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만화계에서 일본과 가장 친한 만화가를 만나다.
일본만화의 작품성을 인정받게 만든 만화가 ‘프레데릭 브왈레’
박경은(재불 만화가)
△ 프레데릭 브왈레
프레데릭 브왈레(frederic Boilet)는 일본에 거주하며 현지 매체에 작품을 연재한 최초의 프랑스 작가이다. 조안 스파, 다비드 베, 임마뉴엘 기베르, 마르쟌 사트라피 등 현재의 프랑스 만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이 작업하던 아틀리에 보쥐 (atelier de vosge)의 창립 멤버이기도 한 그는, 90년대 초반 일상에 천착한 만화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서구의 언론들이 과장되고 부정적으로 다루던 일본과는 다른 일상의 일본을 보고 싶었던 그는, 일본을 몇 차례 방문해 그 나라를 소재로 작업을 했다. 그리고 98년부터 일본에 정착해 몇 년 동안 현지 매채에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재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작가활동 뿐 아니라, 번역가, 출판사 편집자의 일도 하면서 일본의 작가주의 만화들을 발굴하고 번역해 프랑스에 소개했다. 이렇게 소개된 작품들 중 하나였던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불어제목 : quartier lointain이후 열네살로 표기)〉은 2003년 일본만화 최초로 앙굴렘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 시나리오상을 수상했다.
오랫동안 상업적이고, 못 그려지고, 조악한 것쯤으로 인식되던 일본 만화는, 오늘날 작품성까지 가지고 있는 대중문화로 프랑스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그 인식변화의 숨은 일등공신이 작가 프레데릭 부왈레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필자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일본 국가 이미지가 어떤 과정으로 부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문화가 갖는 큰 역할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보다 20년쯤 앞섰던 프랑스와 일본의 만화 교류의 예를 통해 우리에게 알맞은 방향은 무엇인지도 생각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8,90년대 부정적 이미지의 일본. 프랑스 만화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다.
프레데릭 브왈레는 1960년 프랑스 로렌 지방의 에삐날에서 태어났다. 낭시 보쟈르를 졸업한 그는 1983년 첫 만화 〈궁수들의 밤(la nuit des archees)〉을 펴냈다. 고대가 배경인 이 작품을 시나리오 작가와 협업해 펴냈던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로 1990년 〈3615 알렉시아(3615 alexia)〉를 펴내며 주목을 받는다.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전 프랑스의 네트워크 시스템인 미니텔을 통한 두 남녀의 만남을 다룬 이 만화는 역사, 모험만화, SF, 서부극이 중심이던 당시의 프랑스 주류 만화들과는 달리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대안 만화들에서 주로 다루던 이야기들에 가깝다.
△ 인터넷에 앞서 프랑스에 존재했던 네트워크 시스템 ‘미니텔’을 통한 싸이버 채팅을 소재로 한 만화 〈3615alexia〉
〈3615 알렉시아〉 이후 브왈레는 여행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행선지로 일본을 택한다. 그가 일본을 택한 이유는 조금 특이하다.
“요즘은 많은 프랑스 젊은이들이 일본 문화와 일본 만화에 끌려 일본행을 택합니다. 일종의 재팬드림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일본의 이미지는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무관심하거나 대개 부정적이었죠. 프랑스 방송국에서 일본에 대해 다룰 때는 거의 다 과장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서구 언론들이 중국을 다루던 시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일본이 우리를 침공할 것이다!’와 같은 내용이 주류였죠. 일본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이라고 해봐야, 게이샤, 가라테, 다도 문화 정도였을 겁니다. 일본에 대해서 프랑스 언론이 이야기 하던 것들은, 직장인들은 항상 피곤에 절어있을 만큼 일을 하고 , 캡슐 호텔 같은데서 잠을 청한다는 것들이었죠. 어떤 방송국들은 일본인들이 조만간 우리에게 생선을 날것으로 삼키게 할 거라고 겁을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공연을 위해서 일본에 직접 갔다 온 제 여자친구는 유럽에서 다루던 일본의 이미지와는 다른 일본의 일상을 들려주었습니다. 저 역시 언론에서 극단적으로 다루던 것과 다르고 프랑스인들이 모르던 일본을 보고 싶었습니다. 과장되지 않고 인간적인 면을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쇼에이 출판사와 프랑스국립문화센터의 지원사업에 신청했지요. 주변사람에게 일본행 계획을 이야기하자 그는 ‘일본이라고? 난 그 나라가 정말 싫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에 가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일본에 대한 부정적 시각, 문화의 힘으로 바뀌다.
그렇다면 서구가 일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프레데릭 브왈레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일본을 보던 시각이 그랬기 때문이죠. 그 때는 일본이 미국에 위협적이었고 일본의 공산품이 미국시장을 거의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공격 목표가 일본이 된 거죠. 하지만 이후 일본은 달라졌습니다. 거품 경제가 무너지면서 실업자도 많이 생기고 일본 제품도 예전만큼 위협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미국에겐 중국이 경쟁자 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일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긍정적인 얘기만 나오는 것이죠. 9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만화 담당자로 일했던 프랑스인은 저에게 ‘일본은 모든 것을 잘 팔지만 자신의 이미지만은 팔 줄은 모른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동차, 공산품들은 잘 만들었지만 이미지만은 부정적으로 남겨뒀다고요.”
그는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를 바꾸었던 일본 문화에 주목한다.
“5년 여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93년부터 94년 즈음에서 일본만화가 프랑스에 많이 소개되었고 재패니메이션도 방영되었습니다. 어린 세대들은 일본을 좋아하게 되었고, 일본을 바라보던 비판적이고 의심스러운 시각이 많이 달라진 것이죠. 이제는 일본이 프랑스인들이 꿈꾸는 여행지가 되었습니다. 일본 문화가 이런 변화를 이끌어 냈습니다. 미키 마우스를 중심으로 한 미국만화가 프랑스에서 했던 역할과 비슷합니다. 문화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지요.”
프랑스 만화계에서 느끼던 갈증. 일본 만화에서 해답을 찾다.
일본 만화가 프랑스에 소개되던 초기에 브왈레는 일본만화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일본만화들을 통해 그가 지향하는 만화들을 발견한다.
“어느 날 공연예술가인 당시의 제 여자친구를 취재하러 일본의 방송국 사람들이 왔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정말 희한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조명, 음향 엔지니어, 기자, 진행자, 통역까지 전부 가방 속에 만화책이 들어 있더군요. 프랑스 사람들도 만화를 좋아합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읽는 것이 아닙니다. 주제도 굉장히 다양했습니다. 그때까지 프랑스에서 볼 수 있었던 일본만화들과 달리 제게 훨씬 흥미로운 것이었죠.”
그는 프랑스 주류만화들이 다루던 주제와는 다른 현실, 일상, 사랑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이런 소재는 프랑스 영화에서 많이 다루던 내용입니다. 그게 프랑스 영화가 미국 영화와 다른 점이죠. 이런 면이 프랑스 영화의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었습니다. 우연히도 일본 촬영팀이 갖고 있던 만화들이 그런 만화였습니다. 8~90년대에 프랑스에서 만화는 거의 남성의 전유물이었죠. 싸인회를 갔는데 전부 남자 뿐이었어요.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모든 연령과 성별을 위한 만화가 이미 존재했습니다. 여성독자들 뿐 아니라 여성 작가들도 굉장히 많았죠. 그것이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일본을 주제로 작업하다.
1990년. 일본의 쇼에이 출판사와 프랑스국립문화센터의 지원금을 받은 그는 6주 동안 일본에 머물며 작업을 구상한다. 브왈레는 유능한 편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브뉴와 페테스(Benoit Peeters)와 함께 시나리오를 쓴 만화 〈러브 호텔(Love hotel)〉을 1993년 카스테르만 출판사에서 출간한다.
△ 브왈레가 일본에 머물며 구상한 작품 《러브호텔(Love hotel)》의 초판본 표지와 만화 일부
프랑스의 한 공무원이 업무차 일본에 와서 일본의 여고생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만화는 비평가와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러브 호텔에 대한 비평은 좋았지만, 프랑스 독자들이 일본에 가고 싶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은 복잡하고 일본인은 외계인 같다는 이미지를 주었거든요. 저 자신은 일본에 대해 아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전작의 이미지를 ‘수리’하는 느낌으로 후속작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출간된후속작이 〈토쿄는 나의 정원(Tokyo est mon jardin)〉이다. 이 작품은 전작의 3년 후가 배경이다. 주인공은 일본어에 훨씬 능숙해졌고 일본의 일상을 더 깊숙히 이해하는 인물이 되었다.
사실 그가 작품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일본 쪽의 재정적 지원의 힘도 컸다.
“이 작품을 하면서는 금전적 여유가 생겨서 일본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일본과 프랑스가 협력해 예술가들이 머물 수 있게 해주던 기관인 빌라 쿠조야마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고단샤는 국제지원프로그렘을 만들었는데 제가 그 첫 번째 외국인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간판 만화가들의 산실. 아틀리에 보쥐(atelier vosge)를 세우다.
프랑스에 돌아온 그는 1995년 파리에 돌아와 당시에는 무명이던 작가들을 모아 아틀리에 보쥐(atelier vosge)를 만든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프랑스 만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가들이 되었다.
△ 러브호텔의 후속작 《토쿄는 나의 정원(Tokyo est mon jardin)》의 초판본 표지와 만화 일부
“임마뉴엘 기베르는 당시에 겨우 책 한권을 출간한 작가였습니다. 아틀리에에 들어오면서 작업스타일에 큰 변화가 있었죠. 조안 스파는 아직 한권의 만화책도 펴내지 못하던 상태였여요. 그때 저는 작업실을 찾고 있었는데 다비드 베가 보쥐 광장 근처에 큰 스튜디오를 찾았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사실 제가 아틀리에 보쥐라는 이름을 주장했어요. 그곳이 보쥐 광장에 있었고 제가 보쥐 지역 출신이였거든요. 그래서 그곳에 크리스토프 블랑, 다비드 베 ,조안 스파, 임마뉴엘 기베르 등이 모였죠. 제가 일본으로 떠난 얼마뒤엔 마르쟌 사트라피도 합류했고요.“
△ 일본을 주제로 한 일본 작가화 프랑스 작가들의 단편모음집 《일본(japon)》. 카스테르만 출판사에서 2005년 출간되었다. 브왈레의 옛 작업식 동료이던 임마뉴엘 기베르와, 조안 스파가 참여했다.
일본 출판사와 프랑스 만화가의 협업시도, 실패로 돌아가다.
91년부터 몇 년 동안 일본의 고단샤는 프랑스 만화가들의 작품을 잡지에 연재했다.
“고단샤는 일본만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 했습니다. 지원금을 마련해서 작가, 기자 등을 초대하기도 했지요. 잡지 《모닝》을 통해 프랑스 만화가들의 단편을 실었습니다. 그들이 작가를 고르는 눈은 우리가 보기엔 좀 특이했습니다. 유명한 작가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무명이던 루이스 트롱다임 같은 작가도 있었거든요. 일본 출판사 사람들은 프랑스에 앞서 이 작가들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예측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단샤의 움직임을 일본의 다른 출판사들도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상업적 실패로 돌아간다.
“고단샤는 프랑스 작가들에게 일본의 독서방향대로 그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일본 만화계에서는 만화가와 담당자의 관계가 작품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프랑스 작가들과 일본 잡지사의 담당자와는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죠. 프랑스 작가들은 담당자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 사는 작가들과 일본에 있던 출판사의 거리 문제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작가들이 일본식 시스템에 맞추어 작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죠. 오늘날에도 프랑스 작가들 중에는 그때의 경험을 좋지 않게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비록 대중적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이때 연재된 작품들은 몇몇의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일본이 프랑스 작가와 협업을 멈춘 것은 일본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불황이 이어진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정착. 현지에서 연재를 시작하다.
일본 여성과 결혼한 브왈레가 97년 일본에 정착하며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고단샤는 프랑스 작가들의 연재를 멈추었고, 프랑스와 유럽만화는 일본에서 성공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자리 잡았다.
“프랑스 만화가들이 실패의 경험을 안고 떠나갔지만 제 만화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술 만화 출판사인 오타(ohta)출판사가 제 만화를 출간했고, 90만부씩 팔리던 소학관의 잡지 《빅코믹스》에서도 연재지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단샤는 제게 8년 정도 지원금을 주었습니다만 한권의 책도 펴내지는 않았습니다. 《아사히신문》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재했습니다. 800만부가 넘게 발행되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도쿄에선 다섯 명에 한 명쯤은 제 작업을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만화 비슷한 모습으로 그림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작업하면서 화면구성은 약간 일본식으로 적응했습니다. 일본 만화 스타일로 그리는 것은 제가 일본 작가들보다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림의 기교를 향해 갔던 적도 있었지만, 대가들의 그림도 기교적으로 가기 시작하면 그림이 경직돼 보이더군요. 모에비우스는 대단한 작가입니다만 그가 여자를 그리면 항상 같은 얼굴입니다. 저는 그것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현실을 반응하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습니다. 그건 모델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죠. 모델더러 오랜 시간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할 순 없으니, 저는 사진, 비디오 이미지들을 모았습니다.“
“제가 일본만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림체보다 서사적 가능성입니다. 일본의 만화가들은 감정이나 감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능숙합니다. 일본 독자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만화 한두가지 정도는 말할 수 있죠. 프랑스 만화에서 그건 참 드문 일이였어요. 유럽만화에는 생략이 많고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빨리 옮겨가기 때문에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힘듭니다.“
그는 일본에서 작업하며 〈마리코 퍼레이드(Mariko Parade)〉와 〈유키코의 시금치(L""""Epinard de Yukiko)〉 등 다수의 작품을 펴냈다. 〈유키코의 시금치〉는 9개 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 프레데릭 브왈레가 일본 현지에서 작업하고 연재한 〈유키코의 시금치(L’Epinard de Yukiko)〉. 9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2001년부터 그는 프랑스와 일본 작가들과 함께 누벨 망가(nouvelle manga)활동을 펼친다. 그는 선언문을 통해 프랑스에서 오타쿠 성향의 일본 상업만화만 소개되고 상황과, 프랑스 만화작가들이 단순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 내용은 뒷전인 체 멋진 그림을 그리는 데만 집중하는 모습을 비판한다.
그리고 일상에 천착한 일본의 작가주의 만화들이 프랑스에 더 많이 소개되고 프랑스 만화가들에게도 허황된 내용의 주류 만화에서 벗어나 일상과 현실에 가까운 만화작업을 할 것을 촉구한다. 그의 주장은 프랑스 대안만화에도 큰 영향을 준다.
다니구치 지로와의 만남 그리고 카스테르만 출판사의 편집자 활동
일본만화의 다양성과 작품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이 2003년 앙굴렘페스티발에서 최고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의 프랑스어 판 표지.
다니구치 지로와 프레데릭 브왈레와의 관계는 각별하다. 브왈레가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을 불어로 번역해 소개했기 때문이다. 다니구치 지로는 브왈레의 만화 〈토쿄는 나의 정원〉의 스크린톤 작업을 해 주기도 했다.
“다니구치 지로를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앙굴렘페스티벌 때였습니다. 그는 고댠샤 출판사 사람들과 같이 왔었죠. 당시 그는 일본에서도 별로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고, 저도 그의 작품을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작품과 도쿄체류를 위해 고댠샤 사람들과 연락을 해왔었습니다. 다니구치 지로가 제게 프랑스 작가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구치는 오토모 가츠히로와 함께 유럽만화에 관심을 갖던 몇 안되는 일본 작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때는 일본과 프랑스의 만화교류가 거의 없었습니다. 다니구치는 누가 유명한 지 아닌 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관심을 갖는 만화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것들도 많았습니다. 제 입장에서 볼 때는 굉장히 흥미로웠죠.“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프레데릭 브왈레는 일본에 거주하며 프랑스 카스테르만 출판사의 샤카(sakka)컬렉션 책임자가 된다. 그리고 다니구치 지로, 다카하나 칸, 히데지 오타, 푸미코 타카노 등의 작가주의 만화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번역, 출간한다. (당시 카스테르만 출판사에는 한국 만화 전문콜렉션 hanguk도 있었다.)
앙굴렘 위안부 전시회에 대한 시각.
그에게 한일 간의 문제,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에게 굳이 이 질문을 한 것은 이전에 그와 동석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가 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대답을 회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앙굴렘에서 열렸던 위안부 전시회에 관련해 말문을 열었다.
“제가 그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던 일본분이 그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말하던 것은 들었어요. 진지한 분인데 외국어도 잘하시고 오리가미(종이접기) 장인이기도 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고요. 그 분은 ‘위안부 문제는 없었고, 과장되었고, 수정주의 적인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존재했을 거라는 짐작은 합니다. 그러나 규모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의 시각차이가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전투마처럼 한국이 끌고 왔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 처음 와서 하는 것(사실, 한국관련 앙굴렘 전시는 그것이 첫 번째는 아니었다.)이 일본을 비판하는 것이었다면 그건 전략적으로 서투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업과 일본만화계와의 인연을 듣고자 마련한 인터뷰 자리에서 그 문제로 장황한 토론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일본측의 시각으로만 그 문제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은 안타까웠다.
프랑스로 돌아오다.
2008년, 브왈레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일본인 아내와의 헤어짐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곳에서 평생 정착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간 떠날 것을 알고 있었죠. 18년 동안이나 그 나라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작년에 일본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었습니다만 저는 그 나라에 더 이상 경탄하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연인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처음 몇 해 간은 모든 것에 입맞추고, 모든 움직임을 알아가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알 정도가 되면 상대방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죠. 떠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떠났습니다.”
프랑스에 돌아온 후 그는 만화가로서의 모든 작품활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금은 안식년 같은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는 2014년 사랑이야기를 담은 《286일(286 jours)》이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 프레데릭 브왈레의 사진집 《286 jours》의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