시대적으로 유효한 질문이다.

  역사적 사건은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들이 사망했거나, 차마 사건을 증언할 수 없는 경우 대리 발화자를 통해 이야기된다. 오카 마리는 언어로 명료하게 말해질 수 없는 사건의 폭력에 대해 우리가 가진 언어의 윤곽 속에 완전히 담기지 않은 채 넘쳐흐르는 사건의 조각-말해지지 않은 사건의 잉여 부분-이 잘려나간 부분에 많이 있으며, 언어가 현실에 대해 본질적으로 어긋남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였다.(오카 마리. 앞의 책. 32-33.) 사료와 언어로 채워지지 못하는 부분, 그러나 폭력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말해지지 못하지만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이 흔적들은 어떻게 재현되어야 할까. 구술 기록 활동가들은 구술자의 말을 매끈한 말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다.(이호연 외.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 코난북스, 2021.166p) 화제의 순서, 단어 사이의 침묵, 미세한 표정 변화, 시선의 방향과 같은 것들이 사건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남기는 흔적으로 드러난다. ‘매끈한 말이 되는 순간, 사건은 언어화될 수 있는 표층으로만 남고 언어화될 수 없는 트라우마와 기억은 사건에서 삭제되고 만다.

  다시 재현의 불가능성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 보면, 사건의 재현 불가능성은 두 가지 난관을 배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당사자 아님의 문제, 두 번째는 폭력과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음의 문제다. 이를 바탕으로 실재 사건과 재현물에는 2번의 균열이 발생한다. 당사자의 사건의 기억과 언어화될 수 없는 트라우마의 진술 사이에서 첫 번째 균열이, 트라우마의 발화와 대리 발화자의 자기화를 통한 재현물 사이에서 두 번째 균열이 발생한다. 이러한 균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때, 증언은 사건 그 자체를 반영한다고 믿는 관점은 증언의 물신화를 초래한다. 결국 재현의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재현의 윤리란 이러한 균열과 흔적들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심한 흔적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태도일 것이다.

  균열을 내보이는 일은 결국 사건과 재현물 사이의 거리, 결코 겹쳐질 수 없는 타자와 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거리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는 탈맥락화를 통해 소격효과를 의도하는 연출이 배치되기도 하는데, <바시르와 왈츠를>(2008)에서 애니메이션에서 실제 학살의 참상을 담은 자료 영상으로 전환되는 장면(아리 폴만. (2008). 바시르와 왈츠를[영화]. 01:21:43부터.)이 예시가 될 수 있다. 실제 참상을 담은 영상으로 화면이 전환되며 독자는 허구(재현)에서 실재라는 존재론적 층위의 낙차를 맞닥뜨린다. <그해 봄>에서는 여정남의 실제 상고이유서가 삽입된 장면이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박건웅. 그해 봄. 보리, 2018. 287-288.) 독자(관객)는 탈맥락화를 통해 그가 읽()고 있는 것이 재현물이며, 재현과 실재 사이에는 균열이 있음을 환기한다. ‘재현이라는 기표가 지시하는 것은 타인이 경험한 사건이라는 기의이지만, 기표가 기의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해 봄>은 인혁당 사형수가 직접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가족, 동료 등 주변인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한다. 사형수 8명의 이야기가 담긴 본 챕터는 구술 모자이크 형식으로 이루어져, 인혁당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또 사건이 가족과 주변인에게 평생에 걸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복합적으로 서술한다. <그해 봄>은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된 만화이며, 증언이 만화와 함께 구술 모자이크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증언을 듣고 있는 기록자’, 또는 작가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저작 <아리랑>, <어느 혁명가의 삶>에서는 등장인물 본인의 생애사를 들려주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초반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등장한 후, 시점이 바뀌어 인터뷰이가 서술자가 된다. 반면 아트 슈피겔만의 <>와 김금숙의 <>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를 동등하게 위치시키며, 작품의 주된 소재는 인터뷰이의 회고가 되지만, 주요 서술자는 인터뷰어다. 후자의 서술 방식은 증언의 절대성을 경계하며,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포스트메모리 시대의 증언의 다음 세대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이는 사건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뿐 아니라, 기억이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승되며 다음 세대가 어떤 식으로 기억을 주체적으로 구성하는지에도 초점을 두는 서술 방식이다.

  그러나 <그해 봄>은 사건의 핵심 피해자(인혁당 사형수)나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서술자가 되지도 않고, 작중 인터뷰어-기록자가 등장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록자가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는 직접적으로 증언의 청자이자 기록자의 위치로 설정된다. <그해 봄>은 증언이라는 행위에 무게를 둔다. 답변만이 계속되는 증언의 현장에서 독자는 사건의 증인 앞에 마주 앉아야만 한다.

<그해 봄> 180-181.

  <그해 봄>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절망과 슬픔의 침묵을 칸이 채우고, 못다 한 이야기를 말줄임표로 표현하는 대신 상상력이 그리움의 빈자리를 채운다. 기록자가 작중 등장인물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어-독자는 기록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인터뷰어는 증언 앞에서 압도적인 무력감에 놓인다.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은 사회와 분유(分有) 될 수 없고, 결국 추모와 기억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고통은 파괴되지 않은 가족의 상상으로 반복적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메타포는 <악마의 일기><황금동 사람들>에서도 드러난다.

  사건의 흔적은 신체의 훼손을 전시하는 것이 아닌, 유가족에게 평생에 걸쳐 남은 낙인과 괴로움으로 이야기된다. 언어화되지 못한 상처는 서사와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들의 얼굴은 지워져있다. 연좌제로 삼십여 년간 고통 속에 살아온 탓에, 개별성을 지우지 않고서는 증언이 불가능한 탓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일부 등장인물은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만 다수는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다. 독재 권력의 수족인 당시의 경찰과 형사들 또한 이목구비가 비어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어떤 도덕적인 판단 없이 체제에 복종함으로써 스스로의 개별성을 삭제했기 때문으로 해석 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자만이 <그해 봄>에서 떳떳이 얼굴을 가질 수 있다. 그의 얼굴(의 이미지)은 타인의 현현이라기보다는 무소불위의 메타포이거나, 일종의 도상으로 기능한다.

  유가족은 고통과 슬픔을 증언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표정은 읽을 수 없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은 표정으로 직접적으로 그려지는 대신, 언어화될 수 없는 폭력에 절망하는 신체로 드러난다. 허공을 안는 몸짓(79), 사형 집행 소식을 듣고 아래로 낙하하는 신체(139), 유가족의 삶도 떠난 이의 그것과 다름없음이, 관에 들어가서 오열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장면(180), 사건 후의 험난한 삶을 의미하는 주름진 손(191)……. 그들의 희미한 얼굴은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28, 365).

<그해 봄> 78-79p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은 얼굴을 통해 현현한다. 그는 낯선 이,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이다. “다른 모든 사람과 결속되어있는 타자, 그의 얼굴을 통해 우리는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 타자와 동등한 사람이 된다.”(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2022. 134-140p)

  <그해 봄>은 상상하도록 요구한다. 증언의 행간에서, 휴지(休止)에서, 실루엣에서 타자의 얼굴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나와 같은 존재이지만, 내가 결코 될 수도, 알 수도 없는 타자를 상상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건의 흔적을 회상하는 타자를 마주 보고 내가 스스로 질문하도록 요청한다. <그해 봄>의 재현의 윤리는 그렇게 작동한다.

미완의 서사

  2019년 일본구 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에서 진행한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에서는 위안부생존자가 소녀할머니로 표상되는 것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한 문제들이 삭제되고 있음을 우려한 바 있다.(웹진 <> 편집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 <2>-‘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 2019319, https://kyeol.kr/ko/node/153)소녀할머니의 세월 동안의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를 지금, 여기으로 놓아두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주체성을 실천적 차원에서 강조하기 위해 이용되는 수사(修辭) 지만, 그것이 반대로 어떤 사건을 그때, 거기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로 배격하는 것은 아닌지 숙고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구축되는 정체성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기억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며 분유되어, 집단의 정체성을 일정한 양상으로 구축한다. 따라서 기억의 재현 방식은 단순한 기억의 반영이 아니라, 기억을 바라보는 정치·사회적 관점을 의미한다. 공중이 소집단화되면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정체성의 기반 역시도 분열한다. 이것은 사회의 다원성 차원의 논의가 아니라, 공동체의 해체와 관련된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웹과 SNS,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공중을 각자의 관심사에만 몰두하게 만들며, “공동의 의제영역을 점점 줄이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좋아하는 것만 더 좋아하고 공유하고 있으며, 모르는 것, 새로운-“오히려 더 학습하고 찾아봐야 하는”-것은 덜 공유하며 이제 배우려는 의지도 없게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빌 코바치, 톰 로젠스틸.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한국언론진흥재단, 2022. 339) 이렇게 공중이 분열되어 소집단화되는 현상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약화시킨다. 또한 소집단 내 커뮤니케이션은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아닌, 기존의 집단이 갖고 있던 가치관과 이념을 강화하는 용도로 작동한다. 이런 사회에서 기억과 애도는 개인적인 차원의 개념이 되어버리고, 기억을 통한 사회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기억 공동체는 와해된다. 더 이상 타인의 아픔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공동체-그 고통의 얼굴을 잊게 함으로써 반대급부를 얻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아마도 사건이라는 폭력을 저지른 주체일 것이다.

  <그해 봄><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넘어 사건의 실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재현의 윤리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내놓는다. 화자와 시점, 동일시, 얼굴이라는 기표 등 여러 관점에서 살펴본 결과, 두 작품이 표방하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태도는 결국 거리 두기와 관련되어 있다.

  많은 역사적 재현물이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서술 방식으로 삼고 있다. 사건을 경험한 타인을 주체로 하는 것이 허구적 재현이라고 밝히고 서술하는 것은 사건의 경험자인 타자와 작품을 접하는 독자인 의 동일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나였다면이라는 상상에 한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허구적인 동일시는 폭력의 현장을 목도하는 사건의 당사자로서의 나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감각적 동일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사건자체보다는 이미지가 주는 충격만을 기억에 남길 수 있다.

  ‘거리 두기가 요청하는 것은 나였다면이라는 질문 이상의 지점이다. 사건의 전말과 폭력의 구조를 탐색하고, 과거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사건을 간접적으로 나의 경험으로 삼는 것 이상으로 또 다른 사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였다면이라는 질문이 의미하는, 일종의 빙의를 통한 동일시를 하지 않아도-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어도-사건은 오히려 타자의 기억이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서사화되어야 한다. 진실이 중층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진실에 접근하는 재현의 방식 또한 다성화될 필요가 있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그해 봄>이 재현의 딜레마에 응답하는 방식이 바로 거리 두기를 통해 서사적 진실을 다각도로 그리는 것이다.

  기억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과거를 현재와 결부시키는 정신적 과정(태지호. 앞의 책. 3.)이라면 상속과 경험은 실천적 수단이다. ‘지금, 여기그때, 그곳을 연결하는 고리, 기억의 공동체를 다시 그려볼 수 있는 지점은 재현의 윤리를 고민하는 서사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오카 마리에 따르면, ‘사건의 기억은 그것을 경험한 개인에게 폭력적으로 도래하여 그의 주체성을 빼앗는다.(오카 마리. 앞의 책. 69.) 반대로 재현에서 사건은 호명되는 대상이다. 현재로 호명되는 사건은 그 자체만이 호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끈다. <그해 봄>이 그리듯, 타자에게 사건은 한순간 도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시시각각 폭력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예술이 사건을 과거에서 완결된 서사로서 다룬다면, 그것은 사건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역사적인 차원에서든 재현의 윤리를 위반하는 일이 된다. ‘사건을 재현하고자 하는 작가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사건이 어떻게 전유되고 대상화되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그렇게 사건을 그때의 일로 간주하지 않는 작업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사건을 현재로 호명하여 역사 속에서 맥락을 부여하고, 다각도의 재현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사회망을 통해 기억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사건은 그렇게 세대를 건너 전승되면서 기억됨으로써 진정한 애도와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하더라도, ‘사건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박건웅 작가의 다음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다.

필진이미지

박근형

‘좋음’을 다정함을 담아, 적확하게 쓰고 싶습니다.

2017 디지털만화규장각 신인만화평론 공모전 가작
2018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가작
2018. 6. ~2019. 1. 디지털만화규장각 만화웹진 만화리뷰 연재
2019 한국만화박물관 소장자료 연구 필진 참여
2021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대상
2023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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