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태권도가 싫었다. 처음 태권도를 만났던 아홉 살 때부터 싫었다. 같은 반, 가장 예쁜 여자아이였던 혜숙이 만큼 싫었다. 둘 다 내가 좋아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한 기억 때문이었다.
혜숙이를 좋아했던 이유와, 태권도를 좋아했던 이유는 같았다.
“예쁘고...”
“멋지고...”
......그들은 내게 첫 번째 인생의 목표를 주었다.
“태권도를 배워서...! 바위를 쪼개고 학교건물 옥상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여주자...! ”
물론 실패했다.
일 년 가까이 투자해서 간신히 허리에 두른 빨간 띠에도 여전히 바위는 컷고, 옥상은 까마득히 높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혜숙이는 반장의 짝꿍이 되었다. 아무튼 태권도는 그렇게 내 인생의 첫 번째 실패를 쓰디쓰게 맛보여 주었다.
난 태권도가 싫어졌다. 여전히 싫지 않은 혜숙이 때문에 더 싫었다...!!
그래서, 태권도가 이소룡과 성룡에게 두들겨 맞고, 주윤발이 쏘아대는 쌍권총에 난사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도 외면했고, 군대에서 강제로 취득한 검은 띠는 자랑이 되지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태권도에 대한 기억이 50년 전 첫사랑인 혜숙이의 얼굴만큼 흐릿해질 무렵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보내온 이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당연히 콧방귀 한방으로 지워버릴 메시지였지만, 문제가 생겼다. 대상이 현역작가들과 진흥원 아카데미교육생, 즉 예비창작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단 것이다.
난 현역작가이자, 진흥원 아카데미 프로그램의 강사였다. 즉, 두 가지 다 걸린 것이다. 그러니 내겐, 일종의 ‘강제징집명령서’였던 것이다.
그렇게 끌려 간 태권도원. 그런데, 이상한 기적이 생긴 건 그 순간 부터였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다가오는 청량한 공기, 그리고 모던하면서 아늑한 풍경,
마치 힐링을 위해 찾은 휴양지에 온 듯 한 느낌, 당연히 메아리 칠거라 예상했던 살벌한 기합소리대신 맑은 새소리가 들려 왔고, 사방에 너부러져 있어야 할 깨진 벽돌조각과, 피 범벅인 붕대대신 태권도의 역사가 기록된 화단과 귀여운 마스코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순간 난 나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잘 왔네...좋다...” 아울러 태권도가 반쯤만 싫어졌다. 첫 번째 기적이었다.
그런데 불과 삼십분 후 본격적인 스케치샤워를 위해 ‘전통정원’으로 이동하는 순간, 두 번째 기적이 생겼다.
△ 오행폭포(좌), 명인관(우)
단순히 그 속에 담김으로서 이상할 정도로 정화되는 느낌! 결국 멍하니 호연정에 앉아 그 시간을 다 보냈고, 다음 스케줄 때문에 끌려 나올 땐 너무나 아쉬웠다. 그때만 해도 난 그 이유를 정확히 몰랐다. 그래서 오히려 그 감정이 당황스러웠다. 마치, 도축장에 끌려 온 소가 도축장이 좋다며 나가기 싫다고 울부짖는 꼴이 아닌가?
다음 스케줄은 ‘태권테라피’였다.
첫 느낌은 일종의 ‘고문적응훈련’같았다. 스파이질 하다가 적군에게 잡혔을 때 기밀을 누설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적응력을 키우는 훈련 같은 것? 당연히 탈출해야 했지만. 하필 함께 있는 제자들의 시선 때문에 변절자가 되지 못했고, 죽기 살기로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 십분은 고문이었다가 견딜수록 근육이 풀리고 전신이 시원해지는 듯 느껴지기 시작했단 것이다. 돌이켜보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사실, ‘태권테라피’는 태권도를 응용한 퍼스널트레이닝의 개념이었으니까.
아무튼 뜻밖의 횡재를 득템하곤 첫 날의 일정을 끝냈다. 그날 밤, 노곤하게 풀린 육체와 청량해진 정신 덕분에 일찍 잠이 들었다. 덕분에 그 날 밤은 의사에게 처방받은 수면제 한 알을 아꼈다. 참고로 난 악성불면증 환자였다. 기분 좋게 밀려오는 졸음이 내미는 항복조인서에 기분 좋게 사인하면서...
난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태권도가 뭐 이래....?’ 잠 자는 동안 태권도가 삼분의 일 쯤 싫어 졌다.
다음날 스케줄은 더 이상했다.
태권도의 역사가 담긴 박물관과 춘향전을 태권도로 승화시킨 공연관람, 마지막으로 유럽여행이 생각나는 모노레일을 타고 태권도원 전경이 보이는 전망대로 올랐다.
전망대 카페에서 따듯한 카페모카를 마시며 한 시간 가까이, 멍하게 하나 가득 펼쳐진 태권도원 전경만 보았다.
이런 저런 느낌들로 가득했지만 그 전체를 지배하는 건 두 가지 상념 이었다.
첫 번째는 ‘1박2일이 너무 짧다! 하루 만이라도 더 있고 싶다!’
그건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듯 했다. 카페에서 아쉽다는 소리가 연발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나만의 상념, ‘태권도가 뭐 이래?’
동시에 난 태권도가 더 이상 싫지 않았다.
돌아오는 귀경길에서 버스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왜 더 이상 태권도가 싫지 않아 졌을까?’,
‘아니, 솔직히 왜 좋아지기 시작했을까?’
이 글을 쓰는 건 사실, 태권도원을 방문하고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러서다. 늦어진 이유는, 분명 명확한 상황인데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권도가 뭐 이래?’ 그 의문의 답은 어릴 때 새긴 첫 명제가 틀렸기 때문이었다.
정답은 ‘태권도는 원래 이래, 이래서 좋은 거야.’
이 즈음에서 내게 새롭게 정의된 태권도를 고백해야 겠다. 태권도는 격투술이 아니다. 바위를 깨고 옥상을 날아오르는 슈퍼맨 양성소가 아니다. 태권도의 근본목적은 정신수양 즉 힐링이다.
인간의 정신을 맑게 정화시키는 게 주목적이며, 그 정화된 정신은 삶의 방향성을 올바르게 유지시킨다. 그것이 사회 전체를 정화시킴은 그냥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특화 된 건강은 공짜로 주어지는 기분 좋은 보너스다.
태권도원의 풍광과 스케줄들은 내게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작은 보너스를 전체로 보고 태권도를 매도했었다는 걸.
어젯밤도 아쉬웠다. 다시금 불면이 찾아와 수면제통의 뚜껑을 열어야 했으므로.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오늘 저녁 시간에도 태권도원의 홈페이지를 열어보고 또한 그곳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함께 보고 있다. 아쉽게도 조금씩 기억이 흐려져 간다.
‘어쩌지...?’
‘태권도장을 찾을까...?’
‘아니면 [태권도원]에 찾아가 하루라도 머물게 해달라고 사정할까...?’
그럼 불면이 사라질 텐데, ‘태권도원’의 그 마지막이자 첫 날 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