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과 함께 한 유년시절, 대본소 만화들과 함께 한 중딩 시절, 손바닥 크기의 일본 복제만화에 빠져 보낸 고딩 시절, 수업은 제끼고 만화방에 처박혀 있던 대학시절... 한순간도 만화와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만화는 소홀해지고 관심은 영화로 돌아섰다. 나는 영화를 보고 또 보느라 만화책에서 손길을 멀리하게 되었고, 반지하 만화방의 어둑함보다는 극장의 암흑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청춘의 한 마디가 꺾여버렸다.
첫 휴가를 나와서 미친 듯이 영화를 봤다. 볼거리와 이야기에 대한 갈증은 극장을 옮겨가며 하루 네 편의 영화를 섭렵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만화방으로 발걸음이 향하고 있었다. 거기서 아무 생각 없이 집은 만화를 보고 입을 떡 벌리고야 말았다. 완벽한 데셍, 명징한 이야기, 시적인 그림체, 폐부를 찌르는 유머와 통찰... 이런 세련된 한국만화가 있었다니! 나는 놀라며 읽고 또 읽었다. 작품의 이름은 장난처럼 늘어트린 긴 문장이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라니! 그날 오랜만에 깊은 충만감을 느끼며 만화방을 나섰다.
부대로 돌아가서도 그 만화 생각이 났다. 견자와 백지, 황정학 그리고 이몽학까지, 작품 속 인물들의 칼춤과 춤사위와 대거리가 계속 나를 사로잡았다. 만화를 그린 박흥용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도 솟아올랐다. 그의 깊이와 시선은 어떻게 단련되었을까, 궁금하고 부러웠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내가 아직 세상 속 한 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그래서 견자처럼 떠나야 할 것이고 더 만나고 부딪쳐야 할 거란 걸 예언했다.
부대로 돌아가서도 그 만화 생각이 났다. 견자와 백지, 황정학 그리고 이몽학까지, 작품 속 인물들의 칼춤과 춤사위와 대거리가 계속 나를 사로잡았다. 만화를 그린 박흥용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도 솟아올랐다. 그의 깊이와 시선은 어떻게 단련되었을까, 궁금하고 부러웠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내가 아직 세상 속 한 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그래서 견자처럼 떠나야 할 것이고 더 만나고 부딪쳐야 할 거란 걸 예언했다.
제대 후 나는 부딪쳤고 떠났다. 독립영화 현장에서 일하다 복학을 하고, 다시 휴학을 했다. 외국으로 장기 여행을 떠났고, 귀국해 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썼다. 이후 영화가 개봉해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어느덧 스물아홉, 청춘의 말미에 이르렀을 때 나는 우연히 한 출판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내게 주어진 일은 ‘만화 기획’이었다. 운명적이었다.
만화스토리 작가로도 유명했다던 당시 만화팀장님이 내게 물었다. “무슨 만화 좋아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라고...” “아, 흥용이? 나랑 친한데, 그러잖아도 우리가 흥용이 다음 만화 내려고 하는데, 니가 맡아서 해볼래?” 그로부터 두 주 후 나는 내 청춘의 한 때를 헤집어 놓았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박흥용 선생님을 만나 그의 새 책의 편집자가 되었다. 신기한 인연이었고 즐거운 운명이었다.
박흥용 선생님의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나는 만화에 대해 배웠다. 한 명의 만화가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트레이닝이 필요한지, 이야기의 진정성을 향해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옆에서 보고 배웠다. 내가 편집한 선생님의 작품 <호두나무 왼쪽 길로>는 여행만화였고, 덕분에 작품 속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 전국을 여행했다. 그리고 마지막 여정은 선생님과 함께였다. 그즈음의 나는 더 이상 선생님과 내가 처음 반한 그의 작품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황정학을 따라 견자가 걸었듯, 박흥용 선생님을 따라 걸으며 나는 만화와 세상을 배웠다. 가르침이 오가지는 않았다. 함께 일하며 그냥 배웠다. 느리게, 천천히.
몇 해 뒤 나는 출판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지내며 닥치는 대로 시나리오와 소설을 써나갔다. 그 중 <망원동 브라더스>라는 소설이 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인정받게 되는데, 옥탑방에 사는 가난한 만화가가 주인공인 그 소설 곳곳에 나는 그들을 담았다. 내가 사랑한 만화인들을. 그곳에는 싸부도 있고 박흥용 선생님도 있고 만화편집자 선배도 만화가 친구도 담겨있다. 이것이 내 첫 소설의 주인공이 만화가인 이유고, 그것이 너무 고맙고 기쁘다.
이제는 싸부도 없고 함께 일한 출판사도 없다. 소설가가 되고는 만화 일에도 소홀해졌다. 박흥용 선생님의 수유리 댁에도 못 찾아뵌 지 좀 됐다. 그럼에도 만화만 생각하면 행복하다. 그들이 가르쳐 준 즐거움이다. 도심 어느 곳에나 숨어있는 만화방에 들어가 지금이라도 몇 시간 처박히면 얼마나 좋을까? 만화도 읽고 만화로 만난 인연들도 떠올리며 짜장면을 먹고 싶다. 후루룩 촤르륵 쩝쩝 촤르륵.
그런 행복한 인연이 시작된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 정도면 내 인생의 첫 만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