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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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만화 : 오승욱, <동물전쟁 (최경 작)>

나는 만화책을 보면서 부엌문 앞을 걷고 있었다. 만화책의 제목은 최경의 <동물전쟁> 너무 옛날 일이라 왜 만화책을 두 손으로 펴들고 걸어가면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통 만화책을 볼 때는 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개만 내밀고 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인데 말이다.

2016-10-24 오승욱



△ 글·그림 최경, 『동물전쟁, 동물공군』, 상, 하권, 신일문화사, 1972.

나는 만화책을 보면서 부엌문 앞을 걷고 있었다. 만화책의 제목은 최경의 <동물전쟁> 너무 옛날 일이라 왜 만화책을 두 손으로 펴들고 걸어가면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통 만화책을 볼 때는 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개만 내밀고 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인데 말이다. 하여튼 만화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두어 걸음 앞에 시꺼먼 물체가 있는 것을 만화책 너머로 얼핏 보았지만 건너뛰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만화책을 보면서 그 시꺼먼 물체를 넘어가려고 했으나 아! 세상에 태어난 지 다섯 해밖에는 안 되었던 나의 다리는 너무나 짧아 검은 물체를 넘어가지 못하고 다리가 끼어 버렸다. 시꺼먼 물체는 불이 활활 붙어 있는 연탄 화덕이었다. 내 비명 소리에 고모가 달려 나와 연탄 화덕 사이에 다리가 낀 나를 구해 주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추는 안 다쳤네!” 이것이 내 유년 시절 만화에 대한 첫 기억이다. 화상 자국은 내가 마흔 살이 되어서야 사라졌고, 상처를 볼 때마다 최경의 <동물전쟁>이 부록처럼 항상 따라다녔다. 한여름에 일어난 일이어서 더운 방안에는 못 있고, 처마 아래 그늘진 곳에 평상을 놓고 그 위에서 화상이 나을 때까지 누워 지냈다. 넓적다리에 바셀린 거즈를 붙이고 평상에 앉아 있으면서 아버지가 빨리 퇴근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아버지가 들고 온 누런 봉투를 더 반겼었는데, 그 안에는 항상 칠성사이다 한 병과 만화책이 들어 있었다. 만화책 때문에 다쳤는데도 아버지는 만화에 미친 아이니 만화책을 보며 고통을 잊으라고 만화책을 사 왔던 것 같다. 어둑해진 마당에 들어선 아버지는 내 다리의 화상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누런 봉투 속에서 만화책을 꺼내어 주었다. 위문품으로 사다 준 손의성의 제목이 기억 안 나는 형사 만화를 보면서 아픈 대가치고는 짭짤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몇 년이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만화책을 사주지 않았고, 심지어 어머니는 만화책을 보는 것을 싫어했기에 만화를 볼 수 없었던 나는, 동무들과 온 동네를 휘젓고 뛰어놀다가 만홧가게 앞 좌판에 놓여 있던 최경의 <동물전쟁>의 칼라로 그린 아름다운 표지에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 최경의 <동물전쟁> 주인공들이 그려진 딱지를 발견하고 구입하여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애지중지하며 내 보물창고에 보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화가 최경은 60년대에 활동한 만화가로 그의 대표작이 <동물전쟁>이다. <동물전쟁>은 의인화된 동물들이 기관총을 들고 서로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였다. 주인공들이 모두 개들이었고, 그들의 적은 늑대나 고양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스라는 이름의 셰퍼드가 사령관이었고, 케리라는 이름의 진돗개가 멋있었다. 너무나 이들을 좋아해서 초등학생이 되어 집에서 개들을 키우게 되었을 때, 수컷 개들의 이름을 베스와 케리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었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만홧가게에 가서 만화를 빌려 보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니 아마도 그 시기에 본 만화책들은 모두 아버지가 빌려오거나 사 온 만화책들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내가 보았던 만화책들 중 기억나는 것이 이근철이 그린 늑대들 사이에서 자란 주인공이 등장하는 <방랑의 왕자> 시리즈, 최경의 <동물 전쟁> 시리즈, 손의성의 형사 만화, 오명천의 서부극 만화였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만화 취향이 그런 만화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에게 다리에 멍이 들고 빗자루가 부러질 정도로 야단을 맞아도 범죄를 저지르듯 만화책을 찾아보았었다. 지금도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이상 만화전문서점에 들러 재미있는 만화들을 찾는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는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