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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백승빈, <에식스 카운티 Essex County (제프 르미어 작)>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읍 입실리. 지금은 왕복 4차선 도로가 뚫려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할머니의 집이 있던 시골마을. 그곳에서 아버지의 다섯 형제자매가 그들의 유년 시절을 꼬박 보냈고, 십 여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당신 인생의 대부분을 살았다.

2017-10-23 백승빈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읍 입실리. 지금은 왕복 4차선 도로가 뚫려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할머니의 집이 있던 시골마을. 그곳에서 아버지의 다섯 형제자매가 그들의 유년 시절을 꼬박 보냈고, 십 여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당신 인생의 대부분을 살았다.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의 몇 해를 그곳에서 개구리와 잠자리를 잡으면서 지냈는데, 아직도 눈을 감고 힘껏 떠올리면 할머니 집 반경 몇 킬로의 지도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구글맵스 스트리트뷰로 그곳을 찾아가 낯설고도 익숙한 그 길 위로 책가방을 멘 아홉 살 아이의 어느 귀갓길, 그 뒷모습을 조용히 그려보기로 한다.

그날은 찌는 듯한 어느 여름날의 오후, 아침 조례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결코 끝나지 않는 훈화 말씀을 듣다가 정신을 잃어 운동장에 쓰러졌던 아이는 몇 시간 뒤 양호실에서 깨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의 손엔 박카스 한 병이 들려있고, 아이는 그것을 조금씩 아껴 마시며 느릿느릿 걷는 중이다. ‘승빈이가 또 쓰러졌어요.’ 그러니까 그 박카스는 방금 전 엄마와의 전화통화를 끝낸 담임선생이 조퇴하는 아이의 손에 쥐어준 소중한 것이다. 쓰러질 때마다 얻어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이에겐 좀 더 아껴먹을 필요가 있는 음료수다. 근처를 지날 때마다 마른하늘에 번개를 쾅쾅 때리듯 무섭게 짖어대는 진돗개가 있는 집 앞에서 아이는 힘껏 숨을 참으며 걷는다.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목줄 따위도 없기 때문에 그 앞을 지나는 누구든 조용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매번 그렇게 목청껏 짖어대는 개가 절대 문밖으론 일 미터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그 집에서 사람의 기척을 느껴본 기억이 없다는 것 또한 아이를 자주 섬뜩하게 만든다.

진돗개의 집을 무사히 지나고 나면, ‘승빈이 학교 갔다 오나?’ 매번 큰 소리로 아는 척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이의 어깨를 붙잡는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라는 그 아저씨는 키가 엄청나게 크고 덩치도 산만한데, 대충 190센치 정도의 키에 백키로는 거뜬히 넘는 몸무게인 것 같다. 그런데 서있는 자세가 어딘가 삐뚜름하고 걸음도 부자연스러워 자신을 향해 다가올 때면 아이는 한 번씩 긴장하게 된다. 언젠가 할머니가 이야기해준 바로는, 아저씨가 어렸을 때 뱀에 물려서 죽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이는 그를 아직도 유일하게 꼼짝없이 움츠리게 만드는 것은 뱀, (또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모든 것이다. 물론, 아이에게도 뱀은 너무나 무서워서 비가 온 다음 날엔 하천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런 날엔 유난히 뱀이나 그와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우글우글 많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주말 마다 내려오는 아버지는 아저씨의 오랜 친구라면서 그를 대하는 면모가 어딘가 좀 어색하다. 고작 아홉 살짜리 아이의 눈에도 그것이 보인다면 두 사람 간의 데면데면함엔 분명히 복잡하고 민감한 역사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아저씨가 뱀에 물렸을 때 아버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던, 할머니의 얘기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이는 그 후의 이야기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그렇다고 할머니를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그런 게 왜 궁금하냐’며 화내기 바쁘셔서 그를 더 자극시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하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그래도 아저씨는 아이의 등하교를 매일 지켜보고 꼬박꼬박 아는 척하는 다정한 사람이다.

이제 집의 마당 안에 무사히 도착한 아이는 우물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며 멈춰 선다. 지금 할머니는 닭을 잡고 있다. 파닥파닥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고 있는 닭을 향해 쇠칼을 턱턱 내리치는 할머니의 힘찬 손짓은 매번 아이를 얼음기둥처럼 꼼짝없이 멈춰 서게 한다. 그것은 도시 여자인 엄마에게도 마찬가지라, 이들 모자는 항상 멀찌감치 서서 피 묻은 쇠칼이 임무를 완수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지고, 닭의 두 다리가 회초리처럼 일직선으로 쭉 뻗는 모습까지 지켜보게 된다. 일 년에 한 번씩 할머니가 닭을 잡는 그 날은 담벼락 너머 이웃집에 혼자 사시는, ‘외동할매’의 생일이다. 할머니의 먼 친척이라는 그 분이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지 아이는 잘 모르지만 사실상 궁금해 한 적도 없다. 엄마 또한 그 분이 정확히 우리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 아이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 만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친할머니 보다 훨씬 더 푸근하고 살가운 사람이란 사실만이 아이에겐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외동할매의 얼굴엔 특유의 은근한 미소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어서, 거의 매일을 세상만사 관심 없는 표정으로 사는 무뚝뚝한 친할머니와 비교되어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둑한 저녁, 반쯤 열린 솥뚜껑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부엌을 한가득 메우고 나면, 아이는 ‘외동할매한테 가서 백숙 드시러 오라...’,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당 밖으로 달려 나간다. 마을 어귀의 사나운 진돗개와는 달리, 아이가 한 번도 짖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늙고 지친 개가 엎드린 채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개의 이름은 상현이고, 열 살이 훨씬 넘었으니까 아이보다 나이가 더 많다. 마침, 아이는 ‘할매!’를 부르려다 말고 멈칫 하며 안방 마루 앞에 멈춰 선다. 방문 너머로 외동할매가 조곤조곤, 걱정스런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거 맞나? 미옥아? 내 말이 맞나?’ 외동할매가 무언가를 자꾸 되짚어 주듯이 물어보면, 미옥이는 고개라도 끄덕일 듯한 뉘앙스로 ‘야옹...’이라 대답한다. 그러니까 미옥이는 외동할매가 애지중지 키우는 고양이인 것이고, 상현이와 미옥이는 외동할매의 사랑스런 두 자식들인 셈이다. 아이는 오래 전부터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외동할매가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사람처럼 이름 붙인 이들 개와 고양이가 그의 진짜 가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읍 입실리. 그 곳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의 몇 해를 보낸 할머니의 집이 있던 시골마을이다. 그리고, 구글맵스를 타임머신 삼아 지난 기억조각들을 재료로 약간의 상상을 보태 각색해본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제프 르미어의 그래픽 노블 <에식스 카운티>에 대한 나의 (다소 수상쩍은) 감상문인 셈이다.


제프 르미어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에식스 카운티’의 작은 농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영화를 전공했지만 자신의 ‘고독한 성격(solitary personality)’과는 맞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 만화로 직업을 바꾸었다는데, 그래도 ‘고독함’에 대한 테마는 어디 가지 않고 그의 작업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러니까 그가 쓰고 그린 이야기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수십 년에 걸친 세대를 통과하며 그들 각자의 고독함과 외로움의 정서를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에식스 카운티>는 소설로 치면 ‘Collected Stories’, 즉, 단편 이야기들의 모음으로, <농장 이야기>, <유령 이야기>, <시골 간호사>라는 부제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이 독립적인 완결성과 멜로디를 가진 단편들이지만,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화음을 이루며 하나의 태피스트리(Tapestry)로 완성되는 멋진 교향곡이다. 이러한 구성과 짜임새야말로 <에식스 카운티>만의 아름답고 특별한 개성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작은 시골마을 ‘에식스 카운티’를 배경으로 두 집안의 가족사가 수십 년과 몇 세대에 걸쳐 펼쳐진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농장 이야기>의 주인공은, 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외삼촌에게 의탁된 고아 소년이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법을 모르는 외삼촌과 조카는 각자의 세계에 고립되어 쓸쓸한 일상을 보내는 외로운 영혼들이다.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른 복장으로, 슈퍼히어로 만화를 그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치는 소년이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근처 주유소 주인아저씨. 하지만 외삼촌은 조카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지나치리만치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와 거리를 둘 것을 경고한다. 그 이유는, 십 여 년 전에 죽은 여동생과 그 두 사람 사이에 숨겨진 역사와 드라마에 있다. 하지만 외삼촌은 소년에게 과거의 문을 여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에피소드가 마무리되는 엔딩에서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가면과 망토를 툭, 하니 벗어버린 소년의 뒷모습을 보면, 그도 어느새 굳게 입을 다문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한 마무리가 주는 정서는 말할 것도 없이, 쓸쓸함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유령 이야기>는 하키 선수인 두 형제가 주인공인 비극적인 이야기로,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이 된 형의 분절된 회상을 통해 진행된다. 수십 년 전, 에식스 카운티를 떠나 토론토에 있는 하키 팀에서 뛰고 있던 형에게 우직하고 믿음직한 동생이 찾아온다. 뛰어난 신체조건을 바탕으로, 형 못지않게 촉망받는 하키선수로 성장한 동생이 결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그즈음 형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이들 사이를 갈라놓을 만한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고, 형제는 그 후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관계를 끊고 살게 된다. 세월이 흘러 외롭고 쓸쓸한 혼자로, 가는 귀까지 먹은 늙은 형이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동생을 찾아와, 서로를 윽박지르고 억지로 끌어안으며 보내는 그 인생의 마지막은 처절하다는 말 외에는 그 쓸쓸한 정서를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에식스 카운티>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그 중심을 관통하는 이야기 자체에도 정서적 호소력이 상당하지만, 수십 년에 걸친 세월을 오가는 치매 환자의 불안하게 분절된 플래시백을 통한 장면 연출에서 그 작가적 탁월함이 더 빛을 발한다. ‘유령 이야기’라는 에피소드의 부제에 그것에 대한 힌트가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하키 스틱의 사운드는 유령을 불러내는 구호와도 같고, 그 때의 목소리는 눈과 귀를 닫고 싶을 만큼 처절하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 고독한 치매 환자의 회상 속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연민, 고통스런 후회와 탄식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두 번째 에피소드의 형이자 치매환자인 노인이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며 끈질긴 책임감과 타고난 관심으로 보살피는 중년의 여자간호사가 주인공이다. 물론, 그에게도 앞선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처럼 말로 다하지 못할 안타까운 사연과 비극적인 가족사가 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의 특별함은 이전 단편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시키는 극적 기능을 하고 있는데 놓여있고, 바로 그곳에 제프 르미어만의 예술적 야심이 숨 쉬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 간호사는 <에식스 카운티>라는 크고 장대한 태피스트리를 꿰어 벽에 걸어놓은 장본인이자, 제프 르미어라는 작가의 좀 더 개인적이고 계획적인 목소리인 것이다.

그 목소리가 주로 말하는 것은, 에식스 카운티의 하늘을 끊임없이 떠도는 까마귀의 저주와도 같았던 이 모든 비극적 이야기의 시작이, 영원히 숨기고 싶었던 실수와 욕망으로 비롯된 것이었지만, 결국 믿을 수 없는 희생과 헌신으로 마무리되고 기록될 것이라는 조용한 선언이다. 처절할 정도로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들리지 않는 비명을 내내 지르는 이야기들처럼 보이지만, 500 페이지 가량의 책을 마침내 덮는 마음이 꼭 그렇게 처절하고 쓸쓸하지는 않다는 것이 그 증거다. 오히려 대부분 외롭고 쓸쓸한 인간사의 숨겨진 비밀을 들여다본 것 같은 감동을 전해준다고 할까.


‘할매!’,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읍 입실리의 어느 마당 있는 집, 할매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안방 문이 열린다. ‘백숙 드시러 오래요.’ 할머니는 외동할매에게 안방 아랫목을 내준다. 이불 밑에 메주 덩어리들이 놓여있는 할머니 방의 아랫목은 아이에겐 이 집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곳이지만, 여기서 아이가 주목하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무뚝뚝한 할머니가 외동할매를 매년 하루씩 그렇게 꼭 보란 듯이 챙긴다는 사실이다. 물론, 꼭 생일에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날만큼은 꼭 누구 보란 듯이 말이다.

‘외동할매가 지난주에 돌아가셨다. 기억나지? 외동할매?’ 아버지를 통해 외동할매의 부음을 들은 것도 벌써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아마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해 전인가 후인가, 비슷한 시기였을 거다. 오래 전, 할머니 집에서 개구리와 잠자리를 잡으며 보낸 몇 해를 뒤로 하고 엄마와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고, 그 후 지금까지 입실리와 그 곳의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입실리와 그 곳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에식스 카운티>가 있었다.

당시, 나와 내 친구들이 함께 골몰하면서 쓰고 있던 시나리오는 지구가 멸망하기 전 날에 생일을 맞이한,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그 날 하루를 보내는 방법에 관한 옴니버스/앤솔로지 단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찾아와 하루를 함께 보내는 대상은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인들. 그러다 마침, 우연히 보게 된 <에식스 카운티>라는 그래픽 노블이 나로 하여금 유년 시절의 몇 해를 보낸 시골마을과 그 곳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 시나리오의 마지막 에피소드엔 외동할매를 모델로 한, 여든 살 노인이 등장한다. 젊은 시절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외롭게 홀로 살던 그가 (자신이 기르던) 온갖 가금류 동물들에게 사람의 이름을 붙이고 자식처럼 대하며 살았던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배경으로 필요하다, 그러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대기하라는 사이렌 소리가 마을 전체를 뒤흔들던 어느 날에, 노인은 자신을 ‘애니멀-커뮤니케이터’라고 소개하며 등장한 요구르트 아줌마의 방문을 받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당 여기저기에 숨어있던 닭과 염소, 개와 고양이들이 각자 소리를 지르며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상현이, 미옥이, 혜숙이, 경자... 

<에식스 카운티>의 마지막 페이지, 가끔은 자신이 환자들에게 좋은 일을 하기나 하는 건지 궁금해 했고, 그들 삶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기는 하는 걸지, 의심하기도 했던 간호사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실과 바늘로 태피스트리를 만들며 죽은 남편에게 혼잣말로 읊조린다. 자신이 (돌보는 환자들을) 참견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단순히 간호사 노릇이 붕대나 변기만 갈아주면 끝인 게 아니라고, 가끔은 이것도 약간 엄한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고, ‘어쨌거나, 가족이란 게 결국 그런 것 아니겠어.’ 라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의 문을 닫는 마지막 대사다. 매 챕터를 죽음과 이별로 마무리하는 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면서도, 그것이 죽을 만큼 슬프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마음의 온도를 몇 도 이상 끌어올려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희생과 헌신으로 기대하는 내일에 대한 희망, 그것의 소박한 바람임을 잊지 않는 것. 500 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문학이라면 충분히 가질 만하고, 무엇보다 어울리는 주제다. <에식스 카운티>는 그런 고귀한 정신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