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수상작(대상)
만화 대신 만와
1. “만와그려오”
김급양이 그리는 것은 만화가 아니라 만와다. 만화가가 아니라 만와가인 그는, 공군 시절 급양병으로 근무했던 경험에서 딴 ‘급양’이라는 필명에 자신의 성을 붙여 ‘김급양’이라는 이름으로 인스타그램에서 만와를 연재한다. 누군가는 그의 만와를 이제는 익숙한 장르가 된, 그리고 무엇보다 인스타툰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일상툰의 하나로 여길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만와는 많은 부분에서 일상툰과 공통점을 갖는다. 극도로 단순하고 귀여운 그림체라든지, 일상적인 소재를 활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상툰이 대체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만화로 풀어내며 공감을 얻는 것에 반해, 급양만와는 일상의 소재를 활용하지만 기발하거나 엉뚱한 상상력으로 웃음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일상툰과는 차이를 갖는다. 즉, 그의 만와는 일상에서 출발하지만, 일상이 아닌 상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러한 점에서 급양만와는 오히려 병맛 만화의 성격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병맛 만화 또는 B급 만화로 불리는 이 장르는 이말년 작가와 조석 작가, 귀귀 작가 등을 중심으로 201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장르다. 병맛 만화의 주된 특징은 조악한 그림체와 찰진 ‘드립력’으로 꼽히는데, 이를 위해 종종 욕설이나 폭력 등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급양만와에서는 재미를 위해서 폭력이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엉뚱함과 기발함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급양만와의 유머는, 차라리 한동안 유행처럼 번지던 ‘안온, 다정, 무해’의 영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악한 그림체로 특징지어지는 병맛 만화의 작가들이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그림체를 갖는 것에 비해, 급양만와의 그림에는 그림체라고 할만한 것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체는 손쉽게 그린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손쉽게 그린 것이다. 그에 반해, 병맛 만화의 조악한 그림체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이라는 예상외의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가 아닌가? 이처럼 급양만와는 온전히 병맛 만화에 속한다고도, 온전히 일상툰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는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 심지어 그의 만와는 만화라는 분류조차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만와에 고유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그의 만와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급양만와의 그림체는 매우 간결하다. 간결하다 못해, 심지어 그림체랄 것이 (거의) 없다고 할만한 수준이다. 급양만와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손쉽게 따라 그릴 수 있는 수준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그가 그림판과 마우스를 사용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웹사이트에서 정식으로 만화를 연재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그러나 여전히 손으로 만화를 그리는 정식 연재 만화가들은 따라서 대체로 숙련된, 정교한 그림체를 갖거나 작가의 고유한 특성이 드러나는 그림체를 갖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급양만와의 그림체에는 작가의 고유성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종의 그림체 없는 그림인 그의 만와는 마치 그림판을 이용해 그린 그림의 표준인 것처럼 보인다. 즉, 누구라도 그림판과 마우스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면, 급양만와의 그것과 유사한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실제로 김급양은 인스타그램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기능을 활용해 팔로워와 소통하던 중, 한 고등학생 팔로워에게 완벽하게 그림체를 모방당한다. 해당 팔로워는 김급양을 그린 그림에 “급양 만화 고딩이 털었죠?”라는 메시지를 적어 그에게 보냈고, 김급양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받은 그림을 공개적으로 게시했다. 이 그림은 김급양의 인스타그램 하이라이트로 게시되어 있는 “무물1”에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급양만와의 그림체는 사람의 손재주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그림판과 마우스라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가깝다.
△ 그림 1 <왜 추우면 감기에 걸릴까?>편 중 일부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그래서일까? 그의 만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최소한의 특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의 만와에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인 김급양과 그의 엄마는, 각각 공군 급양병 시절에 썼던 모자와 짧은 파마머리로만 구별된다(그림 1). 이 외의 묘사는 거의 동일하며, 심지어 그마저도 최소한으로 그려져 있다─눈을 제외한 코와 입은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생략된다. 또한, 캐릭터의 형체는 최소한의 획수로만 그려지고 사건의 묘사에 필요하지 않은 배경은 당연히 생략된다. 매 컷은 상황이 아니라 사건으로 축소되고, 사건은 다시 대화로 축소된다. 심지어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독백에 가깝다. 한편, ‘신규직원’(<자꾸 소나기 오는 이유 알아냄> 편, 2024년 7월 28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이나 ‘전공책’(<시험공부를 하면 안되는 이유> 편, 2024년 6월 10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처럼 대표되는 특징을 간단히 묘사하기 어려운 경우나, ‘김자반’(<밥도둑의 충격적인 진실> 편, 2024년 6월 18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벚꽃잎은 봄이 보내는 편지야> 편, 2024년 4월 19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 또는 ‘목이버섯’(<버섯끼리는 어떤 얘기를 할까?> 편, 2024년 7월 4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처럼 몇 개의 획 만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은 경우는 스스로 자기가 무엇인지 밝히게 하거나 이름을 적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으로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다. 즉, 그는 그릴 필요가 없는 것들은 애써 그리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반드시 그려야 할 것들만 그린다.
어쩌면 이러한 특성은 그의 만와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인지도 모른다. 그의 만와는 장식적인 요소나 규범적인 질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오로지 그것의 기능에만 충실하다. 즉, 그의 만와는 “이야기 따위를 여러 장면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만화 본연의 정의에만 충실하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만화’ 검색.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425659&searchKeywordTo=3 (2024년 9월 1일 접속)) 어쩌면 지나치게 그것에만 충실하다. 그렇기에 급양만와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만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급양만와를 보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기발함과 엉뚱함에, 또는 귀여움에 감탄하며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급양만와가 재미있는 이유를 작가의 상상력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급양만와는 단순히 기발하거나 엉뚱한 발상을 통해서만, 또는 (병맛 만화가 흔히 그렇듯이) 상황의 전복을 통해서만 유머를 자아내지 않는다. 급양만와의 미학은 그것이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요소는 일절 거부하며 만화의 본연의 기능에 온전히 충실한 동시에 명시적으로 만화임을 거부하는 데에, 즉 만와임을 선언하는 데에 있다.
△ 그림 2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첫 페이지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명백하게 만화의 정의에 충실한 한편, 그것을 만화로 부르길 거부하는 급양만와의 모순적 태도는 그의 그림뿐 아니라 글에서도 드러난다. 즉, 의도적으로 맞춤법을 거부하는 그의 특유한 문체가 그것으로, “만화 그려요”가 아닌 “만와그려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그림 2). 또한, 그는 “진자”(<자꾸 소나기 오는 이유 알아냄> 편 등.), “~잔아”(<호랑이가 제 말 하면 온다고?> 편, 2024년 7월 16일, <비행기 모드 켤 때 주의사항> 편, 2024년 7월 12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 “~군아”(<호랑이가 제 말 하면 온다고?> 편 등.)와 같은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진짜’ 대신 ‘진자’, ‘잖아’ 대신 ‘잔아’, ‘구나’ 대신 ‘군아’ 같은 표현들은 있어야 할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빼거나 더하는 식으로 맞춤법을 피해 간다. 언뜻 보아 이러한 표현은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이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구나’를 ‘군아’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처럼, 단순히 편의를 위한 것이거나 모바일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써 나타난 표현이라면 ‘ㄴ’ 받침을 빼고 사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의 사용이 우연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된 것임이 분명한 이유는 맞춤법을 피해 가는 다른 사례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심각한사회문제가된다”(지하철에서 카드 찍을 때 노래 나옴?> 편, 2024년 8월 1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처럼 일부러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거나 “매미 << 얘네들”(<매미가 그만 울게 하는 방법> 편, 2024년 8월 5일. (출처: 급양만와 인스타그램, @rmqdid))처럼 주객이 전도된 듯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급양만와가 언어유희를 즐겨 활용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급양은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그것이 지닌 의미를 비틀거나 반박하곤 하는데, 주로 익숙한 속담을 반박하거나 전래 동화를 비트는 식이다. ‘가재는 게 편’이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와 같이 은유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따지고 들면서, 사실은 가재가 게에게 섭섭한 점이 많았음에도 억지로 참느라 힘들었다거나 자기에 대하여 말하는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야 하는 호랑이의 곤란함을 살피는 것이다. 또한, 간장게장이나 콩자반 등에 사용되는 밥도둑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밥을 훔친 진범을 따져보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전래 동화에도 적용되는데, 콩쥐팥쥐 이야기 속 두꺼비의 처지가 취업 사기를 당한 처지와 다름없음을 논하면서 두꺼비의 억울함을 살피거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둘러싼 도박과 승부 조작 등 거대한 암흑 세력의 존재를 가정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김급양은 한때 십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급식체’를 즐겨 활용한다. 이는 그것의 의미나 맥락과는 상관없이 모든 단어의 뒤에 ‘티비’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으로, ‘어쩔티비’라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진 급식체를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가 언어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내용 없음과 맥락의 무관함에 기대어 반복해서 사용되는 급식체는 그야말로 언어를 가지고 노는 행위의 일환이다. 그는 노트에 그린 그림들을 모아 ‘손그림티비’라는 제목을 붙여 인스타그램의 하이라이트로 고정해 두었는데, 이 그림들 각각의 제목에는 모두 ‘티비’라는 접미사가 붙어있다. 단어의 의미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 ‘티비’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출몰시키며 특유의 텅 빈 감각을 드러내듯, 그의 만와는 언어를 가지고 놀면서 특유의 유머를 구사한다. 이처럼 급양만와는 탈-문법적 표현이나 언어유희의 활용을 통해서 언어에 요구되는 규칙이나 질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언어의 본질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그것을 그것으로 기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단 하나의 속성만 가져와 취하는 급양만와의 전략은, 극도로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한편 어딘가 동시대적인 양상을 드러낸다.
2. 급양만와의 ‘만와적’ 특징에 대하여
상술했듯, 급양만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그가 의도적으로 만화임을 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만와는 만화라는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점에서 누가 봐도 명백하게 만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을 만화가 아니라 만와라고 명명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의 만와에서 ‘만와적’이라는 특성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만와적이란,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핵심을 충족하는 한편 그것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그것 내부에서 그것을 거부하며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최근 들어 비평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 아닌가? 그것에 속하는 한편 의도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그것을 비껴가려는 태도. 즉, 그것을 충족하는 동시에 내부에서 그것을 반박하려는 태도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상비평플랫폼 『마테리알』과 시를 다룬 (유사) 비평서 『미친, 사랑의 노래』를 들 수 있다. 먼저, 2022년 시작된 『마테리알』은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하며 잡지를 발간하고 도서를 출판하며, 각종 행사를 기획하는 등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내세우는 지향점이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스루패스란 “사람에게 패스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패스하는” 것을 지칭하는 축구 용어에서 가져온 것으로,(이상현, 「동시대의 동료들에게 고한다 –정경담&함연선」 『K’Arts magazine』 34호(2020년 6월). https://art.karts.ac.kr/magazine/34/artists_4.html (2024년 9월 1일 접속)) 이들의 목표가 대상(인물)의 발굴이 아닌 공간의 창출에 방점이 찍혀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이들은 함께 활동하고 대화하는 공간인 일종의 ‘플랫폼’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테리알』은 다양한 필자를 한데 모으는 데에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개서한’이라는 포맷을 활용하거나 ‘오픈스페이스’와 같은 행사를 기획함으로써 기존의 평론계에서 가시화되지 못한, 그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마테리알』의 구성원들이 모인 계기 중 하나가 기성 비평계에 대한 반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듯, 이들은 등단 제도와 비평 권력 등 기성 영화평론계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기획에서는 정형화되고 관습화된 비평계를 향해 날 선 비판을 드러내며 특정 지면이나 인물을 호명하기도 한다. 또한, 공인된 잡지에서라면 지나치게 사소하거나 사적인 것으로 치부할 법한 주제의 기사도 싣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이를테면 ‘해적질의 옹호’ 시리즈나 ‘데굴데굴 패스연습’ 시리즈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시도가 꽤나 호응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들 중 일부는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는데,(한민수의 ‘해적질의 옹호’ 시리즈는 2024년 4월에 『영화도둑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나원영의 2010년대 온라인 호러에 관한 에세이는 2022년 10월에 『대체 현실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단행본 출간이 그 자체로 성공의 증거는 아니지만 이들 책이 주제의 참신성 측면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을 얻고 있다는 점은 나름의 성과다.
한편, 2024년에 출간된 김언희의 시에 대한 (유사) 비평서인 『미친, 사랑의 노래』 또한 주목할 만한 사례다. 12명의 필자가 참여한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자신의 ‘유사 비평’이라는 정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유사 비평’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것은 “정확히 어떤 장르라 분류할 수 없는” 그들의 작업이 “특별한 ‘입단’ 절차를 필요로” 하는 “문단의 기준에서 ‘진짜’ 비평으로 취급되지는 않을 거라는 자기 인식”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이다.(이연숙, 「들어가며」, 밀사, 박수연, 변다원, 성훈, 양효실 외 7명, 『미친, 사랑의 노래』, 2024, 현실문화, 9쪽.) 일견 자조적인 듯한 이런 태도는 따라붙는 문장에서 즉시 전복된다. “그러나 한계 짓는 ‘진짜’가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유사’의 영역 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웠다. (중략) 이처럼 김언희의 시를 풀이해야 할 수수께끼로 두지 않고 일종의 상상적 공유지처럼 ‘사용’하기를 택하는 ‘유사 비평’의 과정 덕택에” 비평부터 대담까지 다양하게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연숙, 위의 글, 9쪽.) 수많은 이들이 비평이라는 기존의 분류에 부합하기 위하여, 비평가라는 이름으로 제도 내에 한 자리 - 비록 빛이 들지 않는 구석진 자리라도 - 차지하기 위하여 자신을 깎아내기에 몰두하는 동안, 이들은 “서로의 글이 가진 고유성”(이연숙, 위의 글, 9쪽.)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는 것을 선택한 셈이다. 비록 그것이 무엇도 보장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마테리알』과 『미친, 사랑의 노래』에서 기성 비평계의 구조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공통으로 관찰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등단’이라는 ‘특별한 입단 절차’가 그것에 속하게 될 이들, 즉 그들의 ‘우리’를 선별하고 구성하는 기준으로 ─의도했든 아니었든 간에─ 작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리그에 속하는 대신 새로운 장소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그들이 만드는 장소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점유되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다수가 드나드는 광장에 가깝다. 기존의 구성원보다 외부 필자들을 주축으로 움직이는 『마테리알』이나, 12명에 달하는 필자들로도 모자라 “어딘가의 수신자들에게” “먹고 쓰고 싸는”(이연숙, 위의 글, 11쪽.)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미친, 사랑의 노래』는 확실히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들은 차라리 문을 문으로 만드는 벽조차 (따라서 문 역시)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모두를 향하여 자신을 열어젖히는 것도 모자라, 이들은 작품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기존의 비평계와 모양을 달리한다. ‘스루패스로서의 비평’과 ‘유사 비평’은 모두 기존의 등단 제도가 요구하는 것처럼 작품을 엄중하고 진지하게 대하기보다는, 그것을 마음껏 ‘갖고 노는’ 과정에 주력한다. 기존의 합의된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방식대로, 따라서 정형화된 방식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대로 말이다. 따라서 이들의 비평은, ‘데굴데굴’거리며 ‘패스 연습’하듯이 글을 주고받는 과정이 될 수 있(었)고, 작품에 대한 레퍼런스를 전유하며 그것을 ‘읽는 대신 먹는’ -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이연숙, 위의 글, 10쪽.) - 과정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제도를 통하지 않고서도 존재할 수 있는, 그리고 가시화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이미 그 자체로 (새로운) 하나의 장르가 아닌가? 만와와 스루패스로서의 비평, 그리고 유사 비평이 한데 속하는 장르 말이다.
특별한 입단 절차를 두지 않으면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즉 벽과 문을 두지 않는 이 공간(장르)은 누구나 오고 갈 수 있지만 누구도 점유할 수는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거주는 언제나 일시적이며 무엇으로도 보장되지 않는다. 떠오르는 것은 이내 사그라들 것이고, 소란스레 눈에 띈 것은 곧 잠잠해질 것이다. 영원함이 허락되지 않는 이곳은 상승과 하강 운동이,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곳이다. 지속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쓰고 그려야만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먹고 싸야 하듯이 말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영원히 하나의 이름으로 분류되지 않으며, 역으로 어떠한 이름도 누구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행위’다. 즉, 비평가 또는 만화가라는 명명이 아니라, 글(비평)을 ‘쓰거나’ 만화를 ‘그리는’ 행위로써 그들은 들고 나는 자리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사실 비평가나 만화가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일종의 선별 과정을 암시한다. 글(비평)을 쓰거나 만화를 그린다고 해서 누구나 그렇게 불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명명은 분명히 행위라기보다는 이름에 의해서 자신을 정체화하며, 그것을 얻기 위한 별도의 ‘절차’가 있음을 드러낸다. 실제로 등단 제도가 목표로 하는 바는 수많은 작품 사이에서 단 한 작품, 또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단 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던가? 따라서, 비평가 또는 만화가라는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개인이 제도와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제도에 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본성상 제도와 불화하는 개인은, 또는 제도로부터 이미 추방되거나 배제된 개인은, 그리하여 제도 바깥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고 심지어 그곳에서만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이들은 어디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만화 대신 만와, 진짜 대신 유사(pseudo)가 만드는 새로운 영역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만화이면서 만와라고 선언하는 급양만와의 시도는, 비평이지만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이거나 진짜가 아닌 유사 비평이라고 자신을 규정하는 이들의 시도와 동일한 열망을 공유한다. 이들이 공유하는 열망은 이름이 아니라 행위에, 포장이 아니라 내용에, 명목이 아니라 실질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핵심.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의도적으로 기존의 분류─만화와 비평이라는 ‘장르’─를 비껴가기를 택하는 이유일 테다. 그리하여 이들은 상징계로부터 추방된, 그러나 기꺼이 그것을 반기는, 다시 말해 상징계의 질서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무엇으로 명명되길 바라는 열망이 전적으로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려는 열망은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동시대적인 열망의 일환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열망을 만화와 비평에서 관찰했다면, 이제는 더욱 확장된 영역에서 이를 살펴볼 차례다.
3. 홍철 없는 홍철 팀과 순살 아파트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제도와 질서를 향한 반감은 만화나 비평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급양만와와 유사 비평의 정 반대에서 -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 이를 드러내는 사례는 ‘홍철 없는 홍철 팀’이나 ‘순살 아파트’라는 명명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홍철 없는 홍철 팀’은 2010년에 방영된 무한도전 217회의 한 장면에서 시작되어 오늘날 밈(meme)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게임을 위해 팀을 짜는 과정에서 박명수의 마지막 선택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다.(상황은 이렇다. 게임을 위해서 박명수와 노홍철이 가위바위보를 하여 팀을 짜기로 한다. 자연스럽게 명수 팀과 홍철 팀으로 나뉘어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노홍철이 4번을 연달아 이기며 4명의 팀원을 갖게 된다. 1명의 팀원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박명수가 이기게 되고,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남아있는 1명 대신 노홍철을 선택한다. 말이 되지 않는 듯한 이 상황은 멤버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받아들여지고, 결국 노홍철이 박명수의 팀에 속하게 되면서 ‘홍철 없는 홍철팀’이 탄생하게 된다.) ‘홍철 없는 홍철 팀’이라는 팀명이 밈이 되어 수년간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탄생한 과정의 재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홍철 없는 홍철 팀’이라는 바로 그 표현에 담겨있는 모순과 역설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넣어 팀명을 짓는 이유는 그가 팀의 리더이거나 중추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철 없는 홍철 팀’처럼 팀명을 구성하는 인물이 팀에 부재하다는 사실은, 심지어 그럼에도 팀명을 계속해서 사용한다는 사실은 바로 그 팀명의 존재 이유를, 그것을 명명하는 행위를 물색없게 만든다. 즉,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핵심이 부재한 팀명이 존재할, 따라서 그렇게 명명될 필요가 무엇인가?
이러한 점에서 ‘홍철 없는 홍철 팀’은 급양만와의 ‘만와적’ 특성과 정반대에서 작동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만와적 특성이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핵심을 충족하면서 그것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홍철 없는 홍철 팀’은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핵심이 부재한데도 계속해서 그것으로 작동하며 존재하는 것의 사례다. ‘홍철 없는 홍철 팀’은 그것으로 불리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그러한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모순과 역설을 가시화하며 재미를 담보한다. 이와 유사하게 작동하는 또 다른 사례는 지난해 인천의 한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어난 붕괴 사고에서 발견된다. ‘순살 아파트’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 사고는 건물 기둥이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철근을 누락하여 지하주차장 지붕층이 붕괴한 사고다. 건설사의 조사에서 지붕층 전체 700여 곳 중 30여 곳에서 철근이 누락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처럼 광범위한 철근 누락이 가능했던 원인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 전·현직 직원들의 조직적인 유착관계와 업무 태만이 밝혀지면서 전 국민의 분노를 유발했다. 결국 이 아파트는 철거하게 되었지만,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는 이미 완공된 아파트에서도 수십 건의 철근 누락이 적발되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
‘순살 아파트’ 논란은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핵심이 부재한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것으로 존재하려는 시도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이 아니면서 그것인 체하는 시도가 결국에는 그것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기에 이른 것이다. ‘홍철 없는 홍철 팀’이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으로써 재미를 주는 요소였던 것에 비해, ‘순살 아파트’는 직접적으로 우리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충격을 배가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논란이 단지 한 번의 사고 때문에 불거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후의 조사가 밝혀냈듯, 수년에 걸쳐 불법적인 관행들이 당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을 이루는 구조에 이미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층간 소음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이 말해주듯, 이러한 구조적 결함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감지되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순살 아파트’라는 명명은 오늘날 분야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종의 경향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행위보다 이름이, 내용보다 포장이 중요할 뿐인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하는바, 이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함에도 그럴듯한 외양으로 자리를 보전하는 구조를 향한 뿌리 깊은 불신을 드러낸다. 즉, ‘순살 아파트’는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핵심이 부재한 가운데 계속해서 그것인 체하는 것, 온갖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요소만 남아 그로써 간신히 수명을 연장하는 것을 이르는 말과도 같다.
실질이 없고 명목만 남은 것의 또 다른 형상은 SNS에 만연한 봇(bot)들의 말하기에서도 발견된다. 앞선 두 사례─홍철 없는 홍철 팀과 순살 아파트─가 속이 텅 빈, 그러나 겉으로는 완전한 듯 보이는 무엇의 사례라면, 봇들의 말하기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들은 바로 그 순전한 명목성에 기대어 자신의 내용 없음을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아마도 SNS을 사용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당신이 충분히 강하다면, 내 계정을 클릭하지 마세요’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번역체의 부자연스러움을 보란 듯이 방치하며 그것을 은폐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이들의 말하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일종의 뻔뻔함이다. 즉, 이들은 그것의 목적─대부분 성적 어필인─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계가 아니라 사람인 체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여기저기에 출몰하며 기계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따라서 사용자들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다 못해 결국엔 무력감을 겪게 될 것인데, 계정을 신고하거나 차단하는 어떠한 노력도 이들 앞에서는 무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 그림 3 <테무 싹쓸이 쇼핑 & 언박싱 후기 (광고 아님)>의 일부.
총 26분 18초 길이의 영상 중 위 장면은 13분부터 13분 40초 사이에 나온다. (출처: ‘침착맨’ 유튜브)
과거에 병맛 만화 열풍을 불러일으킨 웹툰 작가였으나, 지금은 유튜버 ‘침착맨’으로 더욱 유명한 이병건은 최근 그의 유튜브 채널에 중국의 쇼핑몰 테무(TEMU)에서 의류와 잡화를 구매하고 입어보는 영상을 게시한 바 있다(그림 3). 이 영상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요인은 제품의 특이한 디자인이나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것의 극도로 조악한 품질에 있었다. 특히 그는 금색 운동화를 착용하며 “기분 나쁠 정도로 가볍다”거나, 금가루가 바닥에 떨어지고 손에 묻어나기 때문에 “걸으면 안 된다”는 등의 표현으로 웃음을 자아낸다.(침착맨, <테무 싹쓸이 쇼핑 & 언박싱 후기 (광고 아님)>, 2024년 5월 2일, 총 26분 18초, https://www.youtube.com/watch?v=KD-eOTr1Aac (2024년 9월 1일 접속)) 신고 ‘걷는’ 일이 문제가 되는 금색 운동화는 분명히 신발이지만, 그것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신발이 아니다. 이는 그것으로 기능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외양으로만 그것으로 존재하는, 소위 ‘테무 맛’이라고 불리는 특유한 감각을 적절하게 예시한다. 이러한 점에서 침착맨의 테무 쇼핑 영상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듯 보이는 대상을 명목상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기획력이 발휘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속는 셈 치고 구매해 본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속기 위해서, 그리고 바로 그 속임과 기만을 유희하기 위해서 제품을 구매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봇들의 말하기와 테무 맛이라는 감각이 드러내듯, 순전한 명목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모종의 공모 관계에 가담할 것을 요구한다. 즉, 알면서도 모른 체 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은 은밀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거듭해서 출몰하는 봇들의 댓글을 신고하고 차단하다 지쳐 결국 내버려두거나 호기심에 클릭해 보게 되듯, 착취적 조건에서 생산 및 유통될 뿐만 아니라 기준치를 초과하는 발암 물질로 범벅된 상품을 (저렴한 가격과 마케팅에 현혹되어) 결국 한번 사볼까 마음먹게 되듯 말이다. 모두가 그것의 기만성을 이미 알지만, 결국에 모두가 ‘흐린 눈’ 하게 되는 이유는 일일이 따지고 드는 일이 지나치게 소모적일뿐더러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도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용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를 불려 나가는 이들에게는 당연하게도 내용보다는 이름이, 언제나 드러날 (그리고 내세울) 이름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에 그것의 내용 없음은 모두의 흐린 눈에 기대어, 즉 모두의 모른 체를 통해서 은폐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동시대가 냉소주의와 무기력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유다.
이러한 가운데, 급양만와가 보여주는 만와적 시도들은 우리에게 냉소와 무력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 주며 새로운 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김급양의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력은 우리가 냉소와 무력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벗어나 상상으로 향할 수 있는 작은 길을 터주는 한편, 그의 그림체 없는 그림과 맞춤법 틀린 글은 그 자체로 오늘날의 사회에 만연한 뒤틀린 감각과 이중적 요구를 전면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일종의 해방적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관습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문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또는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기계 장치 - 마우스든, 디지털 펜이든 - 를 이용한 그림임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그의 만와는 그럴듯한 외양이나 무엇인 체하기에만 몰두하는 태도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는 마치 “법을 꼼꼼하게 적용시킴으로써 오히려 법의 불합리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들뢰즈의 논의를 떠오르게 하는바(질 들뢰즈, 「유머, 아이러니, 법」, 『매저키즘』, 이강훈 옮김, 인간사랑, 2007, 105쪽.),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급양만와가 단순히 일회성의 재미를 넘어 모종의 쾌감을 선사하는 이유일 테다. 즉, 그의 만와를 보는 즐거움은 단지 일상적 소재나 상황의 전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삶의 본질적인 조건에 대한, 무엇보다 그것의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성격에 대한 통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만화 또한 ‘K’라는 접두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만화야말로 ‘K’라는 접두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K-웹툰의 글로벌 진출이 문화 콘텐츠 강국이라는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수출 경쟁력을 제고할 수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각광받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화가 산업이라는 명명 하에 거대한 시스템으로 포획된 오늘날의 상황을 고려할 때, 만화에 충실한 동시에 만화가 아님을 선언하는, 즉 만화이지만 만화라는 명명을 거부하고 만와로서 자신을 새로이 규정하는 급양만와의 시도는 그래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