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만화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
띠리릭-
다양성만화 제작지원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와중에 다양성만화에 대한 글 의뢰가 들어왔다. 현재 직접적인 수혜작가로써 사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막상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은 상태라 어떻게 무슨 글을 써야할까 망설여졌다.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고민하기에는 전문적이지도 않고 전체적인 판을 잘 보지 못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하게 써달라는 요청에 주저 없이 내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써보고자 한다.
일단 다양성만화 제작지원사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의문을 가져보았는데 첫 시작은 1998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주관했던 창작만화 제작지원사업에서 사업의 형태가 정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이전에도 만화지원사업의 형태는 장르별로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주로 완성작에 한해서 상금이 주어지는 경향이 많았고 만화제작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변화한 사업이 그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엔 단편으로만 시작되었으나 2회부터는 장편까지 추가되었고 나는 운 좋게도 1999년 제작지원공모에 장편 지원작으로 선정되어 700만원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총 지원금은 1,000만원이었으나 300만원은 프랑스 앙굴렘만화페스티발 참가경비로 주어졌다. 덕분에 일본망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만화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의 내 상황을 회고해 보면 미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려보고자 준비했던 시기였다. 사실 만화를 선택한 건 단순했다.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군대에서 틈틈히 시나리오와 콘티를 다듬어 제대할 때 가지고 나온 노트에서 시작되었다. 군대 내 무수한 검열과정에서 상급자에게 빼앗기기도 하고 땅속에 묻어두기도 하며 숨기고 지켜온 이야기였는데 한국전쟁 중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역사를 토대로 만든 이야기였다. 이걸 막상 회화작업으로 그리고자 하니 회화는 이야기를 하나로 압축된 형식이었고 또 이것을 연작으로 그리려고 하니 왁구와 물감등 재료비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들어갈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보려는 생각에서 영화아카데미라는 곳에 한번 가볼까도 고민했고 단편영화 제작현장에도 보조로 참여하며 영화판에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도 함께하는 현장의 작업이기 때문에 과연 내가 이 수많은 스탭들을 이끌고 수억의 자금을 조달하며 무사히 작업을 마칠 수 있을까하며 회의감이 들었다. 내 성격상 온전히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작업, 그래서 나만 책임질 수 있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보던 중 아트슈필겔만의 <쥐>라는 책을 보았다, 유태인을 쥐로, 나치를 고양이로 묘사한 아버지 블라덱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든 자전적인 이야기였다. 무거운 주제의 역사적 사건을 이렇게 진중하면서도 사실감있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을 하며 그 자리에서 책을 집어들고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그래픽노블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작가주의 만화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날 홍대거리를 정처없이 돌고 돌아 결국 돌아온 건 내 책상 위였고 나는 익숙한 붓대신 본격적으로 펜을 잡게 되었다. 처음 만화용지에 채색을 하니 종이가 찢겨지기도 하고 여러 시행착오 끝에 건축학과에서 용지로 쓰이는 제도지를 선택하여 한 2년 동안 300페이지의 원고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더디고 지루했지만 참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어느 작가에게나 시련의 시간 배고프고 가난했던 때가 있었다고 고백하지만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나마 나에게 운이 좋았던 건 작업실은 취미미술화실 한 켠에 작은 방을 마련하여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당시 IMF시기에 퇴사자분들이 생업으로 차린 가게의 인테리어를 위해 비교적 싼 벽화의뢰가 많이 들어와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하곤 하였다. 보통 20일간 가게에 벽화 그리는 일을 하면 그 수입으로 2-3개월을 만화 작업하는 방식으로 이어갔는데 한번은 지방의 조폭형님들이 개업하는 나이트클럽벽화도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생계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문제는 중간에 끊긴 작업흐름을 다시 회복시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그때 지원사업으로 선정이 된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과연 내가 이 만화를 끝낼 수가 있을까 하며 회의감이 들던 시기에 벽화 일은 잠시 접어두고 오로지 만화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지원금 700만원 중 절반 350만원은 저금을 하였고 나머지 350만원으로 일 년을 버틸 계획을 세웠다. 한 달에 30만원의 생활비로 살아갔다. 빠듯하기도 한 경비였지만 나에겐 큰돈이었다.그렇게 총 1,000페이지라는 일 년간의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2000년 <꽃>이라는 첫 단행본 책이 출간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한정 희귀본이 되었지만 <꽃>은 운이 좋게 2006년 프랑스 카스테르망출판사에서 출간되기도 하였다.
만약 제작지원사업이 없었다면 나는 다른 일을 통해서 번 돈으로 생계와 제작을 이어갔을 것이고 제작시간이 더 길어졌다면 어쩌면 중도에 포기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작지원사업은 나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다.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었던 한국현대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려보자라는 구상을 세상이 인정해준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그 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지원사업은 사라졌지만 2011년 개관한 부천만화영상진흥원이 만화지원사업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좀 더 세밀하게 다듬어져 지금의 다양성만화제작지원사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10여년간 지속된 다양성만화제작지원사업 덕분에 나의 만화 <그해 봄>, <악마의 일기>, <황금동사람>들이 세상에 나올 수가 있었다.
다양성이라는 의미가 가지고 있는 우리 시대의 화두는 명백하다. 과거에 비해 갈수록 다양성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에 다양성이라는 명제가 들어간 것이 역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이 희박함을 반증한다. 이는 비단 만화만의 문제는 아니며 문화 전반의 고민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인만큼 상품성과 오락성 시장성을 추구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도 존중한다는 견해를 우선 밝히며 다만 그에 비해 작가들이 하고 싶은 작품들의 색깔은 갈수록 획일화되고 개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하고 싶다.
흔히들 다양성을 추구하는 작품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다양성만화가 비주류에 속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미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란 출신의 프랑스만화작가 마르잔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에 대한 일화를 들어보면 그녀는 이란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중 이란에 대해 왜곡된 사실들에 대해 진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자 자전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안에는 문명의 충돌, 이란의 현대사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서사에 대한 이야기가 풍자적으로 때론 진중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2003년 책으로 출판된 후 프랑스 전역의 문화상품으로 1위를 차지했고,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타임지 선정 2003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다. 또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라소시아송이라는 독립출판사를 큰 출판사로 성장시키며 작가주의 만화가 비주류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책이 시장에서 이토록 성공하리라는 예측은 누구도 하지 않았지만 다양성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망은 실제보다 더 많은 수요를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줬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취향들은 제 각각이며 다양성은 인간의 본질이다. 사실상 예측가능한 상품은 없다. 성공한 모델을 모방하고 흥행공식을 따라가는 경우보다 독특한 발상과 시대를 앞서가는 컨텐츠만이 대중의 갈증을 해소한다고 생각한다.
80-90년대 아시아문화를 이끌었던 홍콩영화는 왜 사라졌을까?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대적 상황도 있었겠지만 아시아영화에 중심이었던 홍콩영화가 어느새 획일화된 소재의 재탕으로 스스로 몰락해간 과정에 기인한다고 평가한다.
미국의 선댄스영화제는 자유롭게 사고하는 인디영화의 축제로 알려져 있다. 매년 기발한 상상력과 연출의 표현들이 영화시장에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 자유롭게 창작한 영화들이 획일화된 상업영화시장을 형성하는 미국영화계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을 주는 것이다.
봉준호감독은 수상소감에서 “우리는 영화라는 인류 공통의 언어를 쓰고 있다”라고 발언했다.만화역시 세계 공통에 언어라고 생각한다. 만화의 상상력을 통해 인류가 서로의 문화와 삶을 깊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매체라고 본다. 그러기에 만화역시 문화 다양성의 한축으로 바라보아야한다.
그러나 2025년을 바라보는 한국만화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아보인다. 웹툰시장은 크게 성장하는 반면 새로운 표현과 소재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줄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분방한 청년작가들의 표현력이 웹툰 플랫폼에 맞춰지고 재단되어져 시장에서 요구하는 획일화된 캐릭터와 스토리의 전개가 이어지고 있다. 2차 판권을 목표로 기획되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원소스멀티유즈라는 단어가 만화계를 휩쓴 적이 있었다 하나의 원천소스로 여러 가지로 만든다라는 뜻으로 한때는 모든 만화지원사업들이 그 이름에 맞추어 지원의 성격을 규정했었다. 그러나 정작 쏟아진 원소스멀티유즈지원작이라는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전혀 멀티유즈로 되기에는 그 내용이 진부하고 뻔한 작품들 위주였다. 결국 독창성을 상실한 작품은 생명력이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면 위에 보이는 섬은 그 밑에 단단한 암석으로 지탱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대중문화란 그 밑에 단단하고 넓은 문화다양성이 존재하여야 비로소 튼튼하고 아름다운 섬을 만들 수가 있다.
문화예술이란 1등 2등 경쟁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누가 1등을 하면 전부 다 그걸 따라하는 세상이 아니다.
한 종류의 꽃만 전시하면서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것이 아닌 이름 없는 작은 들꽃과 수많은 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해나가는 것이 한나라의 문화척도라고 생각한다.
매년 이 사업을 통해 수십 종의 다양성 컨텐츠들이 만들어지고 만화생태계를 보다 다양하고 넓게 풍성화시킨다. 그리고 획일화된 만화시장에 신선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마영신작가의<엄마들> 김금숙작가의<풀>이 만화계의 오스카라는 하비상을 수상했다. 다양성만화가 한국을 넘어서 만화라는 언어를 쓰는 세계의 다양한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양성제작지원사업이 없었다면 이 수많은 작품들이 기획단계에서 사라져 세상의 독자들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컨텐츠가 얼마나 팔렸는가 얼마나 성공했는가에 대한 평가보다는 얼마나 다양한 독자들의 마음을 충족시켜주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AI시대를 맞이하여 크리에이터직업은 가장 오래 살아남을 직업이겠다라고 자신한 게 불과 2년 전 일인데 오히려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컨텐츠산업에 도입되고 있다. 그러기에 기능적인 면이 아니라 작가의 개성과 독특한 발상이 더욱 더 소중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예전 구석진 화실책상에서 만화를 그리던 그 시절들을 추억한다.
만화를 함께 시작했던 동료작가들 중 몇몇은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만화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그들이 나에게 술자리에서 해주었던 작업이야기들은 참 신선하고 획기적인 구조의 상상력들이었다. 그 독창적인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흩어진 낙서장 안에 혹은 컴퓨터 안 파일에서 맴돌고 있을까?
그 당시 잘 때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내가 언제까지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다음 작품은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었다. 다양성제작지원사업은 그런 고민을 하는 작가들에 대한 해답이었다.
어디선가 다양성만화제작지원사업의 폐지 소식이 들려온다. 부디 10년간 이어져왔던 한국만화의 확장이 멈춰지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