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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케장의 만화에서 드러난 의미화에 대한 저항을 중심으로, 이를 위한 부수적 전략들을 분석하기 위해 쓰였다. 김케장의 만화에서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어는 김케장의 만화에서 무수히 쏟아지고 엇갈리고 재배치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의미의 부재를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니까 김케장은 많은 말을 함으로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언어의 물질적인 차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제부터 김케장의 다양한 단편들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구체적으로 예시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김케장의 만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독자뿐만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애틋하고 낭만적인 글이 되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말텐데, 왜냐하면 김케장의 만화가 전혀 진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진지함의 결핍으로 인해 그를 향한 나의 열정과 애정은 충분히 어리석거나 미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김케장의 만화에 대해 최대한 수식어와 부사를 배재한 채, 오로지 분석적이며 객관적인 문체로 사실들을 서술하려고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어리석고, 정신 나간 것으로 보이기는 싫기 때문이다.
1.김케장이라는 미스터리
김케장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탈-형식적인 말투와, 마치 그림판으로 그린 듯한 성의 없는 그림체, 마지막으로 읽은 듯 안 읽은 듯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단편으로 유명하다. 김케장은 2008년부터 문제적이며 걸출한 작가들을 무수히 배출해낸 디시인 사이드 카툰연재 갤러리에 자신의 만화를 올리기 시작했다. 즉 김케장의 그림체가 지난 9년 간 (아마도 고의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소리기도 하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김케장의 많은 사적인 정보-나이, 성별, 직업 등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비밀로 지켜지고 있다. 그렇다고 김케장과 보다 가깝게 접촉할 수 있는 경로가 아주 없지는 않다. 김케장은 자신의 블로그(http:||kimkero.tistory.com|)를 운영한다. 블로그에는 종종(그러나 꽤 규칙적으로) 만화가 올라오지만,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김케장이 좋아하는 ‘러브라이브’라는 애니메이션이다. 또 김케장이 말을 만들 때 분명 참고하는 것 같은, ‘사이퍼즈’라는 게임 도중의 채팅 화면 캡처도 자주 포스팅 된다.
작년부터 김케장은 만화책과 티셔츠 등을 만들기 위해 텀블벅도 시작했다. 두 번의 텀블벅은 모두 대성공으로 끝났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텀블벅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김케장 때문에 당황했는데, 텀블벅을 위한 포스팅과 자신의 만화책에서 김케장이 너무도 분명하게 표준적인 한국어 화자의 말을 구사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인데, 그것은 김케장이 ‘뭐가 제정신으로 보이는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정신’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김케장이 제정신이라는 (새로운)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그가 구사하는 한국어의 해체적 용법에 지나치게 감화된 몇 몇 사람들은 ‘정상인’ 김케장에게 실망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상태가 혼재된 가능성으로서의 미스터리 바깥의 김케장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은 김케장의 만화에 내재된 형식과 논리를 보다 독해 가능한 것, 무엇보다 의도된 것으로 만든다.

<465. 메론과 레몬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내> 중
2. <우레C 하즈카C>와 중단 시키는 언어
김케장의 만화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먼저 블로그에 들어가보자. 우선 <721. 우레C 하즈카C (일일권장량의 797971%)>라고 적힌 포스팅이 블로그 상단에 떠 있다. 그 밑에 720, 719, 718...와 같이 영원히 하강하는 숫자 옆에 나란히 쓰인 제목들이 있다. 이것들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왜인지 안타까울 정도로 시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서브-서브 컬처적이라 판독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하지만, 클릭해 본다고 해서 제목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케장의 만화에서 제목은 예민하게 계획된 표제지만, 그것이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만화의 첫 장면에서는 꽃봉오리가 ‘후.. 넌 이런 거 피우지 마라’라고 한다(그렇다, 나는 앞으로 김케장의 만화를 이런 식으로 인용할 계획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은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초현실적인 사건일 수도 있지만, 다음 장면에서 꽃봉오리는 갑자기 사라졌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꽃봉오리는 왜 등장한 것일까?) 꽃봉오리의 행방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문장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겨울...그것은|비비빅도 구워먹는 계절...’ 누구도 겨울에 드럼통에서 비비빅과 귤을 구워먹지 않는다. 비비빅을 구워서 먹을 순 없다. 아마도 이것은 비유일 것이다. 그 정도로 춥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음 대사가 나온다.
‘공사가 중단된 건물에|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풍경|드럼통에 둘러서서|귤이나 비비빅을|구워먹는 사람들...’ 그렇다. ‘귤과 비비빅을 구워서 먹는다’는 정식은 물론 비현실적이지만, 여전히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은 채로 세 번째 등장함으로써 이 만화의 중심 사건이 될 것 같은 암시를 준다. 이 곳에서는 ‘귤이나 비비빅’을 구워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독자인 나는 다음 장면부터 이에 적응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이탈이 또 다시 벌어진다.
‘그리고 그 드럼통 안을|들여다보면|거기에 타고 있는 것은|아이....’라는 대사와 함께 드럼통 안에서 타고 있는 아이가 (김케장의 그림체로) 그려져 있다. 귤과 비비빅에 대한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아이가 불에 타고 있다. 서사라는 이름의 중심은 계속해서 와해되며 조각난다. 이걸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한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음 장면에서는 ‘...스크림’이라는 단어만이 적혀있다. 위에서 언급된 ‘아이’와 만나 낱말로서 ‘아이스크림’을 이루니까, 뭐 말은 된다. 그렇지만 ‘...스크림’은 다른 모든 장면들과 연결을 중단시키고, 중단된 지점부터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할 것을 무리하게 요구한다. 김케장에게 있어서 언어유희를 통한 의미의 탈취는 서사를 통한 의미의 확장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단편들의 언어유희와 마찬가지로, ‘아이’와 ‘...스크림’은 서사를 무력화하고 의미를 절단한다. ‘...스크림’은 서사가 부재한 심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실제 화면 상의 물리적 공간까지 장악한다. 폴 드 만이 말한 것처럼, 낱말이 마치 ‘펜싱’처럼 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펜싱은 언제나 지는 싸움으로, ‘제대로 된 지칭 대상을 가리키는 법이 없다’. 실컷 언어유희를 하고 나면 허무해지는 것처럼, 김케장의 언어유희 역시 기계적인 허무함과 공백을 전달한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이 언제나 실패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언어가 불완전하며 불가해하다는 사실에 대한 끝이 없을 저항이며, 따라서 능동적인 실패다.

<457. ●●포도요?●●포도●라구요?●●●우리가 왜 포돕니까●●●> 중
3. <저는그렇게생각안해요.tif>와 부정이라는 규칙
<저는그렇게생각안해요.tif> 시리즈는 김케장의 다른 만화들과는 달리 개별적인 카테고리에서 연재되고 있다. 연재 초기에는 <아침조회할떄이렇게생각안함.tif>, <버스탈떄인가잠잘때이렇게생각안함.tif>와 같이 흔한 공감물의 제목을 비튼 것 같은 컨셉의 소제목을 달고 있다. 이 단편들은 대체로 형식적으로는 공감물이라는 장르를 의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인 서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공감 얻기에 실패해야만 하는 구조를 취한다(‘때마침 울리는 알람|시계 발로 찼는데|알고보니 내 알람시계를 죽이려던|살알람청부업자를 발로 찬거라서|아랍인들한테 감사의 의미로 해피머니 상품권 5000원 받아봄‘<아침에이렇게생각안함.tif>).
그런데 <간절히바랄때이렇게생각안함.tif>부터 일상물에서 벗어나, ‘왜 이게 굳이 개별 카테고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작품들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개별 카테고리가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김케장의 만화가 대부분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김케장의 만화가 재미있는 이유와 같다. 모두가 김케장에게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그러한 필연적 실패에 김케장의 고유성이 있다. ‘시사만화가 김케장’이라거나 ‘일베만화가 김케장’ 같은 단어가 어색할뿐더러 거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김케장의 만화가 단 한 번도 표면-언어 바깥의 언어를 전달하려 의도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는그렇게생각안해요.tif> 시리즈 역시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제목에 ‘안해요’가 들어가는 만큼 어느 정도의 경향성은 있는데, 예컨대 이들 10개 단편은 ‘부정’이라는 규칙을 공유한다. 한 장면에서 그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전 장면에 대한 부정이 동반되는 것이다. 그 부정은 이전 장면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모든 장면은 부정의 연쇄 사슬에 의해 관계성이 형성된다. 부정은 결국 규칙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소진시킨다. 예를 들어 <부두주술걸때이렇게생각안함.tiff>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매 장면마다 이어진다. ‘어그레 들어와들어와|들어와들어와들어와들어|와들어와 편하게 있어’, ‘아무데나 앉아도돼|니집처럼편하게있어|나집업는거알잔아’, ‘그래?|하여튼TV빼고|아무데나|앉아’, ‘(털썩)’, ‘아니 야|그렇다|고침대에안즈|면어떡해??\'’이 대화에서는 엉성히 짜여진 개그 콤비 같은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집처럼 편하게 있어’라는 관용어구는 ‘집이 없는’ 인물에게 관용어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 인물은 언어의 사회적 의미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대화는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고, 고립된다. 하지만 김케장의 만화에서 이들의 관계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의미들이 증발되고 난 뒤에도 남아있는 규칙들이 더욱 중요하다.
그 중 가장 최근작인 <돈까스카레인줄알았는데카레는없고돈까스만있는줄알았는데돈까스는없고철수네치킨까스만있었다.TYIf>에서는 김케장이 그러한 ‘부정’의 규칙을 끝까지 밀어부친 좋은 예시다. 승객이 다 내린 뒤에 탑승해달라는 안내방송에 화가 난 승객이 다른 승객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폭행한다. 여기서 폭행 사실 자체는 의문시되지 않은 채, 맞은 승객은 단지 ‘방송 내가않했는데’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때린 승객은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이를 ‘쌍방과실’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화의 연쇄에서 우리는 이전 장면의 전제가 생성하는 서사가 부정되고 오직 의미 없는 말들만이 살아남는 것을 본다. 다음 장면에서 김케장은 뜬금없이 ‘그럼 대표적인|쌍방과실에는|무엇이 있을까?’라며 태연하게 ‘사과, 감, 무화과’를 소개한다. 그러자 ‘사과, 감, 무화과’는 소개자의 무례함을 지적한다. 소개자는 다음 장면에서 어느 새 ‘제와철(JYC) 엔네방송쌘터’에서 사과방송을 하는데, 단지 ‘사과, 감, 무화과’를 ‘이러한 분들이’라고 정정하기 위해서다.
이렇듯 서사가 연결되지 않는 한, 김케장의 만화에서 어떤 장면도 그 다음 장면만큼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차피 부정되고 휘발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장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부정의 규칙 속에서 모든 장면은 평등하게 자신의 사라짐을 예감한다. 남는 것은 똑같이 생긴 ‘사과, 감, 무화과’를 가리키고 있는 ‘쌍방과실’이라는 단어의 분명한 현존이다. 그 순간, 오직 말들만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말들은 남아서 자기의 불가해성을 증명하고 의미의 부재를 드러내기 위해 말뚝처럼 단단히 박혀있다. 이렇듯 김케장의 만화에서 말의 물질성은 유일한 진실이다. 우리는 그러한 말들에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거울처럼 투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