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래곤볼 깊이 읽기》(2011) 김현아, 주재명 옮김, 워크라이프 2016
원제 ‘ドラゴンボ?ルのマンガ 学(드래곤볼 만화학)’
인간은 ‘스토리텔링 애니멀 Storytelling Animal’이다. 동명의 책을 쓴 조너선 갓셜은 “인간이라는 종(種)은 이야기 중독자”라고 규정한다. 정말 인간은 ‘이야기’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문학, 만화, 영화, 게임은 물론 매일의 뉴스와 드라마, TV프로그램과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익명의 일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온갖 크고 작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 역시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 타인의 이야기 없이 오로지 내 이야기만으로 충분하려면 그 삶의 궤적이 빈틈없이 촘촘한 사건과 에피소드의 연속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이 정말로 대서사시라도 이야기와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실화의 당사자는 괴로운 법이고, 아무리 대단한 공상도 스스로의 상상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대체로 빈틈투성이다. 일상에 치여 넋을 놓고 지내다보면 삶은 무미건조해진다. 잉여의 틈을 채우려면 이야기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틈만 나면 또 다른 이야기를 찾는다. 남의 이야기에 자극받은 이야기꾼은 자신이 만든 새 이야기를 세상에 내어놓는다. 이렇게 소비와 수요와 공급이 삼위일체를 이룬다.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엔터테인먼트의 산업적인 측면에서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결국 인간과 예술의 상호작용, 그래서 ‘문화’의 순환이다. 세속에서 칭하길 ‘오타쿠’라고 불리는 마니아들은 사실 인류문화의 선봉(先鋒)에 있는 것이다. 당대의 문화예술을 선도한다고 칭송받는 작가들 역시, 작가이기 이전에 자기 분야의 오타쿠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비평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비평가는 사실 작가보다 더 오타쿠에 가까운 직업이다.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 등을 규정하는 각자의 미학. 모든 ‘덕질’은 비평에서 비롯한다.
△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2012) 노승영 옮김, 민음사 2014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이야기하는 인간)’, 스토리텔링의 마음을 가진 유인원에 대한 책.
그러니 우리는 “OO은(는)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니라고요!”라고 말하면 안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재의 다량, 다종(多種) 생산을 통해 인간에게 늘 선택을 요구한다. 개인의 선택은 일정한 취향으로 발전한다. 그러니 작금의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분야에서 어느 정도는 오타쿠다. 다만 정도의 차이,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도가 지나치면 일상생활이 곤란하지만, 깊이는 깊을수록 길어 올릴 가치가 생겨난다. 연말에 굉장한 깊이의 책을 읽었다. 미사키 테츠의 <드래곤볼 깊이 읽기>가 그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인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1984-1995)을 가지고서,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 이면에 있는 작가와 작품 사이, 캐릭터와 스토리 사이의 역학(力學)을 집요하게 분석한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드래곤볼>의 재발견이다. 우리 시대의 고전은 과연 만만하게 볼 만화가 아니었다.
조산명(鳥山 明, 어째선지 이렇게 부르는 게 훨씬 정겨운) 선생의 <드래곤볼>은 원작의 연재는 옛적에 끝났지만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 미디어믹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일본 만화를 대표하면서 앞으로도 불멸의 IP(지식재산권)로 남을 작품과 그 세계관의 총칭이다. 한국에 상륙한 최초 정발 ‘망가’로서의 파급력과 영향도 대단했던 역사적인 만화. 개인적으로도 90년대 초 해적판 ‘호호 샘 코믹스’ <드라곤의 비밀>로 처음 접했던 때의 충격이 여전하다. 그렇게 재미있는 만화는 처음이었고, 그림체와 스토리를 흉내 내어 키 작은 꼬마 주인공이 ‘천하제일무술대회’ 비슷한 대회에 나가는 만화를 수업 시간에 그렸던 기억도 난다. (내 인생의 첫 표절!) 세월이 꽤 흘렀어도, 서재에 늘 꽂혀있는 <드래곤볼>은 거의 매년 한두 번씩 다시 꺼내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파트는 소년 편. 정말이지 질리지 않는, 언제나 그리운 그림체다.
△ 토리야마 아키라 <드래곤볼> 단행본 1권의 궤적. 좌측부터 해적판(여기 끼면 안 될 것 같지만…),
서울문화사 정발 무삭제판, 완전판, 풀컬러판.
내 또래가 <드래곤볼>을 모른다면 분명 간첩이지만,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의 시대에 나고 자란 새로운 독자들은 그 이름과 애니메이션 정도는 알아도 원작 만화는 안 보았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던 어느 애니메이터 분이 심드렁하게 “<드래곤볼>은 본 적 없어요, 보려고 시도하다 뭔가 변태(?)같아서(아마 ‘무천도사’ 때문이리라) 초반에 포기했거든요.”라고 말해주어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으니까. 당시의 나는 <드래곤볼>을 그냥 그렇게 넘기면 절대 안 되는 위대한 만화라고 단언하면서도 그 근거를 구태여 열심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작가의 그림체를 칭송해도 취향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스토리의 재미를 강조하려니 “그냥 싸움질만 계속하는 뻔한 ‘배틀물’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왔을 때 “싸움질만 계속하는 건 맞지만…”에서 더 설명할 여력을 잃는다. 언제부턴가 <드래곤볼>은 소위 ‘파워 인플레이션(전개상 앞의 적보다 더욱 강한 적을 계속 등장시키는 설정 클리셰)’의 틀을 확립한 작품이 되어 있다. “문답무용, 보면 알게 돼”라고 쉽게 말하고 넘기지만 실은 나부터가 <드래곤볼>을 제대로 비평하고 분석해야할 온당한 텍스트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재미있다!’는 작품을 접했을 때 즉각적으로 나오는 거의 반사적인 감각이지만, ‘왜 재미있는가?’는 시간을 두고 사유의 전개가 필요한, 그러니까 학문적인 영역이다. 우리는 <드래곤볼>의 재미 자체는 의심한 적이 없지만, 왜 어째서 재미있는지는 제대로 분석해본 적이 없었던 거다. 이 책 <드래곤볼 깊이 읽기>의 문제 제기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저자는 이 책이 추구하는 핵심을 ‘미스터 포포의 가르침’ 식으로 서두에서 밝힌다. 눈으로만 읽지 말고 생각하라.
책은 <드래곤볼>이 ‘주간지에 연재되는 장편 만화’라는 시스템 안에서 독자로 하여금 다음 화의 전개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중독성이 얼마나 강력한 작품이었는지를 되새기며 글을 시작한다. 연재 당시에 실시간으로 읽었던 독자들의 마음은 일본과 한국이 다르지 않았다.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가 “크리링이 죽었다!”라고 누군가 외쳤던 여름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던 증언의 인용은 이미 아저씨가 된 이쪽 독자의 마음도 건드린다. 다음 화 공개가 일본보다 일주일 늦는 격차를 못 참고 팩스로 공수된 저화질의 그림과 조악한 번역의 해적판을 돌려보며 다음엔 또 어떻게 될지 조바심 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독자를 ‘쥐락펴락’하게 만드는 이러한 테크닉이 결국 매주 마감과 인기 앙케이트가 반복되는 주간지 연재 시스템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지적은 냉정하고 정확하다. 우리는 이미 이 만화의 재미를 당시에 실시간으로 즐겼던 독자다. 이제는 이미 완결된 단행본 형태의 만화를 다시 읽으며, 대강의 인상을 버리고 “일부러 천천히, 차분히” 읽어보자고 저자는 제의한다. 머리를 비우지 말고 디테일에 집중하자는 제안. 원작의 독자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저자의 전략부터 보통 내공이 아니다.
저자는 책의 구성을 크게 ‘1.이야기(작품론)’와 ‘2.군상(캐릭터론)’과 ‘3.언어(텍스트와 담론)’의 세 가지 파트로 나누어 <드래곤볼>의 구조에서부터 세부적인 디테일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한다. 1부에서 작품의 전체 구성과 줄거리에서 일어난 세 번의 전환점 - 레드리본군 편에서 타오파이파이의 등장과 첫 사망자의 발생, 피콜로 주니어 편과 사이야인 편 사이 손오공과 피콜로가 실은 외계인임이 밝혀짐, 프리저 편과 인조인간 편 사이 타임머신 등장 - 을 밝혀내는 부분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드래곤볼>의 서사 전략을 짚어낸다. 장편 연재는 두 편으로 만족한 소문난 ‘귀차니스트’인 조산명 선생이 애초 명확한 구성이나 구체적인 계획 없이 ‘사후 이유 붙이기’와, ‘사후 복선 발견’ 등 궁여지책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간 까닭에 오히려 의표를 찌르는 전개를 할 수 있었다는 부분은, 이야기의 개연성과 복선 회수를 항상 고민하는 풋내기 작가에게 프로페셔널의 창작 구상과 운용의 또 다른 묘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캐릭터 중심의 만화인 <드래곤볼>속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 양상, 존재 의미를 분석한 2부는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원작의 애독자가 가장 큰 해석의 재미를 느낄 파트다. 여기서 많은 부분을 언급할 수는 없고, 개인적으로는 손오공의 성장에 따른 신체와 그림체의 변화와 복장의 분석, 피콜로 파트에서 ‘지구 변경론’을 끌어와 전개한 ‘변두리’ 문명과 ‘잡종성’의 힘, 프리저의 진화와 변신이 더욱 작은 신체로 향하는 의미, 셀은 왜 적들 중에서도 멋진 녀석으로 그려졌는지를 고찰한 부분 등이 인상적이다. 특히 야지로베를 ‘또 한사람의 오공’으로 분석한 대목에서는 만화를 보면서 비슷하게 생각했던 지점이 저자의 해석과 일치하는 것에서 오는 쾌감이 있었다. 파트의 중간 중간마다 작가와 연재 당시의 시대상과 미디어, <드래곤볼>에서 반복되는 패턴과 드래곤볼의 사용법 등을 논한 꼭지 칼럼도 재미있다.
저자(혹은 편집자)가 도비라(표제지)에 “지금부터가 대단하다”고 예고한 마지막 3부야말로 이 책이 한국의 <드래곤볼> 독자에게 진짜 의미를 가지는 부분일 것이다. 언어 파트는 그동안 국내 정발된 판본의 번역으로는 인지할 수 없었던 <드래곤볼>의 실제 말투와 화법, 그래서 캐릭터들이 쓰는 언어와 이름의 뉘앙스가 정확하게 어떤 형태와 논리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이어지는 ‘드래곤볼의 자본론’은 이 만화의 ‘파워 인플레’ 문제를 묻는 사람들에게 묵직한 대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 도비라에 마치 ‘3줄 요약’마냥 친절하게 저자(혹은 편집자)가 남겨놓은 문장은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어낸 독자에게 주는, <드래곤볼>의 주제에 가장 근접하게 도달한 깨달음이다. 당연히 여기 적지는 않겠으니 궁금한 분은 꼭 책을 읽어보시길.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해 인간과 이야기의 관계와 ‘만인 오타쿠’론까지 늘어놓은 이유는 이것이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우리 모두가 온갖 매체의 전문가이고 비평가인 지금, 내 취향에 의존한 대강의 인상을 재빨리 몇 줄로 써서 한 작품의 위대함이나 하찮음을 논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유명한 비평가들도 비슷한 일을 하므로 물론 이러한 아포리즘(aphorism) 역시 비평이겠다. 시대는 깊이 보다는 속도를 요구하고, 우리는 빠른 결론과 다음의 소비를 원한다. 나 역시 누군가의 별점과 공신력 있는 사이트가 매긴 점수를 확인하곤 한다. 하지만 때때로 어떤 작품은, 나 스스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사유하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잘 안다고 믿었던 작품도 그렇다.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고, 그 이면엔 내가 놓치거나 간과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다수가 쉽사리 결정한 지배적인 담론에 마냥 따른다면, 세상의 온갖 이야기에 대한 나의 시야는 좁아지고 취향은 편협해질 뿐이다. 편협한 취향은 결코 오타쿠의 미덕이 될 수 없다.
남들의 짧고 굵은 감상에 길들여져 있던 와중에 이 책이 내게 준 소중한 깨달음이 있었다. 눈으로만 읽지 말고 생각하라. 그리고 확 말해버리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까지. 이야기 없이 살 수 없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인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만날 때, 귀인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온전히 그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일부러 천천히, 차분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일깨워준 태도에 마지막으로 다음의 인용문을 더한다.
“모든 게, 정말로 모든 게 우리를 배신하거나, 아니면 바로 너를 배신하지. 차분함만이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아.”
- 로베르토 볼라뇨 <2666> 中.

△ 책을 펴낸 출판사 ‘워크라이프’의 블로그 대문 사진. 완전판 13권 옆에 책을 꽂아놓은 것이 절묘하다.
옮긴이의 친절하고 충실한 주석 덕분에 <드래곤볼 깊이 읽기>는 한국어판이 곧 완전판일 듯.
(이미지 출처 : 워크라이프 출판사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