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이 끊겼던 아버지가 수 년 만에 아들을 부른다. 그리고 대뜸 눈앞에 있는 거대한 괴물에 타라고 명령한다. 일본 아니메의 역사에서 이 당혹스러운 시추에이션은 지극히 당연한 설정으로 반복되어 왔다. 그들은 신의 모습을 본 뜬 인조인간 로봇에 훈련된 어른 병사가 아닌 어린 소년을 태운다는 선택을 했고, 인류의 운명을 질풍노도의 아이들에게 맡겨 왔다. 이 방면의 선구자라 할 나가이 고(永井 豪)의 <마징가 Z>에서 카부토 코지에게 마징가를 선사하고 죽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로봇은 악마도, 신도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너의 선택에 달렸다. (알다시피, 마징가는 ‘나는 마신魔神이다’라는 뜻이다)
△ <극장판 마징가 Z 인피니티> 2018년 1월 일본 개봉 예정
마지막에 그레이트 마징가가 나올까?
정상 수준을 뛰어 넘은 초월적 힘을 불완전한 아이에게 맡기는 이 상황은 실은 섬뜩한 것이다. 슈퍼 로봇의 역사에서 선택된 소년들은 그 힘을 정의에 쓰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악마도 신도 되지 않고 다만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리얼 로봇으로 넘어오면서 양상은 변한다. 토미노 요시유키(富野 由悠季) <기동전사 건담>의 아무로 레이에 와서야 우리는 이들이 ‘소년병’이었음을 알게 된다. 로봇에 탑승해 적과 싸우고 영웅이라 불리는 이 아이들은 실은 대동아 깃발 아래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가미가제 전투기에 칼을 차고 올랐던 그들이다. 정의라는 초월적 명분으로 불완전한 소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실재한 역사의 기이한 변형이다.
태어나니 전황에 불타는 조국이었고 천황이 있었듯, 아니메의 소년들이 겪는 상황 설정도 타고나는 운명이다. 로봇 만화의 소년들에게는 제정신을 가진 보호자가 없다. 천애고아거나 대부분 엄마가 증발해 있다. 로봇을 만들어낸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오래 전 가족을 등졌던 매드 사이언티스트이면서 자식의 목숨을 제 손 안에 함부로 굴리는 파시스트 가장이다. 갑자기 타라고 하는 로봇에 조작 설명이나 훈련 과정은 생략된다. 애초에 나만이 그 괴물에 올라 조종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 괴물을 잘도 움직인다. 이제 예전의 삶은 없다. 계속되는 전투가 소년의 유일한 삶이 된다. 내전이 만연한 아프리카 등지에서 소년병을 뽑는 방식은, 총을 주면서 부모나 형제자매를 쏘라고 밀어붙이는 것이라 한다. 해내지 못하면 죽는다. 해낸다면 이제 너는 우리와 함께 간다. 예전의 삶은 없다. 전쟁만이 유일한 삶이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적 기계수의 목숨을 끊어내던 로봇 아니메의 열혈 소년들은 광기의 세계에서 미쳐버린 소년병에 가깝다.
전쟁은 지옥이다. 허위의 가치를 실제의 죽음이 채우기 때문이다. 소년 병사를 자살 공격에 내몰 때, 그들 위의 어른들은 조국이나 정의 같은 어떤 영속한 가치를 명분으로 세우며 그에 비하면 목숨은 하찮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른들 중 일부는 이 지옥을 반대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죽음 그 자체를 가르친다. 토미노의 로봇 만화에서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은 오로지 죽음의 반대를 위한 충격의 교육이다. ‘몰살의 토미노’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虫)를 만나게 되어 있다.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어 일생을 이 지옥에 반대한 망가의 신은 <불새>나 <아돌프에게 고한다>를 비롯한 여러 만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죽음을 가르쳐 왔다. 이러한 몇 명 어른들의 슬픈 의지 덕분에, 만화는 일본에서 가장 진중하며 또한 미래적인 예술이 되었다.

△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エヴァンゲリオン新劇場版>
<서序>(2007), <파破>(2009), (2012)
안노 히데아키(庵野 秀明)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 멀리 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자장 없이 우리에게 도달했던 가장 파격적인 아니메를 이야기할 수 없다. 1995년에 등장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과거에 우리가 알던 아니메의 세계를 ‘리셋’해버렸다. 그리고 2007년 재구축된 ‘에바’,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서序>(2007), <파破>(2009), (2012)를 통해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아니메를 향해 갔다. 또 우려낸 사골 국물이 아니었다, 신극장판은 에반게리온을 넘어 아니메의 새로운 미래였다. 시스템을 포맷했던 텍스트가 스스로를 리부트시켰다. 우리는 그야말로 신세기의 목격자들이다.
벌써 10년 전이 되어버린 2007년 7월, 안노 히데아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신극장판’으로 새롭게 다시 건축(Rebuild)한 명분으로 10년 동안 ‘에바’보다 더 혁신적인 아니메가 나오지 않았다고 도발했다. 그러나 맞는 말이었다. 이후 우리가 몇 년씩 기다리고 환호하고 또 욕하면서 보는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아마도 극장에서 대중이 접할 수 있는 가장 실험적이고 사(私)적인 영상물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초(超)개인적이고 초오타쿠적인 작품이 대중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그 만큼의 수익을 벌어들이며 무엇보다 하나의 상품으로서 완벽히 기능한다는 점은 단순히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운 일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로봇 아니메의 오랜 소년병 테마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극한까지 나아갔다. 이번 소년 이카리 신지는 전혀 영웅이 아니었다. 지구의 멸망이나 인류의 존속 따위가 애초에 이 소년에겐 문제가 아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고 친구들을 사귀고 싶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해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내 존재를 내가 긍정할 수 있길 바란다. 타인과 맺는 관계의 결핍과 두려움, 그 속에서 상처받는 여린 자아. 우리는 열혈이 아니라 자폐인 주인공을 만났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문제가 ‘인류보완계획’이라 불리는 음모론의 세계와 맞닿는다. 그러니까 한 개인의 내면적 문제가 전 인류의 근원과 멸망과 부활에 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극단이다. <에반게리온>은 아주 사적인 테마를 엄청나게 거창한 외형으로 난해하게 전개하는 기이한 텍스트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나는 오직 나를 통해서만 세계를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나의 선택이 곧 나를 둘러싼 세계를 결정 짓는다는 진실. 20년 전에 우리가 만난 TV판은 결국 자폐아 소년을 위한 심리 치료였다. 소년은 세계를 구해낼 필요가 없었다. 자신을 구해내는 것이 곧 세계를 구해내는 것과 같았다.
이 기이한 상품을 열광적으로 소비했던 팬들은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적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치료받아야 하는 대상이 주인공 소년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어진 논란을 안노 히데아키는 더한 파격으로 받아쳤다. 철저히 토미노적인 몰살의 향연이면서 그보다 더한 과격한 실험이 행해진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 Air/진심을 너에게>(1997)의 충격을 아직 기억한다.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욕망과 리비도(동인지의 그것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를 분출하며 죽어나갔고, 우리가 본 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일종의 연극 - ‘잔혹극(Theatre de la cruaute)’에 가까웠다.

△ 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劇場版 Air/まごころを、君に>(1997)
이 작품이 관객에게 전한 진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잔혹극(殘酷劇)은 기괴한 사운드와 조명, 지나치게 거대한 소품들로 꾸민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상황에 객석과 무대 사이 구분을 제거하고 관객들을 직접 참여시켜 일종의 ‘해방’을 꾀하는 시도이다. 안노의 잔혹한 실험극은 난해한 텍스트와 불가해한 장면들로 관객을 괴롭힌 다음, 애니메이션 사상 유래 없는 시도를 한다. 관객과 작품 사이의 경계인 스크린을 걷어버린 것이다. 애니메이션 도중에 갑자기 실사로 된 영상이 나왔고,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있는 바로 자신들을 스크린으로 보았다. 안노는 ‘오타쿠’라고 불리는, 안노 자신 역시 속해있는 폐쇄적인 팬덤과 그들 각자가 가진 어떤 정신병을 향해 이제 그만 그 속에서 나오라고 외친 것이다. 핏빛의 바다에서 정말로 신창세기(Neon Genesis)가 이루어지며 에반게리온은 끝났다. 우리는 아니메의 죽음을 보았고, 역설적으로 ‘End of 에반게리온’은 ‘죽음Death’으로 아니메를 다시 ‘부활Rebirth’시켰다.
그리고 10년 후 또 다시 스스로 부활했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피빛 붉은 바다에서 시작한다. 모두의 우려대로 에반게리온은 끊임없이 사골을 끓이는 ‘루프물’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떤가? 10년 전보다 소년 신지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문제는 분명하고 무겁게 반복되고, 그런 만큼 배경과 설정의 모호한 떡밥들은 더욱 다채롭다. 아니메의 기술적 성취는 눈부실 지경이고, 그러면서도 갈등과 감정의 무게감은 여전히 묵직하다. <서>, <파>, 모두 고르게 결말부에서 감정을 고양시킨다. <파>에서 60년대 일본 어린이들의 동요 ‘오늘은 이제 안녕(今日の日はさようなら)’이 흐르며 초호기가 3호기를 뜯어먹는 장면은 토할 것 같다. <서>와 <파> 동일하게 극적 결말이 되는 신지와 레이의 장면 등은 에반게리온이 여전히 눈물을 쏟게 만드는 작품임을 입증한다. 분명히 체감할 수 있는 변화들 속에서, 본질은 변한 것이 없다.
그 자신이 일본 최고의 오타쿠로서 커리어를 시작해 에바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안노는 이 시리즈가 자기모순으로 가득한 텍스트임을 이제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토미노의 <건담>은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거기 나오는 병기인 모빌슈트의 프라모델은 팔아야 했다. 반다이에게 돈을 벌어주지 않으면 건담은 존재할 수 없다. 에바는 일찍이 전쟁병기에 혹한 안노의 밀리터리 취향이 가득 담긴 작품이고, 이제 가이낙스가 아닌 ‘카라χαρα(그리스어로 ‘즐거움’이라고 한다)’라는 이름으로 독립 제작사를 차린 그는 에바의 모든 판권을 쥐고 스폰서에게 비굴해 할 필요 없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린다. 전의 에바도 그랬지만 <신극장판>에선 상품으로 만들기 더욱 곤란해 보이는 새로운 에바와 병기들이 아크로바틱 액션의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신극장판>의 변화에서 눈여겨 볼 것은 에바 대 사도가 아니라 에바 대 에바의 싸움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피아 구분이 안 되는 아노미와 혼돈이 액션 시퀀스마다 거듭된다. 로 가면 아예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군이 된다. 애초에 우리가 악이었으므로 선이란 없다. 미사일을 마구 쏘아대고 대폭발이 일어나는 장면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애니메이터의 작품이지만 그도 전투는 결코 ‘모에’한 것이 아니란 걸 안다. 총리가 군복을 입고 전투기와 탱크 위에 올라가 젊은이들을 향해 힘이 어쩌고를 외치는 일본의 미친 정국에서, 에바의 전투 맥락은 결코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에바를 보라, 우리를 모조리 죽이려는 정신병자들은 항상 저 위에 있다.
온갖 방식으로 뒤바뀐 설정들에 대해서도 설명의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알아서 마음대로들 해석하며 즐기라는 것 같다. 이제는 지친다며 짜증내는 이도 있고, 또 여전히 해석에 골몰하는 이들도 있지만, <신극장판>과 예고가 나올 때마다 모두들 간만에 에바로 인해 머리 아플 기회를 얻는다. 이렇게 신극장판은 모든 오타쿠들을 혹하고 낚을 메카닉 향연과 설정 페티시즘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아름답고 여전히 야심차며, 풍요롭게 엮여 있다. 에바가 에바다운 것은 팬과 관객을 배반하는 텍스트라는 점이다. <신극장판>에서 우리는 예고편과 전혀 다른 신작에 당혹한다. 에서 팬은 또 좌절을 맛보았다. 이건 나의 에바가 아니야! 우리가 이미 20년 전에 외쳤던 비명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에바였다. 에반게리온은 원래 이런 텍스트니까. 우리는 안노 히데아키라는 걸출한 작가의 초개인적이고 초오타쿠적인 텍스트에 붙잡힌 동인들이다.
그렇지만 양상만은 전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재건축판 에바가 또 모두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서, 꽝! 너네들도 죽어버려, 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아, 기분 나빠,라고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신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닐 수도 있고 You are (NOT) alone, 나아가지 못하지만 나아갈 수도 있고 You can (NOT) advance, 되돌릴 수 없지만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You can (NOT) redo. <서>, <파>, 의 모든 부제는 괄호를 통해 선택의 여지를 강조한다.
에서 신지는 물론 관객인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는 사라지고 없다. 극중 누구 하나 신지와 우리에게 속 시원히 알려주질 않고 선택만을 강요한다. 어쩌면 가정과 학교라는 좁은 세상 속의 아이들, 나아가 온갖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맞서고 있는 우리들이 겪는 세계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세계는 우리를 이리저리 떠밀고 끌고 다니며 매순간 선택만을 요구하면서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결과를 아는 방법은 오로지 선택을 하는 것뿐이고, 그 선택은 행동을 요구한다. 나의 선택이 세계를 바꿀 것이다.

△ <신 고질라 シン·ゴジラ>(2016)
안노, 넌 내게 (에바 대신) 고지라를 줬어.
올해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는 에바의 완결 대신 <신 고질라>(2016)를 만났다. 안노 감독 개인의 입장에서 이 꿈의 프로젝트를 연출할 기회가 왔는데 저버린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결과물은 그의 경력에 전혀 오점으로 남지 않았다. 오히려 전환점이다. 안노는 <신 고질라>를 통해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에바를 시뮬레이션 했다. 이 영화에는 캐릭터간의 감정 따위는 필요 없으니 억지로라도 넣어야 한다면 손을 떼겠다며, 토호의 수뇌부에게 직접 편지를 썼고 흥행으로 입증해보였다. 반대로 이미 텍스트 내부에 감정이 가득한 에바는 어떻게 될까? 고질라 이후의 에바가 더욱 충만해질지언정, TV판과 20년 전의 극장판처럼 만들다 만 애니메이션을 수습하기 위한 심리극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 본다. 다만 문제는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괴상한 기호로 예고되었던 에바 신극장판의 완결편은 3.0+1.0. ‘무재원점(無在原点)’의 부제를 공개했다. 우리의 해석이 맞다면, “돌아갈 원점은 없다”는 것이다. 20년간 유예되었던 에반게리온의 끝이 부디 또 루프물, 다시 신창세기가 아니길 바란다. 소년병 테마의 오랜 역사에서 시작되어 상품이 소비자를 욕하며 죽이는 오타쿠 자살극에 도달했던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신극장판 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끝을 향해 전개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에바는 이제 부제의 괄호를 지우고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은 신지, 그러므로 안노의 선택에 달렸고, 우리 모두는 그 결과인 결말을 기다린다. 그 결말을 눈으로 확인하는 날이 너무 늦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 Point of no return
우리는 선택의 결과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