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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밥장, <대물 (김삼 작)>

김삼 작가는 1941년에 태어나 62년에 만화계에 데뷔하여 66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잡지인 <소년중앙>과 <보물섬>에 명랑만화를 연재하였다. 소년동아일보에 십여 년간 연재한 <소년 007>과 강 씨라면 피하지 못했던 별명 <강가딘> 모두 그의 작품이다.

2017-03-21 밥장

야한 만화엔 저절로 손이 간다. 작품성이나 평가는 미뤄둔다. 페이지를 넘기면 피와 살이 튀기며 여자들은 느닷없이 가슴을 드러낸다. 교복을 입은 거대한 소녀 로봇을 타고 다른 차원 속 싸움터를 누비는 마츠모토 지로의 <여자 공병>, 제목부터 음험한 토쿠히로 마사야의 <남편은 건강하고 개가 좋아>, 영화로 만들었을 때 내용보다 의상이 더 궁금했던 오쿠 히로야의 <간츠>, 주인공은 괴상하고 이야기는 더 괴상하지만 여자만큼은 정성스레 그리는 미노루 후루야의 <낮비>와 <솔티니스>까지 야한 만화를 들자면 끝이 없다.



지난여름 삿포로에 갔을 때 우연히 만화 전문 서점에 들렀다. 앞쪽에는 제법 건전한 만화들이 놓여 있었다. 그 뒤로는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가볍게 뛰어넘은 모든 야함이 꼼꼼하게 분류되어 꽂혀 있었다. 표지만 봐서 잘 모를 수 있을까봐 인상적인 페이지를 뒷면에 붙인 뒤에 비닐로 싸두었다. 덕분에 몇 권을 집어 들었지만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심각한 덕후가 될 것 같아 슬며시 내려놓았다.
많은 손님들은 이미 즐겁게 선을 넘고 있었다. 계산대 뒤 점원은 어떤 야함을 가져오든 관심 없었다. 바코드만 꼼꼼히 찍을 뿐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니 그 나이 먹도록 만화를 읽어요? 그것도 야한 만화를’ 이라며 한심하게 여긴다. 그러면 ‘전 작가니까요. 가리지 않고 봐야죠.’라고 대꾸한다. 이게 무슨 변명이 될까 싶은데 의외로 잘 먹힌다.

야한 만화를 언제부터 좋아했을까? 언제부터 야하다는 느낌을 알았을까? 초등학교 4학년 봄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랑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같은 반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무척 싫어했다. 집은 가난하고 옷차림은 꾀죄죄했으며 공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부모들 극성맞기로 소문난 사립초등학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 날도 선생님한테 피리로 머리를 맞았다. 피리가 산산조각 났는데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되레 방글거리며 ‘석원아. 좋은 거 있는데 한번 볼래?’라면서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 가방에서 만화책을 꺼냈다. 말로만 듣던 빨간책이었는데 전혀 빨갛지 않았다. 표지 따위는 없었다. 눈썹 짙은 남자는 가슴 큰 여자를 한껏 더듬으며 옷을 벗겼다. 금세 맨살이 드러났고 나로선 전혀 해본 적 없는 몸짓을 하며 땀을 흘렸다. 어린이 잡지에서 보던 명랑한 만화는 아니었다. ‘이게 섹스야. 섹스.’ 와우. 섹스라니. 내 몸에도 달려있어 딱히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어린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어른들의 놀이였다. 담배와 술도 마찬가지였지만 섹스랑 달랐다. 담배와 술은 어른이 되어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섹스는 당장 하고 싶었다.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위 아닌) 섹스를 했다. 하지만 섹스는 늘 곁에 있었다. 초등학교 빨간책에서 중학교에는 비디오로 넘어갔다. <선데이서울>부터 해외잡지까지 차분히 넘나들었다. 책상 서랍을 꺼내 뒤편에다 김삼의 <대물>을 숨겨두고 몰래 읽으며 낄낄거렸다. 유머를 곁들인 작품 속 음담패설에 눈을 뗄 수 없고, 이야기야 어쨌든 그가 그린 허벅지는 늘 터질 듯하고 매끄러웠다.


김삼 작가는 1941년에 태어나 62년에 만화계에 데뷔하여 66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잡지인 <소년중앙>과 <보물섬>에 명랑만화를 연재하였다. 소년동아일보에 십여 년간 연재한 <소년 007>과 강 씨라면 피하지 못했던 별명 <강가딘> 모두 그의 작품이다.


80년대 후반부터는 <대물>같은 성인만화를 그렸다. 그 뒤로 어떤 작품 활동을 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만약 내 또래거나 더 어렸더라면 어땠을까. 한 가지에 푹 빠진 덕후들이 대접받고 ‘너만의 인생을 살라’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의 줄인 말)가 뜨고 있는 시대를 산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조용히 잊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