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이 문단의 기인이었다면, 만화계의 기인은 단연코 박기소 선생을 논할 수 있겠다.
어릴 때 찾아온 뇌막염 수술의 후유증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난청 장애를 안고 청춘을 보낸 박기소는 이제 여든넷의 쓸쓸한 원로가 되었다.
그는 카툰이란 장르가 상업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척박한 문화적 환경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한 칸 또는 네 칸 만화 위주의 작업을 해왔지만, 만화계에서 ‘박기소’는 그야말로 아는 이들만 알아주는 순혈 카투니스트이다.
수많은 습작과 미술 전문지에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해 왔으나 번듯한 작품집 한권 출간 못한 그를 위해 이희재, 김동화 그리고 조관제 등 후배들이 뜻을 모아 2010년 최초의 박기소 작품집 <박기소의 아이디아(거북이북스)>를 발간하기도 했다.
1934년 서울 혜화동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박기소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앓게 된 뇌막염의 후유증으로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 둔 박기소는, 아침에 일어나면 특별히 소일할 것이 없었다. 친구도 없고 갈 곳도 마땅하지 않았던 그에게 만화는 외로운 시간을 달래주는 유일한 위안거리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재미였었던 만화 보기와 만화 그리기는 장애를 가진 자식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반대로 그다지 오래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당시만 해도 만화란 돈 벌이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한 저급 문화였었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박기소의 장래에 대한 부모님들의 번민과 우려는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다만 그림을 좋아하는 박기소의 재능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여겨 본 그의 부모님들은 당대의 대 화가 ‘박고석’ 선생의 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박기소는 해를 거듭할수록 순수 회화보다는 만화 예술에 대한 탐닉과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1960년 아동 만화 ‘돌돌이’를 단행본으로 발간하여 한때 만화계 안팍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으나, 매번 적지 않은 분량의 단행본을 그려야 하는 고된 작업은 그의 건강을 위태롭게 만들곤 했다.
그리하여 하고 싶은 만화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된 청년 작가 박기소는 짧지 않은 기간을 방황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한 칸 또는 네 칸으로 표현하는 카툰이란 장르를 발견하게 되고, 그의 예술가적 지향점에 부합하는 카툰 장르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가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한 때 서울시의회 교육문화전문위원을 역임하고, 월간 <미술세계> 편집장으로 재직했었던 ‘장민태’가 박기소를 카투니스트로 데뷔하도록 도운 은인이라고 한다.
장민태 편집장은 박기소가 그동안 모아 둔 작품들을 보고 카투니스트로써의 천부적인 자질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꾸준히 그에게 카툰 작품 연재를 권유하였고, 박기소 또한 본격적으로 카툰 작품을 기고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입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술 잡지에 소개된 그의 작품을 보고 여러 미술관련 정기간행물로부터 꾸준한 원고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린이처럼 맑은 심성을 가진 박기소의 하루 일과는 시계처럼 일정하다.
오라고 하는 곳은 없지만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다니며, 어딜 가든지 누굴 만나든지 거리낌 없는 자유인이다.
아침 6시 기상을 원칙으로 하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는 날이면 5시에도 일어나 작업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뒤척이며 불편한 잠자리에서도 아이디어에 몰두하는 타고난 작가로써의 근성을 갖고 살아왔다.
마치 그에게 있어 카툰은 일상이요 일기인 듯하다.
그가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에 놓여진 모든 사물과 사람은 박기소의 아이디어를 위한 먹잇감이다.
점심을 먹고 도보와 지하철로, 아이디어와 스케치 여행을 시작하는데 화방, 미술 학원, 그리고 만화 관련 단체를 순회하며 사람도 만나고 작품도 보여 주면서 바쁘게 움직이다가 6시 무렵 귀가한다.
소리를 듣지 못해 남들과 소통하기에 불편하고 친구가 많지 않은 박기소는 깊이 있는 취재와 사색을 통해 남이 보지 못한 서민들의 애환을 보고 느끼고 조명하며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길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을 타면서 본 사소한 사물과 사람들의 행동을 예사롭게 보지 않고 카툰 아이디어로 연계 확장시키기 위해 그는 주로 메모를 한다.
이런 관찰과 메모로 하루에 2~4점 아이디어가 구상되면 먼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 주면서 반응을 살핀다.
작품을 보고 웃는지, 시큰둥해 하는지, 작가이든 전문가이든 작품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웃거나 재미있다는 작품만 골라 제작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아이디어 스케치 4점 중 2점 정도가 작품으로 완성된다.
인사동 갤러리들을 찾아다니는 그만의 주기적인 공간 순례는 박기소의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갤러리들과의 인연으로 박기소의 카툰 초대전은 서울을 비롯하여 부천, 대전 등지의 유명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게 되는 흥미로운 기록을 갖게 된다.
전 대전 중구 문화원장 ‘박동규’의 표현대로 박기소는 ‘화랑가의 순례자’가 된 것이다.
종이와 물감을 구매할 돈이 아쉬울 정도로 생활비가 부족한 박기소의 경제 사정은 늘 궁핍하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 버리는 종이나 판자가 보이면 배낭에 넣어 가져 와서 작품을 한다.
이런 박기소의 사정을 알고 돌봐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중에서도 <미술넷 커뮤니케이션>이란 미술 용품 무역을 하는 ‘김견남’ 대표는 언제나 박기소에게 <화수분> 같은 존재이다.
박기소가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화방 안에 있는 스케치 북에서부터 수입 지류와 붓과 펜, 마카까지 그림 그리는데 필요한 일체의 용품을 한 묶음씩 챙겨준다고 한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우리의 옛것을 모으는 <시간여행> ‘김영준’ 대표도 또한 고마운 분이다. 박기소가 인사동 순례를 하다가 예고 없이 불쑥 찾아 가더라도 흔쾌히 점심도 대접하고 교통비까지 살펴주는 선한 인물이라고 한다.
‘둘리 아버지’ 김수정, ‘악동이’ 이희재 등 만화가들도 의정부 외곽에 살고 있는 박기소의 외로운 집을 자주 찾아 준다.
이희재는 박기소가 문자로나마 외부와 연락하기 편하도록 휴대폰을 개통해주기도 했었는데, 정작 박기소는 그 신통방통한 문명의 이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도 하지만 귀찮아서 짐 더미 어디인가 버려두었다.
박기소는 거주지의 마을 주민들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고 사는데, 어느 이웃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어린이까지 3대가 작가 박기소의 열혈 팬으로써 작가가 참여하는 매 전시회 때마다 온 식구가 출동한다.
박기소를 일컬어 동네에서 인기 짱 할아버지라는 그 이웃들의 말을 전해 주자 ‘과한 칭찬’이라며 겸연쩍어 하는 원로작가의 모습에서 범부들은 이미 잃어버린 맑디맑은 유년의 순수함을 보게 된다.
그는 84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만화관련 행사장은 어김없이 찾아간다.
그리고 그의 카메라 앵글 앞에서는 국내 만화가뿐만 아니라 외국 만화가도, 작품과 나이와 지위를 떠나 순식간에 무장해제를 당한 채 유쾌한 표정으로 담겨진다.
때로는 자신의 기쁜 마음만 앞서 주위 환경이나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로 후배들을 불러 자신이 찍어 인화한 사진을 건네주곤 하는데, 스마트폰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 듬뿍 묻어나는 그의 등장은 늘 고마울 따름이다.
박기소는 또, 사진 나눠 주는 것만큼이나 ‘박기소 표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네 아이들은 물론 만나는 작가나 행사 관련 스탭들에게 무조건 캐리커처를 그려 선물을 한다.
그러나 그의 캐리커처는 하나 같이 모델의 얼굴이 사람이 아닌 원숭이과로 표현되는데, 침팬지나 우랑우탄 같은 이미지로 된 캐리커처 선물을 받고서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 하나 없이 모두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즐거워한다.

대부분의 만화가들이 펜 선이 잘 표현되는 종이의 품질을 따질 때, 박기소는 그 종이라는 매개체에 덧붙여 그만의 표현 기법을 적용해보려 늘 고심을 한다.
건물의 울퉁불퉁한 담벼락에다 종이를 대고 연필로 또는 붓으로 터치를 해서 표현을 하거나, 물건과 물건 사이 모서리를 활용해서 나타나는 표현 기법을 개발하는가 하면, 종이를 뭉쳤다 펴서 구겨진 화지畵紙에다 그리는 카툰의 새로운 표현 영역 확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가적 탐구심은 마치 새로운 길 찾기에 도전하는 젊은 실험 작가와도 같다.
종이 위의 표현 기법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작품에 입힐 색감에 대한 실험도 자유분방하다.
다방에서 지인이랑 만나게 되면 박기소를 아는 이들은, 건강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그를 위해 처음부터 커피를 두 잔을 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커피 잔을 박기소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데, 이는 커피를 활용하는 박기소의 장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진한 갈색의 커피에다 붓 펜을 찍어 그림을 그리면, 물감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은은한 색이 나오는데, 박기소가 커피숍에서 가장 즐겨하는 놀이라고 한다.
그의 기행은 이 뿐만이 아니다.
만화계 행사 뒤의 뒤풀이를 위해 찾아 간 식당의 식탁에 앉자마자 박기소는 주위의 접시 몇 개를 모아 물기를 말끔히 없앤 다음, 항상 준비 하고 다니는 붓이나 네임 펜으로 그 곳에 참석한 작가들에게 사인을 하도록 한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던 작가들이나 만화계 인사들은 박기소가 내미는 사인 접시를 거절 할 수도 없고 거절 하지도 않는다.
주위 사람들과 식당 주인들의 민원을 들었는지 요즘은 일회용 종이 접시를 한 묶음씩 배낭에 넣어 다니면서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국내작가이든 외국 작가이든 보이는 대로 사인을 받아 낸다.
박기소가 그 동안 만났던 원로 만화가에서부터 지금 주목받고 있는 젊은 만화가의 사인까지 그가 소장한 사인 접시 컬렉션은 가히 ‘만화가 사인 박물관’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귀한 자료가 되었다.
박기소의 붉은 색 낡은 여행 가방 겉면에는 그가 여행을 다녀 온 나라들의 상징적인 그림이나 글자들이 표현된 장식들로 가득하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 사라진 것 같은데, 오래 전에 단체로 중국 만화행사에 참여 했을 때는 구걸하는 거리의 소년들이 꽤 많이 있었다.
이들이 다가와 구걸을 하더라도 동정을 베풀지 말고 무시하라는 사전 교육을 받곤 했었다.
사전에 교육을 단단히 받은 일행은 손 벌리는 아이들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어린이를 좋아하는 박기소는 떼로 몰려드는 아이들의 귀찮은 요구에도 재미있지 않느냐고 즐거워 하곤했다.
그리고 만화계 국제행사로 어느 나라를 가든 박기소는 반드시 그 나라의 흙을 채취하여 조그만 병에다 담아온다. 외국의 흙 속에 어떤 미생물이라도 있어 우리나라 생태계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소심함으로 만류를 하곤 하지만 그는 늘 막무가내이다.
선천적 장애로 인해 비록 행동반경이 한정 되어 있는 박기소이지만, 그 흙을 통해 세계를 어쩌면 우주를 잇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기소 카툰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느낌은 ‘재미있고, 내용이 쉽게 이해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대담한 생략과 시간과 정황의 흐름 속에서 강한 자기주장, 또는 개성 등으로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시대 감각적 특성과 잘 부합되는 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단어와 문장을 함축해서 한 칸에 담는 ‘카툰’은 탁월한 정보 전달 능력으로 인정받으며, 창조적인 인간의 능력을 그대로 반영하는 조형 행위, 이를 기반으로 한 예술성을 인정받는 독창적인 만화 장르이다.
이렇게 지적인 유희를 유도하는 만화 장르 ‘카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남다른 관찰력과 함께 뛰어난 감식력을 갖춘 독자들의 식견이 필요하다.
때문에 카툰 장르는 감각적이고 쉬우면서 재미있는 것만 소비하고, 다소 깊이 있는 생각을 꺼리는 현대인들의 일반적인 기호에는 부합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들이 다 그렇듯이 작품 구도나 색상의 배열도 그냥 속된말로 듣도 보도 못한 박기소 식이다.
그러나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짖궂고도 명확하다.
회화 공부를 한 탓인지, 박기소의 작품 속에서는 회화 기법이 자주 나타나기도 한다.
제도권 수업으로 익힌 전문적인 회화 작업이 아니라, 회화 기법 중에서도 온갖 폐품을 붙여 제작하는 꼴라쥬collage 기법을 즐겨 차용하는 ‘박기소 식 카툰’은 카툰을 공부하는 후배들도 관심을 가져볼만한 흥미로운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박기소가 유독 싫어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공원에서 하릴없이 기운 빠져 무기력해 보이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할 일 없고 갈 곳 없다는 것 자체가 핑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는 애써 외면하고 다닌다 한다.
나라에서 나오는 미미한 생활 보조금과 미국에 사는 조카딸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원로 작가 박기소는 비록 보여 지는 삶이 팍팍해 보일지 모르지만 웬만한 일에는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을 만큼 달관의 경지에 올라 있는 듯하다.

오래 살면서 독자들에게 웃음을 안겨줄 수 있는 훌륭한 카툰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때문에 박기소는 술이나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시중에서 파는 향신료가 첨가된 음료수도 마시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관리한다.
박기소가 기거하는 두 칸 방에는 희귀 우표, 만화가들 취재자료, 여행 다녀 온 나라의 흙이 든 병, 시대별로 분류 해 둔 술과 담배, 껌, 전철표 등 온갖 ‘없는 것 말고 다 모아 놓은 물건’들과 함께 그동안 했던 습작과 원고들이 가득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기소는 주인인 듯 객인 듯 겨우 다리를 펴고 누울 자리에 만족한다.
과거 어느 시절 이사를 한차례 하면서 집안 식구들이 박기소 모르게 애써 모은 수집품들을 잡동사니라고 다 버린 일화를 소개하며 지금도 못내 아쉬워한다.
모아 둔 이 많은 수집품들을 나중에 어떡할 거냐고 물었더니, 200년 살 건데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격한 운동 대신 아침에 일어나면 수집해서 진열해 놓은 희귀한(?)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위치를 바꾸는 작업으로 운동을 대신한다.
박기소와 만나기 위해서는 직접 통화가 안 되기 때문에 얼굴을 보았을 때 미리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거나, 작가의 자택 인근에 살고 있는 이웃의 전화로 대신 전달해 주는 그야말로 아날로그식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해야한다.
인터뷰를 할 경우에도 질문은 필담으로 소통을 해야 하는데, 질문과 상관없는 일방적으로 당신의 이야기만 할 때는 이야기의 맥이 끊기기 십상이어서 일반인들과 소통하는 것에 비해 몇 배나 힘이 든다.
인터뷰 도중에 점심 대접을 하려고 했더니, 돈 아깝다며 먼 길 찾아 온 후배를 위해 가게에서 미리 사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편의점 도시락을 꺼내 대접을 해주셨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돋보기안경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작품과 나눠 줄 사진, 그리고 그림 도구로 가득한 백팩이 트레이드마크인 박기소 선생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취재도 끝나 일어서는데 필자를 불러 세웠다.
빈손으로 보낼 수 없다며 주섬주섬 후원자들이 도와 준, 주위에 있던 스케치 북이며 색 볼펜을 찾아 건네주며 그래도 아쉬웠던지, 뭐 하나 더 줄 게 없는지 찾는 걸 만류하느라 힘들었다,
당신보다 넉넉한 필자에게 전철역까지 갈 택시비까지 찔러 주려고 했던 정 많은 시골 노인 같은 박기소 선생.
건네 준 선물 보따리를 들고 현관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데, 느닷없이 향수를 듬뿍 뿌려주며 ‘향수 냄새로 마나님한테 오해를 받아 혼나길 바란다’는 만화가다운 환송을 해 주셨다.
곤혹스러운 향수 냄새에 절은 체로 전철로 귀가를 하는 내내, 천사 박기소 선생이 앞으로도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살며, 좋아하는 수집품도 모으고 카툰을 그리며 재미있게 살아 갈 수 있으시기를 기도했다.
박기소
작품 연보
1934년 서울 혜화동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출생.
1945년 뇌막염 수술 후 귀가 들리지 않아 경성혜화공립초등학교 중퇴.
1957년 화가 박고석 화백에게 사사받음.
1960년 어린이 만화 ‘돌돌이’ 출간
1976년 서사만화에서 카툰으로 작품 발표 시작.
1988년 월간 만화광장, 만화에 4컷 만화 연재.
1993년 월간 미술세계, 갤러리 가이드, 아트 뉴스, 한배달, 동아약보, 아트2000, 미술 21 등에 카툰 연재.
1999년 ~ 대전 문화사랑, 미술 21 등에 카툰 연재.
초대전
1994년 제1회 신사미술제(서울)
1995년 홍익갤러리(서울) / 청학대 예술관(안산)
1998년 대전중부문화원(대전) / 청주 소요 갤러리 / 청주 무심 갤러리
1999년 갤러리 우리(대전) / 호반 갤러리
2000년 1월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 이브갤러리(서울)를 위시하여 모은 갤러리 / 대덕 안산 도서관. 미스 갤러리 청학대 예술회관 소사 만화갤러리 등에서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