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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제 漫步만보_ 원로 만화가 순례 ⑥ 조항리

김우영, 오원석, 윤준환, 임웅순, 조항리 5인의 작가들은 “광화문회”라는 동인회로 오랜 예술적 경험과 감성을 공유해오고 있는 우리나라 어린이 만화계의 레전드이다. 그들의 대표 작품을 원화로 만날 수 있는 <만화일기장-유년의 기억, 일상의 기록> 전시회가 한국만화박물관에서 23017년 9월 8일 개최되는데, 모임의 총무를 자청하여 동분서주하는 조항리 선생을 만났다.

2017-09-04 조관제


김우영, 오원석, 윤준환, 임웅순, 조항리 5인의 작가들은 “광화문회”라는 동인회로 오랜 예술적 경험과 감성을 공유해오고 있는 우리나라 어린이 만화계의 레전드이다.
그들의 대표 작품을 원화로 만날 수 있는 <만화일기장-유년의 기억, 일상의 기록> 전시회가 한국만화박물관에서 23017년 9월 8일 개최되는데, 모임의 총무를 자청하여 동분서주하는 조항리 선생을 만났다.

공부보다는 만화가 더 좋았던 소년.

조항리는 지금은 하남시로 바뀐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항리에서 태어나 세 살 무렵 서울로 상경했다. 그래서 누가 고향을 물으면 서울이라고 한다.
그의 본명은 ‘원희’였다. 조원희라는 본명 때문에 신인 시절 여성 만화가로 오해를 많이 사기도 하여 필명을 “항리”로 바꿨다. 지금의 하남시 황동의 옛 지명이 바로 “항리”였으며, 대학 입학서류에서 자신의 본적지 지명을 발견한 직후부터 필명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항상 항恒 마을 리里’ 항상 있는 마을, 특색은 없으나 언제나 제자리에 있는 마을, 변함없고 정감 있는 느낌이 드는 이름이라 만족하고 있다.

중학생 시절, 군에서 제대한 삼촌이 들고 온 고바우 김성환의 ‘만화 승리’를 보게 된 것이 만화와의 첫 번째 조우였으며, 고등학교 1, 2학년 때부터는 방학 때만 되면 이웃에 살고 있던 신동헌 선생 댁을 찾아 그림을 배웠다. 신동헌의 캐릭터 ‘왕눈이’의 그림체를 처음부터 좋아했던 조항리는 틈만 나면 약수동에 살고 있던 신동헌 선생 댁으로 찾아가 때가 되면 밥도 얻어먹고 그림에 대한 평도 듣곤 했다.



만화에 흠뻑 빠진 조항리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서도 그림만 그렸다. 공부보다는 만화가 더 좋았던 그는, 모교 교지에 4컷 만화와 만평까지 담당하며 여러 학우들과 선생님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찾아온 방학과 함께 교지가 휴간이 되어 생애 첫 연재 작가로서의 기쁨과 자신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항리는 이후 좀 더 적극적인 작가로써의 인생을 개척해 가는데, 자신이 그동안 그려두었던 만화 원고를 들고 <만화학생>이란 잡지사를 직접 찾아 간다. 만화학생의 편집장이었던 ‘추동식’은 고일영의 필명으로 당대의 유명한 만화가였으며, 바로 고우영의 친형이기도하다.

분명 아마추어 수준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추동식은 조항리의 가능성을 크게 보고 연재를 결정했는데, 잡지 “만화학생” 이 그야말로 학생 작가의 작품을 연재한 것은 여느 매체를 통 털어서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자신감 충만해진 조항리는 잡지 <만화세계>에도 도전을 하게 되는데 이곳엔 ‘양정기’ ‘이범기’ 그리고 학생신분의 ‘고우영’이 나름의 아성을 쌓아가고 있는 곳이었다.
8쪽 짜리 만화를 초등학교 교과서 삽화가로 유명한 ‘김태형’의 그림체를 흉내 내어 투고를 했지만 끝내 작품은 채택되지 못했다. 하지만 조항리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서울에서 발간되는 모든 일간 신문들을 구해 게재된 연재만화를 보며 신문만화 연재에 도전한다.
당시 발행되던 10대 일간지 중에서 시사만화를 게재하지 않은 신문은 <조선일보>와 <자유신문>이었는데, 두 신문사를 목표로 그 동안 그려 놓은 ‘화등잔’이란 캐릭터를 다듬고 아이디어를 고쳐서 4컷 만화 10여점을 완성시켰다.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꼼짝도 않고 만화만 그리는 조항리의 모습을, 판검사나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님은 그저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는 줄로만 오해하고 계셨을 것이다.
혼신을 다해 그린 네 칸 만화 ‘화등잔’ 을 들고 그는 제일 먼저 <조선일보> 문화부장을 찾아 간다. 하지만 원고 검토는 커녕 만화 자체를 연재하지 않는다는 면박만 듣게 된다. 당황하고 무안하여 얼굴이 붉어진 조항리를 문화부장은 신문사 지하에 있던 새싹회의 윤석중 선생을 대신 소개해주었다.
<소년조선일보> 편집 책임자이기도 했던 윤석중 선생과 신문 삽화 원고를 들고 온 고바우 김성환을 현장에서 만나게 된 건 행운이었으나, 여러 기성 작가 세계의 장벽에 대한 정보와 작품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만 귀담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장안의 10대 신문 중 하나였던 <자유신문>에 만화를 그리는 고등학생

조항리를 익히 알고 있었던 동네의 자유 신문사 지국장으로부터 <자유신문>에 연재했던 ‘김경언’의 시사만화 연재가 끝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조항리는 <조선일보>에 가져갔었던 원고를 다시 다듬어, 무척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코트도 없이 교복 차림으로 문화부장을 찾아간다.

<자유신문> 문화부장은 ‘명동백작’으로 유명한 문단의 한량 ‘이붕구’ 선생이었는데, 가져간 만화원고를 몇 번이나 들여다 본 문화부장의 ‘두고 가라’는 말을 듣고 조항리는 기쁨에 90도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날로부터 조항리는 신문발행 시간에 맞춰 <자유신문>을 사서 문화면부터 다른 면까지 샅샅이 찾아보게 되지만 오매불망 그의 만화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 동안을 기다리기에 조바심이 난 조항리는 어느 날 <자유신문사>를 직접 찾아가게 되는데, 신문사 입구 오늘자 발행한 신문을 붙여놓은 게시판의 문화면 한 가운데에 조항리의 ‘화등잔’이 버젓이 게재되어 있는 게 아닌가. 바로 그날 1958년 2월 2일을 조항리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후 조항리의 원고는 신문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간헐적인 주기로 연재가 이어졌는데, <자유신문>에서는 존재감이 미약했으나 당대의 사회적 상황에서는 큰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그야말로 서울 지역 10대 신문의 지면에 만화를 연재하는 학생작가 조항리이였기에, 주위 가족은 물론 학교에서도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 수업 시간에 만화를 그려도 용서되고, 수업 도중에 원고 제출을 이유로 조퇴를 신청해도 허락되었다.

‘화등잔’의 연재는 이봉구 문화부장이 퇴사하기까지 약 6개월간 진행되었다. 이후 조항리는 4면으로 창간된 <소년소녀 자유신문>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연재의 기회를 얻게 된다. 아동문학가 이주훈이 편집장이었으며 그는 조항리에게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6칸 만화 ‘종달이’를 청탁했다. 종달이는 초기 일주일 주기 연재로 시작하여 다음 해 부터는 4컷의 매일 연재로 전환되었다. ‘화등잔’의 원고료는 500환이었으나, ‘종달이’의 원고료는 무려 2만환이었다. 당시 신문 한 달 구독료가 400환이었으니 학생 신분의 조항리로서는 어마어마한 수입이었다.

조항리는 약 4개월 정도 <자유신문사> 연재를 마무리하고 이주훈의 소개로 <새벗>에 만화를 게재하게 되었다. 그 후 어린이 잡지와 대중잡지를 번갈아가며 작품 연재를 꾸준히 이어가면서, 만화 입문 시기부터 동료로 만난 채일병의 권유로 단행본 창작으로 시야를 넓혀갔다.

<아침에 지는 해>가 <별 하나 나 하나>로 바뀐 사연

조항리의 실력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채일병은 원고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으니 부지런히 그리기만 하라고 응원을 했다.
만화계의 마당발 채일병의 응원에 힘을 얻은 조항리는 김래성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에 영향을 받아 128쪽 분량의 단행본 <아침에 지는 해>의 원고를 탈고한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기대를 걸었었던 만리동의 모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고 낙담한 나머지 조항리는 염천교 위에서 원고를 찢어 버릴 생각까지 했다.
채일병의 만류로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다시 다른 출판사를 찾아 헤매던 중 그들은 ‘독수리 문고’ 강부호 사장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독수리 문고 강부호 사장은 당시 20여명의 만화가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만화가들 사이에선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조항리의 원고를 본 강사장은 ‘일만 칠천 환’ 이란 원고료를 선뜻 지불했다.

당시 만화 단행본 표지의 컬러 채색은 분판(아연판에다 직접 색깔별로 따로 그려야 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했는데 박광현 선생이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다.
조항리의 작품 제목을 본 박광현 선생이 ‘아침에 지는 해라니?! 말이 되느냐?! 라는 위압적인 태도에 눌러 한 마디도 못하고 나왔는데, 한 달이 지나 독수리 문고에 가니 조항리 만화의 제목이 ’아침에 지는 해‘가 아니라 박광현 선생이 임의로 고친 제목 ’별 하나 나 하나‘로 바꿔 출간된 것이었다.
조항리에겐 다소 탐탁치않은 제목이었지만 다행히 ‘별 하나 나 하나’는 히트를 친다. 그리고 단행본 첫 작품의 인기 덕분에 조항리는 다음 작품을 독촉 받는 만화가로 도약하게 되었다.

‘별 하나 나 하나’에 이어 ‘혜성 같은 소년’을 발표하고, 그 인기에 힘입어 ‘혜성같은 소년과 괴도 뤼팽’, ‘혜성같은 소년과 흡혈귀’ 같은 혜성 같은 소년 시리즈로 조항리 작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조항리가 꿈꾸던 신문만화는 4. 19와 5. 16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수의 신문들이 정간, 폐간을 당하는 바람에 지면을 잃게 되었고, 그나마 발표할 여지가 있었던 잡지사의 연재 원고료는 수익이 변변치 않았다. 그런 와중이었기에 조항리에게 단행본 만화는 단비 같은 수입원이 되었다.

문하생을 두지 말고 다작을 하지 말자. 작품의 수준을 높여 원고료를 올려야 한다는 논리로 조항리는 늘 혼자서 그렸다. 그런 고집 탓에 조항리는 몇 달에 한 권씩 밖에 작품을 발표하지 못한다.

만화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무너져 버려 애니메이션계로...

1961년 5.16이 일어난 그해 9월, 군사정부 문화 담당관이 아동 만화가들을 중앙청 회의실로 모아 발족시킨 것이 만화의 사전 심의를 위해 만든 ‘한국 아동만화 자율 위원회이다. 당시 ‘혜성 같은 소년’이 20권 가량 출판되며 인기를 끌었지만, 탐정만화는 범죄를 다루는 내용이 많아 검열을 당하기 시작했고, 검열 때문에 원고를 수정하느라 시달려 지친 조항리는 마침내 ‘혜성 같은 소년’ 시리즈를 중단하고야 만다.

대신 장르를 바꾸어 심의에서 무난하게 넘어 갈 수 있는 작품으로 발표했지만, 이제는 독자들의 반응이 시들해지면서 서서히 그의 인기는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매년 5월과 10월이면 만화를 악서의 대명사인 것 마냥 신문과 라디오에서 떠들어대는 시대적 풍조 속에서 조항리는 작가로서의 자존감에 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만화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무너져 버린 조항리는 1966년 10월 말경 심의 지적을 받아 돌아온 작품을 수정하지 않고 해당 출판사와의 관계와 연락도 묵살한 채 6개월 동안 두문불출하며 책만 읽었다.

실의에 빠져있던 조항리는 동료 작가 김청기의 권유로 1967년 박영일 감독의 <손오공> 애니메이터로 참여하게 되는데, 그 무렵 국내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신동헌 선생의 주도로 제작되고 있던 터라 애니메이션에 대한 만화인들의 관심이 높았다.

조항리는 김청기와 함께 TBC동화부에 입사를 하면서 본격적인 애니메이터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데 <황금박쥐>와 <요괴인간> 등의 작업에 연이어 참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이 아닌 타인의 그림을 대신 그리는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작화가로써의 생활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절필한 지 3년. TBS 동화부를 퇴사한 뒤 조항리는 다시 단행본을 그리기로 한다. 하지만 든든한 파트너였던 독수리 문고는 폐업을 했고, 이영복, 채일병, 이덕송 등의 인맥으로 출판사를 소개받아 다수의 SF 장르 만화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3년간의 공백이 너무 컸던 것이었다.

친구 김청기와 함께 한 에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

조항리는 고심 끝에 단행본에서 다시 눈을 돌려 신문/잡지 연재 작가로 복귀하는데, 대중지 <명랑>에 ‘우수리’ <로맨스>에는 ‘미스 깽’, <영화잡지>에는 ‘미스 호들갑’을 연재 하였다.

어린이 만화잡지 월간 <만화왕국(발행인 조범래)>에서는 ‘괴도 뤼팽’을 시작으로 연재를 시작했는데, 자본이 부족한 만화왕국사가 사세가 기울어 졌을 떼 사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마지막 편집장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건강이 악화되어 대수술을 하고 1년간 요양을 한 조항리는 문화영화사인 <동양문화>에서 CF 기획과 연출, 애니메이션 작업을 맡게 된다.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촬영 현장을 데리고 다닌 감독의 호의 덕분에 구체적으로 영화 연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고, CF 제작 감독도 해보면서 인정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친구 김청기와 조우하게 되는데, 그때 의기투합하여 시작한 작업이 ‘로보트 태권 V’ 이다. 김청기의 평생 소망은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이었는데, 유현목 감독이 각본, 홍보, 흥행을 담당하고, <서울동화(대표 김청기)>가 연출, 작화, 촬영을 담당해서 다음 해 여름방학에 맞춰 개봉하게 되는 프로젝트였다. 바로 ‘로보트 태권 V’ 제작 프로젝트였으며 조항리는 각색, 작화, 연출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로보트 태권 V’ 의 시나리오를 쓴 지상학은 이야기 구조는 잘 만들지만 로봇만화에 대해서는 경험이 다소 부족했다. 조항리는 지상학의 시나리오를 보완해주는 다양한 정보와 기술들을 제공했다.

6개월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부족한 전문 인력으로 제작을 하려니, 철야작업을 두 달 이상 강행해야 했지만, 모든 직원들은 한 마디 불평 없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부흥에 대한 사명감으로 작품 제작에 매진했다.

대한극장에서 여름방학을 맞이해 개봉한 ‘로보트 태권 V’는 일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대박을 쳤다. ‘로보트 태권 V’가 개봉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일본 도에이 동화(東映動畵)에서 애니메이션 작화 의뢰 요청을 했지만, 김청기는 ‘도급 제작은 하고 싶지 않다. 동등한 입장에서 합작을 하면 하겠다’며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기회를 걷어 차 버리기도 했다.

조항리는 김청기 감독과 ‘로보트태권 V’ 시리즈를 비롯해서 ‘똘이장군’, ‘황금날개’, ‘우뢰매’ 시리즈도 제작하여 크게 인기를 모았다. 다수의 작품에서 조항리는 애니메이터 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혹성 로봇 썬더에이’ 등의 작품에서는 직접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김청기 감독과 만든 심형래 주연의 ‘외계에서 온 ’우뢰매’의 인기는 ‘로보트 태권 V’ 를 능가하는 기록이었다. 1탄에서 4탄까지 연이은 흥행에 힘입어 완구 제작과, 소년잡지 ‘월간 우뢰매’를 창간하여 5 만부 매진이라는 엄청난 성공을 맛보기도 했지만, 작가적 이상과 의욕 등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못해내는 바람에 좀 더 큰 도약을 하지 못한 채 이선으로 물러나게 된다.

‘로보트 태권 V’ 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에서 평가 되고 있지만, 일부 악의적인 비평을 하는 이들에게 그는 항변한다. 창작이란 것이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원형이 있고 이를 어떻게 변형하느냐가 중요하다. 여러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도 많겠지만 새로운 것을 수용했다고 봐주면 좋겠다고.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작품의 완성도나 인기 면에서 ‘로보트 태권 V’와 비견 할 만한 한국 장편 SF 만화영화는 없다. 더구나 SF 시리즈를 7편까지 제작한 사례는 극영화든 만화영화이든 한국 영화사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며 그려왔기에 조항리는 후회가 없다.

실직자가 된 조항리는 가족들 눈치 보기 힘들어 후배 일러스트레이터 최준식이 운영하는 ‘동화나라’ 사무실 한 켠으로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 신문 잡지 사보 등 인쇄매체에 발이 넓었던 동화나무는 일감이 많았다. 그 덕분에 조항리도 일감을 얻어 꽤 덕을 많이 봤다.

그러던 어느 날 최준식이 어린이 문예에 연재했던 만화 ‘밤토리’ 원고를 가져 오라고 한다. 그 원고를 <대교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있던 ‘만화일기 시리즈’로 출간하도록 주선해 준 것인데, 출판사의 뛰어 난 만화일기 기획 덕분에 ‘밤토리 만화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파랑새 출판사>에서도 밤토리를 주인공으로 한 고전학습만화까지 출간되기도 했는데 후배 최준식에게 두고 두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조항리는 다른 작가들보다 만화 자료 수집을 많이 하는 작가이다. 일본 만화가 주류를 이루던 그 시절부터 유럽이나 미국 만화를 구하러 다녔다. 만화 공부할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한 ‘매드MAD’ ‘뉴요커(The New Yorker)’ 그리고 일본의 ‘만화독본(漫畵讀本)’ 등 주로 카툰이나 네 칸 만화 자료만 구했다.

선도 엉성하고 먹칠한 부분도 꽉 차지 않은 그림체인 슐츠의 ‘피너츠’는 조항리의 만화 교과서였다. 스타인버그의 작품도 1958년쯤 일본의 만화독본에서 처음 봤을 때는 피카소 그림 같구나 하는 정도로 보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안목이 높아졌을 때 ‘뉴요커’에서 다시 보게 되면서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의 실력을 아는 학계에서는 조항리를 많이 찾는다. 마음 약한 그는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대학에 출강을 하기도 했지만, 40대만 되어도 교수라도 될 욕심을 부려 보겠지만 지금은 미련이 없다.
“피카소나 디즈니가 교수라서 유명한가. 작가는 작품으로 이름을 남겨야지”

조항리가 말하는 ‘카툰의 세계’

만화학과 학생들에게 “카툰은 만화의 기본” 이라며 아무리 강조를 해도 학생들은 이해하려고도 안하고 그리기조차 싫어하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서 조항리는 무척 안타까워한다. 카툰은 시적이고 ‘퀴즈적’이다. 수준이 있어야 맛을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대중성과는 영원히 먼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서이다.



조항리는 이런 환경 탓을 작가의 책임으로 본다. 카툰을 이해 못하는 독자를 이끌어 줘야 할 책임을, 외곬로 형식에 고집을 말고 그림으로도 수준을 높여야 하는 기성 작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르디요’의 만화는 카툰으로서의 재미도 있지만 일러스트로도 좋은 작품이고, 서정 카투니스트 ‘레이몽드 뻬이네’는 내용과 맞는 좋은 그림에 유머까지 있는 작품, 카투니스트이면서 일러스트레이터인 ‘앙드레 프랑소아’처럼 높은 컬러링 작품처럼 우리나라 카투니스트들도 작품에 대한 고민과 열정이 살아나기를 노작가는 기대하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상이 남달라 할 이야기는 많지만 언제나 절제하며, 남의 뒤에 서서 양보하고 관조(觀照)하듯 살아가는 조항리 선생은, 어린이 만화의 또 다른 전설을 만든 원로 만화가들의 캐릭터들 - 뚱딴지, 꾸러기와 맹자, 따개비, 코망쇠 형제, 팔방이, 밤토리가 등장하는 전시의 개관을 기다리고 있다.

조항리는 어린이들과 부모님이 함께 즐기며 감상할 수 있도록 광화문회의 첫 전시회 <만화일기장-유년의 기억, 일상의 기록> 에 대한 홍보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항리(본명 : 조원희)

1940년 경기도 광주 생
1958년 일간 <자유신문>에 4컷 만화 '화등잔'으로 데뷔
1959년 어린이 잡지 <새벗>에 '종달이' 연재, 어린이 잡지 <국민학교 학생>에 ‘구슬이’ 연재
1960년 단행본 ‘별 하나 나 하나’ 발표, ‘헤성같은 소년’ 시리즈 발표(전 20여권)
1964년 단행본 ‘끝없는 도전’ ‘세 소년’ 발표
1965년 아동만화 자율위원회 위원, ‘소년 탐정 살별이’ 발표
1967년 TBC-TV 동화부 근무 (만화영화 황금박쥐, 요괴인간 작화 참여)
1970년 ‘잃어버린 지구’ ‘우주소년 알파’ 발표
1971년 대중잡지 <명랑>에 ‘우수리’ <로맨스>에 ‘미스 깽’ ‘미스 호들갑’ 연재
1976년 만화영화 ‘로 보트 태권 V’ 작화 참여
1977년 만화영화 ‘황금날개’ 각본 및 작화
1982년 만화영화 ‘혹성 로봇 썬더 A’ 각본, 감돋
1984년 만화영화 ‘84 태권 V' 각본, 작화
1986년 만화영화 ‘우뢰매’ 각본, 작화
1987년 일본 애니메이션회사 DIC 감독
1988년 월간 우뢰매 발행인, 편집인
1989년 월간 <항공>에 ‘우수리’ 연재
1991년 어린이 잡지 <어린이 문예>에 ‘밤토리’ 연재
1994년 월간 <2000년>에 ‘정아비’ 연재, 단행본 ‘밤토리 만화일기’ 발표, 어린이 잡지 <소년>에 ‘무녀리패’ 연재
1996년 단행본 ‘밤토리 목민심서’ 발표
1998년 단행본 ‘교양고전만화’ 제작
1999년 단행본 ‘밤토리 삼국유사’ 발표.

1996년 ~ 2009년 명지대학 사회교육원. 청강문화산업대학에서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애니메이션 카툰 강의. 일러스트 하우스 전주 경호 직업전문학교 출강.

현재 : 잡지 및 주간지 작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