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만화를 참 많이 좋아했어”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는 2002년 제10회 대산 청소년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이름이고, 책의 표제가 된 작품은 고등부 소설 부문에서 수상한 단편이다.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하라니, 누군가의 인생에 말하는 듯 의미심장하고 강렬한 제목이다. 이 문장을 처음 접하고 가슴 어딘가 쿡 눌러지는 느낌을 받은 나는 작품집을 구해 읽었다. 소설은 현재 만화가가 되어있는 화자가 작가들의 10대 시절을 회상하는 글의 청탁을 받아 과거를 더듬는 이야기다.
△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 민음사 2002
작품집을 펴낸이들도 이 제목에 끌렸던 것인지 대상작을 제치고 표제작이 되었다.
입시 목적의 미술 학원을 다니던 ‘나’는 친구 ‘세영’을 만나면서 만화의 세계에 눈을 뜬다. 기계적인 데생에 머물던 나에게 세영의 만화에 대한 열정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같은 고교에 진학하면서 둘은 ‘BMW’라는 이름의 만화서클을 결성한다. 불이 잘 난다는 문제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바로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를 그대로 영어로 읽은 약자. 장래의 꿈을 일찌감치 정해놓고 도중에 이탈하지 말자는 강한 의지를 약속한 이름이었다.
프로 만화가가 되는 공통의 꿈을 가지고 BMW에 다섯 명의 여고생이 모인다. 가장 그림 실력이 뛰어난 만큼 신랄한 ‘혜숙’, 쾌활한 성격과 반대로 어두운 만화를 그리는 ‘우경’, 술과 담배를 하는 등 살짝 비행소녀지만 문학적인 만화를 그리는 ‘보연’까지 다섯 친구들은 오로지 만화가만을 원한다. 기성 만화를 두고 토론하는 것은 물론, 매달 10페이지의 창작만화를 마감하고 서로 냉정하게 비평하는 등 엄격한 회칙의 동인 활동을 한다. 그러나 대입 수능 시험을 앞둔 고3 수험생이 되면서, 그들의 꿈은 현실의 문제로 삐걱대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각자의 문제들 앞에서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꿈과 열정이 가득 담긴 소중한 습작 원고들을 부모의 손으로 또는 제 손으로 직접 쓰레기 소각장에 던져놓고 소녀들은 흐느낀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한다. “나는 네 만화를 참 많이 좋아했어.”
끝내 만화가가 된 화자는 꿈에 도달한 자의 미안함과 쓸쓸함으로 친구들과 지난 시절을 그리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맺는다. 고교 2학년 때 쓴 단편 소설에서 이미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분들은 어떻게 책 한 권을 써낼 수 있는 걸까?” 묻던 학생은 직업적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통찰과 비전이 있었던 것 같다. 작품을 쓴 김지현 씨는 국문과를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 겸 소설가가 되었다. 러브크래프트와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선 등의 옮긴이로서 그의 이름을 장르문학 곳곳에서 발견하고 생면부지의 내가 묘한 반가움을 느낀 적이 있다. 반드시 만화가가 된 건 아니지만 번역가라니, 스토리텔링의 세계에서 창작보다 훨씬 숭고한 일이 아닌가!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나의 옛날을 되새겨봤다. 자신을 세계에서 제일 만화를 잘 그리는 중학생으로 믿고서 만화잡지에 투고했던 일이나, 만화는 절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미술 선생님과 논쟁하고 이상한 친분을 쌓았던 일, 학교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친구들과 만화 동아리를 결성해 작품집을 만든 일 등 케케묵은 추억이 떠오른다. 정작 난 벌써 잊었는데 아직도 내 만화를 기억하는 먼 친구의 안부 속에서, 만화가만을 원했던 과거의 꿈이 새삼 소중하고 또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를 하고자 왔을 때 그 역시 만화를 사랑하는 스승이 내게 말했듯, 나는 만화가의 꿈을 배신하고 온 거나 마찬가지다. 모두 다 할 수 있다는 건 과욕이고 착각. 재능은 꾸준히 오래 갈고닦지 않으면 쉽게 고갈된다. 꿈은 늘 훈련이 필요하다.
“선생님, 사실은 만화가가 되고 싶어요”
이 소설과 함께 얘기하고픈 작품이 있다. 만화가 히가시무라 아키코(東村アキコ)의 이름을 처음 안 것은 작품이 아니라 인터넷의 게시물에서였다. 일본 여류작가가 한국 남자 연예인에 반해 한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한류 팬이 되었다는 거였다. 만화 본편보다는 보너스 후기를, 작품보다는 작가를 ‘짤’로서 먼저 접한 것. 대외활동과 신변 노출이 잦은 일종의 예능인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의 만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미대 입시생 시절부터 프로 만화가로 데뷔하기 까지를 그린 자전적 이야기 <그리고, 또 그리고 かくかくしかじか>(2011)다.
△ 히가시무라 아키코 <그리고 또 그리고>
정은서 옮김, 애니북스 2014
이혼하고 아들과 단 둘이 사는 싱글맘으로 현재 집에서 매일같이 만화를 그리는 하야시 아키코, 바로 작가 자신은 어려서부터 장래 희망이 순정 만화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 12살 때 이미 스토리 만화를 그려 자신이 투고하면 곧바로 데뷔, 순정만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초대형 신인이 되어 히트를 칠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앞서 세계최강의 중학생 만화가를 꿈꾼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데 암튼 “만화를 그리는 아이라면 반드시 이런 꿈을 꾸는 법”. 공부는 내팽개치고 만화책이나 보며 느긋하게 지내던 ‘하야시’는 무사히 아무 생각 없는 고교생이 되어 미대 입시를 준비한다. 여전히 자아도취에 빠져 미대에 수월하게 들어가리라 생각하던 하야시는 친구의 소개로 바닷가 작은 화실에서 붓 대신 죽도를 휘두르는 ‘히다카 켄조’ 선생을 만나면서 자신의 실력과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고 만화가가 되어서도 이 화실에 계속 다니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럴듯한 예술가가 되어 성공하려는 비대한 자의식에 적당히 살고자 하는 낙천주의, 거기다 자기 능력의 실체와 한계가 파악되면 포기가 빠른 성격까지 결합한 하야시의 막연한 꿈은 요령이라고는 부릴 수 없는 히다카 선생의 혹독한 스파르타식 그림 수업을 통해 땅에 발을 붙이는 계기를 얻는다. 자신이 미대 출신이 아닌 화가로서 미술계에선 이단아 취급 받는 시골 화실의 선생이면서도, 히다카는 입시와 대학을 무시하거나 시스템 바깥의 예술이 진짜라는 식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하야시에게 철저히 데생의 기본에 매진하게 한다. 요령을 피우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무조건’ 그린다. 그것은 그림을 그린다, 라는 행위 자체가 노동임을 일깨워 몸의 습관이 되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와 엄청난 바보 사이, 진짜 예술가란 사실 후자에 가깝다는 것은 작가를 꿈꾸는 누구나 어느 날 깨닫고 마는 진실. 문제는 하야시가 선생에게 자신의 진짜 꿈을 고백하지 않은 것이었다.
△ 하야시 아키코와 히다카 켄조 선생의 강렬한 첫 만남
히다카는 하야시가 화가가 되기 위해 미대에 간다고 믿었다. 같이 2인전을 열고자하는 스승은 제자에게 대학에서 많은 그림을 그리길 당부한다. 그러나 미대에 간 하야시는 그림을 그릴 최고의 환경에서 정작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나중에 집중하면 금방 그릴 수 있다고 미룬 다음 흥청망청 나태하고 방탕한 일상을 보내다 마음 속 불안만 키웠고 결국은 하얀 캔버스 앞에서 손이 멈춰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슬럼프에 빠진 제자를 찾아온 히다카 선생은 하야시에게 자화상을 그리게 하면서 외친다. “잔말 말고 그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려라!” 그러나 하야시는 대학 4년을 잉여의 시간으로 흘려버린다.
하야시가 잠시 잊고 있었던 만화가의 꿈을 되살리기 시작하는 건 3권부터다. 졸업 후 정식으로 화가가 되길 바라는 선생과 교사가 되길 바라는 부모 사이에서 만화가의 꿈을 숨겼던 하야시는 고향으로 돌아와 백수 시절을 다시 화실에서 보내다 전화회사 콜 센터에서 2년 반을 근무하게 된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 하루 종일 컴퓨터와 전화에 시달리다 퇴근하면 화실에서 수험생들을 가르치고 녹초가 되는 일상을 반복하다보니 회사를 그만두기 위한 방법으로 만화를 그리자는 마음을 먹는 하야시. 작가는 여기서 독자들에게 외친다. “사람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친 상태일수록, 스트레스가 한계까지 치달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야말로 꿈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겁니다!” 시간이 남아돌던 대학시절에는 전혀 그리지 않다가 생활에 허덕이며 자유시간이 몇 시간밖에 없는 상황에서야 처음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 “우리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인간이 아니에요.”
우여곡절 끝에 잡지 데뷔의 꿈을 이룬 하야시, 하지만 여전히 선생에게만은 만화를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의 그릇으로 채울 수 있는 만화의 가벼움과 진지한 회화의 고통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지만 자칫 스승을 실망시킬까 주저한다. 고민 끝에 선생에게 고백하자 히다카의 반응은 의외였다. 만화는 만화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하루도 쉬지 말고 그리라는 것. 그러나 스승의 말에 휘둘리기 보다는 온전히 만화를 선택하려는 하야시는 고향과 선생의 곁을 떠날 생각으로 회사 출퇴근과 화실 알바, 밤에는 만화 원고 작성을 하는 강행군을 이어가다 연재가 결정되면서 도망치듯 오사카로 이주한다. 이제 만화에 올인 할 수 있는 매일, 연재 만화가로서 원고와 마감과 입금 확인을 반복하는 성취감에 익숙해져갈 때 고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암에 걸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게 되었음을 담백하게 전하는 스승이었다.
△ 히가시무라 아키코 원화전’ 포스터.
캐릭터들 속 죽도를 들고 있는 히다카 켄조 선생이 보인다.
“괜찮다, 그려라.”
마지막 5권의 이야기는 이 만화책을 처음 접할 독자를 위해 남겨두어야겠다. 이제 20년차 경력의 작가는 많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현재 네이버 웹툰 <위장불륜>도 연재 중)하면서도 마감을 엄수하는 지금의 원동력은 “괜찮다”며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던 스승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한다. 만화를 그리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며 “그려라!”고 외치던 켄조 선생의 모습. 작업하는 컴퓨터 책상 앞에서, 노트북을 들고 나온 카페 구석자리에서도 이런저런 하찮은 이유로 글이 안 써진다고 외치는 내게, 오히려 마감 쳐야할 일을 더 늘리라고 하던 내 스승과 겹쳐 보이는 장면이었다. 꿈이 밥벌이가 되어도 도중에 도망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100% 진실임을 알아도 모른 척 하고 싶은 게 제자다.
만화의 하야시 미카코는 선생에게서 도망쳤다는 죄책감을 갖지만 자신의 꿈에선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인기 만화가가 되었다. 욕심만큼 능력 이상으로 일을 늘리며 밥벌이가 된 만화가의 길을 끊임없이 간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누구나 고단하다. 중간 중간 작은 보상이라도 없다면 버티기 힘들고 포기하고 싶어진다. 젊은 날 외에 인생의 모라터리엄(moratorium, 유예)을 선언할 수 있는 시기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시절만큼 아쉬운 때가 없다. 나도 그렇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내가 반드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고 또 물을 것 같다. 설령 재능이 있어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만 기다리니까 미리 더 노력을 쏟을 것 같다. 다시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에서 한 문장을 더 빌려야겠다. 이제 막 수능을 치르고 새내기 대학생이 될 내년을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올해 겨울이 조금 더 추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