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에 대한 추억은 어둡고 만화카페의 기억은 화사한가?
대본소부터 만화카페까지 만화 대여 공간의 변화
어둠고 침침한 이미지의 만화방은 어떻게 휴식과 데이트 장소인 만화카페로 변화했을까?
박세현(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소장)
허름하고 음침한 길가로 난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면서 들어선 그곳. 천장의 형광등 조명은 어둡고 실내엔 매캐한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오래된 책 먼지 냄새가 코끝을 쓰윽 스치고 지나면, 긴 마른기침이 튀어나온다. 바로 입구에는 웬 노파 하나가 계산대에 앉아서 무표정하게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곳은 바로 만화방이다.
사실 만화방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에게도 만화방의 추억은 특별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한글을 제대로 깨치지 못한 나는 만화방에서 만화책 한 장 한 장을 침 묻은 손가락으로 넘기면서 어느새 한글을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편, 초등학교 6학년부터 집안에서 혼자 교회를 다녔던 나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차례(제사)를 지내지 않기 위해, 명절 때 여러 번 가출을 감행했다. 그때 내가 유일하게 갈 곳은 만화방뿐이었다. 아마 가장 맛있는 음식이 먹을 수 있었던 시기에, 허름한 만화방에서 쫄쫄 굶으면서 만화를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듯하다.
△ 영화 <아저씨> 속의 만화방
어쨌거나 첫 번째 문단은 요즘 개봉 10주년 맞으면서 핫하게 다시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영화 <아저씨> 속 등장하는 뻔하디 뻔한 만화방의 이미지를 묘사한 글이다. 영화나 문학 속의 만화방은 거의 아니, 늘 이렇게 무겁고 지저분하고 어둡고 삭막하고 범죄소굴처럼 묘사되어 있다.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였던 만화방은 영화 속에서는 이렇게 부정적 아이콘이 되었을까? 아마도 ‘만화’를 천덕꾸러기나 유해식품보다 더한 것으로 폄하했던 인식이 고스란히 만화방에도 이어졌을 것이다. 우리네 어른들의 뇌리 속에는 아무튼 만화와 만화방은 한통속으로 여겨졌을 테니까…
그럼 이런 만화방의 기원은 뭘까? 사실 만화방은 만화책을 사서 보지 못하기에(돈이 없어서, 혹은 만화책이 너무 많아서) 만화책을 빌려서 집에서 보거나 그 자리에서 읽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근데 지금의 만화방처럼 17세기 후반 조선시대에도 책을 빌려보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대중소설 읽기가 나름 유행이었다고 한다. 법도와 윤리를 따지던 조선시대에 음란소설에 빠진 세태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영화 <음란서생>(2006)이 이때의 세태를 잘 보여준다. 하여간, 소설을 빌려주던 곳을 ‘세책점’이라고 불렀단다. 세책점은 소설을 필사해서 책값의 10분의 1 정도의 금액을 받고 책을 빌려주었다. 여기서 재미난 점은 책이 여러 번 대여되다 보니, 종이가 해어질 것을 염려하여 종이에 기름칠을 했으며, 두꺼운 한 권짜리 소설책은 여러 권으로 필사했다고 한다. 특히 결정적인 장면에는 다음 권으로 넘겨서 필사하여 책을 분권해서 대여했다고 한다. 정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편집과 제작의 상술은 대단하다.
△ 1952년 거리에 펼쳐진 만화 좌판 풍경
지금의 만화방 형태는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의 혼란과 전쟁 후의 상흔과 폐허가 남았던 1950년대 초중반, 만화책을 빌려 볼 수 있는 곳은 ‘방’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시장이나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 놓인 ‘좌판’이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1957년에 아현동에 만화총판이 생기면서 1960년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만화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당시에 다양한 장르의, 여러 만화작가들의 만화책들이 출간되었고, 지역마다 만화총판이 생기면서 만화방들에서 소비되었다. 결국 만화방은 만화산업의 번성과 그 맥을 같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만화방의 첫 이름은 우리 고유의 말이 아니었다. 만화방을 ‘대본소(貸本所)’나 ‘대본옥’라고 불렀다. 만화(漫畫)라는 용어도 일본의 망가(マンガ)의 한자어인 것처럼, 대본소도 일본어 ‘카이혼(貸本)’에서 나온 것이다.
1990년대 만화방과 함께 도서대여방의 붐으로 만화산업은 호황의 시기를 누렸다. 하지만 1997년 IMF 금융위기와 2000년대 IT 붐은 한때 반짝하던 만화방과 대여방 시장에 빨간불로 경고했고, 수만 개에 이르던 만화방과 도서대여방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몰락의 현실화는 출판만화가 아닌 디지털 만화(온라인 스캔 만화, EBOOK, 웹툰 등)의 탄생과 2010년 스마트폰의 상용화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 홍대에 있는 만화카페 실내 풍경
기존의 퀴퀴하고 어둡고 접근이 꺼려지는 만화방은 팬시하고 조명은 밝고, 심지어 화려한 인테리어는 물론, 편하게 누워서도 만화를 볼 수 있는 휴식과 데이터 장소로 바뀌었다. 이름도 만화방이 아닌, 만화카페로 더 특화되었다. 만화카페에는 과거 만화방 전문 만화책인 일일만화보다는 웹툰의 출판만화와 일반 도서로 발간된 만화,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해지면서 출간된 만화책(일명, 단행본 형태의 만화책)들이 즐비하다. 여기엔 연애, 추억, 기억, 향수, 오락의 재미들이 발현한다.
2020년 지금 우리는 물리적 공간이라는 만화방이 아니더라도 사이버 공간인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만화방에서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환경에서든 수많은 만화와 웹툰을 즐길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만화방에 대한 추억이 디지털 파일처럼 삭제되거나,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만화카페에서 보낸 기억이 무조건 화사하고 상쾌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추억은 과거의 향수를 먹고 살며, 기억은 지금의 즐거움을 공유하게 만든다. 그곳이 만화좌판이든, 만화방이든. 만화카페든, 아니면 사이버 만화방이든…. 문제는 우리에게 늘 즐거움과 재미, 그리고 시간 때우기를 선사하는 스낵컬처, 만화책이 항상 곁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