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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제 漫步만보_ 원로 만화가 순례 ② 김기백

1935년생인 김기백은 영남 지역에서 주로 한옥과 오래된 절의 보수와 설계를 맡아 명성이 자자했었던 건축 전문가 부친의 슬하에서 비교적 넉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 사이즈가 여느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 커서, 의술의 힘을 빌려 치료를 해볼 엄두까지 내보았었다는 어린 날의 김기백은, 성년이 되어서도 무언가 생각에 몰두하노라면

2017-03-09 조관제




과학자를 꿈꾸며 책 속에 파묻혀 살던 소년과학자를 꿈꾸며 책 속에 파묻혀 살던 소년


1935년생인 김기백은 영남 지역에서 주로 한옥과 오래된 절의 보수와 설계를 맡아 명성이 자자했었던 건축 전문가 부친의 슬하에서 비교적 넉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 사이즈가 여느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 커서, 의술의 힘을 빌려 치료를 해볼 엄두까지 내보았었다는 어린 날의 김기백은, 성년이 되어서도 무언가 생각에 몰두하노라면 무의식적으로 자꾸 머리가 왼쪽으로 넘어가곤 한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미술에 재능도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오로지 비행기나 탱크 같은 것을 만드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독서광의 기질도 있어서 김래성, 정비석등의 작품을 위시하여 국내 소설을 거의 다 읽었으며, 서양의 고전으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탐닉하기도 했으나,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평가는 “고전이란 게 이렇게 따분하고 지루한 거구나” 하는 식이었다 하니, 학생 시절의 김기백은 문학적 취향에 있어서는 호불호가 분명한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김일소(본명:김한성) 선생의 만화가 실렸던 <국제신문>의 독자 투고에 응모하여 김기백의 작품이 여러 차례 실리기도 했는데, 그 인연을 핑계로 신문사를 찾아가 <국제신문>사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던 김일소 선생을 만나게 된다. 당시에는 만화가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김일소 화백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의 만남이었는데, 실제로 김기백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만화 대본소를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공대에 합격을 했지만 김기백은 당시 돈암동에 있었던 서라벌 예대로의 입학을 결심한다. 극작가 유치진, 시인 박목월, 홍성기 감독과 같은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교수로 재직 중인 당시의 서라벌 예대가 그에게는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여졌었던 것이라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유학 생활은 부친의 타계, 연이어 기울어진 가세와 군 입대 등의 악재와 물려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게 된다.

그 무렵 부산에서 가장 번화했던 광복동에서 친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품점 점원으로 있었는데. 친구가 퇴근하면 양품점 위층에 있던 음악다방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며, 세미클래식 같은 걸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만화가들의 그림도 몇 점 전시되어 있었던 그 다방에서 같은 또래 종업원들과 친해져서 메모지에 캐리커처를 그려주었는데, 그들은 김기백을 그림 잘 그리는 ‘삐딱이’ 아저씨라 불렀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다방 구석자리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들 나이 또래의 젊은이를 가리키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함께 술자리 할 것을 제안한다.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모두가 거나해질 즈음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사연인즉슨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김 모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애초 원고료 외 방세까지 지원받는 꽤 괜찮은 조건으로 어수선한 서울 생활을 잠시 접고 내려와, 김 모가 수주해온 크리스마스카드용 삽화 작업을 도맡아 처리했는데 어느 날 김 모가 수금한 돈을 다 챙겨 야반도주를 해버렸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이가 훗날 “주먹대장"으로 한국 만화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김원빈이었다

만화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김기백은 이런 인연으로 만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기본 상식에 대해 김원빈 으로부터 듣게 되었지만, 만화를 직업의 대상으로 생각해본바 없었기에 그저 김원빈과의 술자리에만 가끔씩 올라오는 변변찮은 안주거리밖에 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꼬여버린 생활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서울로 다시 올라간 김원빈과의 인연도 훗날을 기약하지 못한 채 그곳 부산에서 오랫동안 쓸쓸한 기억으로만 멈추게 된다.

무작정 가출한 청년에서 시사 만화가로...

부산에서의 무의미한 생활에 진력이 난 김기백은 친구들과 함께 자원입대를 하지만, 신체검사 결과 거리 감각에 문제가 있는 시력 장애라며 귀향조치를 받는다.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내던 김기백은 어느 날 저녁 분노와 무기력함만이 가득한 술자리를 걷어차고 무작정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다시 들어온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서울 관수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던 고교 동창의 약국을 임시 거처로 삼아 대책 없는 서울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지만, 서울에서도 변변한 일을 찾지 못한 김기백의 일상은 무료함과 쓸쓸함의 굴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었다고 한다. 간단한 음식으로 아침 요기를 대신하고 문화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명동에 있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상호조차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공기만이 자욱한 다방으로 출근 아닌 출근을 한다.

어릴 적 친구가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그 다방에서는 계란 노른자를 띄운 모닝커피를 팔았는데, 김기백에게 흰자위 모아 둔 것을 프라이로 구워서 커피와 함께 내놓는 것으로 허기를 달래주기도 했고, 때로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면, 교대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가서 아침부터 매혈을 한 돈으로 순대 국밥을 사 먹고 하루를 보내곤 했다.

친구들에게 얻어만 먹는 것이 미안했던 김기백도 매혈을 시도해보았지만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을 당한다. 그마저도 끼니를 해결 할 수 없는 날이면 홀로 슬그머니 나가 명동공원에서 고구마를 삶아 파는 할머니에게 고구마를 하나 얻어 다방에서 냉수 한 잔과 함께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이렇듯 벗어나지 못할 듯 짙게 드리운 무기력한 일상은 다방으로 찾아온 전남매일 서울지국의 아무개 기자와의 만남으로부터 그 공기(空氣)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전남매일신문의 시사만화가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다른 만화가를 찾고 있었는데, 다방 종업원들한테 그려준 김기백의 캐리커처를 우연히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기성작가를 초빙할 형편이 안 되는 신문사의 형편도 말 못 할 한몫을 하긴 했다.



당시 친여 성향인 전남매일신문 서울지국의 제안을 받은 김기백은 흔쾌히 시안 작업을 시작했다. 가판대 신문들을 사들고 신문에 실린 여러 시사만화를 참고로 하여 시대 상황에 대한 표현 방법도 고민해서 네 컷의 시사만화를 완성했다. 원고를 넘긴 이틀째 되는 날, 본사의 사장이 마음에 들어 하니 바로 거래를 하자는 반가운 회신이 왔다.
김기백은 내친김에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신문사에 이야기하고 그 당시 서울에서 제일 방세가 저렴했던, 응암동 산 8번지 달동네에 자신만의 단칸방까지 얻어낸다. 이재민을 위해 만들었다는 단층 주택단지였던 응암동은, 방세가 싼 대신에 공동화장실에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밤에는 촛불을 세 자루 켜놓고 작업을 했으며, 당연히 교통도 안 좋았던 곳이었다. 
만화를 그저 귀동냥으로밖에 배울 수밖에 없었던 김기백 이었지만, 군사정부에서 민심 수습을 위해 개최한 경복궁 박람회 현장을 취재한 스케치가 신문사 내부에서 꽤 좋은 반응을 얻게 되는데, 그야말로 인생사 새옹지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첫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나비 영감"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독창적인 주인공을 설정할 걸 하는 생각도 들지만, 네 칸 만화의 기본인 기승전결도 모르던 김기백 이어서 캐릭터까지 고민할 수 있는 이론적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었다.
‘나비영감’으로 연재를 시작을 하며 시사만화의 맛도 조금씩 깨치고 있을 즈음 김기백의 감각을 높이 산 본사 사장은 그를 아예 시사만화가 겸 전남매일신문 서울지국 기자로 발령을 내주었다.
지국에 정식으로 출근해서 필요한 취재도 나가고, 사진도 찍고 일손이 모자라는 지방신문사의 서울 지국에서 김기백은 정치와 사회, 연예 등 모든 영역을 커버했다. 심지어 신문사 연재소설이 펑크 날 때면 대필도 대신한 적이 있다고 하니 생각해보면 웃픈 일들이었으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었던 것은 김기백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운명이었음은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신문사내에서 팔방미인 같은 역할을 하던 김기백도 철도요금 인상 건을 다룬 시사만화로 필화사건을 겪게 된다. 서울과 광주, 가끔 부산도 기차로 다니는 김기백으로서는 차비 인상 정책 발표에 화가 난 나머지, 철로를 곡괭이로 찍으려고 번쩍 든 장면의 만화 컷을 그린 것이다. 언론사의 시사만화라도 공공기물을 파손하는 만화 컷은 어떤 이유로도 불순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신문사 논조가 친여 쪽이라 특별한 제재를 받지 않고 신문회관에 출석해서 경위서 한 장만 쓰고 나왔는데, 그 당시 언론 검열하는 기관으로부터 본사 편집국에다 은근히 압력을 가한다는 분위기를 느끼고 결국엔 사직을 하게 된다.

과학자의 꿈을 접고 생존을 위해 천직이 된 아동만화가

신문사를 퇴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김기백은 만화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객지에서 생계가 막막했었던 그에게 때마침 공고된 대한문화공사의 구인 모집 광고가 다시 한 번 그를 만화인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월트디즈니 만화의 판권을 얻어 출판 사업을 하는 대한문화공사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기 발행된 월트디즈니의 만화책을 한국어 버전으로 재발행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면접을 보고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한 김기백에게 회사에서는 신문사 경력도 있고 수염이 많아 나이가 들어 보였던 그를 아예 20여명 되는 만화 지망생들을 관장하는 편집장으로 임명을 한다. 

하지만 대한문화공사의 디즈니 만화출판사업은 판로를 확보하는 문제 외 사업 경험과 운영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불과 일 년 만에 사업을 접게 된다. 대한문화공사의 사세가 기울어지고 있을 무렵에, 만화 출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필름 제판 기술자가, 대한문화공사의 인쇄 담당자에게 신인 만화가들 몇 사람을 데리고 출판을 하고 싶다는 부탁을 받았다며 김기백에게도 참여를 권한다.

신문사에서 시사만화 네 컷 만화만 해 본 김기백은 단행본 만화 작법엔 무지했다. 출판사 동원문고에서 결합한 어느 동료에게, 원고지는 팔절 모조지에, 만화책 사이즈 비율로 확대한 원고지 한 장에 두 쪽으로 나눠 그리는 가장 기초적인 단행본 만화 작법부터 배워가며 원고를 시작했다. 그러나 김기백의 어설픈 화풍을 본 출판사 대표가 극화보다는 독자층이 많은 명랑체 만화로 작품을 해보라는 권유를 했고 이렇게 시작한 작품이 데뷔작 <날라리 어사>이었다.

옥황상제가 지상의 인간들이 엉망진창으로 사는 걸 보고 지구로 암행어사를 보내 비리를 척결하고 평정한다는 내용의 60여 페이지 분량의 단행본 작품이었는데, 지방 만화 대본소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고 한다.
책은 그런대로 잘 나갔고 비록 신인 원고료였지만 생계에도 도움이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동원문고’의 사세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생계형 만화가의 인생유전은 이후로도 함께 일하는 출판사의 성향에 따라서 명랑만화와 순정만화를 울며 겨자 먹기로 넘나들며 몇 번의 고달픈 사연들을 남기게 된다.


당시의 순정만화 독자층은 만화장르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었기에 신인 작가들이 생존하기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김기백은 동료가 가지고 있던 일본판 소녀만화 잡지를 참고로 하여 난생 처음으로 순정만화 『어디로 갈까』를 그렸다. 완성된 원고는 만화사전자율심의위원회에서 심의를 받은 후 출판을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의 이름 대신 김인숙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한편, 창설사(출판사)에서 알게 된 김찬(본명:김영두), 구성천, 박태종 같은 동료들은 김기백에게 명랑만화에 대한 작업을 포기하지 말고 끈기 있게 다시 해보라는 진정 어린 권유를 하곤 했는데, 참고할만한 일본 만화잡지들과 명랑만화를 주로 다루는 신촌지역의 대형 출판사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는 순정만화를 그리다가, 사장이 퇴근한 저녁에는 개인적으로 명랑만화를 그리며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구성천의 소개로 제일 문화사 편집부의 김귀옥을 소개받았고, 그녀는 다시 김기백을 제일 문화사로 이끌었다. 제일 문화사 이준석 사장은 원고를 들고 찾아 간 김기백과 원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래층에서 근무하던 서울 총판장 홍순창을 전화로 불러 그 자리에서 바로 작품을 읽어보고 평가해보라고 했다.
서울총판장은 서울에 판매될 만화책을 공급하는 책임자로서 그의 호불호 한마디에 만화작가의 생사여탈권이 결정되곤 했다. 긴장된 리뷰 시간이 흘러가고 이윽고 홍순창의 평가를 전해들은 이준석 사장은 금고에서 돈을 꺼내 주면서 원고에 표시한 부분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가져 오라고 했다.마치 돈과 원고와 짧은 눈 맞춤만으로 이루어진 선문답이나 다름없는 자리였으나 그 순간은 김기백이 드디어 만화계의 주류로 성큼 들어서는 계기가 만들어진 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한 큰 액수의 원고료를 선불로 받은 김기백은 신촌역 근처에 있는 여인숙에 임시 거처를 정해 작업에 몰두하기로 했는데, 창설사와의 거래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사정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후 김기백은 제일문화사의 배려로 회사 소유의 한옥집 부엌 옆 골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좁은 만화판이라 김기백이 제일문고와 거래를 한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고, 창설사와는 자연스럽게 거래가 끊어졌다.

외톨이 만화가에서 만화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다.

그 당시 만화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박기당은 김기백에게 『목탁』시리즈로 유명한 최상권(필명:문철) 만화자율위원회 회장을 도우라며 전격적으로 만화자율위원회 이사로 추천을 한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1968년부터 문공부가 주관한 곳이었는데, 전문성이 없는 직원들의 사전심의에 대해 만화가들이 불만이 많아지자 만화가들을 직접 참여시켜 만화자율위원회를 만들었다.


잡혀가는 도둑이 포승줄에 묶여 있으면 너무 잔인하니 포승줄을 지워라. 남녀가 단둘이 차에 타고 있으면 어린이들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이 있으니 좌석 가운데 할아버지를 그려 넣어 수정하라. SF 만화를 그릴 때에는 버튼으로 조작을 하면 다른 모형으로 변하는 비행체를 표현하자 너무 허무맹랑하게 과장을 했다고 수정을 요구하는 등, 만화다운 기발한 상상력을 말살시키는 전 근대적인 심의 풍토에서 명랑 만화가 김기백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60년대의 우리나라 만화계는, 아동만화의 인기 때문에 독자가 줄어들어 피해를 본다고 주장하는 아동 문학가들과 동화책 출판사들이 만화계를 향해 전면전을 불사하던 시절이었다. 해마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전후해서 불량만화를 단속하고 불태우는 퍼포먼스까지 벌이며 언론을 내세워 만화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곤 했다.

5월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부터 신문사, 잡지사를 다니면서 아동만화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아동만화자율회 최상권 회장을 비롯한 많은 만화가들이 노력했다. 최상권 회장은 그런 활동의 영향으로 갑작스레 과로사하고 만다.
김기백의 원고를 처음으로 검토했었던 제일문화사 홍순창이 바로 최상권 회장의 사위이기도 했는데, 훗날 손의성, 백산 등이 주도하여 만화계는 그의 업적을 기려 망우리 묘역에 추모비를 세웠다. 

제일문고에서는 당대의 인기 작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서사구조가 있는 극화체 만화로 인기를 구가했던 김종래, 박기당, 박광현 등이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 시절 최정상급 명랑만화였던 ‘까불이’ 시리즈를 그린 김경언과 ‘땡이 시리즈’ 의 임창(본명:임종우)도 중요한 만화가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일문고로 옮긴 이후로 김기백의 작품도 인기가 날로 높아져 명랑만화에 대한 자신감도 넘쳐나게 되었다. <고물딱지>, <로맨스 삼촌>, <내 이름은 니그로>, <서울깍두기>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폭발적인 반응이 함께 했고, 더 많은 작품 제작을 위해 제일문고 사장은 문하생이 늘어나는 대로 작업실을 확장해주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김기백은 한 달에 두세 종류의 제목을 단 이십 여권의 작품을 쏟아냈는데, 당시의 그의 작업실 스텝 수가 삼십 여명 내외까지 이르렀다. 김기백의 문하생 출신으로 독립해서 인기 작가로 성정한 만화가로는 김영하, 윤소영, 김경복, 남계식 그리고 김숙 등이 있다.



민애니와의 만남과 결혼.


김기백은 같은 출판사에서 거래를 하던 민애니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녀는 순수회화를 전공한 신인만화가였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2남 1녀를 홀로 키우던 김기백은 1969년에 민애니와 결혼을 한다. 뒤늦게 만화계에 입문한 홀아비 김기백이, 미혼이었던 민애니와 결혼을 한 사건은 한동안 젊은 만화가들 사이에서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받으며 한동안 화제가 됐다.



그리기 쉬운 명랑체 만화를 그려 힘들게 그리는 극화제 만화가들보다 인기가 좋았던 이유, 단행본 작가라는 이유로 잡지 연재를 하면서 겪었던 차별, 그리고 민애니와의 결혼 등 이런저런 이유로 만화계는 김기백을 외롭게 만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줄기차게 잘 나가는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며 극복해 나갔다.
민애니는 살면서 김기백의 아이들에게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큰소리친 적이 없었던 대범하고 관대했던 엄마였다. 다만 돈 관리가 서툰 김기백 때문에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원망스러워할 뿐이었다고 한다.



순정 만화 단행본에서도 주가가 높았던 민애니는, 육영재단에서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 <보물섬>과 <댕기>를 비롯하여 <소년왕국> 등의 잡지에도 오랫동안 연재를 한 인기 작가였다.

김기백은 무협만화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이재학과는 절친 이다. 이재학은 명랑만화가로서는 최고봉이었던 김경언 문하생 출신이어서 화풍이 김기백과 같은 만화체 작가라며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며 가까이 지냈다. 
이재학이 부엉이 문고(대표:오학운)와 거래를 할 때, 그의 명랑만화는 판매 실적이 신통치 않았는데, 부엉이 문고 사장이 극화체로 바꿔 그리라고 강압적으로 요구를 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만화체 작품만 해 왔던 이재학은 사장의 요구에 한동안 고민도 했지만, 고집을 버리고 극화체 만화가로 변신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재학은 무협 만화로 변신 후 부엉이 문고에서 중심 작가로 빛을 보게 된 만화가가 된 셈이다. 
이재학의 무협만화는 일본에까지 소문이 나서 만화잡지 출판 명문 ‘고단샤(講談社)’에서도 청탁을 받아 연재도 했다. 일본으로 원고 협의를 할 때면 항상 김기백과 함께 동행을 하며 관광까지 시켜 주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대동맥 수술 중 깨어나질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우정을 잊지 못한 김기백은, 최상권 회장 추모비를 세웠던 것처럼, 1993년에 주변의 뜻있는 분들과 뜻을 모아 이재학의 추모비를 세우는데 앞장을 섰다. 

한 동안 아동만화 붐으로 만화 출판은 호황을 맞이했지만 인기 작가들 몇몇 이외의 만화가들에게는 원고접수수량을 마음대로 제한하고, 원고료를 착취하는 출판사의 전횡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출판업자들의 이런 부당한 처사에 맞서기 위해 박광현, 박기당 등 극화체 만화가들이 주축이 된 <오성문화사>가 설립된다.
‘작가가 주인이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작가가 직접 출판을 해서 제대로 된 원고료를 받는 출판사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만화계의 대부 같았던 박기당의 권유로 인기 작가 김기백도 오성문고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젊은 시절 부산 다방 룸펜 시절 우연히 술친구로 몇 번 만났었던 김원빈을 십여 년 만에 다시 조우하게 된다.

오성문고에서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여유가 생긴 김기백은 김원빈을 비롯하여 스포츠 만화로 인기 작가였던 백산(본명:최일부), 동경 4번지의 손의성, 이근철, 임창의 문하에 있었던 하고명 등과 같은 인기 만화가들과 교류의 폭을 넓힌다. ‘한국아동만화가협회’태동에 역할을 하다 
작가들이 의기투합해서 시작한 오성문고는 처음에는 순항을 했다. 그러나 만화가들을 위한다는 순수한 생각만으로 시작한 사업이라 구성원들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당연히 영업력도 떨어진 조직이라 판매는 자연스레 부진해졌고 점차 적자가 누적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자금 문제와 내부 의견 충돌로 인한 경영상의 난맥에 처한 오성 문고를 이어서 <합동 출판사>가 설립된다. 인쇄업자였던 이영래 사장이 합류했으며 장사꾼다운 발상으로 저렴한 제작비 기반의 출판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극대화해나갔다.
합동출판사는 이후 ‘만화책은 보고 버리는 책이다. 좋은 종이, 좋은 잉크로 잘 만들 필요가 없다.’ 라는 전략 하에 만화 출판계를 평정해 나가는데 결국 이런 경쟁력은 견제할 수 없는 전횡의 불씨를 키우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합동 출판사로 인한 이런저런 전횡이 이슈로 떠오르던 시기에 ‘한국아동만화자율위원회’가 ‘한국아동만화가협회’로 새로 발족되고, 김기백도 만화계를 위해 필요한 여러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문공부 관계자와 협의를 하며 아동만화가협회를 창설하는데 역할을 했다.
‘도전자’등 만화 단행본으로도 이미 널리 알려지고 동시에 중앙일보에서 시사만화를 담당했던 박기정이 아동만화가협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평소 만화 출판에 관심을 가졌던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은, 합동출판사의 횡포에 불만이 많은 만화가들을 규합하여 신문사에 만화 사업부를 만든다.
참여 제의를 받은 김기백도 <한국일보>라는 큰 배경을 가진 출판사가 아동만화를 시작하면 우리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도 좀 나아지리라는 믿음으로 조건 불문하고 여러 동료 작가들과 함께 소년한국일보사의 만화가로 합류를 한다.



이후 소년한국일보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명랑만화에 스스로 한계를 느끼며 지쳐가고 있을 무렵, 후배로부터 ‘고거창’이라는 캐릭터를 설정해서 변신을 해 보자는 제안을 받고, 새로운 화풍으로 반 삽화체 극화 <인생 마라톤> 시리즈를 비롯하여 <꼬마우주인>, <만화도사> 등의 작품을 시도하며 재기에 성공을 한다.
그 시절 만화 단행본 시장은 명랑물 만화 독자가 줄어든 반면 삽화 컨셉의 만화가 상승세를 타고 있을 때여서 타이밍을 잘 맞춘 것이었다.

행진만화미술학원 개원과 출판사 행진문화사 설립하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 문화 개방 정책의 흐름을 타고 한국 만화출판 시장을 향해 일본 만화들이 쏟아져 들어와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국경 없는 만화 시장의 흐름에 대한 안목과 정보로 인해 독자들의 시야도 폭넓어지고, 이미 일본 시장에서 검증받은 수준 높은 좋은 작품들이 빠르게 번역되어 쏟아져 들어올 무렵, 김기백은, 스스로의 능력에 한계를 느껴 작품 활동을 포기 하고야 만다.

노후는 시골에 가서 농장이나 하면서 편한 여생을 보내 싶었던 김기백이었지만, 넉넉지 못한 자금을 끌어 모아 1993년, 서울 강북구 미아3동 전철역 앞에 <행진만화미술학원>을 어렵게 개원한다. 펜을 놓은 만화가가 할 것은 학원 운영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체계적인 미술 공부를 한 민애니의 역할에 힘입어 6개월 기본 과정의 커리큘럼으로 개원한 <행진 만화학원>은 학생들이 입소문을 타고 몰려들었다. 
수강생 중에 가능성이 보이는 학생의 작품은 선정해서, 김기백이 설립한 출판사 <행진 문화사>를 통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여 판매까지 했다. 비록 적자가 나는 출판이었지만 수강생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발간한 책을 출간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IMF가 터지면서 서서히 학생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몇 달 정도 지나면 회복될 거라는 그의 희망은 2년을 넘기면서 건물 임대보증금까지 다 날리게 될 지경까지 내몰렸다. 거의 몇 십 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계속 일을 했지만 체계적인 돈 관리를 못해 금전적인 여유도 없었고, 재기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라는 생각에 늘 지쳐있었다. 집 주인이 사무실을 비워 달라고 할 때는 앞이 보이지 않아 몸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1999년. 
충청도 어느 시골의 집을 빌려 줄 테니 내려오라는 민애니 지인이 건넨 구조의 손길을 붙잡고 그제야 간단한 집기들만 챙겨 트럭에 실고 내려가게 되는데, 그것이 김기백 만화유전의 마지막 여행이 되는 듯 했다. 

아직도 김기백은 푸르다

충청도로 내려온 김기백은, 개 두 마리와 놀고, 낚시와 좋아하는 영화를 즐기며 세속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혼자서 놀 수 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좋았다.
프라모델 조립하는 취미는 작품 활동으로 분주했었던 시기에도 틈틈이 이어왔었는데, 범선 한척을 완성하기 위해 2년을 공들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취미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프라모델 조립은 고통스러운 작업이겠지만, 그에게는 작품 생각을 잠시 잊게 해 주고 몰입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프라모델 작업의 정확도와 정직함을 요구하는 특성이 마치 만화작업의 과정과 맞닿아 있는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유롭게 소일하던 김기백의 충청도에서 생활은, 미국에서 공부하던 딸을 돌보기 위해 민애니가 떠나 버리면서 끝이 난다. 아무 인연도 없는 곳에서 민애니까지 없는 충청도에서 혼자 있을 이유가 없어, 혼자 살만한 주거지를 찾다가 수원으로 옮겨 혼자 살고 있다.
미국서 공부를 끝낸 막내딸과 민애니가 살고 있는 서울 거처로 김기백도 와서 함께 살자고 했지만 거절을 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어질러 놓기를 좋아하고, 귀가 어두워져 음악이나 텔레비전의 볼륨을 크게 틀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 때문에, 같이 살면 반드시 생길 갈등이 두려워 스스로가 밝힌 자유로운 성격대로 ‘흐르는 대로 살아간다.’

순발력 있는 김기백의 스토리 작법

김기백 만화의 인기 비결인 아이디어 발상법에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동기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순수한 창작이란 건 없다고 믿는 그는,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영감을 받아,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만화가다운 상상력으로 과장해서 진화시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기작인『서울깍두기』는 ‘서울깍두기’란 식당에서 설렁탕을 먹던 기억을 떠올려 소재로 삼아 작품 제목과 주인공 이름을 깍두기로 한 것이고, <행운아> 역시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소재가 재미있어 구상한 작품이었다고 했다.
<깐돌이 만세>에서 캐릭터 깐돌이는, ‘똘똘이 같은 아이’라는 부산의 방언을 빌려 이야기를 만들었다.

김기백은 스토리에 매달려 작품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얼개가 구상이 되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특정 성격의 등장인물을 생각해서, 주인공이 얼개 안에서 성격대로 행동하도록 하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놀 수 있도록 하면 드라마가 된다고 한다. 만화가는 작품에 몰입하다보면 캐릭터의 성격을 만화가의 취향에 맞춰 가고 싶어 하는데 이야기를 망가뜨리는 이런 유혹을 경계하라고 한다. 

지금 어느 매체를 봐도 어린이 만화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김기백은 안타까워한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보고 자라야지 자라서도 만화에 대한 매력을 이해하는 우군이 되는 것이 아닌가?! 컴퓨터나 휴대폰에서 횡행하는 오락이나 게임에 빠져 병들어가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 만화를 출판하는 회사나 만화가들을 위해 정부나 지자체의 전략적 지원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여운 말썽꾸러기 소년 ‘깍뚜기’를 등장시켜 6, 70년대 우울했던 시절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인기작가 김기백은, 3등을 하든 4등을 하고, 꼴등을 하더라도 자기 페이스를 지키며 살아 온 삶에 감사하고 있다. 
지금은 80대 노인이 되어 기력도 많이 떨어지고, 치아도 틀니에다, 당뇨까지 있는 몸이지만, 특유의 호기심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좀 더 오래 살면서 지켜보고 싶다는 선생님의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헤어졌다.



김기백 (본명 : 김기태(金基台))

1935년 부산태생
1956년 부산공업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중퇴
1961년 《전남매일신문》 네 칸 만화 〈나비영감〉 연재(~ 1963년)
1963년 동원문고, 창설사 등에서 만화단행본 작업(~ 1964년)
1964년 제일문화사에서 본격적인 만화단행본 작업 시작
1966년 오성문화사에서 만화단행본 작업
1968년 (사)한국아동만화가협회 초대임원 역임
1972년 (사)한국아동만화가협회 4대, 5대 부회장 역임(~ 1973년)
1973년 소년한국일보사에서 만화단행본 작업(~ 1980년)
1980년 향지서, 우진각, 우종 등의 출판사에서 만화단행본 작업(~ 1992년)
1993년 행진만화미술학원 운영, 도서출판 (행진문화사) 운영(~ 1999년)
1996년 격주간 《만화정보신문》 및 《무용예술》 등에 연재

수상경력
1973년 한국아동만화상 윤리상 수상
2005년 황금펜촉상 수상

작품연보
1) 신문·잡지 연재
1964년 대중잡지 《로맨스》 로맨스 삼촌, 《부부》 소꿉엄마 등에 연재
1970년 《소년세계》 <깐돌이 만세>, 연재
《소년한국일보》 <개구장이 박사>, 연재
1996년 《무용예술》<영아의 뮤용일기>, 연재
1970년대 《소년중앙》 등에 연재

2) 단행본
1963 <날라리 어사>/ 동원문고, <어디로 갈까>/ 창설사
1965 <고물딱지>, <내 이름은 니그로>/ 제일출판문화사
1966 <로맨스 삼촌>, <로맨스 멍멍>, <서울 깍두기>/ 제일출판문화사, <행운아>, <어린이 극장>, <아차군 재치양> <아차차 명탐정> <아차 검객> 외 다수 / 오성문화사,
1975 <인생마라톤과 출발> <인생마라톤 시리즈>, <소년학도병>, <고거창의 빨간 바지> 외 다수 / 소년한국일보사
1979 <만화도사>, <꼬마 우주인>, <우주 심청전>, <청색별에서 온 소년)> 외 다수
1986 <공포의 괴물투수>, <달려라 청춘>, <괴짜 강골 사나이> <왈가닥 괴물스타> 외 다수 / 우진각,
1993 <맹물신랑과 원더풀 새댁>, <외톨이 천재 복서> <괴팍 꼴찌의 보물찾기> / 행진문화사,
1998 <폭소 철부지도사>/ 행진문화사, <괴짜 총각의 결혼 복덕방>, <20대 벼락부자> <디스코 호떡 총각>/ 우종, <강촌괴물 상경기>, <걸물청춘시대> <고거창 임자 있었네> 외 다수 / 우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