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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35 : 이희재, 이해경, 이진주

1952년 전남 완도 출생. 역시 만화를 무척 좋아했던 시절이 있다. 비록 가난해서 밥을 굶더라도 만화 보는 것은 빼놓지 않으며 만화에 대한 꿈을 부풀렸던 소년기를 보냈다. 1970년 꿈에 그리던 인기 극화가 김종래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기초과정을 배우며 능력을 키워나갔다.pg

2017-10-18 박기준

이희재

1952년 전남 완도 출생. 역시 만화를 무척 좋아했던 시절이 있다. 비록 가난해서 밥을 굶더라도 만화 보는 것은 빼놓지 않으며 만화에 대한 꿈을 부풀렸던 소년기를 보냈다.
1970년 꿈에 그리던 인기 극화가 김종래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기초과정을 배우며 능력을 키워나갔다.
1976년 애니메이션 회사에 근무.
1979년 주식회사 <바른손>의 개발부 디자인실에서 근무.
1980년 <한국학력개발원>에서 편집 미술부 근무.
1981년 마침내 청소년 만화 ‘명인’으로 데뷔한다.
1983년 <보물섬>지에 ‘악동이’를 연재하며 인기 작가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골목대장 ‘악동이’는 1980년대 무렵의 우리 사회의 현실도 보여 주고 있다.
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신문 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운동회에서도 이기기 위해 친구를 매수하는 부잣집 아들. 할 수 있는 일을 박탈 당한 채 쓸쓸한 노년기를 보내는 노인들의 이야기 등, 순간순간 우리들의 현실을 상기시켜 가며 해결점에서 진한 감동과 함께 여운을 안겨준다.
이어 <소년중앙>의 만화 부록에 6년간을 연재.
1986년 극화 ‘현상금을 따먹는 사나이’를 게재하며 성인만화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간판스타’ ‘성질수난’ 등 20여 편의 단편 발표.
1988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선정 우수만화상을 거부, 다음 해 우수만화상 수상.
1996년 경민대 만화영상과 출강.
1996년 한겨례문화센터 출강.
1998년 서울 산업대 출강.
2016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역임.
1988년 <보물섬>에 ‘나의 오렌지나무’를 연재하며 인기 상승.
1990년 이원복과 함께 글 그림을 맡아서 ‘한국의 역사’를 전집류로 발표한다.
1992년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발행. 일본판으로도 번역 발간하였다.
백기완 원작 ‘쇠뿔이’ 만화로 발행. ‘개구장이 꼬마 도깨비 마루를 찾아라’ <한겨레 문고>에서 발행.
1980년 만화계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참신한 만화, 건전한 만화의 보급에 중심을 둔 <바른 만화 연구회>란 모임을 발족시켰다. 100여 명의 회원 대다수가 실험 정신이 넘치는 신선한 신진작가들이었다.
현재는 사단법인 <우리만화연대>로 크게 확대된 단체로 발전하고 있다.
그의 작품과 활동이 더욱 빛나길 바란다.

△ 청소년 만화 캐릭터 ‘악동이는 꾸지람에 익숙한’말썽꾸러기로, 공부시간에 엉뚱한 짓만 하는데도 많은 친구들이 따른다. 맑고 순수한 심성 때문이다.

△ 악동이 이야기(1983년 ‘보물섬’연재) 
 악동이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고 겪게 되는 이웃 이야기다. 
이 만화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어린이들 시선을 통해 보는 또 다른 어른 만화이기도 하다.

△ 성인극화 ‘간판스타’, ‘성질수난’ 현존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냉정하게 파헤친 단편모음집.  
그림을 통한 그의 표현기법 또한 특이한 것이 특징이다.(1987년 예음)

△ 망원경보다는 현미경으로 세상을 보는 작가. 현지 어디든,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뛰어다니며 취재한다.  
사회문제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현장으로.(1988년 고구려성)

△ ‘아홉살 인행’(2003년 12월 3일 주간신문)  
특이한 기법으로 실감있게 현장감을 보여주고 감동의 여운을 오래 남기는 작가로 유명하다.

△ 시사 카툰 ‘형제’(1990년 1월 ‘시사만평’지서 게재)

△ 일본에 진출한 극화로 한국만화의 실력을 보여줬다. 
 1. 그의 작업실 책상 
 2. 한국의 역사시리즈 
 3. 윤복의 일기 
 (코리안 코믹 스토리 1989년 5월호 소개)

△ 봄 꽃이 만발한 서울대 공원에서 열린 우리만화협의회 가입 단체인 몽당연필, 보리풀, 작화공방, 민미협 만화분과 등의 회원과 일반회원들이 참석(1994년 4월 주간만화 게재)

△ 우만연 결성. 만화계몽 운동에도 앞장서. 
 인데코화랑에서 ‘만화는 살아있다’전 크게 열어(1994년 6월 22일)

△ 우만연에서 발간했던 색다른 만화 무크지들 ‘만취’

△ 격월간지 ‘우리만화’

△ (국회의원 회관 앞)오래 전 월간 ‘만화광장’기자와 작가로 인연이 있었던, 민병두 의원과 만화정책을 논의하는 이희재.(2004년 ‘계간만화’에서 게재)

△ 대전 목원대 만화예술학과 심포지움 참석 후, 대전 만화 학원 방문(1999년 10월 28일) 
 (앞 좌 : 박인하(청강문화대 교수) 필자, 이희재 뒤 우: 길문섭 원장과 학원생들)

△ 제 9회 일본 교토 국제만화 서미트 참석한 일행(2008년 교토) 
 (좌 : 이현세, 이두호(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이희재, 원수연, 김용수, 김동화(한국만화가협회 회장))


이해경

1951년 부산 출생. 본명 이미라.
초등학생 시절에 소아마비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일찍이 일본에서 여학교를 졸업한 신식 어머니 밑에 태어났기 때문에 재활을 위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녀는 비록 신체적 고행을 마다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지만, 힘들 때마다 독서와 한국화 공부에 더 몰입하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만화가로서의 소양이 닦이는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
13세 때 소파 방정환의 동요 ‘삼형제 별’의 가사 내용을 소재로 삼아 60쪽짜리 작품을 완성해냈을 정도였다.
이해경은 당시 최초 순정만화의 형태를 형성하고 인기 순정만화가로 활동하면서 만화가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김정파 선생을 찾아 갔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기질이 있음을 알아 본 선생은 기꺼이 그녀를 어시스턴트로 받아 주었고, 그의 화실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일하게 된다.
1974년 <새소년>에 ‘현아의 외출’이라는 작품을 이미라라는 실명으로 게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자각한 그녀는 집으로 내려가 10년간 문학 작품을 접하면서 한국화에 도전, 만화에 필요한 것 외의 많은 내적 실력을 기르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1982년 부산 MBC <어린이문예>에 ‘천사의 시’ 게재. 같은 해 <새소년>에 극화 ‘이사도라 덩컨’ 게재.
1993년 <독서광장>에 ‘베토벤’ ‘모차르트’ 발표.
1996년 <제1회 아시아 국제만화제>에 만화가 협회의 회원으로 참가. 어머니의 통역으로 일본 굴지의 출판사인 <집영사>에서 발행되는 격월간 여성지 의 청탁을 받고 극화 ‘만남’을 3년간 연재.
1997년 <소년 동아일보>에 ‘다다의 요리일기’ 연재.
1990년 <매주만화>에 연재했던 성인극화 ‘잠들지 못하는 여자’는 주인공 스스로가 자전적 모델이었노라고 자서전에도 씌어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할 작품의 캐릭터라 말하고 있다. 5-6년간 여러 매체를 통해 선보여 오는 동안 독자들에게 이미 친근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난을 헤치며 성공한 인간 승리자의 한사람이다.
명지대 사회학과 만화 창작 겸임교수. 장애자를 위한 재취업 인력공단에 교육 과정 강사로 출강.
2005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 수상. 그녀와 동고동락한 그의 모친에게 <만화영상 진흥원>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수여하였다.
2006년에는 만화가 협회의 이사로, 또한 여성만화가 협회의 원로로서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고 행복한 일상을 꾸리고 있는 의지의 만화가라 하여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지금도 후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땀 흘려 최선을 다하며 자기 길을 가고 있는 자랑스런 여성만화가이다.

△ 제1회 동아시아 만화 서미트 참가(1996년 9월) 
 전시 원고 작품 캐릭터 작품

△ 초기의 작품 ‘우유빛 천사’는 이해경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1977년)

△ 예술의 향기 ‘모차르트와 피가로의 결혼’(1993년 독서광장 연재)

△ 일본 성인 여성지 ‘YOU’에 ‘만남’등 연재. 
 일본과는 다른 한국의 여성상을 소개해.(1998년 - 2000년)

△ ‘겨드랑이가 가렵다’(2005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이해경의 문제작

△ 제 1회 아시아만화 서미트 참가(1996년 9월 일본 이와끼시 명성대학에서) 
 (앞 좌 : 기무라 다다오(일본만화신문대표), 이해경, 심상기(서울 문화사 대표),  
이와끼시 시장, 권영섭(한국 만협 회장), 권혁준  
둘째 좌 : 박명철, 필자, 이경래(교수), 최경탄, 김진, 강촌, 이충호, 김이랑, 김준범 
 셋째 좌 : 조명운, 이재학, 최준식(어깨동무, 주간), 이정문 
 넷째 좌 : 황미나, 장태산, 박산하, 조명운)

△ 서울 국제만화전 행사장에서 ???시휴식(1998년 5월)

△ 만화가 오세명 1주기 추모전 저녁회식에서(2017년) 
 (좌 : 김광성, 조관제, 이해경)


이진주

1952년 서울 출생.
1972년부터 만화를 동경, 인기 만화가 김기백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스습 기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평생의 동반자 이보배(순정만화가)를 만나게 된다.
1979년 ‘어린이 1, 2 구조대’라는 단행본 작품으로 데뷔.
1980년 ‘하니와 황태자의 사랑’ 시리즈.
1983년 ‘하니를 백작 품에’ 시리즈.
1985년 <보물섬>지에 ‘달려라 하니’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크게 히트를 쳤고 화제의 주인공으로 올랐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래 터진 또 하나의 특이한 스포츠 만화였다.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화제가 된 육상 3관왕 임춘애의 인기에 힘입어 순정 스포츠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 만화계에 입문하면서 데뷔 초기에 펴냈던 것은 일본 ‘마징거Z’ 류의 SF만화였다. 그러나 군사 정부 때 격투를 소재로 한 만화를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정통 순정만화에 손대기 시작한다.
때마침 일본 만화 ‘캔디캔디’ 시리즈, ‘베르사이유’ 시리즈, 그리고 ‘유리가면’ 시리즈가 한국에 상륙하여 일본 만화가 판치고 있던 시대였다. 어느 날 일본 만화 냄새가 나는 캐릭터에 회의를 느낀 그는 고심 끝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캐릭터 ‘하니’를 탄생시켰고 이후 우리 만화판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한다.
기존의 순정만화들이 보통 감상적이고 몽환적인 소녀의 모습을 그려내 왔었다고 한다면, 이진주는 스포츠를 통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도 역경을 헤쳐 나가는 힘찬 정신력의 소녀상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온가족이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는 건강한 작품으로도 손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KBS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서 주제곡과 함께 온 동네를 진동시켰으며 캐릭터 상품으로도 개발이 되어 부가가치가 많은 작품으로 기록된다.
후속작 ‘맹순이’ ‘오추매’ 도 많은 독자들을 끌어들인 인기작으로 계속 환영받고 있다.
1997년 <인덕대학> 멀티미디어학과 교수로 출강하여 후학들을 지도.
1999년 <한국만화문화대상> 수상.
1999년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 역임.
그가 살고 있는 동네는 만화 장면으로 많이 쓰였기 때문에 특별 취재해 TV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작업실 책상 옆에는 또 하나의 책상이 하나 더 놓여 있는데 몇 해 전 숨진 여류만화가 이보배의 책상이다. ‘달려라 하니’는 이 두 부부가 만들어 낸 노력의 소산이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첫딸은 진주, 둘째는 보배로서 이 이름은 만화의 캐릭터 명을 그대로 붙인 것이라 한다.

△ 까만 머리카락의 우리 순정만화 여주인공(1985년부터 2년간 보물섬에 인기리에 연재) 
 하니를 통해 역경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준 걸작

△ 순정, 명랑 스포츠만화라는 장르를 개척한 이진주는 
 순정만화의 비현실적 설정과 스타일에 큰 변화를 일으켜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 결손 가정의 문제아가 지닌 특수한 능력이 의외로 지도자와 만나 성공한다는 성공담이 큰 감동을 안겨준다.


△ 성인 극화 제9교시 ‘사랑 실습’(1986년 3월호 만화광장 연재)

△ 아내 이보배가 이진주를 캐리커처한 작품.(1998년 만화터 여름호 게재)

△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 폭발적인 인기를 이끌어냈다. 
(1988년 TV 애니메이션 13부작 방영. 주제가 악보와 스토리보드)

△ ‘달려라 하니’애니메이션 포스터 앞면, 뒷면 
 (1988년 대원동화 제작)

△ ‘달려라 하니’ 뮤지컬 포스터(2007년 세종 문화 회관 대극장) 
 원작을 뮤지컬로 만들어 또 다른 관객에게 감동을 전했다.

△ 하니 학습장 대유행(1989 - 1990년)

△ 하니 피규어 캐릭터 등장(2009년)

△ 1980년대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의 실제배경이 됐던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 ‘하니 공원’을 조성. 
홍두깨 선생 등 캐릭터들의 명장면을 재현한 조형물도 세워졌다.(2010년 중앙일보)

△ ‘어깨동무’ 창간 20주년 기념회서 기자들과(1989년 어린이 대공원서) 
 (앞 좌 : 강인선 편집장, 배금택, 최신오, 필자. 
 뒤 좌 : 김수정, 이진주, 신영식, 차성진)

△ ‘제일 만화’ 예술원생들 이진주, 이보배 화실 방문 
 (1991년 봄 강동구 이진주 화실 앞에서) 
 대선배의 조언, 사인과 기념사진(중앙)

△ 제2회 아시아 만화 서미트 국제 행사장서(1997년 서울) 
 참가자에게 사인하기 바쁜 이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