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는 모 방송국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현재 경제 위기의 원인이 된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점과 그 결과 그리고 그 구조를 보완해 나갈 수 있는 국가정책의 방향에 관한 내용이였다. 다큐멘터리는 결론을 통해 앞으로 우리나라가 가야할 방향은 복지국가, 즉 국민 개개인이 기본적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을 만큼의 사회적 안전 장치를 갖춘 국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국민이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고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보장이 국민 개개인의 창의성을 북돋울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글에서는 창조와 창의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일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창조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창의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인데 만화의 창작과정에선 창조와 창의가 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비교적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는 편에 속하는 프랑스. 과연 그렇다면 복지 정책이 프랑스의 만화가들이 창조적일 수 있는 실질적인 보탬이 되는 것일까? 아쉽게도 그 질 문에 명확한 답을 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많은 조사가 필요하므로 필자의 역량이 부족한 감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프랑스의 복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와 문화정책 그리고 경제적인 지원까지 다양한 부분을 좀 더 넓고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위한 개인적 노력에 대해선 이미 굉장히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이 글에서는 사회가 어떻게 만화가들을 좀 더 창조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프랑스 사회와 정책이 만화가들이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니다를 말하기 전에 프랑스 만화가들이 과연 창조적인가 아닌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조”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되는, 또는 그런 것”, “창조적 사고”는 “생산적 사고와 동의어로 과거의 경험을 이용하여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내용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사고”라고 되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만화가를 배출한 나라 프랑스, 그들이 펴내는 만화책은 수량이 많을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새롭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 작가들은 만화라는 매체의 형식에 대한 실험뿐만이 아니라, ( 필자는 2010년 9월의 우바포 그룹에 대한 기사에서 이 부분에 대해 다루었다.) 프랑스와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 만화가 루이스 트롱다임이 창작그룹 우바포 활동시 그렸던 실험적인 만화
미술사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듯이 프랑스 예술가들은 세계 각국의 인문적, 그래픽 적 영향을 자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여준다. 만화가들 역시 이 부분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프랑스 만화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만화가 무리 중의 하나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 하기는 쉽지 않다.
자. 이제부터 프랑스 만화가들이 창조적일 수 있게 도와주는 사회분위기와 제도 등에 대해 몇 가지를 짚어 보자. 물론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으나, 사회의 도움도 창작에 굉장이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보는 습관을 갖는 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유지되므로 굉장히 중요하다. 프랑스 국립 도서 센터의 자료에 의하면 프랑스 전국에는 약 4,000여 개의 공립 도서관이 있다. 대학 도서관은 제외한 숫자다. 참고로 2010년 우리나라의 공립도서관 수는 759개이다. 프랑스 인구가 6500만 명이므로 도서관 1개 당 인구수가 1만 6천명인 반면에, 한국인구는 4500만명으로 도서관 1개 당 인구수가 6만 6천 5백명이다. 인구 수당 도서관을 따지면 우리나라가 프랑스보다 6배가 정도 적은 것이다.
프랑스 자료에 따르면 전체 도서관의 4분의 1이 넘는 1174곳이 인구 2000명 미만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다시 말해 프랑스에서는 시골구석에 있는 아이도 도서관에 쉽게 갈수 있다는 말이다. 이 도서관들에는 예외없이 만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만화코너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도 알찬 편이다. 또한 이 도서관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많은 만화페스티발들이 운영된다. 프랑스가 도서관의 만화 서가에 비치하기 위해 사들이는 만화책의 양도 상당하다.
프랑스의 아이들은 부모의 소득에 상관없이 책과 만화책을 많이 읽을 수 있고, 만화가와의 직접적인 만남도 가질 수 있다. 기존 만화가들에게는 만화를 판매 해주는 시장의 역할이 되고 미래의 만화가들은 좋은 책들을 접하고 자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 도서관에서 열린 만화 페스티발에서 만화가와의 만남을 갖는 초등학교 학생들. 프랑스에서 도서관은 어린이들에게 많은 만화를 접하게 해주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페스티발, 아틀리에 운영등을 통해 작가를 직접 만나거나 만화를 직접 그리는 경험들도 제공한다.
프랑스에서도 만화를 가르치는 고등교육기관은 많지 않다. 전국적으로 보았을때 사립을 포함해도 10군데가 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중 영향력 있는 곳은 당연히 공립학교들이다.
공립학교의 연간 등록비는 300에서 1,000유로 사이이다. (한화로는 50만원에서 150만원정도로 반값등록금 실시하는 서울시립대보다 반절이 더 싸다.) 사립학교는 연간 4,000-7,000유로 정도 하는데 이 학교들은 교육부의 학력동등인증을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굉장히 엄격한 학사관리를 하는 편이다. 자율성보다 짜여진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학생들에게는 사립 학교도 좋은 교육기관이다.
미대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한달에 수십만원을 미술학원에 써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예술 옵션을 선택해 교과 과정에서 작업한 것으로 대학 입시 준비를 한다. 프랑스 미술 학교들은 편입이 자유로운 편이므로 고교졸업 후 별로 안좋은 미술대학에 들어갔다고 해도 때려치우고 재수 삼수 하는 게 아니라 있던 학교에서 작업을 열심히 해서 더 좋은 학교로 편입을 한다. 그렇게 하면 이전 학교에서의 학력도 인증이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시간을 많이 버는 셈이다. 하지만 사립학교와 고급학교 준비 전문 기관에 돈을 더 내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고급학교 합격율이 약간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요약하자면 프랑스에서는 만화를 좋아하고 재능있는 학생이 고등교육을 원할때, 부모님이 소팔고 논팔아야 할만큼 경제적인 부담이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2009년 부터 프랑스의 미술관은 프랑스와 유럽에 거주하는 26세 미만의 학생들에게 무료입장을 허락했다. 세계최고의 미술 작품들을 선보이는 프랑스의 미술관들을 경제적 부담없이 어느 때든지 둘러 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다.
미술관이 공짜인 것은 좋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교통비는 공짜인가? 공짜는 아니다. 하지만 26세 미만인 학생은 한달 5만원에서 6만원 사이에 정액권을 사서 마음껏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맘 내키면 언제든지 미술관에 죽치고 앉아 그림을 쳐다보아도 된다는 얘기다.
프랑스의 많은 만화가들이 미술작품에서 받은 영향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조안 스파는 마티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니콜라 드 크레시의 작품에서는 엉소(Ensor)와 그로츠(Grosz)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파스칼 하바테의 이비쿠스 만화는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미래의 작가들에게 고전 미술부터, 근대,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시각적 경험은 창작욕을 자극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미술작품을 직접 보는 것은, 연예인을 직접 만나는 것 만큼이나 큰 경험이다.)
세계에 대한 더 큰 관심과 다양한 그래픽적 소스 제국주의 시대에 프랑스는 영국과 더불어 전세계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또는 보호령이였던 나라들을 살펴보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중앙아프리카의 코트디브아르, 말리, 세네갈, 카메룬, 챠드, 콩고, 가봉, 니제르, 토고, 중동의 레바논과 시리아도 보호령과 식민통치를 했고, 북미의 캐나다 퀘벡지방과 미국의 미시시피강 유역, 루이지아나 주 등도 프랑스 식민통치 구역이였고, 카리브해의 과달루프, 마르티닉 섬은 여전히 프랑스 영토이며, 남미의 기아나 역시 아직까지 프랑스 영토로 남았으며 브라질의 리오데 쟈네이로가 잠깐동안 프랑스 영향권 하에 있었다.
아시아에선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었고,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 폴리네시아 등이 현재까지 혹은 이전에 프랑스의 영향력하에 있었거나 여전히 프랑스 영토로 남아있다. 전세계에 프랑스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불어가 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 불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도 많은 편이다. 프랑스 인들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유산도 관심을 가졌다. (결국 대부분이 약탈이지만.) 프랑스 인들이 외국에도 많이 진출했지만 프랑스 본토에도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어와 살고 있다. 유태인이 프랑스에 머문지는 수 백년이 넘었고, 이태리, 포르투칼, 스페인 같은 서유럽 출신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으며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과 레바논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
동구권의 몰락으로 폴란드와 구 유고연방 사람들도 많이 몰려오고 있으며, 베트남,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까지 포함하면 굉장히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프랑스 영토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외국인 촌을 형성하기도 하고, 프랑스 인들 사이에 섞여 살기도 하며, 그들의 문화를 보여주고, 그들의 프랑스에서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한다.

△ 코드 디부아르 출신 작가가 글을 쓰고 프랑스 만화가가 그림을 그린 만화 시리즈 <아야(aya)>, 아프리카 코트디브아르 인들의 일상을 담은 이 이야기에 프랑스 독자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을 통해 프랑스 인들은 다른 문화와 외국을 배우고 그것을 외국과의 관계에 활용하며 창작에 응용하기도 한다.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프랑스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마르쟌 사트라피는 이란 여성작가로 프랑스에서 “페르세 폴리스”를 펴냈고, 유태인 조안 스파는 북아프리카의 랍비였던 자신의 조상이야기 “랍비의 고양이”를 그렸다. 시릴 페드로사는 최근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포르투칼”을 펴내고, 아르헨티나 작가 죠세 뮤뇨즈는 프랑스에 거주하며 아르헨티나 이야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