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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26 : 정훈, 최운정, 김기백, 심명섭

1935년 일본 나마시나현 출생. 해방과 함께 울산으로 귀향했지만 육체적인 장애로 인해 학생시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앞길을 내다보고 기술을 택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나 할까.

2016-10-26 박기준



정훈
1935년 일본 나마시나현 출생. 해방과 함께 울산으로 귀향했지만 육체적인 장애로 인해 학생시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앞길을 내다보고 기술을 택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나 할까.
1959년 졸업을 앞두고 실력을 인정받을 때까지 단행본 출판사를 들락거렸는데 마침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1961년 <소설계>에 투고하며 도전 끝에 성인만화 ‘로맨스군’을 연재하며 데뷔하였다.
이어서 <아리랑>지에 ‘부엌 숙이’가 연재되며 성인만화가로서의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숙이는 남의 집 더부살이로 살아가지만 명랑하고 꿋꿋하고 예의바르게 정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야기로서, 이 작품은 크게 화제가 되어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한국 전쟁 후의 사회분위기 또한 이산가족들의 만남이나 성공담이 크게 화제였기 때문에 읽고 보는 이들의 공감을 샀다.
△ 좌: 대표작 <부엌 숙이>, 대중 월간 ´아리랑´지에 연재, 인기가 굉장해 TV 드라마로 방영된 걸작.(캐릭터 소개 1961년.) / 우 : 청소년 명랑만화 <칠칠이 칠용사>와 등장인물들(1960년부터 등장)
△ 청소년 명랑만화 시리즈 <부엌 숙이> 단행본. (1965년 제일문고 발행)
‘또순이’와 재일교포 수기를 가지고 영화화한 ‘어느 하늘 아래’ 등도 그 시대 흐름과 잘 맞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부터 인기 작가 소리를 듣기 시작하나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병환이 심해 1년을 입원과 치료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져서 다시 새로운 무명 작가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0년의 5.16군사 정변 이후 서점시대는 대본용 시대로 바뀌고 검열 또한 심했지만 최선을 다해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괴기만화 ‘유월형’ ‘칠칠이 칠용사’ 시리즈도 펴내며 피나는 노력으로 재기를 위한 사투를 벌였다.
1968년 대본소가 성행하던 시절, 마침내 청소년만화 ‘여학생 숙이’ 시리즈를 펴내며 다시 각광 받기 시작, 본격적인 인기 작가 대열에 들어선다.
△ 청소년 명랑만화 시리즈 <여학생 숙이>. (1960년 우주문고 발행)
△ <여학생 숙이>에 등장하는 인물들
똑똑한 소녀 가정부 숙이는 주변 여건은 어렵지만 타고난 명석한 두뇌 판단으로 여러 가지 위기를 넘기며 명랑하고 꿋꿋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 만화는 잡지에 연재했던 부엌 숙이의 미들 주니어판이라 할 수 있다. 주인집 아들딸들의 가정교사 일부터 시작해서 주인아저씨의 바둑 상대가 되어 주는가 하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 시대의 또순이 이야기다.
1964년 <제일문고> ‘건널목’ 시리즈 8권 발행.
1966년 <진선미문고> ‘괴등대’ 시리즈 7권 ‘우주박치기’ 6권 발행.
1965년 ‘춤추는 허깨비’ ‘토종개 삼형제’ 발행.
1970년 ‘태평양의 격전지’ ‘과달 카날 전투’ ‘방패연 타고 세계일주’ 발표. <소년 동아일보>에 ‘나비의 소원’ 연재.
1975년 <소년한국도서>에서 ‘현대판 흥부전’ 시리즈 발행.
1976년 ‘역적 촐랑이’ 시리즈 발표.
1985년 <제일만화예술원>의 주임 강사로서 후학들의 지도에 전념을 다하다가 사망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중장년층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 인기 연예인들 캐리커처(1999년 작품)
△ 주제 : 배움이 없이도 계수로 연막을 친다. (신문, 잡지, 홍보물, 단행본의 삽화 등 다재다능한 실력 보유)
△ 만화가 협회 가을 야유회, 앞좌 : 필자, 이종진, 유세종, 심명섭 / 뒤 : 정훈, 여태수, 박기정, 권영섭, 이갑호, 박부성 (1975년 미사리에서)
△ 공주대 만화영상과 입학생들 상경 수업차 ´제일 만화 예술원´ 방문 좌 : 정훈 주임 강사, 박기준 원장, 임청산 교수, 윤영옥 시사만화가(1990년 6월 28일)
△ ´제일 만화 예술원´, 잡지출판사, 애니메이션사, 만화가 화실 방문 견학 후 잠시 휴식 (맨 끝줄 우측 정훈 주임 강사)

최운정
1938년 평북 출생(본명 최도근). <고명상고> 시절 출중한 그림실력과 함께 재담꾼으로 통했다.
1956년 <월간 야담>에 ‘두고 봐야 하느니라’로 신인공모전에 당선, 작가로 데뷔한다. 당시의 심사위원은 김용환이었다.
1960년 청소년 명랑만화 ‘살살이’ ‘야살이’ ‘아차차 남매’ 등 폭소탄을 자극하는 아이디어와 재치 있는 언어구사는 청소년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의 스토리는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즉흥 아이디어로 엉뚱한 일을 벌여놓고 엉뚱하게 수습하여 웃음이 터지게 한다. 누구라도 흉내내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체 또한 그의 장기로서 청소년들에게 거리감 없는 친밀한 느낌을 준다.
1957년 <만화학생> 신인만화상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단행본으로 ‘우주여행’ ‘꼬마탐정’ ‘만화동산’을 발표하였다. 대중지에도 단골작가로 등장하였는데 ‘너구리 선생’ 등 그의 돌출 행동 만화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다.
△ 명랑지에 게재했던 <너구리 선생>(1960년)과 만화선집에 게재한 <여성상위시대> (1975년)
1960년 중반,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끌었던 서영춘을 모델로 삼아서 본격 성인만화에도 도전한다. ‘살살이 희극배우’ ‘살살이 별일이야’ ‘낙제대장 살살이’ 등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
△ 청소년 개그만화 <살살이> 시리즈 (1966년 발행)
△ 1960년대 인기 최고의 코미디언 구봉서, 서영춘을 모델로 응용한 개그만화 <살살이 희극 배우> 등 <살살이> 시리즈로 인기몰이(1960년)

만화가들 중에서도 재치 있는 만담가로 소문이 나서, 만화쇼 등의 작품을 연구해 무대에 서는 것도 그의 취미며 즐거운 일과 중 하나였다.
1974년 <한국만화가협회>의 이사로 있으면서 어린이 집 위문이나 양로원·국군 위문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만화쇼도 펼쳐 외로운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한편 TV쇼에도 출연, 신동우 등과 함께 만담과 장기 실력을 보여 주기도 했을 만큼 또 다른 특기로 명성을 높였던 인물이다.
후반기에는 코미디언 송해와 함께 새마을 운동에도 참여하며 많은 연예인들과도 친숙해진다. 그리고 야간 비어홀 무대에서 명사회자로 활동하였던 재치꾼 사회자, 만담가로 많은 팬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가 즐겨 타고 다니던 스쿠터의 충돌사고를 빚고 병원으로 후송되어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작가들과 만나면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만화 심의로 스트레스를 받던 선배들과 친구들, 후배들을 웃게 만들던 그의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남겨진 그의 작품들도 많지는 않지만 동료들과 독자들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진 않을 것이다.
△ 최운정 카툰, <충견의 도덕심>, 신한국 만화포스터전 출품작 (1993년 6월 25일)
△ 가을 야유회, 좌: 최운정, 이갑호, 필자, 하고명, 이우정, 박기정, 김정파(1975년 1월)
△ 만화가협회 송년회, 좌 : 필자, 최운정, 한 분 건너 이근철(1995년 12월)

△ 출판사와 만화가들 친목회, 좌 : 최운정, 김만택 편집장, 오학운 사장, 이재학(1965년)

△ 제2회 아시아 만화가 대회, 좌 : 최운정, 신동우 / 우 : 정운경 대회장(1997년 아시아 만화대회장)

△ 최운정 딸 혼인식 만화가 축하객들 앞좌 : 이범기, 황정희, 홍순창(영업부장), 필자, 최운정, 김정파, 이근철, 최석중 둘째 : 김찬, 이희덕, 김영숙, 심명섭, 박기정, 임수, 박진우, 하룡, 유효종, 하고명 셋째 : 김찬, 유세종, 한 분 건너 김기백, 이종진, 서정철(1995년)

김기백
1935년 부산 출생.
<부산공업학교> 전기과에 재학하며 공업미술에 대한 남다른 소질을 엿보이게 했다.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영화의 거리 충무로에서 알게 된 신문기자와의 인연으로 신문 시사만화 창작에 힘을 쏟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만화 인생이 시작되었다.
1961년 <전남매일신문>에 ‘나비영감’이란 4컷 만화를 연재하며 데뷔한다. 하지만 철도 요금 인상 문제를 신랄하게 풍자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 달만에 연재는 중단된다.
1963년 ‘어디로 갈까’라는 순정만화로 단행본에서도 데뷔한다. 같은 해인 1963년 ‘로맨스부부’를 연재했고 <소년세계>에 ‘깐돌이’를 연재했다. 또 <소년한국>에 ‘개구쟁이 박사’를 연재했다.
△ 좌 : 귀여운 말썽장이 캐릭터를 통해 청소년들의 웃음보를 터뜨린다. (김기백의 대표캐릭터) / 우 : "만화의 날" 기념, 이를 주제로 한 만화가 협회 회원전 출품작(2002년 11월)
1964년 <제일문고>에서 ‘로맨스 멍멍’ 발간.
1966년에는 신문 잡지와 병행하던 작품 활동을 단행본 쪽에 더욱 치중하여 대표작인 명랑 난센스 만화 ‘아차군재치양’을 창작해낸다. 아차군이 뭔가 실수를 남발하면 재치양이 재치 있게 그 실수를 수습하는 재미난 콤비 캐릭터를 형성하고 있다. 상상력이 뛰어나서 수백 종에 달하는 작품 모두가 독창적인 개성을 갖고 있는 게 놀랍다.
△ 청소년 명랑만화 <아차군 재치양> 시리즈의 앞 뒤 표지(오성문고 1969년 발행)

△ <아차군과 재치양> 본문, 작가의 재치가 번뜩이는 명랑 만화로 오래도록 사랑을 받았다.

△ 김기백 작품의 표지이미지들. 각 작품이 독창적인 개성을 갖고 있다.
1968년 <오성문고>에서 ‘장이의 대성공’ 발표.
1970년 ‘요술복 동동동’ 발표.
1971년 <소년한국>에 ‘인생마라톤’을 연재하며 본격적으로 만화가로서 각광 받기 시작, 곧 인기 만화가 대열의 정상에 서게 된다.
그는 1971년부터 <소년한국도서>의 전속 작가로 맹활약하면서, ‘만화도사’ 시리즈, ‘서울깍두기’ 시리즈, ‘행운아’ 시리즈 등 3백여 작품을 창작해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밝고 건강한 청소년 상을 잘 구현해내는 데 있다. 힘들고 화날 때일수록 웃는 씩씩하고 잘생긴 소년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김기백은 초기 순정만화가 중 한명인 여류 만화가 민애니와 결혼하여 같은 길을 걸었던 부부 만화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을 도와주던 제자 중에는 김영하, 최신오, 이진주, 이보배, 윤소영, 백종관 등이 있다.
1972년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 역임.
1976년 ‘청소년만화 윤리상’ 수상.
1993년 부부가 합심하여 ‘행진만화학원’ 운영.
1998년 <무용세계>에 ‘영이의 무용일기’ 연재.
그는 아직도 영화에 관한 미련이 남아 있어 가끔 시나리오도 집필하는 등 그의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의 노후 건강과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희망이 결실을 가져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 데뷔작 <나비영감>, 전남 매일신문, 풍자 만화 연재 중 필화 사건으로 3개월 만에 연재 중단 이후 부터 청소년 만화가로 활동했다. (1964년 )

△ ´만화 문제점과 그 타개책 세미나´ 참가, 좌 : 박진우, 김기백, 이상호 (출판문화회관 1988년 10월 11일)

△ 울산 청소년 만화 대회 참가 학원장들 좌 : 조득필, 박상원, 황정하, 필자, 김기백, 길문섭(회장), 이용진(고문), 장지연 (방어진 해변, 2003년 9월)

△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 참가 좌 : 권영섭, 김원빈, 김기백, 조관제, 박기소, 필자, 이소풍 (부천 2008년 10월)

△ 일본 만화집단 초청 방일, 앞좌 : 신동우, 건너서 박기정, 바바 노보루 둘째 : 사쿠라이 마츠모토, 김기백, 데츠카 오사무, 이상호 회장, 다다 히로시 (도쿄 1974년 12월 4일)

심명섭
1939년 강원도 출생. 학창시절부터 미술부와 연극부를 넘나들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졸업 후 연극 영화가 좋아 <계림극장> 미술부에서 간판 일을 하게 된다. 그림도 배우고 영화도 공짜로 보고 탭댄스도 무대 위에서 배울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한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그런 와중에도 원고 작업을 게을리 한 적은 없었다. 미국만화를 매우 좋아해서 오래 전부터 연구해 왔던 그에겐 ‘개구장이 데니스’ ‘찰리 브라운’ ‘꼬마 루루’ ‘블론디’ 등 모아둔 자료도 상당했다.
1960년에 명랑만화로 데뷔한다.
1961년 <부엉이문고>에서 ‘홍두깨 시리즈’를 펴내며 명랑만화가로 주가를 높였다. 이때부터 극장 미술부에는 사표를 제출하고 만화계에서 본격 활동을 개시하였다.

△ 좌 : 캐릭터 홍두깨와 꽃분이 컴비 우 : 동방만화 예술원, 화림만화 예술원 원장으로 후진 양성 신문 광고(1986년)
‘홍두깨의 모험’ 시리즈에 이어 ‘홍두깨는 제멋대로’, ‘귀신 잡는 해병대’ 시리즈 등 작품에만 전념하는 바쁜 나날을 지냈다.
국내 만화 캐릭터들이 대부분 일본 형의 모습이었던데 비해 미국형의 새로운 모습과 상상력을 동원한 폭소 판타지 스토리, 그리고 폭소 전쟁 등 흥미진진하게 독자들을 리드해 나갔다.
△ 청소년 명랑만화 시리즈로 장안의 주가를 높혀 (1960년 부엉이 문고 발행)

△ <홍두깨> 시리즈와 <황금 고양이 네로> 시리즈의 등장인물들 (1975년)
△ <건아 홍두깨> 본문, 미국 만화 스타일의 독특함 그림체에 차원 높은 유머가 돋보인다.
1964년 ‘떠돌이 왕자 셋’, ‘미무사’, ‘황금고양이 네로’ 시리즈를 계속 발표하던 중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연예 무대에 대한 미련을 벗지 못하고 있던 그는 친구의 권유로 유랑극단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일주하며 악극단의 단장으로 새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보면 그에게 있어 천추의 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려할 줄만 알았던 꿈의 무대를 실제로 맞닥뜨리고 보니 너무나도 함정이 많은 비극의 무대였던 것이다.
일기 사정에 따라서는 입장객은 한명도 없고, 장마철이 연속되어 인건비를 지불할 수 없게 되며 불량 단원들의 난동과 폭행으로 이어져서 결국 패기만만하게 시작되었던 흥행 사업은 파산으로 끝나고 만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만화계로 돌아온 그는 재출발을 꿈꾸지만 실력 있는 후배들이 많이 등장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0년 문화인 야구대회에 선수로서 출전.
1968년 <한국만화가협회> 이사 역임 등 사회자로 많이 알려졌다.
1970년 ‘바로 찾은 기회’를 비롯하여 역사, 스릴러, 공상과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골고루 작품을 발표하였다.
1977년 만화가 친목단체 <만필회> 회원으로 활동.
1985년 <화림만화학원>의 원장으로 후진 양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호쾌한 성격과 함께 그를 빼닮은 듯한 캐릭터 홍두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요즘 병석에 누웠다고 한다. 그의 쾌유를 빈다.


△ 신한국 만화 포스타전 출품작 (1993년 6월 25일)
△ 신한국 만화 포스타전 출품작 (1993년 6월 25일)

△ 동료 자녀 결혼식 후 만남, 좌 : 심명섭, 차형, 황정희, 임수, 이우봉(신라호텔 1979년 12월)

△ 출판 기념회장, 앞좌 : 심명섭(사회자) 축사하는 이기석(한국일보 국장) 뒤 : 김찬, 이우봉 (청소년 회관 강당 1975년 12월 10일)

△ 제일 만화학원 개원 기념회에서 사회자로, 좌 : 정훈, 심명섭, 이우봉, 최석중 (제일만화 예술원 1985년)

△ 만화계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건배, 좌 : 이원수, 길창덕, 심명섭, 이희덕 (망년회 1995년 1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