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틴에이저였던 세대에게 ‘비디오 게임’은 단순한 ‘전자오락’이 아니다. 게임은 우리 세대와 함께 태어났고 같이 자라난 새로운, 미지의 예술 형식(Art Form)이다. 나는 솔직히 문학과 만화와 영화는 지난 20세기에 이미 예술적 성취의 절정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앞으로 새로 나올 미래의 문학, 만화, 영화보다 나는 아직 내가 찾아 읽고 보지 못한 과거의 작품들이 더 궁금하다. 21세기의 문학, 만화, 영화는 20세기가 전쟁통에 일구어낸 유산을 그대로 상속받은 직계 후손일 뿐이며 사상과 표현 양식에 있어 여전히 그 자장과 영향 안에 머문다. 어쩌면 더 퇴보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과 회화는 더더욱 이전 세기로 가야 할지도?)
이상하게도 나는 50년대의 영화, 60년대의 문학, 70년대의 만화가 지금의 것들보다 훨씬 새롭게 느껴진다. 인간이 이들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의 극치는 과거에 거의 다 나왔고,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은 선배들이 찾아낸 공식의 재조립과, 테마의 느슨한 표절과, 미리 예견된 징후의 결과를 스스로 내보이는 것뿐이다. 물론 너무 이른 판단이겠지만, 어차피 내가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21세기는 세기 초의 일부분에 불과하고, 그 사이 이들 예술에서 경천동지할 새로운 무엇이 나오진 못할 거란 묘한 확신이 든다. 예술에 대한 산업의 잠식과 소외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산업에 의해 결국 상품이 된다. 팔리지 않으면 소외되거나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규격이 정해진 제품처럼 되어버린다. 질적인 저하가 뒤따르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비디오 게임은 애초에 철저한 상품으로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이 상품이 장차 예술이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다. 어느새 나머지 예술을 압도하는 규모의 IP(지식재산권)를 개발하여 팔아치우기 시작한 이 기상천외한 산업은 아직 그 형식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다른 외부 예술의 요소를 무섭게 흡수, 종합, 응용하면서, 내부에서는 다양한 장르와 포맷이 금방 죽거나 혼합되어 재생산되고 완전히 새로 탄생하는 중이다. 기존의 스토리텔링과 간접 경험 혹은 직접 체험으로서의 예술 이론과 개념 철학은 게임 앞에서 전면적인 개조와 혁신을 맞이한다. 실험과 업그레이드가 반복되는 이 산업의 역사는 이제 겨우 30여년 남짓. 게임은 우리 세대와 나이가 같거나 더 어리다. 그리고 우리처럼, 아직은 어른이 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주류 예술의 바깥에서 예술이라 인정해주거나 말거나, 지금은 ‘놀기’에 여념이 없다.
△ 오시키리 렌스케의 <피코피코 소년 슈퍼>(2015)는 아직 정발되지 않은 상태. <하이스코어 걸>로 야기된 ‘저작권 도용 사건’ 에피소드가 수록되어있다는데 궁금하다.
본질적으로 놀기 좋아하는 ‘유희(遊戲)의 인간(Homo Ludens)’에게 비디오 게임과의 만남은 가히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미 성장판이 닫힌 후에 비디오 게임과 조우한 기성세대는 되도록 게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길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머리에 피가 마르지 않았던’ 90년대 틴에이저에게 게임은 그대로 뇌리와 가슴에 강렬히 새겨졌다. 게임은 내 손으로 움직이는 만화요 애니메이션이었고, 내가 직접 연출할 수 있는 영화이자 문학이었다. 집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지만 더 먼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놀라운 체험. 우리는 게임 콘솔과 컴퓨터 같은 전자제품을 매개체(媒介體)로, 기계의 언어와 로직(logic)으로 작성된 프로그램과 정서적으로 교류했다. 말 그대로, 기계를 향해 인간이 마음을 ‘트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기계의 코드 너머에는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화와 마찬가지로, 역시 사람이 있었다.
유년기에 처음으로 만나 향유(享有)하는 문화가 인간에게 주는 영향은 대단하다. 어쩌면 이 시기의 경험이 한 인간의 자아와 한평생의 취향을 결정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렸을 적의 나를 지워 리셋(reset)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된다. 추억이란 지나가버린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근원적 경험의 기억이다. 회고(retrospect)하기엔 아직 이른 역사일지 모르지만, 비디오 게임을 통해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반추하는 새로운 자서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소개할 만화들이 그렇다.
△ 오시키리 렌스케 <피코피코 소년>(2009) <피코피코 소년 터보>(2011) 주원일 옮김, 미우(대원씨아이) 2014
집단 괴롭힘을 당한 주인공의 처절한 복수를 그려 한때 국내 여러 커뮤니티에서 ‘멘붕 만화’로 악명을 떨쳤던 <미스미소우 ミスミソウ>(2007)의 작가 오시키리 렌스케(押切蓮介). 그가 본명 칸자키 료타(神崎良太)로 직접 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 <피코피코 소년 ピコピコ少年>은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끝까지 추구했던 한 소년의 처절한 비망록이다. 학업은 등한시하고 이성과의 관계도 애당초 포기, 그 결과 3차원의 현실보다는 2차원에 열광하는 오타쿠의 길을 착실히 걷지만 이 책에 담긴 것은 후회나 회한보다는 “내 청춘에 후회 없다! 즐거웠으니 괜찮다!”는 떳떳한 선언이다. 괴기 호러로 유명한 작가의 작풍은 살짝 기분 나쁜 그림체라 호불호가 갈릴 듯하지만, ‘피코피코(게임기를 뜻하는 의성어. 우리말로는 ‘삐용삐용’이나 ‘뿅뿅’에 해당할 듯)’ 소년 즉 오락실에서 유년을 보낸 아케이드 키드의 추억은 국경을 넘어 한국의 독자도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다. 오락실과 불량식품과 비밀기지의 추억은 국적이 따로 없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패미컴’에게서 학력과 사랑을 빼앗긴 주인공. 오락실 게임을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콘솔 ‘PC엔진’의 중고를 구하기 위해, 저금과 세뱃돈의 전 재산을 털어 모르는 동네까지 자전거로 원정을 떠난다.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장대비를 맞아가며 헤매다 급기야 차에 치이는 뺑소니까지 겪고는 부서진 자전거를 버려둔 채 실의에 가득한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은 성탄절과 생일에 아무 것도 못해주어 미안하다며 어머니가 선물한 PC엔진의 신품. 그 시절에 삶의 ‘기적’이란 이런 식으로 존재했다. 속편 <피코피코 소년 터보>(2011)에 이르면, 자신에게 밉살스레 굴던 앙숙 여자아이와 게임 ‘뿌요뿌요’ 대결로 철저하게 패배를 안긴 주인공은 자신을 혐오하는 소녀에게 중학 시절 내내 무시당한 끝에 실연의 감정을 느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게임을 향해 이것도 분명히 ‘사랑’이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작가는, 후기에서 이 만화를 통해 자신을 긍정한다고 고백한다.
△ 야마모토 사호 <오카자키에게 바친다>(2015) 정은서 옮김, 미우(대원씨아이) 2016
게임에서 나름의 사랑과 자기 긍정을 찾은 고독한 아케이드 소년에 이어 콘솔 게임에 마음을 빼앗겼던 소녀를 만나볼 차례. 필자의 2016년 베스트 만화였던 <오카자키에게 바친다 岡崎に捧ぐ>는 작가 야마모토 사호(山本さほ)가 SNS에 올렸던 자전적 만화를 리뉴얼해 정식으로 지면에 연재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이런저런 친구들은 있었지만 끝내 혼자였던 피코피코 소년과는 다르게 이 만화는 주인공 ‘사호’ 외에 단짝친구 ‘오카자키’가 등장한다. 오카자키는 처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음침한 분위기의 안경 소녀였다. 우연한 계기로 놀러간 오카자키의 집, 유령의 집을 연상시키는 허름한 건물 내부에는 온갖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고, 실직 상태로 평일에도 집에 있는 오카자키의 아버지는 팬티만 입은 채 뒹굴뒹굴, 히스테릭한 동생은 걸핏하면 “죽인다!”는 비명을 지른다. 작중 최고로 미스터리한 존재는 어머니인데, 훌쩍 사라졌다 돌아오곤 하는 그녀의 손에는 항상 와인 잔이 들려있다. 그런데 사호는 이 방치된 가정에서 오히려 전에 없던 자유를 느낀다. 무엇보다, 오카자키의 집에는 ‘슈퍼 패미컴’과 ‘플레이스테이션’이 있다! 사실 오카자키에 대한 우정보다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먼저였던 사호는 친구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하며 파라다이스를 만끽한다.
사호를 만나 행복한 오카자키는 “난 아마 야마모토의 인생에서 조연이 되기 위해 태어난 거라 생각해.”라고까지 말한다. 사호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지지해주는 친구 오카자키와 단짝이 되어 보내는 게임과 만화책과 온갖 장난과 놀이가 가득한 행복했던 나날이 만화의 주된 내용.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두 소녀가 중학생이 된 2권에서 예상 못한 감동이 있다. 사실 아동방임 상태였던 오카자키를 통해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는 자신의 행복을 깨달아가던 사호. 장난꾸러기인 사호는 언제나 타인의 감정보다 자신의 즐거움이 먼저인, 약간은 소시오패스적인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사호는 중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오카자키는 자신을 멋대로 따라다니는 것뿐이고 단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사호가 오카자키의 눈물을 보고서 가슴이 죄여 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다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독자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왜 제목에서부터 이 만화를 친구에게 헌정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이 지점에서 작품은 단순한 추억담을 훌쩍 뛰어넘는다.
△ “한밤중에 하는 게임은 이 세계에 단둘만 남은 것 같아서 어쩐지 무척 흥분되었다.”
두 만화는 결국 ‘어른’이 된 지금의 자신에게서 느끼는 어떤 상실감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아닐까? 좋아하는 게임과 친구가 있었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더 이상 마음 놓고 놀 수 없는 현실이 과거로의 회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실 어떤 완성이 아니라 상실과 훼손과 망각으로 향하는 서글픈 과정일지 모른다. 자신의 원형으로 향하는 회고의 매개체로서 비디오 게임이 있다는 사실이 이 만화들의 재미있는 점이고, 우리 세대의 독자들 역시 이 점에서 커다란 공감을 느낀다는 것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