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화>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로 시작할 말은 안 하는 게 좋다고 하는데, 어떻게 써도 이 글이 그런 글이 될 것 같아 시작부터 눈치를 좀 보게 된다. ‘만화 비평지 <지금, 만화>의 발전을 위한 제언’이라는 주제로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발전’과 ‘제언’ 같은 단어가 붙으면 어떻게 해도 아쉬운 소리가 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럼에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면… 그동안 아껴뒀던 미움받을 용기를 바로 여기서 써야 할 것 같다.
농담처럼, 그리고 남의 일처럼 서두를 시작했지만, 사실은 나부터가 이 고민을 책임져야 할 입장이긴 하다. 나 역시 몇 년째 <지금, 만화>에 기고해 왔고, 올해 2024년에는 22호 ‘어린이+만화’ 편의 기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말은 <지금, 만화>의 독자이자 필자, 전 기획위원이라는 관여도 높은 관계자로서 남기는 것이며, 결국 '우리'가 책임지고 개선할 방향을 고민하려는 글임을 밝힌다. 그러니 기분 나빠하셨다면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하겠습니다.
'편집장의 글'을 통한 예각화된 주제 의식과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
내가 참여했던 22호는 마침 <지금, 만화>가 약간의 개편을 맞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께 의견을 나눠 작게나마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추가한 것이 '편집장의 글'이었다.
개인적으로 잡지를 읽을 때 가장 즐겁게, 또 중요하게 읽는 부분이 잡지의 맨 앞에 실린 편집장의 글이다. 이 코너야말로 목차보다도 성능이 뛰어난, 잡지의 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어떠한 맥락에서 커버스토리의 주제를 정했고, 그에 맞춰 각각의 원고들이 어떤 관점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안내해 주는 것이 편집장의 글이다. 말하자면 각 원고의 좌표를 설정해 독자가 길을 잃지 않게 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결국 잡지 자체의 좌표를 설정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온갖 이슈가 빠르게 쏟아지고 각기 다른 관점이 충돌하고 분화하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 잡지가 왜 이 시점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그 사안에 대해 최소한 어떤 전제들을 공유하는지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지금, 만화>의 경우 선정하는 주제가 늘 꽤 넓은 편이라 생각해 왔다. '로맨스', '역사', 'IT' 등 일반명사의 형태로 굉장히 넓은 범주의 논의 거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하게 관점과 입장을 드러내는 주제라기보다는 뭉툭한 소재에 가깝고, 이처럼 제시된 키워드만 가지고는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실제로 수록된 글들 간의 전제나 입장도 엇갈리거나 상충할 때가 많다.
수록 원고 간의 입장차이야 자연스러운 일이고, 독자에게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줘 다각도의 논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 기능한다면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충분히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채 제공된 키워드만으로는 시의성을 느끼기도 어렵다. 해당 사안에 관해 역사를 훑는 글이 <지금, 만화>에 꼭 한 번씩은 등장하는데, 역사는 언제나 유의미한 만큼 언제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에 때로는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개 잡지를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는 바로 지금만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잡지 제목이 '지금, 만화'이니 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일반 명사를 활용해 키워드로 주제를 제시하는 방식을 바꿀 것이 아니라면(사실 바꾸더라도), 편집장의 글은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지금' 왜 하필 이런 주제를 선정했는지, 왜 그 주제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이것은 관심 없는 독자를 향한 설득이기도 하다. 잡지는 결국 말을 거는 작업이자 때로는 싸움을 거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편집장의 글은 화두를 던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 추가된 것을 반갑게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자면 이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주제 선정의 맥락을 충분히 예각화 해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쉽고, 각 원고의 좌표를 설정해주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 만화>는 커버스토리의 범주가 상당히 넓은데, '커버스토리' 코너뿐만 아니라 '크리틱' 코너 역시 커버스토리에 해당한다. 차이가 있다면 커버스토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 논의하는 글인 반면 크리틱은 작품을 비평하는 코너라는 점이다. 놀랍게도 이것을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처음 알았다. 수 년간 필자로 참여하면서도, 대체 왜 같은 코너가 이름만 다를까 의아해했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나의 부주의이기도 하지만, 나처럼 엉성한 독자도 많지 않을까? 잡지를 개편하며 크리틱 코너를 커버스토리 바로 뒤로 옮긴 것은 이러한 성격을 고려해서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앞서 이야기했던, 상충되는 원고들을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편집장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연재 코너를 신설하고 소통의 장을 만들면 어떨까
편집장의 글이 꼭 유지 및 보완되길 바라는 부분이라면, 개인적인 취향과 욕심으로 시도되었으면 하는 코너도 있다. 바로 '연재 코너'다. 잡지에서 흔히 보이는 정기 연재 코너가 <지금, 만화>에는 없어서 아주 조금 섭섭하다. 특정 쟁점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드는 날카롭고 딱딱한 글도 좋고, 작품과 함께 하는 일상을 에세이처럼 다루는 말랑한 글도 좋다. 여러 회차에 걸쳐 연재되는 글은 잡지의 호와 호를 잇는 느슨한 다리처럼 기능할 수 있다. 이재민 만화평론가의 지적대로 <지금, 만화>는 지원 사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1년간의 안정적인 계간지가 아닌, 6개월 단위의 격월간지에 가깝다. 잡지의 각 호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이재민, 만화 비평지 〈지금, 만화〉는 오늘, <지금, 만화> 22호, 2024, 152-160쪽)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연속성을 부여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4회 분량으로 한 해에 시작하고 끝을 볼 수 있는 형태로 운영되면 어떨지 생각해본다.
그런 맥락에서 새로 시도 된 '〈지금, 만화〉에 말하다' 코너 또한 유지 및 발전되었으면 좋겠다. 22호에 실린 이재민 만화평론가의 글은 지금까지의 <지금, 만화>를 망라해 되돌아보는 시도였고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운영 측면을 논하는 것만이 아니라 논쟁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코너다. 지난 호에서 논의했던 것을 어떻게 읽었는지,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은지, 혹은 코너를 가리지 않고 즐겁게 읽은 글이 있는지 활발히 이야기되었으면 한다.
이런 작업은 <지금, 만화>의 독자와 필자를 가시화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만화평론을 쓰다보면 심해에서 말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허공에 외친다고 표현하고 싶지만 그건 속이라도 시원해질 것 같다. 그보다 훨씬,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는 무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막막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논의가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오는 코너를 열어둠으로써 독자를 가시화하고, 연동돼 필자도 수면 위로 떠올랐으면 좋겠다. 앞서 언급한 연재글 역시도 좀 더 필자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다.
솔직히, 예뻐졌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사실은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야겠다. 정말이지 <지금, 만화>가, 꼭 좀 예뻐졌으면 좋겠다. 디자인의 측면에서 다른 잡지와 비교했을 때 결코 경쟁력을 가진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보다 저렴한 가격과 아낌없이 채워 넣은 많은 양의 원고가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지만, 가치소비가 당연해지고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과연 유의미한 경쟁력일지 의문이 든다.
이번 개편 과정에서 디자인의 변화는 많지 않았다. 다행히도 책꽂이에서 잘못 꺼내다간 찢어질 것 같은, 기능을 알 수 없는 네모난 구멍이 사라진 것만이 반가울 뿐이다. 보수적인 나의 미의식으로는, RGB(CYMK)를 가늠할 수 없는 난감한 표지색도 그대로고, 내지의 가독성도 좀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벌써 수 년째 <지금, 만화>를 접하면서 이제는 나도 이 투박한 디자인에 정이 들 지경인데, 만화평론의 발전을 위해 정들기 전에 디자인이 쇄신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화평론가가 된 것은, 사실 <지금, 만화> 덕분이다. 웹으로 배포되던 발간 초기에 우연히 발견했고, 거기에서 홍보하던 공모전을 통해 만화 평론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갑자기 디자인이 엉뚱하게 변해 당황스러웠지만, 처음 <지금, 만화>에 기고하던 당시의 설렘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마움도 아쉬움도 많은 이 잡지와 앞으로도 잘 해나가고 싶으니, 기분 나빠도 이 얘기를 들어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