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는 올해 프랑스에서 복간된 오래된 만화 둘을 소개한다. 하나는 6월에 Misma 출판사에서 나온 스페인 만화 Ananrcoma (작가 : Nazario), 다른 하나는 9월에 발간된 이태리 작가 Bottaro의 Pepito (Cornelius출판사)
△ Anarcoma 표지
독재자 프랑코의 사망(1975년) 이후 스페인에서는, 그동안 억눌린 욕구들을 분출하듯 쾌락 추구, 소비 지향 성격이 강한 언더그라운드 문화운동이 퍼진다. 이 문화운동을 <모비다(Movida)>라고 부르며, 여기에 대표적인 작가로는 영화 감독 알모도바르(나쁜 교육, Volver 등)가 있다. 지금 소개하는 만화 ‘아나코마’도 마약, 성 등 각종 금기들을 다루는 당시 모비다 운동에 영향을 받은 만화로, 1980년대 초 스페인의 라는 잡지에 연재되었다.
△ 잡지 El Vibora 표지로 실린 Anarcoma
△ 작가 Nazario의 소싯적 모습
제목인 <아나코마>는 트렌스 젠더 사립탐정인 이 만화 주인공의 이름이다. 어느 날 Onliyou박사의 비밀 발명품이 수상하게 사라지는데, 경찰들은 이 도난사건을 처리할 능력이 없고… 찾겠다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이 알 수 없는 도난품을 찾는 것이 만화의 주 내용. 작가 Nazario(나자리오)는 이 인물을 구상할 때 남자로 할까, 여자로 할까 고민하다가 풍만한 여성의 가슴에 거대한 남성의 성기는 그대로 둔, 이 오묘한 인물을 구상해냈다.
△ Anarcoma 본문 중
위의 본문 페이지들은 이 만화 중 비교적 순한 장면들. 성기가 크게 나오지 않는 페이지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여하간 화려한 색상, 과감한 화면 연출, 성과 폭력이 넘치는이 만화의 본문이 궁금하신 분들은 책제목과 작가 이름으로 인터넷에 검색해 보시길. 방금 억압에서 풀려나온 80년대 초 스페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만화. 프랑스와 스페인 판이 동시에 공동 제작되었으며, 프랑스판은 Misma 출판사에서, 스페인판은La Cupula출판사에서 나왔다.
△ 2012년에 나온 뻬삐토 복간 모음집 1권과 최근 나온 2권의 표지
<뻬삐토>는 1950년대에 만들어진 만화로, 뻬삐토라는 이름은 해적 소년의 모험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태리인인 Luciano Bottaro(루씨아노 보타로). 이 만화는 처음에는 이태리에서 출간되기 시작했으나 몇년 뒤 Sagedition(사게디씨옹)이라는 프랑스 출판사에 팔린다. 그 뒤로부터는 이태리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프랑스판으로, 동명인 <뻬삐토>라는 월간지를 통해 큰 인기를 끌며 약 30년 동안 연재를 했다. 프랑스에는 동명의 과자까지 존재하는데, 이 성공담(?)에서 작가의 몫이 어떠했는지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날 지경.
우선 50년대의 유럽 만화 시장이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당시에는 어린이 만화 잡지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스피후 신문)>등과 같은 A4 판형의 신문 형태로, 여러 만화가 함께 연재되어 나오는 만화 잡지가 있었고, 이 외에 한 시리즈의 만화만이 연재되어 나오는 작은 포멧 (13 x18 cm)의 잡지도 존재했다. 이 경우 대부분 해당 만화 시리즈 제목이 잡지명이기도 했다. 이 <작은 포멧(Petit format)> 만화 잡지들은 대부분 흑백 인쇄에, 가격이 저렴하고 매우 대중적이었는데, 허나 종종 작가가 누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림들이 무개성하거나 내용도 비슷 비슷한 경우도 많았으며, 시장은 컸으나 그다지 대접받는 매체는 아니었다 한다. 이 만화들에는 작가 이름이 아예 적혀있지도 않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작가가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작은 포멧 만화는 특히 55년부터 65년에 황금기를 맞는데, 그 중 50년대 말에는 이 작은 포멧 만화 잡지를 만드는 출판사가 14개 가량 되었다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60~70년대에는 생산량이 점점 주춤하다, 이후 서서히 사라진다.
이 <작은 포멧> 만화 시장에서는 저작권 개념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예를들어 작가 A가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시작한 만화라 해도, 출판사가 A의 동의 없이, 도중에 다른 작가 B에게 그 만화를 이어서 진행하도록 시키는 일도 가능했다. 불어권 시장의 경우, 프랑스 작가가 일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만화의 이야기가 잡히면, 이후에 이를 임금이 비교적 싼 이태리나 스페인으로 보내 그곳 작가에게 일을 시키는 경우도 잦았다. 그야말로 작가는 그저 그림그리는 기계였고, 만화는 그저 제품이었을 따름. 뻬삐토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은 포멧> 만화다.
△ 연재 당시 잡지 <뻬삐토> (출처 : https://www.cornelius.fr/blog)
뻬삐토의 작가 보타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만화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려 애쓰고, 만화의 가치를 확신하는 작가중 하나였다. 허나 언제라도 출판사가 자신의 만화를 다른 작가에게 그냥 줘버릴 수 있는 환경에서, 작가의 몫을 요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 복간판 1권 본문 중(출처 : https://www.cornelius.fr/blog)
뻬삐토의 인기는 상당했으나 이것이 작가의 처우 개선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작가는 판매량에 따른 인세가 아닌, 그냥 페이지당 가격을 받는다. 여전히 출판사는언제든 작가를 갈아치울 수 있었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만화를 뺏기지 않기 위해 동료 작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원고를 그려 마감에 늦지 않게 넘긴다. 한 편, 뻬삐토의 출판사는 그동안 본인들이 직접 해적판을 만들어 해외에 팔기도 했으며, (여기에서 작가에게 저작료를 지불한다거나 하는 일을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이 캐릭터를 식품회사에 팔기도 한다. 그렇게 뻬삐토라는 이름의 과자도 탄생하지만, 여기에서도 작가에게 가는 몫은 십원 한장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 수난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 2천년대에 이르자 식품회사가 작가를 고소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유인 즉슨 자신들이 권리를 가진 캐릭터를 작가가 사용중이니 그만 사용하라는 것. 다행히 1심에서 식품회사가 졌으나, 이 소송건은 노년의 작가를 많이 괴롭혔다.
△ 과자 뻬삐토. 본래의 뻬삐또 캐릭터에서 모자는 바뀌어져있다.
70세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만화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던 작가는, 약 2만여장의 만화 원고를 그렸으나 대부분의 원화는 출판사가 가지고 있었다 한다. 여기에서 또 한번 작가의 수난사를 들을 수 있게 되는데… 작가는 뻬삐토 이외에도 디즈니 관련 만화작업도 많이 했다. 어느날 작가가 이 이태리판 디즈니 관련 출판사에게 자신이 그린 원화를 돌려달라 요구를 했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다. 이는 출판사가 원화를 귀하게 여겨, 보관하고 싶었기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냥 내 물건을 왜 남 주느냐는 식의 발상이었는지, 그로부터 몇년 뒤 출판사는 자신의 창고에 있던 원화들을 폐기처분 한다. 이때 그 그림 더미 위에 검은색 이물질을 부어, 그 일부를 더럽히는 등 뒷처리도 깔끔하게( ?) 했다고… 이 원화가 언제 어디에 버려진다는 소문을 들은 작가는 자기 그림을 찾으러러 그 곳에 간다. 허나 이미 그곳에는 같은 소문을 들은 수집가들이 와있어서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한다.
이런 업계의 각종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뻬삐토는 연재 당시 많은 어린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후 이를 읽고 자란 Florence Cestac, Charlie Schlingo같은 만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렇게 잊혀지지 않고 또 다음 세대 출판사에 의해 새로이 복간이 되었으니, 총 3권으로 예상중인 이 모음집은 2012년에 1권에 이어 최근 2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