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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27 : 윤영옥, 이정문, 신문수, 박수동

1939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 폭격을 피해 친구 집에 피신해 있던 중 눈에 띈 김용환의 만화 ‘똘똘이의 모험’에 흠뻑 빠져 버렸고, 그것이 그에게 향후 만화가의 꿈을 심어주게 된 계기였다고 하니 꽤나 운명적인 한권의 만화였다 할 것이다.

2016-11-23 박기준



윤영옥
1939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 폭격을 피해 친구 집에 피신해 있던 중 눈에 띈 김용환의 만화 ‘똘똘이의 모험’에 흠뻑 빠져 버렸고, 그것이 그에게 향후 만화가의 꿈을 심어주게 된 계기였다고 하니 꽤나 운명적인 한권의 만화였다 할 것이다.
1955년 농업학교에 다니는 동안 미화부장으로 활약하면서 그림과 소설과 대중지를 탐독하는 게 그의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삼천리> <야담> <학생계> <새벗>과 같은 잡지들은 시골에서도 자주 눈에 띄었는데,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있는 만화를 찾아내어 읽을 때의 행복감이란 요즘 세대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습작한 작품을 만화가 임창 선생에게 보내 조언을 받는 등 자신의 실력 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59년 비록 소규모 신문사이긴 했지만 <광주신보사>에서 인정을 받고 견습사원이 되어 편집부에서 만화와 삽화, 컷, 광고 디자인 등 잡다한 일까지 가리지 않고 도맡아 했다.
1959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세계일보>에 투고한 만화가 입선하면서 그에게 만화가로서의 꿈에 한걸음 근접할 수 있다는 새 희망을 안겨 주었다.
△ <동아일보>에 독자만화로 입선된 최초 작품, (1959년.)
1960년 단행본 ‘대뚱이와 마른종이’ 발표.
이윽고 그는 용기를 내서 서울로 상경한다. 1961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 학교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미스건’을 연재해 그의 명성이 전교생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 건국대 신문에 연재된 ‘미스터 건‘, 후반기에 연재된 ‘미스건‘, (1961년.)
같은 해 <소설계>에 ‘엉털즈’ 연재.
1964년 군사정부 급변 사태로 한일 국교 수립 등의 문제를 두고 학생 데모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한국대학신문 기자협회>를 결성하고 있었던 그가 골칫거리였던지 해외연수 특혜의 기회가 주어져 첫 해외 여행길에 오르게 됐다. 그는 일본 언론계를 견학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만화 천국 일본은 그에게 황홀 자체였을 것이다.
많은 자료를 입수해 돌아와 연구와 습작을 반복하며 몰두하였던 것이 마침내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1965년 건국대 국문과 졸업.
1967년 <서울신문>에 시사카툰 ‘까투리여사’를 연재하게 되었고, 이어서 <소년서울>에도 ‘엉뚱이’를 연재하게 되었다.
△ <서울신문>에 연재된 시사만화 ‘까투리여사(1967-80년)’와 캐릭터 일러스트, (2002년 9월.)
△ <서울신문>에 소개된 ‘까투리여사’ 연재 사고(社告), (1967년 8월 25일.)
△ <소년서울 신문>에 약 반년간 연재한 아동만화 ‘엉뚱이‘, (1967년 3월 8일.)
1972년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필화사건에 의해 연재를 중단 당하게 된다.
1973년 <어깨동무>지에 ‘엉뚱이’를 4년간 연재.
1976년 <소년동아>에 ‘쌕쌕이’ 연재.
1977년 필화사건이 마무리되자 <서울신문>에 다시 ‘까투리여사’ 연재. 편집국 국장석 화백(부장) 대우를 받으며 근무했다.
1980년 <전남 매일신문>에 4컷 시사카툰 ‘메뚜기’ 연재.
△ <전남 매일신문> 연재 만화 ‘메뚜기’, (좌: 1976년, 우: 1980년.)
1986년 <한국신문만화사> 발행.
1991년 자서전 <4컷 속에 인생을 담고> 발행.
△ 좌: ‘한국신문만화사‘, 저술(1986년, 설화당) / 우: ‘4컷 속에 인생을 담고‘, 자서전 발행, (1991년, 진솔)
2001년 목원대 겸임교수역임.
2006년 ‘고바우 만화상’ 특별상 수상. 그러나 칠순을 앞두고 지병으로 사망함으로써 카툰계의 또 하나 별이 지게 된다.
△ 카툰, 주제 : ‘휴식‘, 부천국제만화전 출품, (2002년 10월 6일.)
△ 카툰, ‘어떤 탈북자‘, 한국시사만화작가 초대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2003년.)
△ 전국 31개 대학신문 대표기자들의 미, 일 언론 통신사 시찰단으로 주일 한국 대표부 방문, (1965년 2월 24일.)
△ 일본 원로 시사만화가 사토오 삼페이 내한 기념회, 앞좌 : 김성환, 사토오 산페이, 신동우 / 뒷줄 : 오룡(부석언), 윤준환, 이홍우, 윤영옥, 허어, (1987년 5월 6일.)
△ 공주문화대 상경, 수업시간 임청산 교수 한국 신문만화사 저자 소개, (제일만화예술원서 수업, 1996년.)
△ 앞좌 : 윤영옥, 최세종, 이화춘, 노석규, 사이로, 만화의 날 행사, (2005년 11월 3일.)

이정문

1941년 일본 고베 출생. 해방이 되자 어머니와 함께 귀국한다.
학창시절부터 만화책의 매력에 끌리기 시작했다. 당시 유명한 작품으로는 김의환의 ‘백가면’ 박광현의 ‘푸른 망토’ 그밖에 고상영, 고일영의 세계명작을 각색한 명작들이 매우 인기가 있었다.
1950년 한국동란이 시작되자 험란한 고생길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신문배달, 구두닦이 등 여러 직업을 거쳤는데, 이런 체험조차 훗날의 작가 생활을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1953년 서울로 상경, 15세가 되던 해에 문구점 점원으로 취업한다. 오전 6시에 출근해서 자정이 넘어서야 퇴근하는 고된 업무였다. 그해 추석 모처럼 휴일이어서 영화관에 가, 당시 코미디계의 명콤비가 연기하는 ‘뚱뚱이와 홀쭉이, 논산 훈련소 가다’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나중에 캐릭터 ‘심술이’를 완성하는 데 있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심술통‘ 탄생의 모티브가 된 코미디 흑백 영화들, 좌: 청춘 쌍곡선, 뚱뚱이(양훈), 홀쭉이(양석천), 합죽이(김희갑), (1956년 한형모 감독.) 우: 5부자, 양훈, 양석현, 구봉서, 이종철, 김희갑, (1958년 권영순 감독.)
그 후로 일하는 틈틈이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생각나는 대로 메모해 두었다가 집에 오면 캐릭터를 수정하고 그림 속에 대입시켜 보며 연구하는 일로 모든 스트레스를 풀었다 한다.
특히 당시 시대극화로 인기 절정이었던 ‘엄마 찾아 3만리’의 작가 김종래 선생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하는 등 많은 조언을 받기도 하였다.
1959년 월간 <아리랑>에 ‘심술첨지’로 입상, 데뷔.
1959년 <화제>에 ‘심술첨지’ 게재.
△ ‘심술 첨지‘, <화제> 지 게재, 한국 심술 성격의 원로 캐릭터 탄생, (1959년.)
△ 심술 성격의 2세 ‘심술통 캐릭터‘, 조연으로 등장, (1959년.)
1960년 <농원>에 ‘심술참봉’ 발표.
<경희대 주보>에 ‘메투리’ 연재.
1964년 경희대 경제과에 입학했다.
1965년 <새소년>에 SF ‘알파칸’을 연재하며 청소년 인기 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단행본 ‘알파칸 시리즈’를 제작 판매하여 히트를 친다.
1970년 <소년세계>에 ‘녹색별을 찾아서’ 연재.
1971년 <새소년>에 ‘알파칸 세균전쟁’ 연재하며 한동안 SF 만화 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전문 장르는 개그만화로 이후 개그만화 작업에 최선을 다했다.
1972년 <새소년>에 ‘심똘이와 심쑥이’ 연재.
1975년 <소년생활>에 ‘철인 캉타우’ 연재.
△ 청소년 스토리 만화 ‘철인 캉타우‘, 한국형 로봇 만화로 인기 폭발, (1975년 소년생활지 연재 표지.)
1980년 <리빙뉴스>에 ‘심뽀와 심통이’ 연재

△ 심술 가족 시리즈
1983년 <경향신문>에 ‘심술 999단 심쑥이’ 연재.
1985년 <스포츠서울>에 ‘심술통’ 연재.
1993년 <한국만화 문화상> 저작상 수상.
1996년 <파랑새> 학습만화 문고로, ‘심술통 만화 손자병법’ ‘심술통한자’ ‘심술통 탈무드’ 발행.

△ '심술통‘ 1985년 <스포츠 서울> 등장, 굵은 턱, 짧은 머리로 인기를 끌었다. 이미지는 심술통 캐릭터가 등장하는 교양만화 ‘심술통 탈무드‘의 표지 이미지, (1996년.)
1994년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 역임.
2003년 정보 통신부 발행 ‘심술통’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4년 용인 <둥지박물관>에서 ‘이정문 개인전’
△ 심술 기록 45년 회고전, (둥지 박물관 전시장, 2004년 12월 3일.)
2012년 ‘고바우만화상’ 수상.
1959년부터 놀부영감을 벤치마킹해 심술궂은 성격 묘사로 일관하던 독특한 캐릭터는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50년 동안 우리 만화계의 감초 역할로 인기를 유지해 왔던 그이기에 그의 향후 건강과 활동에 아직까지도 관심이 크다.
△ ‘철인 캉타우‘, 우주 전쟁 본문 중, (1975년 ‘소년생활‘ 연재분 원고)
△ ‘철인 캉타우‘ 본문, 로봇 설계도.
△ 이정문 50주년 전시회 (2009년 12월 23일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 제1회 아시아 만화 서미트 참가, 좌: 김준범, 필자, 최준식(보물섬 주간), 이정문, (일본 이와끼시 1996년 10월.)
△ ‘심수회‘, 좌: 오성섭, 김원빈, 이정문, 박수동, 윤승운, 지성훈, 고우영 (1997년.)
△ 청소년지들에 연재한 명작들, ‘클로버 문고‘ 단행본 시리즈 발행 기념식, 앞좌 : 김삼, 이정문, 필자, 지성훈, 최경탄, 전창진 / 뒤 : 김원빈, 윤승운, 신문수, 조관제, 박기정, 박수동 (2009년 3월 10일, 부천 만화박물관)

신문수
1939년 충남 천안 출생.
<중앙고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전만 해도 독서와 만화를 좋아했던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소질도 있었으나 한국화가로서의 꿈만 컸던 순수 미술을 지망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1954년 <홍익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교미전’에서 동양화 부문 특선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지원이 없는 한 순수미술 쪽을 지향하기란 힘든 일이었고 장래에 대한 보장도 어두웠기 때문에 군 제대 후에는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명성이 높던 김경언 선생으로부터 만화가로서의 재질이 있음을 인정받고 어시스턴트로 입문한 그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전문성을 키워 나갔다.
캐릭터의 구상과 함께 인물 데생을 공부하면서 명랑물을 소재로 하는 것이라면 영화든 코미디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관찰하고 연구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당시에는 명랑만화에 있어서는 신문 잡지를 총망라하여 김경언과 길창덕 선생이 석권하고 있었다.
1962년에 <아리랑>에 작품 투고.
1964년 <로맨스>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와 ‘카이젤 상사’라는 작품으로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 이듬해 결혼, 더욱 작품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1967년 <소년한국일보>에 청소년 만화 ‘칠칠이 모험’을 연재, 이 작품의 인기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여러 잡지로부터 한꺼번에 연재 청탁이 오게 되어 그의 활동반경이 점점 더 넓어지게 된다.
만화가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그의 출세작은 단연코 1972년 <월간어깨동무>에 연재하였던 ‘도깨비 감투’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동심으로 돌아가서 갖은 상상력을 동원해 작품에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 ‘도깨비 감투‘, ‘어깨동무‘지 부록으로 장편 연재된 인기 명랑만화, (1974년 8월, 10월호.)
△ ‘도깨비 감투‘ 캐릭터, 1967년 ‘소년한국일보‘ ‘칠칠이 모험‘에 이어 잡지 연재로 인기 대열, (1967~70년.)
그 후 1980년에는 ‘로봇 찌빠’ 등을 펴내며 더욱 더 인기 만화가로서의 명성을 드높였다. 이 작품은 근래에 극장용으로, 또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상영되기도 했다.
△ 대표작 ‘로봇 찌빠‘, 좌: ‘어깨동무‘ 특별 부록으로 연재, 인기 정상으로 명랑만화 시대를 이끌었다. (1980년.) 우: 최신 ‘로봇 찌빠‘, 애니메이션 원화 (2002년.)
△ ‘로봇 찌빠‘ 원고
△ 애니메이션 52부작 ‘로봇 찌빠‘ 원화.
‘맷돌이’ ‘날마다 웃는 집’ ‘허풍이 세계여행’ 등도 연달아 인기를 끌었던 후속 작품들이다.
이윽고 그는 성인만화에도 도전한다.
1986년 <주간만화>에 ‘옹녀전’ 연재. <매주만화>에 ‘맹물 주식회사’ 연재.
△ 성인만화 ‘신판 옹녀전‘, ‘주간만화‘ 연재 (1990년 5월 5일.)
1987년 <주간경향>에 ‘신판 봉이 김선달’ 연재.
그의 만화는 언제나 잔잔한 재미를 주는 게 특징이다. 독자들의 정서와 눈높이를 맞추어 같이 호흡하기 때문이다. 샐러리맨 생활은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그들 가까이에서 제3자가 되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의 폭을 넓혀가다 보니 누구보다 그 고민과 애환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다.
1996년 한국 출판만화 대상 수상.
2002년 <한국만화협회> 회장 역임.
2008년 <고바우만화상> 수상.
△ 제8회 고바우 만화상 수상, 축하객들과 함께 (2008년 11월 5일. 한국 프레스 센터.)
2012년 <시카프> 만화작가상 수상.
2016년 한국만화걸작선 23 <도깨비감투> 복간.
△ 한국만화걸작선 23 <도깨비감투> 복간, (2016년 11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그 나이에는 그 또래에 맞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는 상상만이 아니라 실제 취재를 통해 그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작가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 ‘신문수 개인전‘, 흐르는 물처럼 한 길을 걸어온 명랑만화 작가, (2004년 10월 28일, 청강문화대 박물관 도록.)

△ 좌측 사진; 창작만화가회 야구단, 앞좌 : 이성박, 윤승운, 권평국, 신문수 뒤: 김박, 지성훈, 오원석, 허어, 박수동, 이용우, (1978년.) / 우측사진; 초등학교 야구선수들과 친선 게임 후 만화 쇼 (1978년.)
△ SICAF 전시장, 좌측부터 신문수 만화가협회장, 손기환 만화애니메이션학회장, 필자, (2003년 8월 12일.)
△ 제6회 중국 국제만화 서미트 참가, 좌측부터 이두호, 오일용, 이희재, 신문수, 정창진 (2003년 10월.)
△ 조선일보 ‘이 사람‘ 인터뷰 사진, (2008년 6월 21일.)

박수동
1941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출생. 1945년 해방과 함께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1960년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평소 그림에 대한 취미가 남달랐던 그는 1960년 교육 전문지인 <새교실>지에 만화작품을 투고하였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만화가로서 데뷔하게 된다.
<경남밀양초교> 등지에서 5년의 교직생활을 하였다. 1965년에는 월간 <아리랑>지에 천연기념품 신인만화 공모전에 준당선하였고, 교육전문지 <새교실>에 ‘탁배기 교장’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25년간 연재한다.
△ 단산 초등학교 교사 시절 제자들과(1960년 겨울.)
1966년 퇴직 후 <교육신문> 기자, 그리고 ‘새교실’의 편집기자로 일하면서 1970년대 한국의 성인만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작가로 꼽힌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신문 기자의 경력을 가진 작가는 오직 박수동 뿐이다. 그런 배경 때문에 아동에 대한 심리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그의 작품들은 기존 작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어린이가 바라보는 시각 및 관점에서 사건이 전개되고 이야기가 해결점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1966년 <서울신문>에 ‘솔봄이’ 1년 6개월간 연재.
1967년 ‘박고구’ <경향신문>에 4개월간 연재.

△ 좌측 상단: 데쥐시절 신문 4컷 만화, ‘강짜 일병‘ (부산일보 1964년 1월 18일~2월 15일 연재.) 우측 상단: ‘박고구‘ (경향신문 1967년 3월 20일 65회 연재.) 하단: ‘솔봉이‘, (어린이 서울 1966년 1월 6일~1967년 2월 23일 연재.)
1974년 <선데이 서울>에 ‘고인돌’ 17년간 연재. <선데이 서울>에 ‘와이프 행진곡’ 연재.
△ 좌: ‘고인돌‘ 등장, 원시인 고인돌로 문명을 비판, 현대인의 건강한 성을 해하적으로 다뤄 성인개그만화 시대를 열었다. (1974년 주간선데이 연재.) 우: 독특한 개성과 정형의 등장인물들로 독자의 환영을 받았다.

△ 가정을 무대로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을 유머러스하게 묘사, (1982년 까치 발행.)
1974년 <어깨동무>에 ‘소년고인돌’, ‘5학년 5반 삼총사’ 연재.
1974년 <어깨동무>에 ‘별똥탐험대’ 연재.
1976년 <소년생활>에 ‘신판 오성과 한음’ 연재.
1978년 <소년중앙>에 ‘번데기 야구단’ 연재. 같은 해 <주간서울>에 ‘땅콩찐콩’ 연재
1985년 <주간야구>에 ‘딸기코 감독’ 연재.
1986년 <만화광장>에 ‘고인돌 야사’ 연재.
1992년 제2회 한국만화 문화상 수상.
2003년 <전주대학> 영상만화과 교수 역임.
2003년 제3회 고바우 만화상 수상
1977년 <심수회>라는 친목단체를 구성 창단한다. 고우영, 김원빈, 이정문, 신문수, 윤승운, 이두호, 허어, 김삼, 오성섭, 지성훈과 함께 활동하였다.
△ 심수회 여행, 좌: 박수동, 신문수, 고우영, 길창덕, 이정문, 윤승운, (제주도 1981년.)
박수동의 만화는 성인만화에 더 강점이 있다. 외국의 원시인 만화(B.C 시리즈)로는 자니하드, 그리고 일본의 소노야마 준지가 있다. 하지만 고인돌은 한국적인 건강한 웃음과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 같은 개성이 있다.
△ 좌: 박수동의 홍보용 만화, 우: 미국의 원시인 만화
보기에 따라서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허점을 찾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다. 박수동만의 독특한 선을 표현하기 위해 펜이 아닌 성냥개비로 그린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 박수동의 필기도구 변천, ‘땅콩 찐콩‘, 소년 서울 연재, 이 때만 하더라도 펜선으로 표현했다. (1974년 8월 25일.)
△ ‘와이프 행진곡‘, 여성중앙, 이 때부터 독특한 선을 표현, 성냥개비에 먹물을 찍어 사용(1975년 12월.)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작품 활동이 뜸해진 그다. 공기 좋고 물 맑고 산 좋고 경치도 좋은 충청북도 산골에서,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신선처럼 이웃들과 건강을 돌보며 취미인 바둑도 두며 고인돌처럼 살고 있다.
문득 그의 새 작품들이 그리워진다.
△ ‘월급장이 만세‘, 직업인의 생활을 담은 에피소드 묶음(1983년 까치.)
△ ‘고인돌‘, 제2회 아시아 만화대회 출품작(1997년.)
△ 제7회 한·일 만화가 엽서 교류전 출품 카툰, 주제: 원숭이 해(2004년.)
△ 박수동 특별전, (SICAF 2006년 5월 4일.)
△ 박수동의 걸작 단행본들
△ SICAF 전시장, 좌: 박수동, 필자, 신동헌, 황정희, 사이로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 낚시모임에서 출발한 만화동인회 ‘심수회‘, (1994년 9월 원천지 낚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