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스튜디오가 처음부터 스토리의 전권을 쥐고 진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이야기 전개가 차곡차곡 순조롭게 진행됨과 달리, 20세기 폭스 제작의 ‘엑스맨(X-MEN) 실사영화 시리즈’는 리부트까진 좋았는데 급기야 시간여행에 평행우주까지 등장하면서 연대기가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비판하는 팬들이 많지만 애초에 원작부터 온갖 방식의 세계관 정리용 크로스오버 이벤트를 벌여온 시리즈답다는 생각도 든다. 히어로가 너무 많은 탓이다. (초인 등록 법안에 반대한 캡틴 아메리카를 지지하여 <시빌 워>(2006~2007)의 광풍에 참전했던 필자는, 이제 서재에 <하우스 오브 M>(2005) 단 한 권만 남겨놓고 마블 슈퍼히어로 시리즈를 계속 읽길 포기했다) 실사 시리즈 쪽도 시간대와 인과관계를 한 번에 정리할 작품이 나오면 수습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마블의 <어벤져스> 두 편을 만들고 현재 잭 스나이더 감독 대신 D.C의 <저스티스 리그>를 마무리하는 중인 조스 웨던 감독을 데려오면 가능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엑스맨 실사영화 시리즈는 그러한 빅 이벤트보다는 여전히 슈퍼 히어로의 캐릭터에 더 집중하고 계속 새로운 히어로나 팀을 영화로 소개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 시리즈만의 개성으로 충분한 미덕은 있다고 본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순서대로 보는 장편 만화의 재미가 있다고 하면, 엑스맨 실사 시리즈는 외전이랄까 단편 쪽에서 걸작과 괴작이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재미가 있다. 골수팬은 늘 설정과 역사를 따지기 마련이지만, 연대기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 다 아는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이야기가 재미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엑스맨 실사영화 시리즈의 최종 결말을 보았다. 그것은 휴 잭맨이 주연한 ‘울버린 트릴로지’의 마지막 이야기, <로건>(2017)이다. 엑스맨들은 모두 죽었고, 새로운 뮤턴트들은 ‘에덴’으로 갔다.
엑스맨 영화 시리즈는 작품성과 완성도가 들쭉날쭉한 편이지만, 특히 <로건>은 걸작이었다.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1978)과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2>(2004), (그리고 <23 아이덴티티>를 통해 세계관이 확장, 부활한)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2000), 팀 버튼의 <배트맨1, 2>(1989, 1992)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실존주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2005~2012) 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슈퍼 히어로 영화 리스트에 올릴 만 하다. <로건>은 프랜차이즈가 영영 끝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작가가 그냥 끝내버린, 한 편의 예술 작품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쪽에서 이만한 작품이 나오긴 어려울 거라 본다.
△ <뉴 뮤턴츠> (2018 개봉 예정)
타이틀 로고만 봐서는 슈퍼히어로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이렇게 서론을 시작하는 이유는, 엑스맨 영화 시리즈의 새 작품 <뉴 뮤턴츠 New Mutants>(2018)의 예고편이 최근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프로페서 X’ 자비에르 교수의 영재 학교 1기 졸업생들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역시 폭스는 정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확장에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엑스맨 본편 쪽은 <다크 피닉스>를 통해 우주로 가버린다고 한다!) <뉴 뮤턴츠>는 <안녕, 헤이즐 The fault in our stars>(2014)의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고 해서 10대 연인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나 예상했는데, 예고편의 톤이 전형적인 틴에이저 공포영화의 그것이라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뒤늦게 정보를 뒤져보니, 감독은 스티븐 킹과 <샤이닝>을 언급하며 호러 장르가 될 거라고 이미 공언한 상태였다. 엑스맨 시리즈에 대하여 반쯤은 접었던 기대감이 다시 활짝 펴지는 순간이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새로 영화화한 최근작 <그것 IT>(2017)이 아주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소년 소녀 틴에이저들의 것인 호러와 슈퍼히어로 장르가 본래의 주인들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뉴 뮤턴츠>의 예고편을 보고 유추해보건대, 영화에 깔릴 주된 정서는 청소년이 자신에게 갖는 존재론적 정체성과 타인과의 소통 문제에 더하여, ‘남들과 다른 나의 능력’이 주는 공포가 될 것 같다. 틴에이저는 남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기성세대가 구축한 사회와 제도권 교육은 남들과 내가 다른 존재로서 집단에 개인을 드러내는 일에 두려움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뉴 뮤턴츠>가 예고편 스코어로 택한 선곡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의 역사적인 앨범 (1979)에 수록된 명곡 을 공포영화 스코어처럼 어레인지한 것이다. 동명의 앨범을 바탕으로 알란 파커가 연출한 록 오페라 영화 <핑크 플로이드의 벽>(1982)에서 주인공 ‘핑크’는 수업시간에 시를 쓰다 선생에게 걸린다. 선생은 그의 시를 공개적으로 읽어 웃음거리로 만들고 곧 체벌이 이어진다. 그리고 유명한 가사와 함께, 시스템의 획일적인 교육이 개인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에 대한, 역사상 가장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담은 유명한 장면이 펼쳐진다.
△ <핑크 플로이드의 벽> (1982)
We don't need no education
우리는 교육이 필요 없어요
We don’t need no thought control
우리 생각을 통제하지 마세요
Hey, teacher, leave the kids alone!
이봐, 선생, 애들을 내버려 두라고!
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모든 건 단지 벽속의 다른 벽돌일 뿐이야
소년소녀들이 일렬로 거대한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책상 앞에 앉아 눈코입이 없는 얼굴이 되어 자동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기계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고기 다지는 기계였고, 아이들은 소시지에 들어갈 고기로서 으깨어진다. 다음 장면에서 소시지가 되길 거부하고 획일화의 가면을 벗어던진 아이들은 교실의 책걸상을 부수고 학교에 불을 지르는데, 무려 초능력자들인 <뉴 뮤턴츠>의 틴에이저들은 과연 어떤 일을 벌이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뉴 뮤턴츠> 예고편을 보고 중고생 때 가슴에 불을 질렀던 명곡을 오랜만에 다시 듣고 나니, 의식의 연쇄적 흐름에 따라 또 하나의 뮤직 비디오와 만화책이 떠올랐다. 90년대 말,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면 얼마나 엄청난 영화를 만들지, 데이비드 핀처를 능가하지 않을까 싶어 기대 1순위였던 뮤직 비디오 감독이 있었다. 스파이크 존즈와 미셸 공드리 등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뮤직 비디오 감독들이 영화계로 성공적으로 넘어갔음에도 그는 내 기대를 결코 이루어주지 않고 비주얼 아티스트로만 남았다. (1997), (1999) 등 ‘에이펙스 트윈 Aphex Twin’과 작업한 일련의 뮤직비디오로 유명한 ‘크리스 커닝햄’이다. 역시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인 ‘스퀘어푸셔 Squarepusher’와 만든 (1998)가 내가 다시 떠올린 뮤직비디오인데, 역시 ‘이상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 (1998)
일본 오사카의 병원 ‘정신 분열 어린이를 위한 집(Osaka home for mentally disturbed children)’에서 뮤직비디오는 시작한다. 말이 어린이 병원이지 비범한 느낌의 아이들은 구속복까지 입고서 독방에 갇혀있고, 한밤 중 거대한 덩치의 남자 간호사는 간수처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감시한다. <아키라>의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이 곳은 병원과 동시에 일종의 연구소인 모양인데, 용감한 소녀 하나가 충직한 견공과 함께 병원 탈출을 감행한다. 한 일곱 살쯤 되어 보이지만 맨손 격투에 능한 소녀가 연구소에 있는 ‘두뇌 스왑(brainswap)’ 시스템에 로그인하면서 영상은 상상 초월의 전개로 이어진다. 소녀가 남자 간호사와 강아지의 두뇌를 ‘스왑’해버린 것이다. 자연스레 뒷이야기가 궁금하여 상당한 여운을 남기는 이 영상은 뮤직 비디오도 충분히 한 편의 훌륭한 단편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능력’을 가진 어린이나 청소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한 레퍼런스로 남았다.
국내에선 ‘초능력超能力’을 선호하지만 굳이 일본식의 ‘이능력異能力’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이능異能’이라는 단어(국어대사전에 ‘이능력’은 없지만 ‘이능’은 있다)가 내포한 ‘특이하고 남다른 재능’이란 뜻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우열의 개념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남들에겐 병적으로 보이는 기질이 사실은 나만의 재능일 수도 있다. 온갖 방식으로 장르화 되어버린 이능력물이 단순히 반복되는 싸움만 하거나 현실도피의 망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 만화로서 훌륭히 그려진 작품이 있다. <드래곤 헤드 ドラゴンヘッド>(1994)로 세기말 일본 틴에이저 버전의 <15소년 표류기> 내지는 <파리대왕>을 그려냈던 작가 모치즈키 미네타로(望月 ミネタロウ). 그가 그린 <동경괴동 東京怪童>(2009)은 틴에이저가 가진 이능력은 병이 아니며 실은 진짜 초능력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만화다.
△ 모치즈키 미네타로 <동경괴동>
이지혜 옮김, 삼양출판사, 2009
만화의 배경인 ‘크리스타니아 클리닉’은 앞에서 소개한 뮤직비디오의 정신 분열 어린이를 위한 집처럼, 뇌의 문제를 가진 청소년의 치료와 연구 및 정신적 케어를 하는 병원이다. 젊은 뇌 과학자 ‘타마키’가 맡은 네 명의 환자가 만화의 주인공 청소년들. 19세 ‘하시’는 교통사고로 작은 파편이 뇌에 박혀 느끼고 생각한 것을 무엇이든 입 밖으로 내뱉는 증상을 가졌다. 한 마디로 거짓말을 전혀 할 수 없는 것. 수술을 해서 파편을 적출하면 완치될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하진 않고, 입만 열면 도발적 반사회적 언동으로 문제가 일어나는 탓에 말을 하지 않으려 스스로 혀를 자르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21세 ‘하나’는 대뇌 질환 때문에 갑자기 본인 의지와 상관없는 오르가즘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증상을 앓고 있다. 그리고 6세 ‘마리’는 자신 이외의 인간은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세계에 산다. 뇌가 인간만을 선택적으로 배재해 실세계의 인간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화면 속 인간은 인지하는데, 가끔 음식이나 손가락의 모양으로 안면을 흉내낸 모양을 만들어내고는 한다. 마지막으로 10세 ‘히데오’는 자신이 슈퍼 파워가 있는 불사신이며 신과 외계인하고 접촉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왼쪽부터 하시, 마리, 히데오, 하나
타마키는 병원을 찾은 스폰서들 앞에서 “이들의 문제는 모두 질병과 그 증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인간적인 문제는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작 하시와 마주했을 때 “당신은 우리를 이용할 뿐 그저 남들 눈에 띄고 싶어 하는 나르시스트이자 불쌍한 위선자”라는 말을 듣자 울컥함을 느끼고,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경력과 처자식까지 내팽개친 채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배신감을 느낀 하시는 파편을 뇌에서 적출할 대수술을 결심하기 전에 타마키를 찾으려고 한다. 난데없이 사라졌던 타마키가 또 난데없이 등장하는 2권의 장면은 뒤통수를 친다. 그는 여장을 하고 브라질의 음악가 바든 파웰의 를 틀어놓고 홀로 삼바를 춘다. “아름다운 삼바를 만들기 위해 슬픔은 꼭 필요하고, 슬픔 곁에는 항상 희망이 존재하지.” 타마키는 아이들의 병 자체에 의문을 품고, 그들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감춘 문제 역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진짜 나답게 사는 법이란, 구제불능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은 타마키. 그러나 ‘더 무시무시하고 구제불능인’ 인간들에게 몹쓸 짓을 당할 위기에 처하고, 겨우 도망치지만 차에 치인다. 병실에서 눈을 뜨자 옆에 앉은 아내는 “변태였어?”라고 묻고 “변태구나.” 결론을 내리며 울 뿐이다. 타마키 자신의 말대로 “이 세상은 타인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를 확인”받는다. 남다른 성벽(性癖)이 있는 그는 이 세상에서 아내에게조차 그냥 변태다. 결국 남과 다름은 병인 걸까? “이 애매한 세상 어딘가에 분명 그것조차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지 않을까?” 타마키의 질문에 대한 진실을 답하는 것은 결국 또 다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하시에게서다. 솔직한 게 싫어서 수술을 원한 하시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도망쳤던 타마키. 뇌에서 파편을 빼내는 대수술을 받는 동안, 하시는 타마키에게 이제 진심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타마키는 눈물을 흘린다.
<동경괴동>에는 모치즈키 미네타로가 만화에 펼침 페이지로 옮겨놓은 빈센트 반 고흐의 회화 두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다.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1889)과, 그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직전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생애 마지막 그림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이다. 고흐는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지만, 자신의 삶은 결국 이기적인 외톨이로 끝장내고 말았다. 하나가 <까마귀가 나는 밀밭>으로 걸어 들어가며 봉인을 풀어내는 감정은 “싫다”는 것이다. 동시에 하시가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것은 결국 외톨이가 싫다는 것,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부모님을 이해하고 싶고, 남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고 사랑받고 싶다는 것,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 위)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아래)
만화는 주인공 ‘하시’가 그리는 만화로 시작해서 그가 완성하는 만화로 끝난다. 그가 그리는 만화가 바로 <동경괴동>이다. 죽었지만 괴물의 모습으로 살아난 ‘괴동’ 하시의 이야기와 초스피드로 하늘을 나는 펭귄과 닭 이야기가 만화 속 만화로 중간에 나온다. <동경괴동>의 아이들은 솔직한 막말을 내뱉는 하시의 존재와 정반대로 형이상학적인 그의 만화를 통해서 결국 서로와 소통하고 서로에게 관계를 맺고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결국 아이들은 병원의 치료가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맺음을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한다. 내가 남과 다름이 질병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는 세계를 만드는 건 결국 자신들이다. 결말부, 타인을 볼 수 없는 마리의 세계에 들어가는데 성공하여 외톨이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전하는 히데오의 모습은 커다란 감동을 안긴다.
모든 틴에이저는 이능력자다. 소년소녀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쓸모없을지 몰라 고민한다. 남과 다른 능력을 함께 초월하는 능력으로 발현시키는 것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다. 외톨이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동경괴동>은 난립하는 이능력물, 온갖 슈퍼 히어로물이 어쩌면 간과하고 있을지 모르는 중요한 본질을 전하는 소중한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