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사랑했던 사람이 죽고 나면 세상에 남겨진 사람은 어떤 느낌이 들까.
아내를 잃는 기분이 저토록 슬픈것이구나라는 감정에 휩싸여 한동안 정신을 못차린 필자.
정신과 의사이신 김혜남 선생님의 저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서 밝히셨던 고인이 되신 언니에 관한 애절했던 아픈 기억과, <친밀감>을 집필하신 전남의대 이무석 선??님께서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본인이 치료를 받던 과정에서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흘리셨던 눈물 등이 동시에 떠올랐다. 정신의학에선 사랑했던 사람의 상실에 관하여 사별(死別)반응과 애도(哀悼)를 구분한다. 사별(Bereavement)은 문자 그대로 죽음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애도의 상태에 있는 하나의 반응이자 증후군이다. 반면에 애도(Grief)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따른 주관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즉 사별반응의 기간 동안 우린 "애도"라는 감정 상태를 거치는 셈이다. 우린 항상 고인에게 생전에 못 해준 게 떠올라 미치도록 미안해하며 땅을 치고 통탄하며 후회한다. 급기야는 밤에 고인의 환청을 듣거나 꿈에 고인이 출현하기도 하고 깨어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허망함에 몇 주를 눈물로 지새우기도 한다. 사고 현장에서 죽어야 했을 사람은 정작 자신이었다며 자기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기도 한다. 이를 생존자의 죄책감(Survival Guilt)이라하며, 이러한 증상들은 길게 지속되지만 않는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애도과정이다. 그래서 정신의학에선 사별 후 생긴 우울을 곧바로 ""우울증""으로 진단하지 않고 ""사별반응""으로만 진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도과정이 잘 극복되지 않으면 "병적 애도"와 우울증으로 이어지며, 심하면 기존의 취약한 자아의 붕괴로 인해 정신분열증까지 오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애도는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일찍이 영국의 정신의학자 존 볼비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애도 반응을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절망 - 그리움 - 와해 - 재구성이란 4단계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경우 사별반응의 기간은 2개월을 넘지 않지만, 정신의학자 칼 아브라함이 말했듯 고인에 대한 애증(愛憎), 즉 고인에 대한 분노나 죄책감이 생전에 미처 해소가 되지 않았을 경우엔 상황은 묘하게 나빠진다.
아내와 사별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앨리를 잊지 못하는 칼. 세월이 변해 칼이 살고 있는 집 주변은 온통 철거되었으나 유독 칼의 집만 생뚱맞게 남겨져 있다. 그녀와 같이 살던 집뿐 아니라 사진첩, 소파, 그리고 젊은 시절 앨리와 같이 만들었던 편지함마저. 앨리를 마음에서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칼에겐 앨리와 함께 있었던 기억들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었으리라. 홀로 고립된 삶을 자처한 칼에게 엘리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은 마음의 피난처다. 또한 칼에게 있어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단순히 감정에 휩싸인 것 이상을 의미한다. 정신분석학자인 발렌스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 있어 "슬픔이란 감정" 은 망자(亡者), 즉 엘리의 대체물(Substitute)였다. 그의 우울은 언제나 엘리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에 쉽사리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때 8살짜리 꼬마 러셀이 그를 깜짝 방문한다. 노인을 도와주어 배지를 받기 위해 왔다는 러셀. 그러나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베풀 마음의 여유가 아직 없었기에, 칼은 꼬마 러셀을 냉정히 돌려보낸다. 영화 <시월애>에서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주인공 남녀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처럼, 칼에게 있어 "편지함"은 생사의 공간을 초월해서 죽은 엘리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기에, 편지함의 훼손은 곧 얼마 남지 않은 앨리의 흔적을 잃는 것과 동시에 앨리와 소통할 수 없게 됨을 의미했다. 편지함을 공사인??가 실수로 망가뜨려 순간의 화를 못 참아 그만 건축사 사장을 때려버린 칼 할아버지. 그는 폭행죄로 양로원으로 후송되어야 하는 배심원의 판결을 받는다.
필자가 치료했던 J씨도 마찬가지였다. 초진 시 환청과 피해망상으로 집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던 J씨. 건강했을 시절 그녀는 결혼한 지 얼마 채 되지 않아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시댁에서만 줄곧 지내고 있었다. 한참 젊은 나이에 첫 아이를 놔두고 남편을 잃은 슬픔도 잠시, 그녀는 시댁식구들에게 위로는 커녕, 그녀가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남편이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았다. 남편의 죽음과 시댁식구의 이중적인 태도에 너무 힘들었지만 그녀는 차마 시댁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애시 당초 친정에??? 반대했던 결혼이었기 때문에 차마 친정에서 지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재혼에 대한 열망은 병적인 애도라는 거센 폭풍 속에 억압된 채, 점차 그녀는 남편의 물품이나 집안 가제도구 어느 하나 손대지 않고 시집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다. 실제로 그녀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이 집에 들어와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믿기 시작했기며, 어느 순간부터는 시집을 떠나는 것조차 중죄요, 배신으로 여겼다.
미이라 -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픈 그대
히치콕의 유명한 영화 <싸이코>에서 주인공이 어머니의 시신을 집안에 그대로 놔두고 생전 차갑고 가혹했던 엄마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채 살인을 일삼았던 것처럼, 고인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소망에서 비롯돼 고인의 성격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정신의학에선 병적 동일시 현상(Pathologic Identification phenomena), 고인의 물품(Linkage )이나 심지어 고인의 시신을 그대로 두는 현상을 밀랍화 (Mummification)라 한다. 특히 시신을 보존하는 현상은 병적인 애도의 차원을 벗어나 생전에 고인과 정신병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큰데, 모자간이나 형제 자매간 공유하는 정신병을 "Folie a Deux"라 한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얼핏 보면 단지 고인을 못 잊어 발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고인을 벗어나는 것은 "배신"이라는 망상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토록 "배신"에 민감한 이유는 고인에 대한 적개심과 의존심이란 실타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있던 "죄책감"이란 썩은 마음의 응어리 때문이다. 칼의 주변 건물이 온통 철거되듯 칼의 마음도 변화되어야 하건만, 아직 칼은 그러기에는 해결해야 할 무언가가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양로원에 가기로 되어있는 날. 칼은 자신의 집에 있던 풍선 모두를 펼쳐 집과 함께 그토록 앨리가 원하던 파라다이스 폭포로 떠나는 대반전극을 펼친다. 풍선에 의지해 집을 비행선삼아 가던 칼. 집에 숨어들어온 러셀?? 뒤늦게 발견하고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천진난만하게 모험을 좋아라 하는 러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발견했기 때문이었을까. 러셀을 그냥 ???에 내려놓을 까 잠깐 고민도 했었지만 칼은 러셀과 같이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한다. 예기치 못한 폭풍에 휩쓸려 칼은 정신을 잃지만 러셀의 덕택으로 둘은 낯선 곳으로 와버린다. 설상가상으로 러셀이 아버지에게 받은 GPS마저 실수로 잃어버려 둘은 우왕좌왕한다. 하지만 어느덧 칼과 러셀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파라다이스 폭포에 거의 다다르게 된다.
아버지의 빈자리
꿈에 폭풍이 나타났다면 이는 갈등을 상징한다. ""러셀을 땅에 버리느냐 아니면 계속 같이 갈 것인가""부터,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인??""까지. 칼은 마치 부인을 잃고 아들과 함께 동반자살이라도 하려는 남편처럼 병적인 애도과정을 밟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역할 모델이자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네비게이션과 같은 존재다. 러셀이 실수로 GPS를 잃어버린 영화 속 설정은 아버지가 우울에 빠져서 고장난 성장의 나침반을 들고서 방향을 잃어버린 아들의 마음 속 공황을 의미한다. 폭포 이름이 파라다이스, 즉 천국인 것도 어쩌면 고인과의 합일하고픈 소망 (Reunion Fantasy) 에서 비롯된 자살에 관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이 러셀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뜻은 폭풍같은 혼란스러운 갈등에서도 살아가야 할 그 무언가를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폭풍 속에서 집이 추락하지 않게 만든 장본인은 칼이 아닌 러셀이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러셀은 병적 애도가 끝날 수 있는 희망의 실마리인 셈이다.
땅에 도착해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여정에서 칼과 러셀은 케빈이란 어미새를 만난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서툴게 텐트를 치는 러셀. 러셀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칼은 러셀의 부모가 헤어졌다는 것, 러셀의 아버지가 러셀에게 많이 소홀하다는 것 등을 짐작하고는 러셀에게 미안함과 동정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다음 날, 칼은 죽은 부인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과 어미새 케빈이 새끼들에게 갈 수 있게 도와주자는 러셀의 제안 사이에서 갈등한다. 과거에로의 고착(固着)이냐, 새로운 변화로의 성장(成長)이냐의 선택의 순간이다. 그 때 때마침 찰리가 어미새 케빈을 잡기 위해 풀어놓은 ""사냥개""들이 그들을 위협하며 칼과 찰리는 만나게 된다. 그러나 두려움도 잠시. 어릴 적 우상이었던 찰리를 바로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칼은 흥분을 쉽사리 감추지 못한 채 어릴 적 그토록 동경하던 찰리의 모험선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칼을 기다렸던 건 온통 박제가 되어버린 전설 속 동물들과 경직된 찰리의 강아지들. 기대하고 동경했던 모험선에서 칼을 기다렸던 건 정작 허망함과 죽음뿐이었다. 멋진 모험가의 모습을 한 찰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찰리는 칼과 러셀을 의심하며 자신을 해치러 온 ???재로 인식하는 편집증에 사로 잡혀 있었다. 위기의 궁지에 몰린 칼과 러셀. 칼은 어미새를 구하려고 시도하지만 찰리는 교활하게 앨리의 집을 불태워 버리려 한다. 다시 찾아온 갈등의 순간에서 칼은 아쉽게도 찰리와 싸우는 것을 피한 채 어미새를 버리고 앨리의 집을 선택한다.
러셀의 아버지는 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러셀의 아빠는 거친 세상과 같은 자연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캠핑의 천재였다. 그러나 러셀은 아빠처럼 텐트를 잘 칠 수 없었다. 그저 아빠와 같이 골목 한 모퉁이에서 가졌던 게임이 아빠와 러셀이 가진 가장 소중한 추억이다. 찰리도 러셀의 아빠처럼 늘 무언가를 쫓아서 외딴 곳 홀로 엉뚱한데 있었다. 칼은 찰리를 늘 동경했지만 정작 찰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만 하고 있을 때 정작 자식은 아버지를 원하고 있다. 어쩌면 찰리는 칼에게 있어 아버지였을지 모른다. "마침내 어릴 적 영웅을 만났는데 그가 우릴 죽이려 들다니."라는 칼의 대사를 만약 프로이드가 들었다면 아버지에게 위협받는 거세불안을 느끼는 아들로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찰리는 칼의 아버지이기도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밀랍화시키고 고립된 삶을 사는 병적인 애도과정 속 칼의 비극적인 최후다.
영화 <샤이닝>에서처럼 미친 아버지가 부인과 자식을 살해하려 했던 것은 단지 공포 영화 속 억지 설정만은 아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우리 마음속에, 우리 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보편적인 코드기 때문이다. 칼과 러셀의 모험과 여정은 마치 <은하철도 999>가 영생의 별로 향하는 모험과 매우 흡사하다. 칼이 앨리의 못 다한 소원을 이뤄주러 파라다이스 폭포에 집을 옮기는 것은, 일찍 죽어버린 엄마를 대신해 기계의 모습을 하고서라도 엄마가 못 다산 생애까지 살면서 메텔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겠노라는, 철이의 오이디푸스적인 색채가 가미된 21세기의 변주곡이다. 필자는 <은하철도 999>의 종착역인 ""영생의 별""의 실상을 보고 난 뒤 약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영생의 별에 ???착해 기계 인간들에 대한 허와 실을 깨닫게 된 철이는, 자신을 기계인간으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철이의 아버지인 프로메슘의 제안을 거절하고 비록 끝이 있지?? 꿈을 품고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으로 남았다. 그러기에 찰리의 허상을 본 뒤 갈등하는 칼은 <은하철도 999> 의 철이와 닮았다.
그동안의 모험, 고마웠어요. 이제 새로운 모험을 향해 떠나요.
(""나의 모험 책""에 마지막으로 쓴 엘리의 작별인사)
어미새 케빈을 포기한 칼을 비난하는 러셀을 뒤로 하며, 칼은 드디어 파라다이스 폭포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칼을 반기는 건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영생의 별에 도착한 뒤 느꼈?? 공허함뿐. 칼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예전처럼 소파에 앉아 ""칼과 앨리의 탐험기 앨범""을 다시 꺼내어 본다. 이때까지만 해도 칼은 겉모양만 할아버지였을 뿐, ???면은 탐험 소녀 앨리를 그리워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를 일깨워 준 것은 앨리의 앨범의 후반부였다. 잊고 있었던 소꿉장난 시절 ""이후""의 칼의 일상들. 소꿉친구 시절 흑백사진 뒤로 스르륵 넘어가는 앨범 뒷면엔, 그들의 결혼사진부터 황혼이 될 때까지 이어지는 원 없이 사랑했고 다정했던 그들의 모습들. 주름살이 하나 둘 씩 느는 그 시간동안 앨리는 항상 칼과 함께 있어 좋았다. 앨리가 웃는 그 많은 빛바랜 추억들로부터 칼은 이미 충분히 앨리를 행복하게 해주었음을 깨닫는다. 부인 앨리와 함께 했던 진정한 행복이 자신이 어려서부터 바라던 파라다이스 폭포가 아닌 그녀와 함께 지내던 일상의 순간들이었음을 깨달으며 비로소 칼은 죄책감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이제 칼은 과거의 소소한 일상을 떠올리며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모험을 향한 평생의 동경을 함께 이루진 못했으나 그들이 살아온 평생의 추억은 그 어떤 모험보다도 흥미로운 것이었으며 행복한 것이었다.
이제 칼에게 생각난 것은 찰리에게 잡힌 어미새를 구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과거의 아집에 ???로 잡혀있던 병적 애도의 과정에서 벗어나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과 역할을 찾는 것이었다. 칼은 자신의 우상이었던 찰리와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서 낡은 앨리의 집을 버리고 찰리의 모험선을 타고 귀환한다. 마치 갓 엄마 품을 떠나 아버지의 모습을 덧입기 시작하는 오이디푸스 소년처럼 칼은 "흥분"하며 방향타를 잡는다.
일생을 자기애와 자기심리학의 연구에 열정을 쏟았던 정신과 의사 하인츠 코헛 박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는 단지 거세불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하인츠 코헛은 유아에게 있어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것은 거세불안의 후덜덜한 공포에서 어쩔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분 좋은 "흥분"이며, 정신치료 상황에서도 이 "흥분"을 버겁게 느끼지 않도록 치료자가 잘 다루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필자가 생각컨데, 이 흥분을 제대로 만끽하는 데 걸림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거세불안과 더불어 어머니를 "배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일 것이다. 칼이 찰리와 싸우는 것만큼이나 앨리의 집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은 어쩌면 거세불안?? 공포와 더불어, 앨리라는 ""어머니""를 배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곧 자기자신도 사라지고 말거라는 두려움(Disintegration Fear : 붕괴불안)을 보여주는 듯 하다. 영화 <박쥐>의 리뷰에서 언급했듯이, 정신분석학자였던 멜라니 클라인이 바라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죄책감을 러셀이 알았을까. 러셀은 안타깝게 앨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칼의 마음이 걱정되어 몇 마디를 건네지만 칼은 이제 담담히 말할 수 있다.
"집은..그저 집일 뿐 이야."
""벤자민 버튼""뿐 아니라
마음의 시계는 누구나 거꾸로 갈 수 있다.
나이에 비해 다소 동안이었던 중년남성 S씨. 부인이 자신과 잠자리를 거부한다며 조심스레 필자에게 털어놓았다. 부인은 S씨의 의처증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남들에겐 한없이 호인이며 인정받는 S씨. 하지만 그의 부부관계는 이미 극심한 위기였다. S씨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로 기억된다. 필자가 놀랐던 것은 둘의 우울증과 의처증이 예상과 달리 오히려 더 심해졌던 것이다. 부인은 ""시어머니가 왜 그렇게 자기에게 모질게 했으며, 이렇게 죽고 난 뒤에 나의 희생은 누구에게 보상받느냐""며 억압된 분노가 해소될 기회조차 박탈된 것에 더 분개했었다. S씨 또한 의처증이 더 심해지면서 완고함과 난폭함으로 인해 S씨의 부인을 더욱 힘들게 했었다.
돌이켜 보면, S씨의 부모 관??는 썩 좋지 않았다. S씨의 아버지는 집에 계신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학령전의 S씨와 엄마는 서로 의지하며 그렇게 포근한 날들을 보냈었다. S씨에게있어 엄마는 때로는 앨리, 때로는 메텔이었다. S씨가 일곱 살 되던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S씨의 아버지는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모습으로 돌변했다. 엄마는 점차 폭력적으로 변하는 남편이 싫어 S씨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결국 S씨를 버리고 집을 나와 도망나갔다가 S씨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다시 들어 왔었다. S씨는 당시에 엄마가 어딘가에서 "죽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가짜 기억이다. 난폭한 아빠보다 더욱 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엄마에게 버려졌다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다. 심리적 충격과 그에 따른 상처가 너무 버거워 미처 받아들이기 힘들 때, 마음은 거짓 기억이라도 만들어내어 연약한 정서를 보호한다. 일종의 자기보호시스템인 셈이다. 마마보이였던 중년남성의 마음은 어머니가 죽은 이후, 엄마가 도망갔던 충격적인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로 돌아가 당시에 받은 상처를 자신의 와이프를 향해 되새김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병적 애도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영화 의 테마는 "모험과 탐험"이다. 영유아가 기거나 걸어 다니게 되면서 새로운 것을 "탐험"할 때, 얼마나 엄마를 안정 기반으로 사용하는가, 또 어려운 시기에 엄마로부터 얼마나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가에 따라 모자간의 애착형성의 질이 결정된다. 필자가 앞서 던졌던 질문이 기억나는가? 영화 에서 칼과 앨리는 왜 불임이었는지. 왜 8분 만에 모든 일생이 영화 초반에 폭풍같이 몰아쳤는지.
8살인 러셀에게나 심지어 80세가 다 되어 가는 칼에게조차, 사랑하는 사람과 지냈던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화려했던 시간은 그저 8분 남짓 찰나(刹那)의 순간으로만 기억 속에 남겨질 뿐이다. 앨리와 칼이 만난 후 그들이 함께 했던 건 비단 칼이 좋아했던 탐험 놀이 뿐만은 아니었다. 앨리는 외나무에서도 칼이 잘 걸을 수 있게 도와주었고 밤엔 행여나 외로울까 창문으로 놀러와 칼이 기분 좋게 잠들 수 있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칼의 모험심을 앨리로부터 공감(共感)받을 수 있었기에 칼은 앨리가 있어 더 없이 행복???다. 심심할 때 같이 놀아주고 안전하게 세상을 탐험할 수 있게 도와주며, 밤엔 마음 편히 재워주었던 칼이 만난 생애 최초의 여성. 그래서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누릴 수 있게 만든 너무나 소중했던 여성. 앨리는 비록 영화에선 칼의 부인이었지만 심리적 현실에선 칼의 어머니였을런지도 모른다. 아마 불임이란 설정도 그런 관계를 넌지시 암시하는 듯하다. 또한 앨리가 칼의 어머니를 상징한다면, 아마 앨리의 나이가 여든 정도일걸로 생각되며 여든이란 칼의 나이는 어쩌면 어머니와 함께 하고픈 심리적 소망의 반영일런지도 모른다.
현실 속의 칼은 아내에게 버림받은 채 러셀 같은 아들을 마지못해 데리고 사는 그저 서투른 남편일 뿐인 것 같다. 칼은 찰리처럼 세상의 인정과 자신의 명성만을 위해 가정을 등지고 살았다가 이혼의 위기에 처하고 아들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했던 S씨와도 닮은 점이 많다. S씨는 영화 의 칼처럼 어머니를 병적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칼은 S씨의 여러 자아의 모습 중 병적인 모습의 자아다. 겉으론 평범한 중년 남성이지만, 내면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병적인 애도반응이란 폭풍에 휩싸인 채,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여든의 모습을 한 여덟 살 어린이"로 묘한 심리적 퇴행을 겪은 것이다. 그???나 S씨는 분열되고 퇴행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또 다른 심리적 자아인 러셀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아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엄마와의 공생 혹은 의존이 아닌 자율적인 탐험의 욕구를 바탕으로 한 ""회복의 자아""인 러셀이 엄마와 늘 함께 하고픈 공생의 지푸라기로 차폐된 마음의 울타리를 두드리고 있었기에, S씨는 칼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이 현재 처해져 있는 나이와 상황에 맞게 지녀야 할 ""모습""과 ""역할""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선택은
엄마가 마지막으로 준 무한한 선물이다.
<은하철도 999>의 숫자 ""999""가 상징했던 것은 어른을 의미하는 ""1000""에서 하??? 모자란 소년이란 의미라고 한다. 메텔과 철이가 헤어지는 장면은 지금도 가슴 저미도록 아련히 떠오른다. 메텔과 헤어지는 철이는 이제 충분히 엄마와 성장을 한 것이므로 더 이상 은하철도 999를 탈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너의 추억 속의 여자일 뿐.. 나는 너의 소년 시절의 마음 속 청춘의 환영..." 이라고 메텔이 마지막으로 철이에게 한 말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고 최고의 대사로 회자되는 이유다.
필자는 병적인 애도를 극복하기 위해선 "역할 변화"라는 마음가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S"라는 알파벳이 "&"로 변하는 정도가 아닌 "S"가 "T"나 "W"의 모습으로 180도 바뀔 각오로 살아가야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가느냐. 아니면 이전의 추구했던 옛 모습에 매여 편집증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영화 말미에 칼 할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이제 남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을 알게 된다. 칼은 이제 자신의 지팡이를 받치던 고무공을 케빈의 새끼들에게 나눠주며 흐뭇해하고, 어릴 적 앨리에게 받았던 뱃지를 러셀에게 주며 기뻐한다. 러셀이 아빠와 재미있게 했다는 게임을 하면서 칼은 이제 진정한 아빠가 된다. 엘리에게 받았던 "사랑"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을 받을 줄 만 알다가 사랑을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주는 사랑을 즐기게 된다.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세계는 칼에게 있어 또 다른 미지의 영역이요, 용감한 탐험의 결과인 풍성한 보물이다. 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큰 소용돌이와 같았던 두려운 "역할 변화"가 필요했었고, 그런 "역할 변화"가 있기까지에는 어릴 적 유원지에서 손에 쥔 풍선처럼 좀처럼 놓기 싫은 "그 분"을 놔줘야 했기에 가능했다.
"그 분"은 참 모순적인 존재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함과 동시에 "상실"을 맛 볼 운명을 동시에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의 메텔이 내내 서양의 상복(喪服)인 검은 드레스만 입고 다녔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