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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꺼내지 못했던, 우리 안의 ‘송이연’ : 쉰 살의 이혼녀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쉰 살에도 새로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수 있다. 세상에, 이렇게 발칙한 웹툰이라니!

2026-08-11 강정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우리 안의 ‘송이연’ : 쉰 살의 이혼녀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이렇게 발칙한 웹툰이라니

50살에 이혼녀가 된 주인공. 세 자식을 둔 엄마지만 딱히 헌신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혼자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윤리마저 저버린 중년 남성. 한 가정을 파탄 내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부끄러움 따위는 없는 내연녀. 겉은 어른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마음 한편은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어른이. 눈앞의 작은 이익 앞에서 친구가 됐다가 금세 원수가 되는 이기적인 어른들. <송이연 50살, 이혼 한 달 차>(이하 <송이연>)에는 하나같이 결핍된 인물들이 모여 있다.

물론 결핍을 가진 인물은 수많은 이야기 속에 등장해왔다. 아니, 어쩌면 결핍이야말로 ‘이야기’를 움직이는 가장 오래된 동력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송이연>은 조금 다르다. 결핍을 극복하며 멋진 인간으로 성장할 것 같은 인물보다, 자신의 결핍 때문에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의 결핍을 건드리며 서로를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발칙한 인물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발칙하다’는 “하는 짓이나 말이 매우 버릇없고 막되어 괘씸하다”는 뜻이다. <송이연>의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도 드물다. 좀처럼 어른답지 않다. 좀처럼 현명하지도 않다. 때로는 대체 왜 저러나 싶을 만큼 괘씸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떼기가 어렵다. 

세상에, 이렇게 발칙한 웹툰이라니! 


홀로서기를 위한 성장 스토리? 복장 터지는 스토리!

먼저 작품의 제목을 보자. 송이연, 50살, 이혼, 한 달 차. 이 네 개의 단어만 놓고 보면 대략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다. 쉰 살에 이혼한 여자가 뒤늦게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그런데 <송이연>은 이런 예상 가능한 성장 스토리의 범위를 자꾸만 벗어난다. 물론 인물이 변화를 겪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성장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흔히 상상해온 그런 성장은 아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꿋꿋하게 고난을 견디고, 마침내 어려움을 극복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을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다. 송이연은 외로우면 울고, 슬프면 또 울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남 탓부터 한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겨우 한 걸음 나아갔다 싶으면 다시 두 걸음쯤 뒤로 물러난다. 보고 있으면 응원보다 잔소리가 먼저 튀어나올 것 같은 주인공이다.

송이연은 50세가 되던 해 이혼한다. 스무 살에 박기호를 만나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과 외도가 반복된 결혼생활을 온전한 가정생활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혼이 송이연의 결단이었던 것도 아니다. 박기호는 열두 살 어린 내연녀 김아름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위해 송이연을 속여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게 한다. 그러니까 송이연은 자신의 삶을 되찾겠다며 당당하게 집을 나온 여자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혼을 ‘한’ 것이 아니라 이혼을 ‘당한’ 여자다. 

“내가 뭐하노. 할 줄 아는 게 하나또 없는데….”

“하고 싶은 거 해라.”

“하고 싶은 게 없는데 그럼 우짜노.”

이혼한 지 한 달, 송이연이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나이트다. 이혼하고 찾아간 곳이 고작 나이트냐는 딸의 비아냥에 송이연은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대답한다. 자유는 생겼는데 그 자유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오히려 막막하다. 


<송이연 50살, 이혼 한 달 차> 프롤로그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능숙한 것도 아니다. 동네에서 친구라고 해봐야 미용실에 모여드는 아줌마들뿐인데, 그들이 자기 뒷담화를 하는 것을 듣고도 앞에서는 제대로 한마디 하지 못한다. 친구들에게 이끌려 골프장에 갔다가 이용당하기까지 한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단 2화만에 벌어진다. 이쯤 되면 독자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얼굴 예쁜 송이연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데다 사람까지 잘 믿는 이 순진한 주인공은 앞으로도 계속 속을 것 같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025년 연재를 시작한 <송이연>은 2026년 8월 현재 2부까지 이야기를 마치고 휴재 중이다. 그 시간 동안 송이연도 물론 달라졌다. 사랑을 하고, 돈을 벌어보고,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초기에 보았던 송이연의 본질적인 성향은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사람을 쉽게 믿고, 배신당하고, 남을 탓한다. 눈앞의 작은 것에 마음을 빼앗겨 더 큰 것을 놓치는 일도 여전하다. 

그래서 <송이연>의 성장은 답답하다. 어떤 경험으로 깨달음을 얻어 이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익숙한 성장의 공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복장 터지는’ 재미인지도 모른다. 쉰 살이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 문제에서 곧바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이를 먹어도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송이연>이 보여주는 성장은 ‘극복’보다는 ‘반복’에 가깝다. 다만 그 반복 속에서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송이연은 그렇게, 속 터질 만큼 느리게 자란다.


쉰 살도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송이연은 50살이다. 물론 중년의 사랑이나 뒤늦은 새 출발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박완서는 일찍이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여성들의 삶을 소설의 중심으로 불러들였고, 마영신의 그래픽노블 <엄마들> 역시 50대 여성들의 연애와 노동,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니 쉰 살의 여자가 사랑하고 방황하고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문학이나 만화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송이연>이 놓인 곳은 ‘웹툰’이라는 공간이다. 이 점에서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웹툰은 태생부터 젊은 매체였다. 종이를 넘기는 대신 마우스 휠을 굴리고, 서점에 가는 대신 포털에 접속해 만화를 읽었다. 이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주요 독자가 됐다. 학원물과 로맨스에서 로맨스판타지로, 그리고 최근 웹툰·웹소설계를 휩쓴 회귀·빙의·환생에 이르기까지 젊은 독자의 욕망과 감각을 빠르게 포착한 이야기들이 웹툰의 중심을 차지해왔다. 그래서 웹툰의 주인공 역시 대체로 젊었다. 사랑도, 실패도, 성장도 아직 인생의 앞부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몫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다. 웹툰은 젊은 매체였지만, 웹툰의 독자가 언제까지나 젊은 것은 아니다. 

2003년 다음의 ‘만화 속 세상’이 한국 웹툰의 초기 플랫폼을 열어젖힌 때로부터 어느덧 23년이 흘렀다. 소위 ‘조석의 편돌이 시절’부터 웹툰을 보아온 독자들의 시간도 그만큼 함께 흘렀다. 20대와 30대에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 휠을 돌리며 웹툰에 빠져들었던 이들은 이제 40대와 50대가 되었다. 그 사이 웹툰을 보는 화면도 바뀌었다. 책상 한구석을 차지했던 뚱뚱한 컴퓨터 모니터는 손안에 들어오는 날씬한 스마트폰이 되었지만, 화면이 바뀌었다고 독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40대와 50대는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중년’과 같은 미디어 감각을 가진 세대가 아니다. 과거의 중년이 아침마다 종이신문을 펼치고 텔레비전 앞에서 드라마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면, 지금의 중년은 다르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고 유튜브를 보고 웹툰의 다음 화를 기다리는 일이 특별한 ‘젊은이 문화’가 아니라 이미 오래된 일상이다. 그들은 인터넷 문화의 성장과 함께 나이를 먹었고, 웹툰이라는 매체의 성장 과정도 처음부터 지켜본 독자들이다. 그러니 독자가 나이를 먹었다면, 독자가 보고 싶은 이야기의 나이도 함께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고, 첫사랑에 설레고, 취업을 걱정하고, 결혼할 사람을 찾는 이야기만으로는 이미 그 시기를 지나온 독자들의 삶을 모두 담을 수 없다. 결혼하고 난 뒤의 삶도 있고, 아이를 키우고 난 뒤의 삶도 있다.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두기도 하고, 늙어가는 부모를 돌보기도 하며, 자식이 집을 떠나기도 한다. 결혼생활이 끝날 수도 있고, 쉰 살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다. 인생은 결혼식 장면에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끝나지 않으니까.


더 없을 밑바닥의 감정, 그 솔직함의 매력

인생사 늘 봄날의 꽃길만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궁창 속의 삶이 계속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고도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고,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마음이 기우는 쪽을 선택한다. 

<송이연>의 인물들은 바로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송이연은 엄마이고 할머니이지만 때로는 가족보다 새로 만난 남자친구가 더 좋고, 자식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자신의 외로움과 욕망을 먼저 선택한다. 동네 친구들은 송이연이 잘될 때는 배 아파하고, 이용할 것이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든다. 박기호와 김아름 역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의 불행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을 모두 악인이라 부르기에는 망설여진다. 이들의 마음이 너무 낯익기 때문이다.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기 전에 질투가 먼저 드는 순간, 사랑하는 가족보다 오늘 하루만큼은 내가 더 중요했으면 하는 순간, 누군가의 불행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런 마음을 대개 드러내지 않을 뿐, 완전히 모르는 감정은 아니다. 


<송이연 50살, 이혼 한 달 차> 2부 30화 중


도시 한복판에 지어진 고급 건물 뒤에는 늘 더러운 뒷골목이 있다.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누구에게나 지저분한 감정 하나쯤은 웅크리고 있다. 그래서 이 뒷골목은 <송이연>이 들여다보는 인간의 마음과 닮아 있다. 누구에게나 남들에게 보여주는 번듯한 앞면과, 질투와 욕심, 이기심과 외로움을 숨겨둔 뒷골목이 있다. <송이연>은 굳이 그곳으로 들어가 우리가 남에게도,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꺼내놓는다.

댓글창에는 송이연을 향한 답답함이 넘쳐난다. 왜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성실하게 살아가지 않는지, 왜 사람을 쉽게 믿고, 왜 또 남자에게 기대는지 답답해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송이연의 마음을 이해하는 목소리도 있다. 평생 남편과 자식을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이 이제라도 더 좋은 옷을 입고, 돈을 벌고, 사랑받고,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까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송이연>의 묘한 매력은 바로 그 사이에 있다. ‘저렇게 살면 안 되지’라고 혀를 차면서도, ‘그래도 저 마음이 뭔지는 알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욕망까지 낯설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송이연’이라는 이름의 무게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고, 얄팍한 우정과 위태로운 사랑 사이에서 번번이 속 터지는 선택을 하는 주인공이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송이연’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5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보려는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송이연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돈을 벌어보고, 자식에게 사과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내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사람을 잘못 믿고, 때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할머니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자신의 욕망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한 사람, ‘송이연’이 된다.

그래서 이 웹툰의 제목이 <송이연>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다. 송이연, 50살, 이혼 한 달 차. 이름 뒤에는 나이가 붙고, 그 뒤에는 이혼이라는 실패처럼 보이는 사건이 따라온다. 그런데 마지막의 ‘한 달 차’라는 말은 묘하다. 쉰 살은 이미 많은 것을 지나온 나이인데, 동시에 무언가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제목은 끝난 사람의 이력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의 자기소개에 가깝다.

어쩌면 지금 웹툰에 필요한 새로운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곳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회귀하고, 빙의하고, 환생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이름 하나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웹툰이 처음 등장한 뒤 20여 년 동안 변한 것은 매체의 형식만이 아니다. 독자도 함께 변했다. 나이를 먹었고, 취향은 세분화되었으며,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도 다양해졌다. 그렇다면 웹툰 역시 더 다양한 독자를 향해 더 다양한 삶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열일곱의 첫사랑만큼 마흔의 권태가, 스물의 성장만큼 쉰의 실패와 재시작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발견하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최근 웹툰에서 발견되는 변화는 그래서 반갑다. 익숙한 장르와 성공한 서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편에서, 그동안 이야기의 바깥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하나둘 주인공의 자리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서사란 반드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발명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았던 사람의 삶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다려온 독자를 발견하는 것 역시 새로운 서사의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이연 50살, 이혼 한 달 차>는 꽤 발칙한 시작이다. 쉰 살의 이혼 여성에게도 아직 이야기가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쉰 살에도 새로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송이연들이 하나둘 자기 이름을 얻을 때, 웹툰이 품을 수 있는 독자와 이야기의 세계도 조금씩 넓어질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발칙한 웹툰이라니! 



필진이미지

강정화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만화평론가
근대 시기 문학과 미술을 통해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연구하는 동시에 웹툰과 웹소설 등 미디어 문학 비평으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새로운 문학을 탐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