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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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탐독의 만화경]망상과 현실, 그리고 VR(Virtual Reality)

일본의 연재만화는 책상 앞에 붙박이가 된 작가의 인생을 오로지 작품에만 갈아 넣는 길고 긴 노동의 시간으로 쌓아올린 숭고한 예술이다. 작가의 책으로 탑을 쌓을 수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짧은 식견으로나마 섣부른 ‘하나자와 켄고’론(論)의 중간 정리를 해보고 싶다.

2016-12-08 박수민



△ 〈르상티망〉(2004) 전2권, 김완 옮김, 재미주의 2015

해마다 읽고 보고 듣고 즐긴 책, 만화, 영화, 음반, 게임들 중 좋았던 작품의 리스트를 틈틈이 메모 앱에 기록해두곤 한다. 매년 거창하게 ‘BEST 10’같은 걸 뽑아 어딘가 공개할 수 있을 정도의 공신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필요성의 정리다. ‘올해는 이런 작품들 덕분에 또 살아갈 수 있었구나’ 하는 고마움의 기록. 책이나 영화의 목록은 이야기의 끝까지 확인한 결과지만, 단권으로 끝나지 않는 현재 진행형 만화의 경우 도입부의 흡입력만으로 리스트에 올린다. 그렇기에 계속 연재 중이어서 단행본 수가 20권 이상에 육박하는 작품이 되면 2011년의 선정작이 2016년의 리스트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 만화가 대단해!’로 뽑았던 작품이 ‘이 만화는 여전히 대단하군!’으로 돌아오는 거랄까. 바로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앰 어 히어로〉가 그랬다. 전개가 좀 지지부진하다고 느꼈는데, 19, 20권에 이르러 다시 독자의 무릎을 치게 만든다. 게다가 올해는 영화화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결과물도 괜찮았다.

그의 첫 연재데뷔작 〈르상티망〉(2004)이 단행본 4권 분량이었고(두 권으로 복간된 신장판이 작년에 국내에도 나왔다), 이어서 〈보이즈 온 더 런〉(2005)이 10권에서 끝났다. 그리고 이제 〈아이앰 어 히어로〉가 일본에선 21권째 나오는 중이다. 단순히 권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만력(漫力)’이 작품을 갱신할 때마다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연재만화는 거대한 서사다. 단행본 20권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면 ‘장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대하(大河)’를 붙여야 옳다. 특히 일본의 연재만화는 책상 앞에 붙박이가 된 작가의 인생을 오로지 작품에만 갈아 넣는 길고 긴 노동의 시간으로 쌓아올린 숭고한 예술이다. 작가의 책으로 탑을 쌓을 수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짧은 식견으로나마 섣부른 ‘하나자와 켄고’론(論)의 중간 정리를 해보고 싶다.

△ 〈보이즈 온 더 런〉(2005)

작금 최고의 만화 리스트를 적어본다면 〈아이앰 어 히어로〉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워킹 데드〉에 대한 일본의 서늘한 대답이면서, 더욱 작가 개인적인 주제를 추구함에도 지금 넘치는 온갖 종류의 ‘아포칼립스’물과 비교하여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진격의 거인〉은 결국 잊히게 되더라도, 이 만화는 계속 이야기되지 않을까? 〈아이앰 어 히어로〉가 빼어난 이유는 단순히 시류에 앞서나가는 좀비물이라서가 아니라, 작가가 전작들을 통틀어 계속 추구해온 테마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한층 진일보하고 성숙한 시선이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미숙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폐쇄적인 남성 자아가 각성하여, 타자인 여성과 연대하며 현실 세계에 안착하려 노력하는 지난한 과정.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기 위해 택한 망상이 도피 불가능한 현실에 의해 ‘긍정적으로’ 깨부숴지는 이야기.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에 공통되는 주제다.

사실 비슷한 테마를 다루는 작가는 드물지 않다. 〈이나중 탁구부〉와 〈두더지〉, 〈시가테라〉의 ‘후루야 미노루’가 우리에겐 가장 대중적일 것이다. 요즘 작가로는 〈표류 인터넷 카페〉, 〈악의 꽃〉, 〈나는 마리 안에〉의 ‘오시미 슈조’가 떠오른다. 그러나 ‘후루야 미노루’는 최근 작품들에서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는 타인과의 연대와 쉽게 도달하는 자기 긍정이 결국 또 다른 판타지처럼 느껴져 아쉽다. ‘오시미 슈조’쪽은 개인의 사로잡힌 망상을 넘어 타인에 대한 욕망을 자기 자신에게 역반영하여 더욱 폐쇄적으로 함몰하는 극단의 주인공을 내세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들. 이들과‘ 하나자와 켄고’가 다른 지점은 현실에 발을 붙인 주인공의 치열한 노력에 있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미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엇을 찾고픈 갈망. 고통과 두려움 앞에 도망치지 않고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 이 세상에 당당히 존재하려는 강박. 〈아이앰 어 히어로〉 이전에 이미 영화(2010) 및 드라마(2012)까지 만들어졌던 ‘하나자와 켄고’의 출세작 〈보이즈 온 더 런〉은 이러한 갈망과 강박의 테마를 처절하리만큼 확실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평범한 영업직 사원이 그가 좋아하는 여자의 순정을 짓밟은 라이벌 회사 엘리트에게 앙갚음하려한다는 내용과 연쇄되는 극단적 상황 전개는 작가 스스로 “내게 있어 성경과 같으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만화”라고까지 존경을 표한 ‘아라이 히데키’의 〈나를 가져가!〉(1990)의 강한 영향 아래 있다. 아슬아슬하게 표절은 아닌, 거의 리메이크에 가까운 오마주라고 할까.

△ 아라이 히데키 〈나를 가져가!〉(1990) 원제 ‘宮本から君へ(미야모토에게서 너에게)’ 국내에는 삼양출판사에서 정발되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

그런데 〈아이앰 어 히어로〉의 전 세계적 재난 상황을 거대한 스케일로 묘사하고 있는 지금의 작가를 생각해볼 때 더 흥미로운 전작은 신장판 띠지에 ‘보상받지 못한 걸작’이라는 근사한 문구가 붙어있는 데뷔작 〈르상티망〉이다. 그의 작품들을 통틀어 개인의 망상과 세계의 현실 사이 충돌이라 표현하면 그럴 듯 해보이지만, 결국 그의 모든 만화는 방에 틀어박혀 맨날 자위만 하던 남자가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와서 진짜 여성과 섹스(관계)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현실이 두려운 인간은 진짜 인간과의 관계가 두렵다. 〈르상티망〉은 여기에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더욱 확실한 자아비판을 한다. 하나자와 켄고의 첫 번째 만화 주인공은 현실을 선택하지 않는다. 가상을, 결국 망상을 택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내가 AI(인공지능) 캐릭터와 충분히 행복하다면, 현실의 인간관계 따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으리라는 망상을 테크놀로지를 통해 정말로 이룰 수 있게 된 세상. 개인용 VR기기가 속속 상품화되고 있는 지금, 〈르상티망〉이 배경으로 잡은 2015년은 놀랍게도 정확한 예측이다.

만화가가 되기 전 작가의 실제 직업처럼(사실 하나자와 켄고 만화의 모든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다) 인쇄소에서 일하는 주인공 타쿠로는 30세 생일을 맞아 최신 유행 중인 가상현실 ‘언리얼’(같은 이름의, 세계적인 3D 게임 엔진이 존재한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저금을 털어 고가의 컴퓨터와 ‘노아의 방주’ 프로그램과 VR 헤드셋을 산다. 이유는 하나, 가상의 여자 캐릭터와 섹스하기 위해서. 비호감 외모와 체격, 소심하고 비사교적인 성격 탓에 현실의 여성은 만날 수 없을 테니 가상 세계로 ‘완전한 현실 도피’를 하겠다는 것. 먼저 현실을 떠난 친구 에치고는 언리얼 세계에서 ‘라인하르트’라는 새로운 자신이 되어 거대한 성에 살면서 여럿의 여자 AI를 거느리고 다른 유저들의 존경까지 받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제 우리에겐 가상현실밖에 없어.” 에치고의 역설적인 현실인식에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언리얼로 들어간 타쿠로는 하필이면, 가상에서 도망쳐서 진짜 현실로 나오고 싶어 하는 전설의 AI ‘문’을 만난다.

〈르상티망〉은 작중 내내 눈물, 콧물, 침을 줄줄 흘리는 스몰 데포르메 추남들이 굴러다니지만 단순히 개그가 목적인 만화가 아니다. 프로그램의 개발자가 언리얼 안에 자신을 복제하고 현실을 등지는 내용이나, 스스로 신이 된 인공지능이 도리어 개발자를 프로그래밍 한다는 설정, 가상세계가 반대로 현실세계에 선전포고를 하는 상황 등은 이 만화를 후루야 미노루가 그린 〈뉴로맨서〉나 〈트론〉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본격적인 SF에 가깝다. 작가는 가상현실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SF적으로 오가면서도, 한낱 망상에 대한 현실의 날카로운 비판을 거두지 않는다. 가상현실 속 잘생긴 외모의 자신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컷의 곧 다음으로, 실제의 자신이 홀로 골방 안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허우적거리는 초라한 모습을 병치한 컷은 적나라하게 웃기고 슬프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자신은 태어난 시점에서 이미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타쿠로에게 현실의 소리를 전하는 이는, 동료 영업사원 나가오 마리아다. 그녀는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이자 악다구니를 부리면서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현실여친’인 그녀는 타쿠로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가 된 ‘가상여친’에게 “너 같은 어른의 장난감이 있으니까 이놈들이 언제까지고 어른이 못 되지!”라며 시원한 팩트의 일갈을 날린다.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이 다른 남성 화자 중심의 일본만화들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지점은, 만화 속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 남성의 욕망과 구원의 막연한 대상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 캐릭터 시점의 현실 인식을 말하고 보여주는 기회를 반드시 이야기에 할애한다. 〈르상티망〉의 결말에서도 모든 캐릭터가 현실에 발을 딛는 계기는 두 여성의 연대 덕분이다.

만화에서 나오는 감압글러브나 슈트 등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한참 연구개발 중인 것들이다. 가상현실 자체는 이미 내가 실제로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구현되어있다. 그러나 한 가지, 작가도 독자인 나도 예상치 못한 것은 ‘VR멀미’다. 가상현실은 현실과 달리 무조건 편리하고 달콤하지만은 않다. 평생 FPS(1인칭 슈팅) 게임을 즐겨온 덕에 3D멀미 따윈 없었던 나도 VR멀미에는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아무리 고해상도와 높은 프레임으로 구현한 가상 세계가 시청각을 장악하더라도, 육체의 움직임에 대한 실제적인 자극이 없으면 혼동하는 뇌는 심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러니까, 현실과 가상현실을 나누는 기준은 놀랍게도 얼마나 진짜처럼 보이는가, 보다는 진짜로 반응할 고통이 있느냐는 것이다. 개인의 망상이 꿈과 이상과 욕망이라면, 세계의 현실은 고통으로 귀결된다. 고통 없이 현실 세계를 살아갈 수 없다. 망상이건 굳건한 의지이건 내가 처한 현실에서의 도피를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가 독자에게 주는 위안은 결국 모두의 삶에 있는 고통에 대한 위안이다.

가상현실은 결국 장난감이고, 망상 밖의 삶은 지속된다. 〈아이앰 어 히어로〉의 최근 단행본에서 주인공 히데오는 현실에서 도피할 때마다 대화를 나누던 망상 속의 친구 야지마와 헤어진다. 20권까지 함께 살아남아온 독자로서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하나자와 켄고의 지금 주인공은 포기하고 도망치는 대신 현실을 향해 더욱 나아간다. 이것이 작가와 작품의 아름다운 성장이며, 또한 그 궤적을 따라가며 지켜보는 독자들의 삶에도 분명히 의미 있는 응원이 아닐까?

△ 〈아이앰 어 히어로〉의 표지 그림이 다음권의 내용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 마지막 단행본의 표지 그림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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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

만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탐독의 만화경>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