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산업 동향과 전망] 버블 이후의 광포한 성숙기가 오다
요즘 일본 만화 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 웹툰이 가파른 성장세를 마치고, 시장 안에 많은 신인 작가지망생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레 바다 건너의 큰 시장에 관심을 가진다. 실제로는 어떤가?
숫자부터 말한다. 2026년 2월, 일본 출판과학연구소(日本出版科学研究所)가 2025년 만화 시장 규모를 발표했다. 서적만화와 디지털을 합쳐 6,925억 엔. 전년보다 1.7퍼센트 줄었다. 2017년 이후 8년 만의 감소세다. 서적 만화가 괴멸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14.0퍼센트 줄어 1,652억 엔, 디지털은 2.9퍼센트 늘어 5,273억 엔이었다. 디지털이 시장의 4분의 3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적만화-종이 만화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례는 바로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 잡지인 주간 《소년 점프》의 발행부수다. 과거 주간 653만부를 인쇄하면서 기네스북에 올랐던 《소년 점프》는 2026년 8월 6일자 보도에서 100만부에 미치지 못하는 98만부를 인쇄했다. 전성기의 1/6이다.
한 줄로 옮기면 이렇다. 디지털 매출 증가가 서적 만화의 감소를 더는 메우지 못했다. 오랫동안 일본 만화 시장을 떠받쳐온 공식이 처음으로 어긋났다.

그래도 디지털은 아직 성장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 만화 전체 성장률을 보자. 2020년 23.0퍼센트. 2021년 10.3퍼센트. 2022년 0.2퍼센트. 2023년 2.5퍼센트. 2024년 1.5퍼센트. 2025년 마이너스 1.7퍼센트.
두 자릿수로 치솟았다가 한 자릿수로 내려앉고, 다시 마이너스로 꺾인다.
2020년과 2021년에 급등에는 뭐가 있었나? 코로나다. 영화관과 콘서트, 이벤트가 멈추고 사람들이 집에 갇혔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 상당 부분을 만화가 차지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스고모리すごもり, “집콕” 수요라 불렀다. 그 2년 사이 만화 시장은 20퍼센트 넘게, 다시 10퍼센트 넘게 불어나 6,126억 엔에서 6,759억 엔이 됐다.
하지만 이건 일종의 ‘버블’로 봐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코로나 격리가 풀리자 수요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2022년의 0.2퍼센트 성장은 이게 버블이었다는 걸 증명한다. 이후 2, 3년의 완만한 증가는 회복이 아니라 크게 불어난 거품이 빠지는 속도였다. 지난 몇 해의 고성장은 시장의 실력이라기보다 상당 부분 코로나가 만든 거품이었다. 이게 결정적으로 증명되는 해가 바로 2025년이다.
코로나 버블 시기에 커진 숫자에 맞춰 사람과 조직이 늘어나고, 또 만들어졌다. 일본은 디지털 만화 시장의 급속한 확장을 보고 수많은 회사와 기성 회사들 내부 사업팀이 생겨났다. 성장이 이어질 것을 전제로 편집자를 뽑았고, 신작 라인을 늘렸다. 그렇게 벌려 놓은 규모는 수요가 반납되는 순간 그대로 부담으로 남는다.
물론 시장 성장세가 꺾였다고 절망하는 건 이상하다. 내일 당장 디지털 만화가 사라지거나 시장이 반토막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가파른 성장기를 지난 ‘성숙기’가 찾아온 것이다.
확장기에 맞춰 세운 몸집과 사고방식을 성숙기에 맞게 다시 짜야 한다는 뜻이다.
확장기와 성숙기를 같은 원칙과 사고방식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확장기에는 시장에 들어오는 새 독자가 성장을 이끌었다. 무엇을 내놓아도 팔리고, 물량을 늘리면 매출이 따라왔었다. 성숙기에는 새 독자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들어와 있는 독자를 두고 다투는 국면이다.
디지털 만화만 떼어 보면 둔화는 더 뚜렷하다. 성장률은 2023년 7.8퍼센트, 2024년 6.0퍼센트, 2025년 2.9퍼센트로 해마다 거의 반씩 꺾여 내려왔다. 서적 만화 감소를 메우던 디지털 동력의 힘이 빠진 것이다.
일본의 전자서점 파피레스パピレス의 아마야 미키오 天谷幹夫 사장은 2025년 8월 <전자만화 시장 붕괴의 위기(電子コミック市場崩壊の危機)>라는 글을, 일본전자출판협회 키퍼슨 메시지 코너에 기고했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시장이 커 보인 것은 상당 부분 무료와 포인트 환원 같은 판촉비가 만든 착시다. 150곳이 넘는 전자서점이 생겨서 경쟁이 너무 심한 레드오션이 되었다. 다들 손님을 끌려고 경쟁적으로 무료를 늘렸지만, 무료로 늘어난 독자는 유료로 넘어오지 않았다. 돈을 내고 읽는 유료독자의 비율은 최근 몇 년 오히려 떨어졌고, 무료로만 읽는 비율은 올랐다. 3권 무료, 5권 무료, 전권 무료는 새 독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돈을 내던 독자마저 무료로 데려갔다.
그가 든 비유는 일본 음악 시장이었다. 2000년대 CD매출이 줄어들고 2009년경 디지털 음원 시장이 910억 엔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SNS 등으로 무료 시청이 퍼지자 2013년경, 시장은 417억 엔 수준으로 반토막 났다. 그 길을, 지금 전자만화가 걷고 있다는 경고였다. 유통량의 숫자와 실제로 남는 이익은 다른 이야기다.

메가 히트작 영웅들이 사라진 공백
둔화의 원인이 수요 감소 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을 끌던 대형 연재들이 잇달아 끝났다. <귀멸의 칼날(鬼滅の刃)>이 완결된 뒤, <주술회전(呪術廻戦)>과 <괴수 8호(怪獣8号)>가 차례로 완결됐고, <체인소맨(チェインソーマン)>도 완결되었다. 이런 초대형 작품은 신간이 한 권 나올 때마다 서적 단행본 판매 통계가 크게 요동친다. 그런 작품들이 순식간에 시장에서 사라진 것이다. 《소년 점프》는 <카구라바치(カグラバチ)>, <마남 이치(魔男のイチ)>등의 작품을 밀고 있지만 결정적 대체재는 아직 없다.
일본 만화 산업은 소수의 초대형 히트가 전체를 끌어가는 구조다. 만화 잡지에서 히트작 만화가 나오고, 단행본으로 팔리고, 애니메이션으로 전개되고, 굿즈와 게임으로 이어진다. 이 산업체인의 맨 앞에 잡지 연재 히트가 있다. 히트작 세대교체가 늦어지면 산업체인 자체가 둔화된다. 문제는 이 둔화라는 타격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원피스(ワンピース!)>처럼 여전히 연재 중인 대형 간판 작품은 남아 있다. 그러나 한 세대를 만들던 히트작들이 줄줄이 완결되는 사이에 다음 작품이 안 나오고 있다. 히트작은 만들고 싶다고 나오진 않는다. 두터운 창작자층과 오랜 경험을 가진 편집 역량 위에서 적은 확률로 터진다. 최근 주간 연재를 소화해내는 젊은 작가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대형잡지 편집자들의 의욕도 이전보다 못하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히트작을 길러내는 테루아- 토양이 얇아지고 있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다.
서적 만화에는 비용 문제도 겹친다. 자재비와 운송비가 오르면서 서적 단행본의 채산성은 갈수록 나빠졌다. 시장을 주도하던 대형작품들이 빠진 자리에 비용 부담까지 더해지자, 서적 만화의 감소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공급의 질에도 변화가 있다. 종이 잡지가 힘을 잃으면서, 잡지를 중심으로 길러지던 우수한 편집 인력이 줄었다. 거대 잡지가 줄어든 자리를, 빠른 자금 순환을 노리는 군소 전자서점과 소규모 편집부가 채웠다.
이들이 쏟아내는 것은 대체로 회귀/빙의/환생, 이른바 회빙환 계열의 양산형 작품이다. 한국 시장에서 먼저 공식이 된 이 유형이 지금 일본에도 대거 늘었다. 짧은 주기로 자금을 돌리기에는 맞지만, 시장에 오래 남을 간판을 길러내기에는 부족한 방식이다. 당연하다. 대형출판사와 다르게 이들에게는 장기간 작품 육성을 할 여유가 없다. 오늘 돈을 벌어야 한다.
한국은 이 유형이 어디로 가는지를 먼저 겪었다. 회빙환은 초기에 빠르게 독자를 모았지만, 비슷한 작품이 쌓이자 피로가 뒤따랐다. 양산은 시장을 키운다. 그러나, 양산은 시장을 지치게 한다. 일본은 지금 후자에 들어섰다.
양산형 공급은 세로읽기/스크롤 독서의 빠른 소비와 맞물려 작품 수명을 더 짧게 만든다. 비슷한 설정의 작품이 끝없이 업로드되고, 독자는 빠르게 소비하고 빠르게 떠난다. 추천 알고리즘이 그 순환을 가속한다. 물량은 늘지만 오래 남는 것은 줄어든다.
여기에 어린이층의 만화 이탈과 숏폼 영상, 게임이 동일한 가처분 시간을 두고 벌이는 경쟁이 겹친다. 최근 일본에서는 편의점에서 만화를 이전보다 사기가 어려워졌다. 서적 가판대가 치워지고 다른 물품들이 채우는 중이다. 아이들이 용돈을 들고 책을 살 수 있던 유력한 창구가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더 만화에서 멀어진다. 전자서적을 사본다? 그 결제는 부모가 해준다. 본인 독서 성향을 부모에게 공개하고 싶은 아이들은 별로 없다. 미래 독자들 개척에도 일정부분 실패하고, 애니메이션 등에 기댈 수밖에 없어지고 있다. 물량으로 밀어 붙이던 확장기의 방식이 여러 방향에서 한계에 닿았다. 시장이 성숙기에 들어섰다는 진단은 이제 업계 안에서 낯설지 않다.

그러나, 중요해진 만화 산업. 한국에서 배운 일본정부가 나서다.
2026년 6월, 일본 정부는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슈에이샤 등 15개 사에 총 115억 엔을 보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번역과 현지 이벤트, 광고 출전에 드는 투자액의 절반을 대준다. 만화에서는 슈에이샤(集英社), 고단샤(講談社), 스퀘어에닉스(スクウエア・エニックス), NTT솔마레(NTTソルマーレ) 네 곳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소니 산하 크런치롤과 반다이남코(バンダイナムコ) 등 다섯 곳이 대상이다. 국내 배급 서비스 이용자를 지금의 1억 명에서 3억 명으로 늘리고, 2033년까지 해외 매출을 지금의 3배가 넘는 20조 엔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가 붙어 있다.
만화 산업은 오랫동안 메이저 출판사들이 알아서 하는 곳이었다. 이들 회사 대부분은 비상장 기업이니 외부요인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시스템 운용을 해왔다.
수치를 하나 보자. 2024년 일본 콘텐츠의 해외 매출은 6조 1,300억 엔에 이르렀다. 반도체 연간 수출액 6조 800억 엔을 넘어섰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반도체를 제친 외화벌이의 선두가 된 것이다. 너무나 중요해졌다.
정부가 보는 전장은 배급이다. 콘텐츠는 일본과 한국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세계 시청자에게 실어 나르는 배급망은 대체로 미국 기업의 것이다. 넷플릭스는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스위트홈>과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드라마 시리즈를 만들어 세계에 내보냈고,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다. <나 혼자만 레벨업>은 애니메이션으로 세계적 성공을 거뒀다. 애니메이션 전문 배급 서비스 크런치롤은 소니가 2021년 인수한 뒤 유료 회원을 2,100만 명까지 네 배 이상 늘렸다. 원천은 동아시아에 있고 파이프라인은 태평양 건너에 있는 구조. 일본이 배급 주도권을 말할 때 겨냥하는 것이 이 구조다.
민간 회사들 성장 엔진이 스스로 돌아가는 동안 정부는 뒤에 있었다. 시장이 알아서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 엔진 돌아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건 좋지 않다. 그러니 나선다. 돈을 들고. 115억 엔의 보조금과 20조 엔의 목표는 자신감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민간만으로는 다음 성장을 만들기 어렵다는 판단의 표현이기도 하다. 콘텐츠를 국가 전략의 전면에 세운 다카이치(高市早苗) 정권의 기조도 이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보조금은 이번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경제산업성(経済産業省)은 콘텐츠 지원 예산을 수백억 엔 규모로 편성하고, 해외 진출을 상시 지원 항목으로 세우고 있다. 일회성 시책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 전략으로 콘텐츠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설계도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다. 2025년 6월에 내놓은 <엔터테인먼트·크리에이티브 산업전략(エンタメ・クリエイティブ産業戦略)>은 해외 매출 20조 엔을 향한 5개년 계획을 담으면서, ‘한국 콘텐츠진흥원’을 참고 모델로 명시한다. 여러 나라에 거점을 두고 정보를 모으며 전략적 해외 진출을 일원적으로 지휘하는 사령탑. 일본이 지금 만들려는 것이 그것이다. 오랫동안 한국이 일본을 모델로 삼아 만화 산업을 키워 왔다면, 이번에는 방향이 반대다.
즉 일본은 국내에서 성장이 멈춘 그 순간에 해외로 방향을 틀었고, 그 방법론은 한국이 먼저 깔아둔 판이다.
한국은 웹툰이라는 스마트폰 최적화 만화매체를 내놨다. 이 체제가 일본에 건넨 것은 세 가지였다. ‘세로읽기’라는 형식, ‘기다리면 무료’라는 과금 모델, 그리고 국가가 앞장서는 진흥 구조. 일본은 지금 그 셋을 차례로 받아들이고 있다. 웹툰 형식은 대형 출판사들이 세로읽기 전담 조직을 만들며 들여갔고, 단행본 단위 구입이 아닌 화 단위 과금 모델은 이미 시장의 표준이 됐으며, 진흥 구조는 콘텐츠진흥원을 본떠 만드는 중이다. 우리가 먼저 실험한 것을, 일본이 국가의 자원을 얹어 뒤따라온다.
즉 일본이 달라졌다. 오랫동안 일본 만화업계는 한국을 배급의 파트너로도, 콘텐츠의 파트너로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국 시장이 세계 최대였고, 세계 만화 앱 수익의 상당부분이 일본에서 나왔다. 굳이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일본이,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고 국가가 해외로 방향을 틀자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이 손을 뻗는 그 배급/무료 모델은 우리가 먼저 만든 것이다. 하루를 기다리면 다음 회차가 무료로 열린다. 픽코마(ピッコマ)가 일본에서 성공시킨 이 방식은 무료와 유료를 한 작품 안에 겹쳐 시장을 빠르게 키웠다. 그러나 무료의 폭이 넓어질수록 돈을 내던 독자마저 무료 쪽으로 옮겨간다. 성장의 엔진과 잠식의 엔진은 같은 장치였다. 우리는 성장의 엔진을 수출하면서 약점도 함께 실어 보냈다.
여기서 한국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형식과 모델과 구조를 먼저 만든 쪽이 반드시 그 열매를 쥐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세로 스크롤 만화와 기다리면 무료를 만든 것은 한국이지만, 그것으로 세계 최대의 시장을 이룬 곳은 일본이다. 콘텐츠를 대는 쪽과 배급망을 쥔 쪽이 갈리면, 원천을 가진 쪽이 언제나 유리한 것도 아니다. 일본이 국가를 동원해 배급 주도권을 말하는 지금, 한국이 무엇을 쥐고 판을 새로 구축할지는 스스로 정해야 한다.
결국 한국이 팔 수 있는 것은 작품의 힘이다. 형식은 이미 일본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고, 무료 모델은 양쪽 모두를 지치게 하는 중이며, 2차 저작물의 가장 큰 배급망은 미국이 쥐고 있다. 남는 것은 오래 남을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회빙환’을 얼마나 빨리 많이 화려하게 찍어내느냐가 아니라, 그 물결 속에서 다음 세대의 간판을 길러낼 수 있느냐가 변화하는 시장 안에서도 그나마 유동성이 덜한 선택지다. 사실 그것 밖에 없다.
성숙기의 시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금 폭력적으로 말해보자. 물량과 무료로 밀던 시기가 끝났다. 작품 수를 폭발적으로 늘리고, 무료로 독자를 모으고, 그 규모를 성장이라 부르던 방식이 한계에 닿았다. 두 나라가 같은 벽 앞에 선 것은 그래서다. 성숙기가 요구하는 것은 다른 능력이다.
첫째는 큐레이션이다. 무한히 업로드되는 작품 속에서 무엇을 어떤 독자에게 어떻게 얹을지 판단하는, 더 전문적인 큐레이션. 추천 알고리즘이 포화에 이른 지금, 그 판단은 오히려 사람의 몫으로 되돌아온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팔리는 것을 가려내는 눈은 물량으로도 무료로도 대신할 수 없다.
편집자/프로듀서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쏟아지는 기획 중에서 될 것을 알아보고, 초기 독자의 반응을 읽어 방향을 잡고, 작가가 보지 못하는 자리를 대신 보는 일. 확장기에는 이 기능이 물량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내놓아도 팔렸기 때문이다. 성숙기에는 이 기능이 승패를 가른다. 큐레이션은 결국 사람의 안목을 시스템으로 세우는 일이고, 그 안목은 오래 쌓인 경험과 심도 있는 만화 연구에서 나온다. 지금 잡지와 편집부가 약해진 자리에서 이 인력을 어떻게 다시 기를지는 아주 중요하다. 플랫폼이 자신들을 “시스템을 설계하는 아키텍처”로 인식한다면, (장기적 안목에서의) 편집자 육성은 분명히 의식해야할 부분이다.
둘째는 독자의 세분화에 대한 대처다. 하나의 대중은 이미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취향과 소비 방식이 나뉜 독자들을 하나의 히트작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점점 통하지 않는다. 세분화된 독자를 세분화된 채로 읽고, 각각에 맞는 작품과 접점을 설계하는 일이 남는다. 대박 하나로 시장 전체를 끌던 시기의 감각으로는 읽히지 않는 독자들이다. 이들에 맞춘 세분화된 작품 공급과 조닝zoning을 연구해야 한다.
셋째는 제작체제 전반에 대한 연구다. 무엇을 얼마나, 어떤 속도로, 어떤 계약과 어떤 분업으로 만들 것인가. 물량을 밀어내던 시기의 제작체제는 성숙기의 시장에 맞지 않는다. 회빙환 양산으로 자금을 빠르게 돌리는 방식과, 오래 남을 작품을 길러내는 방식은 제작의 구조부터 다르다. 작품의 수명이 짧아지고 독자가 세분화되는 시장에서, 창작자와 스튜디오와 플랫폼이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지속할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제작비의 현실화도 그중 하나다.
세 과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바탕으로 한 텍스트 안이 아니라 텍스트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어떤 독자에게 얹을지, 쪼개진 독자를 어떻게 읽을지, 무엇을 어떤 체제로 만들지. 생성형 도구가 그럴듯한 텍스트를 무한히 찍어내는 시대일수록, 그럴듯한 것과 팔리는 것을 가르는 “인간적인 판단의 가치”는 오히려 올라간다. 무료가 흔해질수록 무료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의 값이 오르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는 무료로도, 보조금으로도 살 수 없다. 판촉비를 아무리 쏟아 부어도, 국가가 115억 엔을 대준다 해도, 큐레이션의 안목과 독자를 읽는 눈과 제작체제에 대한 이해는 그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국가의 힘으로 메우려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고, 한국이 준비돼 있는지도 아직 답하지 못한 자리다.
두 시장은 지금 같은 벽 앞에 서 있다. 성장을 만들던 방식이 더는 성장을 만들지 못하는 벽이다. 일본은 국가의 자원을 앞세워 그 벽을 넘으려 한다. 한국은 무엇을 들고 이 벽 앞에 설 것인가. 우리가 그 너머에서 팔 것이 성장인지 잠식인지, 아직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거기에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핵심은 여전히 작품과 작가에 있다. 성숙기에 어울리는 작가 육성과 그것을 세상에 빛 보이는 방식은 누가 먼저 시도하고 찾아내고 적용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