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환
1941년 전북 익산 출생. 본명 윤인섭.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꿈을 키우던 미술학도였다.
졸업후 보도본부 그래픽 실에서 근무했던 국가공무원의 이력도 갖고 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미국이나 일본의 신문 잡지에 빠지지 않고 게재되고 있는 카툰에 대해 일찍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
1968년 처음으로 <소년조선일보>에 선보였던 아동명랑만화 ‘꾸러기’가 뜻밖의 인기를 끌면서 그 후 24년이란 연재 기록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처음 그의 작품을 대했을 때 그때까지 내로라하던 개그만화가들이 모두 윤준환이란 낯선 신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가는 곳마다 천방지축으로 말썽을 일으키고 다니는 꾸러기와 이에 못지않은 말썽쟁이 여자 친구 맹자가 벌이는 소동을 재미있게 구성한 작품으로 한국판 개구쟁이 데니스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었다.
윤준환은 여느 만화가들처럼 여기저기 거래처를 늘리지도 않고 오로지 한우물만 파는 작가였다.
1995년 연재물들은 〈웅진싱크빅〉에서 ‘꾸러기 대소동’ 시리즈로 엮어 발간.
1997년 〈두산동아〉에서 ‘사고뭉치 꾸러기’ 발간.
1998년 〈웅진싱크빅〉 ‘꾸러기는 못말려’
1999년 〈파랑새 어린이〉 ‘꾸러기와 맹자’ 이어서 〈웅진싱크빅〉에서 ‘말썽집안 꾸러기네’발간
2000년 〈대교출판〉에서 ‘우야꼬 만화일기’ 발간.
그밖에 학습만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아동 교육에 보탬이 되는 많은 간행물들을 발간하였다.
<계림닷컴>에서 ‘꾸러기 한문숙어’ 발간.
2001년 <파랑새 어린이>에서 ‘꾸러기 삼강오륜’, 그리고 <계림닷컴>에서 ‘꾸러기 만화편지’ 그 후 청소년 만화에 일관했던 그가 성인만화에도 데뷔한다.
일반신문과 달리 잡지형 신문이라 일컬어지는 <주간 일요신문>에 성인카툰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대포’는 창간호부터 시작된 이래 최장 연재성인 만화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연재도고 있는데, 그 많은 주간 신문 중에서도 인기 카툰으로 군계일학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있다.
이 작가는 일반 작가들과는 달리 치밀하게 스토리를 짜거나 콘티를 만드는 일 없이 즉흥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리고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그리지 않는다. 매순간 자신이 캐릭터가 되어서 내용을 구상해 나가는 편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는 성인만화가 박수동, 이정문, 사이로와 함께 독특한 카툰형 연속 개그만화가로 손꼽힌다.
KBS에서 20년간 근무한 꾸준한 그의 이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사에 신중한 성격으로, 아직도 웹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그는 언제까지나 젊은 작가적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
오랜 시일 독자들의 건강한 웃음을 책임져 왔던 그이기에, ‘물대포’와 ‘꾸러기’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기억될 것이다.
△ ‘꾸러기’ 명랑만화 소년조선 연재
△ ‘꾸러기 말썽일기’ 시리즈 1, 2 연속 단행본 출시
△ 꾸러기 학습만화 시리즈 ‘한문숙어’
△ 10만부 베스트셀러인 ‘깍두기 반장님’(요요코믹스 발행)
△ 1968년 ~ 1991년 까지 인기리에 소년조선 연재된 ‘말썽천재 꾸러기’
△ 상처투성이 머리, 짙은 반달형 눈썹 등으로 성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성인만화 ‘물대포’(우, 2006년 연재 시작, 일요신문), ‘세상만사’(좌, 2016년 7월 연재, 일요신문) 그림위치
△ 카툰 ‘결혼 전과 결혼 후’(2쪽)
△ 못말리는 말썽천재 꾸러기 기증전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성대히 열려(2010년 5월)
△ 일본 관서지역 전문학교 교수등 ‘동아만화예술학교’ 견학 방문
(앞 좌 : 서째 안중규 원장, 윤준환 교수, 뒤 넷째 이로마, 다섯째 박기준, 김성주, 최덕규 교수 / 2003년 10월)
△ 동아LG 주최 ‘어린이 창작 만화공모전’ 심사 중
(좌 : 윤승운, 오원석, 똑똑이 아빠 김종석, 윤준환, 박기준, 최덕규, 안중규)
△ 동아LG 주최 ‘어린이 창작 만화공모전’ 심사 발표장
(좌 : 사회자 똑똑이 아빠 김종석, 심사위원 : 윤준환, 박기준, 오원석, 윤승운 / 2005년 동아일보사 강당)
백산
1937년 대구 출생(본명 최일부). <용산중학> 시절의 각별했던 미술 실력은 <홍익대미대>에 입학까지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술반에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만화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 용산중학은 선배 신동우, 박션석, 김원빈, 송영방 등 만화계의 스타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1961년에 ‘맨주먹의 영웅’ 이라는 단행본으로 데뷔.
미국과 일본에서 야구는 최고 인기 스포츠로 떠올랐는데, 특히 장훈과 백인천이 일본야구계를 압도, 큰 감동을 줄때였다. 그 영향을 받아서 1962년 한국에서고 야구 붐이 일기 시작한다. 야구부원으로 활동해본 경험이 있었던 백산은 재빨리 이 같은 붐을 이용해 ‘빅토리 홈런왕’이라는 시리즈를 박력 있는 펜 터치와 정교한 묘사로 단행본으로 그려냈고 이것이 크게 히트하게 된다.
만화의 표지를 반 삽화형식으로, 야구 투수의 멋진 폼을 크게 실감을 살려서 연속동작으로 나누어 표현했기 때문에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내지에 스타들의 연속 투구 폼을 상세하게 사진으로 실은 후 해설까지 곁들임으로써, 마치 실제 야구장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
이어서 축구와 농구 등 구기 종목과 권투, 프로레슬링 등 격투기까지도 소재로 삼아 극화형태로 실감나게 펴내서, 스포츠 만화를 남성 취향 인기 대열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1965년 농구만화 ‘영광의 별’ 발표.
1970년 축구극화 ‘태양을 향해 달려라’, 럭비만화 ‘맨발의 제왕’, 그리고 격투기만화도 발표한다.
1972년 ‘비운의 복서’ 발표.
같은 해인 1792년에 <선데이 서울>에 성인극화 ‘역도산’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전성기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프로레슬러로 잘 알려진 역도산의 이야기를 담은 영웅담으로 이 작품은 그의 성인극화 중 대표작으로 꼽는다.
1973년 ‘깜북이 행진곡’ 발표.
1973년 백산은 극직가라데의 창시자 재일교포 최영의의 삶을 그린 극화 ‘괴력 주유천하’를 최일봉이란 이름으로 3개월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다. 그러나 심의 문제가 대두되어 연재는 중단되었다. 만화 침묵시대에 의한 탄압을 그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1974년 ‘자정의 공포’ 발표.
1975년 ‘뒤를 쫓아라’ 발표.
1977년 ‘맨주먹의 영웅’ 시리즈 발행.
1981년 ‘극비지령 5호’ 발행.
1985년 우리나라 최초의 당구 만화 ‘당구황제’를 발표했다.
1990년 ‘지옥의 용병’ 시리즈 발행.
2000년 ‘악인문’ 시리즈 발행.
스포츠 무술 극화로서 인기를 얻었던 작가로 특히 액션물에서도 인기를 좌우했다.
박력 있는 펜 터치로 머리카락의 날림을 한올 한올 정교하면서도 박진감 있게 표현했다. 후반기에 가정 문제로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나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이 유감이다.
1960년대 종합 스포츠만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진정한 스포츠만화의 프런티어였다.
△ 재일동포 스포츠 스타 역도산(위)과 장훈(아래)
△ 다양한 스포츠 극화를 펴낸 독특한 작가
농구, 복싱, 축구, 마라톤 등, 박력 있는 펜 터치와 정교한 묘사로 박긴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 후반기에 무술극화 ‘밀사의 검’(1969년 작)
전쟁극화‘대공격’(1971년 작) 펴내
△ 빅토리 홈런왕(1962년 제일문고 발행)
표지부터 피처의 투구폼 사진이 5컷이나 실감나게 보여준다.
새로운 시도를 독자들은 환영하였다.
△ 본문시작 몇 쪽은 잡지 화보처럼 사진을 그림과 함께 선택
생동감을 살리게 설명해 준 것이 인기 비결이었다.
△ 국내 야구붐과 함께 성공을 거둔 ‘빅토리 야국왕’은
우리 야구만화의 효시와 같은 작품이다
△ 백산 카툰 ‘돌고 도는 역사’ (만화선집 1975년 1월)
△ 백산 캐리커처 (만화선집 1975년 1월)
△ 부산 송도해수욕장에서(1968년)
(좌 : 백구두 삼총사 손의성, 이근철, 백산)
△ 문화인 야구대회 만화인 팀으로 출전연습(1969년 8월 동도공고)
(앞 좌 : 이문수, 박기준, 박부성, 손의성, 박기정(회장), 김태곤, 이덕송
뒤 좌 : 백산, 이필승(야구부장), 김기태, 이종진, 고우영, 이향원, 유세종, 이근철, 이고환)
△ 박기준 ‘만화가가 되려면’ 출판기념회에서(1987년 10월)
(앞줄 둘째 : 백산, 뒤 : 유세종, 신도우, 최석중)
박기소
1934년 서울 출생. 초등학교에 다니던 해에 뇌막염에 의해 청각을 잃는 불행을 당한다. 따라서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며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고, 그로 인한 외로움과 소외감을 오직 만화와 그림을 그리면서 지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부모님은 당대의 화가 박고석 화백에게 소개하며 서양화를 배울 것을 권했으나, 규격화되고 틀에 박힌 형식에 얽매이기 싫었던 그는 스트레스도 풀 수 있고 표현도 자유로운 만화를 선택했다고 한다.
1960년 청소년 만화 ‘돌돌이의 모험’을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데뷔, 화제를 모은다. 하지만 많은 양의 작업을 체력적으로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어 요양을 요하게 되고 이로 인해 방황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 후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는, 많은 작업량 때문에 몸의 무리를 초래하지도 않고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짜내서 가볍게 표현할 수 있는 국내외 신문에서의 1컷, 4컷짜리 카툰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분야는 서민들의 애환이나 주변의 사소한 사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찰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다 확대시킴으로써 대중들에게 즐거움과 통쾌감을 전할 수 있다. 이 카툰분야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그는, 배낭 하나에 소형 스케치북과 카메라 하나만을 지참한 채 소재나 아이디어를 찾아 나서는 일로 하루 일과를 보냈다.
박기소가 카투니스트로 데뷔할 수 있게 도와준 <월간 미술세계> 편집장은 연재를 권유했고, 연재된 작품들을 모아 미술관에서 카툰전도 열게 하는 등 새로운 전시문화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한때 수업에서 익힌 희화기법이 적극 반영되고 있다.
1976년 그는 미술 창작 활동을 재개한다. 대전 <주사랑 전문만화 학원> 강사, <갤러리 가이드>, <아트뉴스>, <동아약보>에 카툰 게재.
1977년 미술지 <미술 21>, <한배달>, <아트 2000>에 한 컷 또는 4컷 카툰 연재.
대전 <문화사랑>, <예술문화> 각종 화보 등의 매체에 연재.
1986년 월간 <만화광장>에서 4컷 카툰 부분 당선 연재.
1989년 <아트> 편집위원.
2004년 안국동 <한서 갤러리>에서 카툰전 개최
2006년 소장품전(구식 카메라, 동전, 껌종이, 인형, 종이접시, 술병 등 300여 점 전시) 개최
2008년 <이공갤러리>에서 ‘박기소 초대전’ 개최
미술지 <미술 21>, <한배달>, <아트 2000>에 한 컷 또는 4컷 카툰 연재.
박기소는 여타 만화가들과 달리 매우 분주하게 지내면서도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아침 6시에는 어김없이 기상하여 작업에 들어간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카메라와 배낭을 짊어지고 도보를 이용하거나 지하철을 이용해서 아이디어 사냥과 스케치 여행에 나선다. 그 사이 화방, 미술학원, 그리고 만화 단체를 순회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6시가 되면 정확하게 귀가한다.
박기소가 움직이는 그 시간에 눈에 띈 모든 사물과 사람은 아이디어의 소재가 되는 셈이다. 그는 재로로는 주변의 것 무엇이든지 다채롭게 활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때 묻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그리는 이 카투니스트에게 건강과 행운이 따라 주기를 동료 입장에서나 독자들 모두가 바라는 일이다.
△ 카툰 ‘계단’
만화광장 응모당선(1986년 4월호)
△ 카툰 ‘무제’
‘박기소의 아이디어’ 작품집에서(2010년 거북이 북스)
△ 카툰 ‘무제’
‘박기소의 아이디어’ 작품집에서(2010년 거북이 북스)
△ 카툰 ‘국토는 좁고 인구는 늘고...
’ 미술전문지 ‘갤러리 가이드’(2013년 9월호)
△ 카툰 ‘무제’
‘박기소의 아이디어’ 작품집에서(2010년 거북이 북스)
△ 카툰 ‘성난 소’
‘박기소의 아이디어’ 작품집에서(2010년 거북이 북스)
△ 카툰 ‘구두조립 말’(2011년 작)
△ 박기소 ‘이색 만화전’
사진과 로봇 합성
△ 박기소 초대전 카탈로그 (1998년 2월 대전)
△ 박기소의 아이디어 발행 (2010년 거북이 북스)
△ 동아 LG 국제만화페스티벌 팬사인회 (2005년 7월)
△ 이명박 전 대통령(당시 서울시장)과 함께 (2006년 5월 시카프 개막식)
(좌 : 박기소, 이현세(만화가협회 회장), 이명박(서울시장))
△ 박기소의 아이디어 전 개막식 (2010년 12월 한국만화박물관 카툰갤러리)
(좌 :김광성, 이용철(한국만화영상진흥원 본부장), 장태산, 박기소, 박기준, 조항리, 조성황(스토리작가협회 회장), 임형택(한국만화영상진흥원 원장))
△ 시카프 개막식 오찬장 (2013년 7월 28일) (좌 : 박기준, 김기혜(여성만화가협회 회장), 박재동, 김동화, 박기소)
박부길
1942년 충남 부여 출생(본명 전래식). 동양화가의 꿈을 안고 홀로 상경, 서라벌예대 미술과에 입학하였고, 그 후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역시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에 따라 학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가지가 그린 만화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찾아 다녔다. 학창시절부터 그림 기초가 탄탄하였던 그는 다행히 ‘명마 킹’, ‘흙’ 등의 작품으로 무난히 데뷔하기에 이른다.
1973년 순진하고 착한 소년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밝고 명랑한 어린이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그려 나갔는데, 이것이 어린 독자들에게 잘 먹혀들었다. 성숙해지면서 ‘소년 이소룡’ 등 자기만의 그림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970년대 중반에는 독점출판사 합동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군소출판사 임창(땡이문고), 윤동근(화문각 사장) 등과 연대하여 출판업에 뛰어들어 게릴라식 판매 또는 틈새시장 판매처를 개척해 나가기도 했다.
당시 신문가판대에는 고우영의 ‘삼국지’,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등 4.6배판의 얄팍한 성인만화책들이 진열되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는 반공만화 ‘김일성의 침실’을 그려 가판대에 올렸다. 그러나 결국 이것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의 눈총을 받아서 출판업을 접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한동안 중단했던 한국화 작업과 원고 작업에만 전념하면서 필자가 몸담고 있던 친목회 ‘만필회’의 회원으로 가입, 만화가협회의 5, 6대 이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198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한국화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대한민국 최고 미술대전 수상은 만화를 우습게 여겨오던 정통미술계에서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로 기억된다.
한국화가로 그리고 대학교수로 경남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호는 그의 고향 백마강에서 가운데 자를 생략하여 ‘백강(白江)’이라 지었다.
오랫동안 만화가 생활을 하면서 박부길 작가를 도왔던 제자로는 낚시만화가로 잘 알려져 일본 잡지에 연재, 단행본까지 출간했던 오세호 작가와 광주만화학원 원장, 세한대학교 교수인 조득필 작가 등이 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수상한 후해도 압구정동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목우회’ 등 화단멤버로 작품 활동을 했고, 전시 때마다 카탈로그에 (사)만화가협회 이사였다는 경력을 또박또박 적어 넣으며 만화가였다는것을 자랑스럽게 알리던 박부길 작가가 기억에 생생하다. 화단에서도 더욱 더 주목받는 거목이 되기를 옛 동료로서 기원한다.
△ 산 106×98.5cm(1994년)
박부길(전래식)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화부문 대상 수상작품
△ ‘스파이맨’ (1966년 진흥문고 발생)
영웅주의 활극 시리즈로 한국판 코미디 슈퍼맨
△ ‘스파이맨’ (1966년 진흥문고 발생)
통쾌한 선과 악의 대립으로 독자들을 즐겁게 했던 시리즈
△ ‘노도’ (1967년 합동문고 발행)
순진하고 착한 청년이 끝내 울분을 터뜨린 복수극
△ 1972년 국기원 건립과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창립,
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우승 붐을 타고
‘태권위력’도 발행되었다.(1973년 파랑새문고 발행)
△ ‘김일성의 밀실’(1977년 부길문화사 발행)
군사정부시절, 반공극화로 펴낸 에로틱 성인 성인극화
당국의 눈치를 보며 제목을 ‘침실’에서 ‘밀실’로 개제하였다.
△ 카툰 ‘작가정신’ (한국만화선집 1975년)
△ 한국만화가협회 전(1975년)
(앞 좌 : 김인홍(사무국장), 김용도, 김호, 김만택(편집장), 이상무, 김웅
뒷 좌 : 이소풍, 박부길(전래식), 김준, 이상호(회장), 이종세(사장), 금성, 김기태, 박진우, 박수산)
△ 만필회 축구단(1977년 5월 동도공고 운동장)
(앞 좌 : 최운정, 박영수(마스코트), 차형, 김정수
뒤 좌 : 박수산, 박부길(전래식), 이소풍, 김태곤, 박기준, 여태수, 이우봉, 심명섭, 정훈)
△ 만화가협회 야유회(1976년 10월 한탕강 상류 임꺽정 은거지)
(앞 좌 : 김인홍 국장, 한국일보기자 김찬, 박진우,
뒷 좌 : 박부길(전래식, 국전 한국화 대상), 이우봉, 서정철, 박기정, 이갑호, 박기준, 권영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