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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탐독의 만화경] 디자인 강박의 절박한 미학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에 책장을 새로 정리한다. 덥고 습한 여름동안 책장에 갇혀 눅눅해졌을 책들에게 환기(換氣)의 기회를 주면서, 나 역시 한 계절 고인 생각을 환기(喚起)하는 시간을 갖는다. 작가별로 분류했던 책들을 장르별로 재분류해보기도 하고, 만화와 문학을 구분 없이 뒤섞어버리거나, 올해는 논픽션을 더 많이 읽는 중이니 픽션보다 꺼내기 쉬운 자리로 옮기는 식이다. 좁은 방 서재일수록 배치의 미학이 중요하다.

2017-09-08 박수민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에 책장을 새로 정리한다. 덥고 습한 여름동안 책장에 갇혀 눅눅해졌을 책들에게 환기(換氣)의 기회를 주면서, 나 역시 한 계절 고인 생각을 환기(喚起)하는 시간을 갖는다. 작가별로 분류했던 책들을 장르별로 재분류해보기도 하고, 만화와 문학을 구분 없이 뒤섞어버리거나, 올해는 논픽션을 더 많이 읽는 중이니 픽션보다 꺼내기 쉬운 자리로 옮기는 식이다. 좁은 방 서재일수록 배치의 미학이 중요하다.

나름 세심한 작업을 하고 있다 보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라고 시작하는 김수영의 시 <그 방을 생각하며>가 떠올라 자괴감을 느끼긴 한다. 하지만 나 같은 일개 범인(凡人)은 방의 구조라도 종종 바꿔줘야 일상의 작은 혁명이나 다른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 투 룸 월세 집에 겨우 혼자 살아가는 일도 안달복달하며 버티는 처지지만, 지상에 마련한 내 서재 겸 작업실이 세상을 향한 내 작전 기지이고 지휘 본부이자 전장 그 자체인 것이다.

책은 마냥 가지고 있기엔 무거운 물건이다. 문제는 이 무거운 물건이 너무 잘 증식한다. 작가와 장르와 토픽이 가지를 친다. 이 책을 다 읽기 전 저 책을 먼저 사놓는 일이 비일비재, 책은 어느 순간 쌓인다. 장서가가 자신의 장서 중 50% 이상의 독서 달성률을 보인다면 건강한 서재라고 생각한다. 사놓고도 안 읽은 까닭에 망각하고서, 같은 책을 또 사오는 수준이 되면 그 서재는 고도 비만이다. 열심히 읽어서 또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어서 처분하는 게 좋다.

△ 오카다키 다케시 <장서의 괴로움> 정수윤 옮김, 정은문고, 2014

“이러다간 집이 무너질지도 몰라!”라고 외치는 오카자키 다케시의 책, <장서의 괴로움>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는 대략 3만 권의 책을 가졌다고 한다. 마포구 서강 도서관에 장서가 6만 6천 권 쯤 있다고 하니 충분히 한 인간의 집을 폭삭 주저앉힐 수 있을 양이다. 나는 가진 책이 2천 권이 조금 안 되는데, 독서 달성률이 50%나 될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그래서 이번 책장 정리는 과감히, 안 읽을 책부터 내버리기로 했다. 한번 읽어서 충분히 내용을 파악했다면 또 읽지 않을 책은 처분하기로. 책 자체의 아름다움과 책장에 꽂혀있을 때의 그럴듯함에 현혹되지 않기로. 특히 예쁜 책들, 디자인이 근사하고 하드커버인 책은 더욱 냉정히 판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의 겉모습이 결코 알맹이를 보장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인간은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책장 정리가 더욱 그렇다. “맞아, 이 책이 그런 내용이었어.”, “내가 이런 책도 갖고 있었군.” 하면서 정리하다 말고 책 속에 정신을 빼앗긴 자신을 발견한다. 처분하겠다고 마지막으로 훑어보다가 다시 읽고는 “그래 이 책은 놔두자.” 라며 도로 책장에 꽂아놓는 것이다. 냉정한 장서가가 되는 일은 어렵다.

크리스 웨어의 그래픽 노블 <지미 코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 Jimmy Corrigan - The smartest kid on earth>(2000)는 이번에 내가 처분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한 책이다. 디자인이 근사하고 하드커버인 이 책은 겉으로 아름답고, 커다란 브로마이드로 펼쳐지는 표지가 독특하고, 본문은 켄트지에 올 컬러 인쇄로 가격이 비싸고, 총 380페이지에 무게가 육중하여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치는데 쓴다면 충분히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힙(Hip)하다.

△ 크리스 웨어 <지미 코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2009


나는 원래 이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었다. 책 중간마다 오려내서 풀로 붙이면 종이 모형을 만들 수 있다는 공작 페이지가 있기에(실제로 그러라고 만든 건 아니다), 나는 실제로 이 비싼 책을 가위로 정말 오려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행히 실행에 옮기기 전 다른 한 권은 누군가에게 선물했다. “이 굉장한 작품을 아직 안 읽었단 말임?” 운운했던 것은 기억나는데 책 내용이 기억나질 않았다. 그새 망각해버린 걸 보니 대단찮은 이야기였던 것 같다. 디자인이 아름다운 책에 대한 나의 힙스터스러운 허영심을 얼른 단죄하고 싶어 중고서점 매입가부터 검색했다. 이 정도면 내다 팔기에 괜찮군. 작별을 위해 마지막으로 훑어볼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지미 코리건>은 실제로 대단찮은 이야기를 하는 만화다. 우주 한복판의 푸른 점 지구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하긴 하는데 이 만화에 우주적 모험은 없다. 책의 두께와 현란한 표지를 보고 기대해봄직한, 거대담론을 향해 과대망상을 전개하는 식의 장쾌한 서사 같은 건 1도 없다. 부제인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가 정말로 작품에 나오긴 했는지 모르겠고,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36세 남자’는 분명 나온다.



이 그래픽 노블은 책 자체가 하나의 근사한 디자인 상품이자, 제품으로서 스스로의 판매 판촉을 위한 프로파간다로 포장되어 있지만, 본질은 지극히 개인적인 테마의 자기 고백적인 예술 작품이다. <지미 코리건>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발칙하게도 독자의 인내력에 도전하는 실험인 동시에
울긋불긋한 색으로 그려진 작은 그림들이 살아 숨 쉬고 춤추며 노래하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만들어내는 일대 로망
- 상세 내역서 및 사용 설명서 포함’.

책을 펼쳐 ‘새로 나온 유머 소설’이라는 소개와 사용설명서의 구구절절한 서론부터 읽고 있으면(게다가 엄청나게 작은 활자) 당최 무슨 소리인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책의 시작부터 독자를 최대한 교란시키려는 작가의, 자기 작품에 대한 위악(僞惡)적인 제스처. 작가와 작품이 독자보다 먼저 비아냥거리다니 대체 어쩌려는 걸까?

자신의 오랜 고통에 대한 내밀한 고백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류의 작가라면, 작품을 만드는 도중 스스로에게 느끼는 환멸이 있다. 내 슬픔에 대해 직접 노래 부르고 춤도 추는 낯뜨거움, 내가 가장 숨기고 싶은 이야기로 나를 뽐내보려 할 때의 괴리감. 스타디움 한 가운데 서서 수 만 관중을 향해 홀딱 벗고 있는 느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작가라면 어느 정도는 자아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나를 전시하는 내가 있고, 나를 관람하는 내가 있다. 자아의 분리가 객관의 시작이다. 그래야만 나 자신과 작품 사이에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

작가 크리스 웨어는 <지미 코리건>에서 이러한 환멸을 강박적인 스타일의 디자인 기법으로 가두고 포장한다. 컷을 작게 쪼개고 나누어서 상황의 압박과 심리의 강박을 실험하고 표현한 만화는 이미 많이들 있었다. <지미 코리건>은 단순히 컷에 인물을 가두는 기법에서 더 나아간다. 이 만화는 그림으로서의 만화가 아니라 디자인으로서의 만화다. (주변의 디자이너들을 통해 목격하고 생각한 것이지만) 디자인은 대단히 강박적인 작업이다. 그림을 규격화하여, 그리는 자유를 스스로 박탈해야 한다. 크리스 웨어는 자신의 분신같은 주인공 지미 코리건을 컷 속에 가두면서 그 캐릭터가 산업 디자인적인 선과 색을 가지도록 했다. 인간적인 터치나 어긋난 선이 없는, 철저히 상품답게끔 극도로 규격화된 그림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러한 디자인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것도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동기술법’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꿈과 회상과 망상이 마구 뒤섞이고, 설명 없이 다른 장면으로 점프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한참 읽고 있다가 왜 갑자기 주인공이 다리 깁스에 목발을 하고 있는지 언제 넘어지는 장면이 있었는지 앞 페이지로 돌아가도 안 보여서 의아해하다가, 난데없이 ‘양철로봇’의 머리가 계단을 구르는 꿈같은 장면이 그 묘사인가 짐작하고는, 뒤표지에 ‘환자는 36세의 남성으로, 넘어지면서 우측 발목을 심하게 접질림.’으로 시작하는 진찰 내용을 발견하는 식이다. (이 고이 접은 브로마이드 표지는 이후에도 작품 해독에 필요한 지도가 된다)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서사는 제멋대로이고, 불친절하며, 난해하다. 그런데 그게 계획된 예술적 의도로 읽힌다. 자동기술법은 자유로운 스타일로 보이지만, 실은 이것 또한 강박의 산물이다. 거의 정신 질환에 가까운 문학적 글쓰기를 택한 것은 결코 허세가 아니므로 “윌리엄 포크너가 <소리와 분노>를 썼고,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썼다면, 크리스 웨어는 <지미 코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를 그렸다”고 트윗을 올려도 충분히 괜찮을 정도다.


멀쩡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 양쪽으로부터 적절한 양육을 받으며 평범하게 자라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누군가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겐 특별히 어려운 일이다. 부모는 나를 만들었지만 신이 아니다. 그들도 한낱 인간이기에 불완전하고, 둘 중에 누구 한 명은 일찌감치 부모 노릇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구의 인생이든 뜻대로 되기 힘든 것임을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말이다. 문제는 어른이 되기 전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 어린 시절에 겪은 결핍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는 그것들과 한번 엮인 인간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지미 코리건 역시 오래 지속되는 결핍에 시달린다. 고독하고 정서불안이고 철저한 외톨이, 즉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로 자라기 전, 어린 지미는 붉은 마스크 쓴 슈퍼맨을 좋아했다. 사인회에서 만난 그가 그날 밤 엄마랑 같이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아침 작은 목소리로 “엄마한테 정말 즐거웠다고 전해라, 알았지?” 지미에게 속삭이곤 슈퍼맨 마스크를 주고 떠나면서 이 파더 피규어(Father Figure)는 영원히 무의미해졌다. 그 결과로 36세의 지미는 나이만 먹은 아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진짜 아버지, 존재하나 마나한 친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추수감사절에 한번 만나자는 편지를 전해오면서 지미의 무미건조한 삶에 균열이 생긴다.



그날따라 타인들로부터 온 편지, 전화, 쪽지 등이 지미에게 계속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다. 있는지도 몰랐고, 있어도 이젠 소용없는 존재들이 말이다. 창문 밖에선 슈퍼맨 복장을 한 사람이 빌딩 옥상 위에서 지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이내 뛰어내린다. 바닥에 추락한 슈퍼맨을 멍하니 바라보는 지미에게 전화기 저편, 요양원에서도 여전히 투정을 부리는 엄마는 “너 혹시 엄마 미워하는 거 아니지?”라고 묻는다. 형제도 없고 아버지와의 추억도 있을 리 없는데 그날 밤 꿈속에서 그들과의 이상한 추억을 본 ‘양철로봇’ 지미는 어쨌든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대체 내 아버지는 어떤 기괴한 인간일까? 어떤 식으로 첫인사를 던질까? 막상 실제로 만난 그의 아버지는 그와 똑같이 닮은 외모를 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지미에게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친밀감을 기대한 적 없는 아버지와의 불편한 만남은 갑자기 시간을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대 만국박람회를 준비하고 있는 시카고에서 이번엔 엄마 없이 무정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코리건, 지미의 할아버지 이야기로 점프해버리는 것이다. (만화는 이 국면에서 족보를 꺼내들며 ‘지금까지의 줄거리 요약’을 해준다)

한 남자(지미의 증조할아버지)가 어린 아들(지미의 할아버지)과 함께 낯선 여인의 집에서 시카고 대화재의 슬라이드를 본다. 환등기의 불빛을 보며 아주 높은 빌딩에서 어떤 이의 추락을 상상하던 소년이 잠이 들면, 여인은 소년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계산된 모성애 흉내를 낸다. 다음날 아침, 남자는 조용히 아들을 깨우고 지폐 한 장을 남긴 채 여인의 집에서 빠져나온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이 시대의 어린 코리건은 이쪽의 화려한 시카고와 반대편의 변두리 시카고 사이에서 세상에는 자신이 절대로 속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걸 알아 버린다.

지미의 할아버지야말로 이 만화의 진짜 주인공,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로서의 코리건일 것이다. 생각이 많아서 그만 일찍 성숙해진 아이는 스스로 너무 똑똑한 까닭에 앎의 고통을 일찍 겪는다고 믿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혼자서 하는 너무 많은 생각에서 오는 앎은 타자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편견으로 향한다. 현재의 코리건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코리건 역시 만화에서 여성과 흑인으로 나타나는 타자에 대한 공포와 욕망의 이중적 감정을 가진다. 1890년대의 어린 코리건에게 여성은 가까이 하고 싶지만 예측 불가능한 소녀처럼 미지의 존재거나, 어두운 2층 방에서 내내 침대에 누워 중얼거리는 병든 할머니처럼 공포의 존재다.

이런 코리건에게 인간적인 다정함을 준 유일한 사람은 흑인 하녀인데, 아버지는 하녀를 임신시키곤 비겁하게 내쫓아버린다. (코리건의 엄마 역시 어쩌면 흑인이 아니었을까? 작품은 이러한 함의를 은근히 품고 있다)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애착은 DNA에 전승되어 손자 코리건까지 편협한 겁쟁이로 만들었다. 현재의 코리건은 아버지가 입양한 딸, 게다가 자신에겐 결코 주지 않았던 사랑으로 키운 흑인 누이 에이미와 마주하자 대단히 당황한다. 그는 혈연이 아닌 누이를 보면서 두 손까지 모은 채 덜덜 떨며 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한다.


이 만화는 사실 쿨한 척 하지만 답답한 이야기고, 우스운 척 하지만 슬픈 이야기이고, 못된 척 하지만 착해 빠진 이야기이며, 즐거운 척 하지만 우울한 이야기다. 엄청나게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 끝내 마지막 페이지에서 가슴을 꽝 때리는 이야기다.

이 그래픽 노블에 담은 작가의 예술적 야심은, 스타일에서 디자인과 자동기술법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방법론을 충돌시켜 예측 불가능한 에너지를 만들고, 내용에서 다른 시대를 사는 두 명의 인물과 이야기를 병치하여 작품이 품은 정서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개인의 이야기에만 함몰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만화의 강박적인 디자인은 어떻게든 세상과 타인과 소통해보려는 절박한 의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디자인 강박의 절박한 미학’이라 할까.

비대한 책장을 독서에 용이한 상태로 정리하려는 나의 디자인적 강박은 끝끝내 <지미 코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를 처분하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을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 위에 올려둠으로서, 내 나름대로의 절박한 미학을 구축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 존 브래드쇼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오제은 옮김, 학지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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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

만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탐독의 만화경>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