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만화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만화 속 직업이 있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맛이란 어머니의 음식이다. 그 어머니가 한 사람이 아니듯 맛 또한 어머니의 숫자만큼 많다.” 이 말을 만화로 옮기면 이렇게 바꿔 부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만화는 다양한 등장인물들로 구성되며, 만화에 등장하는 직업들도 등장인물의 수만큼 많다고. 어떤 의미에서 만화 속의 직업들은 맛보다도 더 다양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맛보지 못한 음식의 맛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맛을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화를 비롯한 창작의 영역은 아무리 현실에 기초해도 일정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존재할 법한 직업에도 조금은 비현실적이라도 몰입감을 주도록 변주를 줄 수도 있고, 아직 현실에서는 구현되지 않은 직업의 모습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화 속의 직업을 살펴보는 행위는 그저 지엽적으로 만화 속에 등장하는 각종 캐릭터들의 직업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때로는 만화를 창작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세계를 생각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창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만화 속에서 구현된 여러 가상의 직업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이 작품은 어떻게 상상이 가능했는지를 역으로 추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년 세상에 등장하는 만화가 늘어나는 만큼, 만화 속 직업의 세계도 더욱 다양해질 것은 분명하다.
흥미로운 만화, 더욱 독특한 만화 속 여러 직업들
매년 수많은 만화가 세상에 쏟아지는 와중에서 평범한 소재를 평범한 방식으로 제시하면 아무리 스토리가 좋고 연출이 훌륭하더라도 주목받기는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흥미를 가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창작자들은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연구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나날이 연구가 진행되는 소재의 한 가운데에 ‘직업’이 있다. 만화 속 캐릭터들의 직업은 그저 작중 설정을 채우는 하나의 꼬릿말에 불과할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작품 대다수의 장면을 채워나가는 주된 무대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마치 같은 밥을 먹더라도 어떤 공간에서 먹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느낌을 받기 쉬운 것처럼, 이미 수백번은 시도한 장르나 클리셰를 시도하더라도 작품을 메우는 주된 공간이나 사건이 달라지면 독특한 느낌을 주기에도 용이하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수많은 작가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직업들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간다.
△ 김상엽 작가가 올해 8월로 약 10년 간의 연재를 마친 <복원가의 집>은 ‘유물 복원가’라는 직업을 판타지의 요소와 덧붙여 낸 흥미로운 판타지 만화였다.
지난 2013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올해 8월 200화로 완결된 김상엽의 <복원가의 집>은 ‘유물 복원가’라는 직업을 다루는 작품이었다. 전국 각지에 존재하는 박물관이나 장수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처럼 유물 그 자체를 다루며 접근하는 시도는 자주는 보이지 않아도 드물지는 않지만, 유물을 ‘복원’하는 것은 그간 한국 만화에서는 물론 다른 표현물에서도 잘 보이지는 않았던 시도였다. 여기에 작품은 판타지의 요소를 덧붙여내 더욱 복합적인 흥미를 이끌어내었다. 단순히 유물을 복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매 에피소드에서 만나는 다양한 유물들과 그 유물에 깃든 무수한 존재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계속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얼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백귀야행> 등 일본에서 제법 발달한 소소한 일상 중심의 판타지·호러 장르의 만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연재된 손장원의 <달이 내린 산기슭>은 더욱 전문적인 차원의 직업인 ‘지질학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었다. 그것도 직업만 지질학일 뿐 학교를 무대로 전개되는 작품이 아니라, 직업 설정에 맞게 정말로 전국 각지의 다양한 지질학을 탐사하는 여정을 작품 전반에 제시하는 만화였다. 실제 작가가 서울대학교에서 지질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력답게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지층의 유형과 화석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작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복원가의 집>처럼 작가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직업의 세계를 다루더라도,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흥미로운 변주를 가했다. 다름 아닌 ‘지층’ 그 자체를 의인화하는 시도이다.
이는 일본에서 흔히 발견되는 대상에 대한 의인화를 통해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연출이기도 하지만, <달이 내린 산기슭>은 단순한 캐릭터 형성을 넘어 좀 더 독특한 실험을 감행했다. 지리 그 자체가 캐릭터가 되며 인간이 아닌 자연의 눈으로 각각의 지층 구조에 대한 독특한 감상을 들려주는 것은 물론, 지층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연구의 상황에 따라 존재가 생겼다가도 다시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해당 캐릭터들을 통해 담아내는, 당시로는 물론 현재도 결코 흔치 않은 시도엿다.
전직 지질학자인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이 연구한 지역에 존재하는 지층의 정령을 만나면서 작품은 본격적인 막을 올렸고, 작품이 완결될 때까지 주인공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정령과 함께 지질 답사를 다니며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리를 말할 때 각 지역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적인 요소를 빼놓을 수 없듯, 중간중간 주인공 일행이 방문하는 각 지역의 산신령이 등장하며 각각의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한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복합적인 연출까지 가미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 최훈의 <프로야구 생존기>는 제목처럼 여러 난관과 위기에 빠져있는 야구 선수 및 관계자의 이야기를 통해 색다른 시선으로 직업의 세계를 해석하는 흥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미 잘 알려졌다고 생각하는 직업도 다시 두들겨보며
물론 만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직업이 이렇듯 독특한 것은 아니다. 마치 매년 비슷비슷한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 우수수 쏟아지는 것처럼, 만화 속에 나오는 직업의 종류도 제각기 모두 다르지는 않다. 독특한 직업의 세게를 풀어내는 순간 독자에게 이 직업의 세계를 이해하고 납득시키는 문턱이 존재하는 것도 함부로 독특한 직업을 풀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설사 판타지의 세계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전사나 기사, 마법사 등처럼 판타지 게임이나 소설에서 봤던 직업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같은 장르에 속하더라도 모든 작품이 다 똑같지 않듯, 비슷한 직업의 세계를 다루더라도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는 작품은 존재한다.
다육식물 작가의 <도덕과부도>는 상당히 인상적인 방법으로 교사와 학교의 세계를 다루는 만화이다. 서울에서의 초등학교 교사 생활에 지쳐 고향인 시골에 새롭게 교사 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작품은 상당히 첨예한 시선으로 교사라는 직업의 세계, 그리고 교사를 비롯해 학생·학부모 등 학교를 이루는 여러 구성원 관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짚는 작품이었다. 학생이 자율적으로 학교의 규칙을 잘 따르게 하겠다는 명목의 새 교과서이자 새 교육 시스템 ‘도덕과부도’가 도입되었다는 설정으로 전개되는 작품은 학교를 구성하는 이들의 상호 관계를 결코 일방적인 방향의 정책으로는 풀 수 없음을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작품의 연재 자체는 2021년에 이미 끝이 났지만, 이후 불거진 소위 ‘교권 열풍’ 그리고 그와 맞물려 현재 진행중인 학생 인권 증진 정책을 폐기하려는 수순을 함께 고려하면 어떤 의미로는 미래 전개될 한국 교육 공간의 백래쉬를 미리 예언한 작품이라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프로야구 카툰>을 비롯해 ‘GM’ 시리즈, <클로저 이상용> 등 꾸준히 야구 만화를 그려온 최훈이 2020년부터 연재 중인 <프로야구 생존기>도 기존의 야구 만화와는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야구 선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대다수의 야구 만화가 한창 자라나는 고등학생, 또는 막 프로야구단에 입단하여 성장하는 선수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프로야구 생존기>는 작품의 제목처럼 언제 선수 생명이 끝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위치에 놓인 신인 선수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이미 최훈은 <클로저 이상용>에서 프로 생활은 오래 했지만 팬들조차도 쉽게 존재를 알아주지 못할 정도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 야구 선수의 이야기를 그린 바가 있지만, <프로야구 생존기>에 등장하는 이들의 상황은 그보다도 더욱 좋지 않다. 주인공은 가까스로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이루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성공은커녕 생존을 하기에도 쉽지 않은 처지이고, 주변 인물들도 하나같이 여러 사정으로 선수 은퇴의 위기에 놓여 있다. 설상가상으로 주인공 소속된 팀은 좀처럼 성적을 내지 못하는 만년 약팀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위기에 놓인 가운데 필사적으로 야구판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게 고군분투하는 작품은 여느 야구 만화나 스포츠 만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노력과는 또 다른, ‘생존을 위한 몹부림’을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오랜 시간 야구에 대한 애정을 아낌 없이 드러냈던 작가의 모습처럼, 야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빠져드는 팬만이 느낄 수 있는 ‘밑바닥 야구’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더해지며 작품은 그간 등장했던 매년 국내외에서 무수하게 등장하는 야구 만화 중에서도 가장 진한 현실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 김소희 작가의 만화 <먼지행성>은 디스토피아적 SF 세계관을 바탕으로 ‘우주 고물상’이라는 가상의 직업을 등장시키며 작품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작가 자신이 풀고자하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만들어 나갔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직업, 만화로 자유롭게 상상하다
이렇게 대다수의 만화 작품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직업, 또는 잘 알려져 있지만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직업의 여러 부분들을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만화를 비롯한 각종 표현물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작품으로서 새롭게 재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상상하면서 제시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 만화를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김소희의 SF 만화 <먼지 행성>에서는 ‘우주 고물상’이라는 직업이 등장한다. 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물상처럼 버려진 물건들을 수집하고 다시 팔아 넘기는 것이지만, ‘우주’라는 말이 붙은 것처럼 그 스케일은 현실의 고물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보다 훨씬 쓰레기가 포화된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작품은 태양계 전체의 차원에서 특정 행성을 향해 쓰레기를 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버려지는 것은 비단 각종 고물이나 쓰레기 뿐만은 아니다.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들도, 분명 게속 들여다봐야 하지만 세상이 쉽게 버려야 할 것이라고 낙인찍은 여러 개념들도, 그리고 아직 한창 성장할 나이의 아이도 이 행성에 모여든다. 작품은 쉽게 사물도, 사람도 버려지는 세태를 어두운 세계관의 SF 배경을 무대로 하며 하나의 그럴듯한 세계를 만들고, 다시 그 안에서 등장인물 저마다의 무게를 지닌 드라마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의 중심에는 작가가 새롭게 구상한 직업이 있다. 어떤 의미로는 작품의 세계를 더욱 설득력과 핍진성을 만들기 위해 유기적으로 현실의 직업을 토대로 새로운 직업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밖에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직업들을 새로이 생각하면서 현실의 세계와는 또 다른 새로운 흥미를 만들어 내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yami 작가의 웹툰 <공긔 엇더하니잇고>가 ‘공기놀이’가 무척이나 치열한 배틀 스포츠가 된 세계를 배경으로 공기놀이 동아리를 주 무대로 경기에 나서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통해서 독특한 느낌의 학원청춘 만화를 만들어 내고, 마사토끼 글, 김윤경 그림의 <흉기의 발명>이 조선 시대에 ‘프로파일러’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어땠을지를 상상하며 시대극과 추리만화를 흥미롭게 녹여냈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만화 속 다양한 직업의 존재, 그리고 그 직업들을 풀어내는 방식은 독자에게는 그간 몰랐던 세계를 새롭게 접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구가, 작가에게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탐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독자에게 제시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시간이 된다면 그간 여러 만화들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직업들을 다시금 반추하며 읽으면 어떨까. 만화 속의 직업 같은 여러 부가적인 설정이 어떻게 작품 내에서 성립되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작품의 흐름을 돕거나 메시지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도 또 다른 흥미를 가져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