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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김현수, <상남 2인조(후지사와 토오루 작)>

내가 지금까지 읽은 만화책의 8할은 1990년대 말,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것들이다. 아침 7-8시부터 시작되는 일과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1시에 겨우 끝나곤 했는데 교과서는 사물함에 넣어두고 등하교 가방엔 만화책을 넣어 다녔다. 동네마다 만화 대여점이 지금의 스타벅스 만큼이나 많을 때였다. 대여기간은 2박 3일이었지만 야자 끝나고 대여점에 들러 빌

2017-03-01 김현수

내가 지금까지 읽은 만화책의 8할은 1990년대 말,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것들이다. 아침 7-8시부터 시작되는 일과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1시에 겨우 끝나곤 했는데 교과서는 사물함에 넣어두고 등하교 가방엔 만화책을 넣어 다녔다. 동네마다 만화 대여점이 지금의 스타벅스 만큼이나 많을 때였다. 대여기간은 2박 3일이었지만 야자 끝나고 대여점에 들러 빌린 책들은 몇 권이든 다음 날이면 바로 반납 가능했다. 대여점엔 온갖 장르의 만화들이 전부 있었는데 유달리 자주 손이 가는 건 일본만화들이었다.


그 당시에 주로 봤던 만화들은 <마스터 키튼>, <몬스터>, <해피>, <원피스>, <헌터X헌터>, <출동! 119 구조대>, <바람의 검심>, <베가본드>, <베르세르크>,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종류의 만화들이었다. 친구들과 돌려 읽으면 금방 너덜너덜해져 대여점에서도 호치키스로 접지를 고정하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인기가 넘치는 만화들이었다.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왠지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약간의 허세 석인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만화들을 즐겨 봤던 것 같다. 수업 시간에 읽다가 걸리면 압수당하거나 복도로 내쫓기기 일쑤였고, 몇몇 압수된 만화는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돌려보기도 했지만 다음 날이면 금세 어제 일을 까먹고 또 허세 가득한 만화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그 땐 일본 만화, 나아가 출판 만화 시장이 호황일 때였다. ‘내 인생의 첫 만화’라는 주제에 부합하는 만화책이 뭐가 있을지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바로 이 시기에 읽었던 일본 만화책들이다.

실은 일본 만화를 처음 보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히 따져 물으려면 국민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300원 내지는 500원에 판매하던 호호출판사나 명지 기획의 <드라곤볼의 비밀>, 그러니까 <드래곤볼> 해적판으로 처음 일본만화책을 접했던 것. 이때만 해도 만화의 재미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다음 페이지가 궁금한 맛에 봤던 수준이었다. 게다가 당시 해적판이 멋대로 편집되어 전체 이야기의 왜곡도 가해지는 등 원본 그대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기도 했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저작권 개념이 있었겠는가. 아무튼 ‘내 인생의 첫 만화’에 부합하는 책을 고르려면 내게 가장 강렬한 첫 경험을 안겨준 일본 만화 중에서 고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비록 불법과 함께 시작되긴 했지만, 일본만화의 영향을 제대로 받은 시기는 어쨌거나 고등학교 시절이었고, 그 때만큼은 만화의 재미가 뭔지 조금씩 알아가던 때였고, 무엇보다 ‘내 인생의 만화’로 꼽을 수 있는 만화책을 접했던 시기였다. 그 때 만난 만화책이 바로 <상남 2인조>이었다. 학창 시절엔 누구나 그러하듯, 영화나 드라마, 소설, 음악 등 다양한 문화 매체를 접하면서 자신의 취향이라는 걸 만들어가게 되지만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영화는 그리 많이 보는 편이 아니었다. 영화보다 만화를 더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고, 학생 신분으로서 매번 어려운 시간을 내어 극장을 찾는 것보다는 수업 시간에도 앞자리 친구 등 뒤에 숨어 볼 수 있는 만화책을 자연스레 선호하게 됐다.

그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흔히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수많은 청춘 영화들이나 사내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홍콩 느와르 영화 등을 접하기도 전에 <상남 2인조>라는 학원폭력을 다룬 만화책부터 먼저 집어 들었다. 정말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남자들이 주인공인데 심지어 고등학생이었다. 비록 만화적 허구지만 주인공 캐릭터들에게서 왠지 모를 동지애를 느끼기도 했다.

만화책 제목만 듣고 누군가는 이쯤에서 비웃을 법도 하다.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만화책들을 읽었다면서 기껏 꼽은 내 인생의 첫 만화가 학원폭력물이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선정적이며 젠더 감수성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운 여성의 대상화 범벅인 작품일 게 뻔하다는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만화다. 그저 깡패들이 나와서 무턱대고 싸우는 만화 아니던가.

주인공 영길과 용이는 만화의 배경인 ‘상남’ 일대 고등학교를 주름잡던 일진들이다. 야쿠자로 지칭되는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세계에 발 담그기 직전의 이 아이들의 일상은 실로 위험하다. 두 사람은 ‘귀폭’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동네 최강 콤비인데 싸움을 무지 잘해서 어떤 상대가 나타나든 그 이상의 파워를 보여주며 압도적으로 제압한다. 매 에피소드마다 박력 넘치는 대사와 전개가 보는 이들을 휘어잡는다. 오직 주먹으로 친구들 간의 우정을 판가름하는 무식한 면이 있고 또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한심한 면도 지닌, 그러면서도 때론 죽음의 의미를 운운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하는 청춘들이다.


‘악귀 특공대장’ 영길과 ‘용문폭탄’ 용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전체 시리즈가 무려 30여 권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사건 사고를 담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길과 용이는 방학 때 리조트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여선생님들과 얽히게 되면서 본격 여자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를 착수한다. 물론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매번 친구들과 주먹다짐을 벌여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봄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는 일이 벌어진다. 가까스로 개학한 뒤에는 용이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한다. 험난했던 1학년 생활을 마치게 된 두 사람은 무지막지한 두 명의 여성, 시노미와 나기사를 만나게 되는데 나기사라는 인물은 과거 상남 일대 전설의 조직 ‘폭주천사’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음모와 얽혀 있다. 결국 두 사람은 힘을 합세해서 상남 일대 최고의 짱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부활을 막기 위해 앞장선다. 이들의 목표는 주먹으로 최고가 되는 것 아닌가 의아해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지점이 이 만화의 매력 포인트다.

영길과 용이는 숱하게 벌어지는 목숨을 건 싸움을 이겨나가면서 무조건 정면에서 싸워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쉽게 말해, 이들이 사는 세계는 이기고 지는 결과가 눈앞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곳이라서 누군가 피를 보지 않으면 결코 멈출 수 없다. 다들 이기려고 싸움을 시작한다. 지려고 시작하는 이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이기고 나니까 비로소 왜 져야 끝이 나는 싸움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겼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져야 끝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누구보다 가장 화려했고 지긋지긋했던 고교 시절 동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꼭대기에 올라선 영길과 용이는 비로소 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남 2인조>는 폭력 만화다. 일단 고등학생들이 말이 안 될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며 허세 가득한 눈빛으로 “남자에겐 비록 질게 뻔 하더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어요.”라는 식의 대사를 외친다. 작화 이미지 역시 그에 어울리도록 일반 독자들이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불량 청소년의 이미지, 혹은 야쿠자의 이미지를 과장되게 그려 넣는 식이다.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세운 리젠트 헤어와 등에 무시무시한 문구를 새겨 넣은 ‘특공복’ 코트,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는 마스크 복면, 거기에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 등 불량해 보이는 거의 모든 디자인이 등장한다. 이 만화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유행해왔던 유사 소재 만화들, 그리고 수많은 홍콩 느와르 영화들에 영향 받은 게 분명한 장면들이 꽤 많다.


재미있는 점은 공부와는 평생 담 쌓고 살아갈 것 같은 이 아이들이 벌이는 싸움 하나 하나가 나름의 성장 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지?” 라면서 벌이는 싸움이라는 게 결국엔 어른에 대한 막연한 불신으로 인한 젊은 청춘들의 방황의 다른 말이다. 그들의 방황의 끝에 좌절이 기다리고 있을지,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 될지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어봐야 안다. 조직의 부활을 막기 위해 싸우는 두 사람의 노력,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러워진 영길과 용이의 선택과 변화를 지켜보는 게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상남 2인조>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다.

청춘의 앞날을 감히 누가 똑바로 예측할 수 있을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인물의 역대급 난장판 속에는 이제 막 세상 문을 열기 시작한 아이들의 인생을 함부로 꺾지 않고, 점점 더 많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게 될 아이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비록 허세로 치장한 이야기와 선정적인 이미지가 난무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 글을 읽고 만화책이 궁금해진 독자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상남 2인조>의 속편인 <반항하지마> 시리즈까지 탐독하길 권한다. <상남 2인조>의 영길이 대학 졸업 후 엄청난 교사가 된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결석일수가 많아서 대입 내신 성적에서 어마어마한 감점을 받아야 했고, 대학교라는 곳에 간신히 턱걸이로 입학해야 했던 나는 훗날 <상남 2인조>보다 몇 배 더 재미있는 느와르 영화를 알게 됐고, 기타노 다케시와 두기봉과 마틴 스코시즈 감독 영화를 즐겨 보게 됐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영길 선생 같은 엄청난 영화기자로 살아간다면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