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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마감을 만드는 사람들: 독립만화 현장의 자기주도적 창작

독립만화 창작자들은 스스로 마감을 설정하고 스터디, 워크숍, 페어 등을 통해 자발적 창작 환경을 구축하며, 전통적 출판 시스템 밖에서 공동체적 창작 문화를 실현하고 있다.

2025-06-18 김미래

스스로 마감을 만드는 사람들: 독립만화 현장의 자기주도적 창작

테즈카 선생님은 땀범벅으로, 머리끈을 동여매고, 다리를 달달 떨면서, 육체노동자처럼, 원고를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 그리셨답니다.”
— 『블랙잭 창작비화(미야자키 마사루 원작, 요시모토 코지 지음, 학산문화사, 2013)에서

완성된 만화 말고, 만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한 중간을 떠올려보라. 그 장면의 주인공은 물론 마감에 쫓기는 만화가일 테고, 그를 재촉하는 존재는 편집자, 나아가 일반 독자가 될 것이다. 주인공이 흘리는 땀, 주인공의 동여진 머리, 주인공의 떨리는 다리…… 그는 애꿎은 원고를 노려본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사랑해주는 독자를 탓할 것인가? 혹은 독자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편집자를 탓하겠는가? (실로 그가 원고를 늦게 줄수록, 출판사에 속한 일개 직원인 편집자는 며칠 치 잠 따위는 헌납해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결국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리는 것,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그리는 것이다. 실제로 마감이 가까워지는 만큼, 그의 손에는 속도가 붙고, 만화는 금방 살이 붙는다. 그리하여 마감날 혹은 마감 전일, 우리가 아는 유명한 작품들이 일단락되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쉬이 떠올릴 만하고 기꺼이 공감할 만한 가장 유명한 창작의 고통장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많은 만화가는 마감이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 원고 독촉의 고통이 아닐 때도 창작()의 고통임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와 문자메시지, 이메일, SNSDM을 보내며 독촉해오는 이가 없는 상황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누가 기다리고, 누가 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한 육체노동인데도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 머리끈을 동여매고 땀범벅이 되어서 만화를 그려보아도, 보상이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자신의 육체. 이러한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는 몸이 태업을 하고, 더 이상 머리를 동여매기를, 땀 흘리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까 것보다는 훨씬 덜 떠올리는, 덜 알려진 창작의 고통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허구를 다루는 우리들 창작자라면 마감또한 창작 가능한 법. 외부가 아닌 스스로 정한 마감이 작업의 기준이 되고, 그 결과물이 손에 들어올 때 비로소 그간의 고통은 분명한 보상이 된다.

수백만 독자가 새로고침을 누르는 웹툰 연재작가의 것만큼이나 강력한 독립만화가들의 자발적 마감의 사례를 톺아보았다. 마감이 없는 세계에서 그들은 스터디를 열고, 워크숍으로 배움을 나누며, 페어에 신작을 출품하거나 마땅한 페어가 없을 경우 직접 조직하기도 한다. 또한 만화 플랫폼이 아닌 SNS에서 연재를 약속한다. 이들의 마감은 이 세상의 모든 마감이 그렇듯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스스로를 창작주체로 가열하고, 나아가 방대하고 아득한 작업의 가장자리를 만들어 일을 끝맺도록 다그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01 스터디 및 동아리: 1인칭 단수에서 1인칭 복수로

를 자랑하기는 어렵지만 내 친구(와 나)’를 소개하는 일은 훨씬 수월하다. ‘를 채찍질하기는 어렵지만 내 친구더러 네가 창작 안 하는 건 사회적인 손실이야!”라고 다그치는 것은 더욱 쉽다.

(Quang)은 올해로 15주년을 맞는 만화창작집단이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독립만화 작가들의 스터디 모임으로, 동명의 잡지를 10호까지 발간했다. 멤버들의 색채가 다양해 한 방향으로 향하는 팀이라기보다, 각기 다른 길을 가는 동료에 가깝다. 매번 정해진 주제는 없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원고를 제출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과제(단편만화)를 끝내지 못한 멤버는 한 회차 스터디를 쉬어야 한다. 이때 생긴 공석에 예비 멤버가 들어오게 되며, 꽤 냉정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6월 교보문고 광화문점 갤러리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 15주년 전시를 앞두고 있다. 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인스타그램: @quangcomics_

만화공업단지, 만공단은 2023년 단장 목화가 내가 하고 싶은 만화를 천천히 다듬어가면서 그리고 싶다는 바람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다. 독립만화의 높은 진입장벽을 느끼며, 신인 작가도 투고하고 연재할 수 있는 커뮤니티 기반 잡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표 활동으로는 독립만화 앤솔러지 만화공업단지1, 2호가 있다. 2023년 열여덟 명의 작가로 시작된 모임은 현재 참여 작가만 서른 명 이상으로, 작업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현재 3호를 준비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mangongdan

서서코믹스는 스터디를 통해 공부해온 만화를 무작정 선보이기보다, 특정한 콘셉트를 중심으로 선보인다. 밀레니얼세대의 삶을 다룬 첫 호가 2020년 발매된 이래, 꾸준히 북페어에서 독자와 소통하고 있다. 202412월 만화서점 그래픽(GRAPHIC) 이태원점에서 한 달간 기획전 ‘Tea Party SeoSeo(티파티서서)’를 열어 30여 명 작가 자신들의 작업물은 물론, 작가 소장 희귀도서를 전시한 바 있다.
-인스타그램: @seoseocomics

디룡이코믹스는 창작집단 5인이 지렁이(느리지만 천천히 작업하자는 자신들의 모토를 '꾸물꾸물'이라 표현했다.)라는 제목으로 단편을 모은 잡지 1(2023.1), 8명이 순정만화를 추억하며 만든 2디룡이순정(2023.9), 3영화등에서 느린 열정을 드러낸다.
-인스타그램: @wormcomics

SAPA(사파)는 일러스트레이션, 애니메이션, 그림책 분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만화의 확장을 시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2020년 결성한 콜렉티브다. 매년 한 권의 책을 만들며 출간 시기에 맞추어 팝업 전시를 열어 원화 및 작업과정을 선보인다. 만화잡지를 4(2023)까지 간행했고, 5호가 나올 예정이다.
-인스타그램: @sapa_collective

선세개클럽은 세 명의 작가가 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해 마음, 관계, 연결을 떠올리며,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의 틈을 포착한 단편만화집을 첫 작업물(2024)로 내놓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1호를 함께한 세 멤버 중 한 명인 우태영의 첫 단행본 킬러의 집사(2025)“2025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서울국제도서전)으로 선정되었다.
-인스타그램: @threelineclub

02 만화페어: 직접 만드는, 살아 있는 전시장

어떤 만화축제는 단순히 구경하는 행위조차 만화하기라는 동사로 바꿔 놓는다. 창작자의 열정이 가득한 축제 한가운데 부스로 참여하는 일은 펜을 드는 것만큼이나 충만한 만화하기에 해당된다. 이런 행사들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창작자 본인이었다는 데 이 에너지의 비밀이 숨어 있다.

칸새는 독립만화 작가들이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만화 페어이다. 만화가들이 직접 나와 작품을 판매하지 않기 때문에, 빈 매대에 놓인 샘플 도서를 현장에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독특한 관람 방식이 눈에 띈다. 독자와의 대면을 부담스러워하는 창작자뿐 아니라, 구매 없이 지나치기 어려워 창작자를 직접 만나기 부끄러워하는 수용자에게도 편안한 행사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매진되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만든다. 많은 작가들이 이 페어를 위해 단편 또는 무게감 있는 신작을 발표하고, 40권 내외로 소량 생산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행사 의미를 확보한다. 현재 2(120244, 220254)까지 열렸다.
-인스타그램: @kansae_official

하고 싶은 만화전은 창작자가 원하는 만화를 직접 제작하고 유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독립만화 페어로, 만화가뿐 아니라 삐약삐약북스 같이 만화가가 차린 출판사도 참여한다. 창작자가 셀러로서 직접 부스를 지키고, 자신의 작품을 소개한다. 2021년 온라인페어로 시작된 이 행사는 2024년 오프라인으로 전환되었고, 가까운 페어는 올해 10월 말에 열린다.
-인스타그램: @hagocomix 

03 워크숍 및 교육: 과제가 곧 작품이 된다

만화창작 워크숍을 열어보면, 주최 측이 놀란다. 수강자들의 실력과 기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강제성이나, 때로는 부정적인 피드백조차 밑거름 삼아 성장하겠다는 투지와 함께, 건강한 피드백을 경험하기 위해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창작의 기술보다 시간을 함께 설계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은, 위에서 아래로의 교육보다 리드가 조력자이자 동료가 되는 워크숍의 형태에서 곧 잘 싹튼다.

표류만화교실쾅의 멤버 최재훈이 2015년부터 2025년 현재까지 11년간 꾸준히 운영해온 장수 프로그램이다. 중단기 프로그램(12주 과정)으로 진행되며, 누적 수강자가 270여 명에 이른다. 매 기수 각자 중단편 만화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교육과정 중간마다 발표와 피드백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인스타그램: @plato_q

출간목록 중 대다수가 만화/그래픽노블에 해당하는 출판사 쪽프레스의 스튜디오에서는 비정기적으로 만화 창작 워크숍이 열린다. 첫째, 쪽프레스 편집부가 주도하는 창작 워크숍은 주로 신간만화에서 얻은 모티프로 부담 없이 하나의 작품을 완결하는 데 목표를 둔다. 워크숍 기간은 분량과 난이도에 따라 1일에서 6주차까지 다양하다. 둘째, 쪽프레스에서 출간한 적이 있거나 출간을 앞둔 작가들이 리드가 되는 창작 워크숍이 있다. 만화집 여가생활(goat, 2019)의 작가 심규태의 단편만화 창작생활’, 한쪽 만화책 헤니의 시도(쪽프레스, 2020)의 작가 헤니의 이리저리 단편만화’, 한쪽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다수 작업한 이윤희의 칸 안에서 자유로워지기가 그 예다. 한편 만화를 비평하는 워크숍도 비정기적으로 열린다. 평론가 윤아랑의 아티스트스터디 ○○의 뒷모습 시리즈로, 크리스 웨어, 오카자키 교코, 쓰게 요시하루, 하기오 모토 등 만화가의 만화가로 불리는 스타일리스트들을 주로 다뤄왔다.
-인스타그램: @jjokkpress @spineseoul

 

마감을 정하는 사람과 지키는 사람의 권력 관계가 뚜렷한 전통적 출판 산업의 테두리 밖에서, 우리가 스스로 만든 마감은 시간에 쫓기는 자에서 시간과 스스로 쫓는 자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독립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이런 맥락에서 창작자가 주도하는 스터디, 워크숍, 페어는 개인의 동기 부여 장치를 넘어 창작 공동체이자 시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가는 장치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우리의 마감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래도 괜찮은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이미 출간된 것보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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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2010년 문학교과서 만드는 일로 경력을 시작했고, 해외문학 전집을 꾸리는 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총서를 기획해 선보였다. 책을 둘러싼 색다른 환경을 탐험하고 싶어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출판 분야에서 매니저로 지냈고, 현재 다양한 교실에서 글쓰기와 출판을 가르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사 아닌 곳에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편집자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방침을 만들고 따르는 일에 힘쓰면서도, 방침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레이블(쪽프레스)을 만들어 한 쪽도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낱장책을 소개한 것도, 스펙트럼오브젝트에 소속되어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창작자, 기획자, 교육자 등 복수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편집이므로 스스로를 한 우물 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