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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김남훈, <둘리 (김수정 작)>

내 인생의 만화. 청탁을 받고 작년에 선물 받았던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꺼내서 이것저것 적어보기 시작했다. 그래 만화 하면 역시 드래곤볼 아니던가.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이미 그때도 등장인물, 스토리를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였던 서유기라는 원작을 일본 만화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개성 강한 캐릭터, 박력 있는 전투씬으로 버무린 최고의 명작.

2017-07-10 김남훈



내 인생의 만화. 청탁을 받고 작년에 선물 받았던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꺼내서 이것저것 적어보기 시작했다. 그래 만화 하면 역시 드래곤볼 아니던가.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이미 그때도 등장인물, 스토리를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였던 서유기라는 원작을 일본 만화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개성 강한 캐릭터, 박력 있는 전투씬으로 버무린 최고의 명작. 토리야마 아키라라는 일본인 이름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게 만들었던 작품.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닥터 슬럼프도 이분의 작품이었다는 것. 엄청난 인기 때문에 정식 연재판과 불법 복제 해적판이 서로 경쟁을 하며 쏟아져 나왔던 작품이 아니던가. 그런데 약간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술안주로 황태를 먹기 위해선 맛있는 소스가 필요한데 그냥 마요네즈에만 찍어먹는 느낌이랄까 그 집만의 비전의 소스가 있을 텐데 너무 무난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만화가 있을까.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아직도 현역 프로레슬러 활동하는 나에게 액션과 박력이란 두 가지 키워드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만화라면 역시 북두의 권이 아닐까. 라이더스 재킷을 입은 켄시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거들먹거리던 악당은 그야말로 현학적인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종국적인 물리적 상태로 갈갈이 찢어져 최후를 맞이한다. 선과 악의 선명한 조화, 콘트라스트가 무엇인지 알려준 작품. 그런데 역시 아닌 것 같다. 이 만화는 그때도 재밌었고 지금 다시 읽어도 충분히 지금 만화에 뒤지지 않는 즐거움을 나에게 줄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마흔 중반이란 나이에서 그때와 지금을 같이 오가며 이야기하기엔 부족함이 있지 않을까. 시대를 오가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가며 조금 더 입체적으로 풀만한 만화가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작품이 지나가다가 마치 압력밥솥 밸브가 열리면서 증기 뿜는 소리가 나듯이 어떤 한 단어가 내 머릿속을 휘감다가 지나갔다. 바로 둘리다. 그렇다. 아기공룡 둘리.


먼저 둘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이전에 보물섬이란 만화잡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 같은 학력고사 세대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을 거의 천 페이지에 가까웠던 엄청난 두께의 만화잡지. 어떤 콘텐츠를 접할 때의 지정학적 환경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보물섬이란 존재는 그 이전의 만화를 접하기 위해서 대본소를 가야만 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싸구려 목재로 만든 지하철 역 대합실에 있는 가로로 긴 의자 위에 옆사람 사이를 비집고 앉아서 만화책을 보는 경험은 그때도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물섬은 달랐다. 내 집에서 내 방에서 편안히 배를 방바닥에 대고 누워서 읽는 재미가 솔솔 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다. 둘리가 더욱 가깝게 다가왔던 것이.


1983년 4월호부터 연재되어 1993년 9월호를 끝으로 연재가 종료되었던 둘리. 빙하시대 냉동된 아기공룡이 도봉구 쌍문동 고길동 씨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첫 회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둘리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당시 내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둘리는 기본적으로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캐릭터인데 여기에 초능력까지 있으니 그 말썽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고길동의 애지중지하던 전축, 자동차가 박살남은 물론 집 까지 두 번 이상 반파, 완파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리는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당당하다. 이런 모습은 당시 매우 소심하고 항상 기가 죽어있던 나에게 완전히 반대편 유형의 존재로서 쾌감을 주었던 것 같다. 지금은 프로레슬링 경기장에서 상대방을 번쩍 들어서 던지기도 하고 강연장에선 프라이팬을 구부리며 너스레를 떨고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MC를 보는 등 나서기 좋아하는 인물이 되었지만 34년 전의 나는 정말 항상 침잔된 존재였다. 부모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느라 집에 나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땐 또래보다 덩치가 작아서 같은 반 아이들에게 치이기 일쑤였지만 몇 년 지나자 갑자가 덩치가 커지고 뚱뚱해졌을 땐 또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눈에 띄는 걸 극도로 싫어했었다. 항상 검은 옷만 입고 다닌다고 해서 별명이 블랙 돼지였으니까. 하지만 둘리는 온갖 말썽을 피우더라도 절대로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온갖 군식구를 집 안에 들인 덕분에 각종 질환을 앓게 된 고길동이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고 질책하는 장면에서 완전 빵 터지고 말았다. 그때 둘리의 대사는 "다 아저씨 못난 탓이죠 뭐." 였거든. 이런 둘리의 천방 지축 캐릭터는 김수정 화백의 고민의 결과라고 한다. 보물섬이 창간되고 둘리가 연재된 해는 1983년. 1980년 1212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온갖 검열과 통제를 자행했던 시기였고 보도지침이라고 해서 문화공보부 산하 홍보 조정실에서 언론에서 어떤 이슈를 다룰 것인가 가, 불가, 절대 불가로 나누어 방송국, 신문사에 통보하던 시절이었다. 만화도 사전검열을 받아야만 했는데 만약 주인공이 어린아이인데 장난이 너무 심하게 그려지면 혹시나 가위질을 당할까 봐 아예 공룡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이건 참으로 아이러니인것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공룡을 떠올린 것이 희대의 걸작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는 일이야. 마치 금지사항이 가장 많은 복싱이, 그렇기 때문에 주먹을 사용하는 기술이란 측면에서 가장 고도로 발전한 것처럼, 시대의 분위기와 작가의 창작욕구가 결합되면서 이런 걸작을 만든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리가 큰 인기를 끌자 여러 시민단체 공청회에 캐릭터의 장난이 너무 심하다, 예의가 없다 등등의 이유로 자주 불려 나갔다고한다.


내가 둘리를 좋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개성 넘치고 다양한 등장인물이 많았는다는 점이다. 둘리와 비슷하게 둥글둥글한 외모의 깐따삐야 별 출신의 외계인 도우너는 우주여행 및 시간 여행이 가능한 타임머신을 갖고 있으며 고장으로 인한 불시착으로 인해 지구에 마침 고길동 집에서 둘리와 같이 살게 되었고 또치는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암컷 타조로 공주병이 심하고 허영심이 강한 캐릭터. 내가 둘리 다음으로 좋아했던 캐릭터는 마이콜인데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 그리고 선글라스를 쓴 모양새가 영락없는 흑인 가수이지만 설정상 마씨성을 가진 한국인이다. 특히 둘리와 함께 핵폭탄과 유도탄들이라는 그룹을 결성하는 장면에서 방바닥에서 떼굴떼굴 굴렀던 기억이 아직도 있다.


난 둘리 등장인물 중 마이콜을 주인공 다음으로 좋아했는데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둘리의 말에 속어 넘어가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는 어리숙하면서도 자체적으로 코믹한 장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생물학적 나이로 치자면 1억 년 전에 태어난 둘리가 훨씬 어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마이콜에 관심이 갔던 이유 중에 하나는 당시 내가 살았던 곳과도 연관이 있는데 난 훗날 부대찌개와 길거리 버거로 유명해진 송탄이란 곳에 살았다. 미 공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당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심야영업금지가 예외로 인정된 곳이어서 유흥가의 네온사인이 꺼질 날이 없었던 곳이었다. 미국의 해외 병참기지로서는 최대 규모의 공군 기지가 있는 곳이고 많은 미국인들이 오가다 보니 자연스레 아버지가 미국인인 내 또래 아이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 마이클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마이콜과 같은 피부색은 물론 외모도 흡사했다. 난 뚱뚱한 외모, 마이콜은 피부색 때문에 약간 반 아이들과 거리가 있었고 그래서인지 우리 둘은 조금 통하는 게 있었다. 나중에 알아본 김수정 화백은 곱슬머리인 자기 자신과 백반증에 걸리기 이전의 마이클 잭슨을 모델로 했다고 했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선 내 친구와 이름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 것이 굉장히 신기했다. 친구 마이클은 공부가 아닌 운동에 전념을 했고 육상 선수로서 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지금보다 더 폐쇄적이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조금 일찍 아니 아주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기 공룡 둘리 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외계인, 동물, 토종 한국인이라 주장하지만 혼혈인까지 공통점을 전혀 찾을 수 없으면서도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같은 공동체를 영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채로운 설정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정신을 한 세대 이전에 이미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둘리를 처음 접했을 때와 나이를 먹고 다시 접했을 때 가장 상반된 평가를 내리게 되는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고길동이다. 단순히 성격 나쁜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이런 대인배, 생불이 따로 없다. 원작의 설정이 1943년생이나 1983년 기준으로 41살인 고길동은 자신의 부인과 아들, 딸은 물론 조카, 공룡, 외계인, 동물, 이웃집 가수 지망생까지 거둬 먹이며 자택 완파, 자동차 침수, LP판 파손 등등 온갖 재산상의 피해에도 이들을 강제로 내쫓지는 않는다. 물론 희동이가 둘리를 너무나 좋아해서 내보내지 못한다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강변 이층 양옥집에서 자가로 살고 있는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수성가해서 본인이 마련한 것이다. 고길동의 등쌀에 질린 둘리 일당이 어린 시절의 고길동을 혼내주기 위해서 도우너의 바이올린 모양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보니 시골 가난한 초가집에 살고 있었던 것. 즉 서울로 상경해 본인이 직장생활을 하며 이런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 둘리를 다시 연재한다고 하면 이런 설정이 가능할까. 서울에선 집을 사는 게 아니라 전세로 구한다고 하더로 월급 250만 원을 11년간 꼬박 저축해야 한다는 통계자료가 있다. 아니 돈은 둘 째치더라도 만년과장이란 타이틀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메일로, 문자로 사람을 손쉽게 해고하는 세상인데 그전에 구조조정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최근 중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장래 희망으로 정규직을 적어낸 학생이 있었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서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었다. 내가 둘리를 처음 접했을 때와 고작해여 몇 년 차이가 나지않을 뿐인데 자신의 미래 아니 생존을 걱정하며 살아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세상을 만든 것은 오롯하게 어른의 책임이다. 그 어른에는 나도 물론 들어간다.

이번 여름 휴가 때 둘리를 다시 만나보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헌책방을 돌아다녀볼까한다. 운 좋으면 한 권 정도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무언가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세대의 기억들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볼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