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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네이버 웹툰 《금혼령-조선혼인금지령》 속 곤룡포 이야기 3편

웹툰으로 보는 우리나라 복식 이야기

2020-11-27 권병훈



네이버 웹툰 《금혼령-조선혼인금지령》 속 곤룡포 이야기 - 3편
웹툰으로 보는 우리나라 복식 이야기



권병훈(복식사 전공 <오례> 대표/영화 '남한산성' 복식 자문)






《금혼령-조선혼인금지령》 속 곤룡포를 통한 시대 추정

그렇다면 웹툰 《금혼령-조선혼인금지령》 속의 곤룡포는 어떨까? 일단 작품의 서두에서 천지혜/산책 작가가 언급했듯 이 작품이 퓨전 사극이자 픽션으로서, 실제 인물, 단체, 사건 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해당 작품 속 곤룡포 차림을 놓고 이래저래 재단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실례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 작품 속 곤룡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만약 조선 시대라고 가정했을 때 몇 세기 어느 유물에 가장 가까운 복식이라고 보이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논하도록 하겠다.

 


△ 출처 : 네이버 웹툰 《금혼령-조선혼인금지령》


극 중에서 왕은 모체가 낮은 익선관에 정면을 보고 있는 흉배, 그리고 소매가 아주 넓은 것은 아니지만 다소 넓은 것을 착용했으며, 옥대는 사각형으로 된 것을 사용했고 곤룡포의 옷감은 운보문단을 사용했고 곤룡포의 속에는 깃과 동정이 확인된다. 일단 위와 같은 형태의 복식을 기준으로 봤을 때 시대는 19~20세기 이후로 보인다.

 


△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 


현존하는 곤룡포 유물은 영친왕의 것과 고종 또는 순종이 입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황룡포본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습(一襲)이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영친왕의 것이 유일하다. 영친왕의 익선관은 자적색으로 된 것으로 모체가 낮고 뿔은 동그랗고 앞으로 약간 꺾여있는 형태다. 곤룡포의 경우 소매가 적당하게 넓으며 손이 다소 짧다. 웹툰 속 흉배의 경우 영친왕의 곤룡포 속 흉배 유물과 동일한 형태로 그렸다. 또한 뒷모습을 보면 옥대가 사각형으로 되어있어 허리를 다 두르지 못하고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극 중 시대로는 다소 앞선 시대를 표현한 느낌이 있으나 복식으로만 봤을 땐 구한 말 급변하는 복식의 형태를 차용한 것이 확인되므로 옷으로만 보면 조선 말기의 또는 대한제국 시기 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면 작가는 왜 위와 같은 형태를 차용했을까? 짐작했을 때 두 가지 이유가 남는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듯 온전하게 일습이 남은 것은 영친왕의 곤룡포 유물이 유일하며, 앞선 시대의 곤룡포 유물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시대 상장례 문화와도 연결되어있는데, 조선 시대의 왕이 돌아가시면 소렴(小殮)·대렴(大殮)의 과정을 거친다. 대렴과 소렴의 과정에서 왕의 시신에 왕이 평상시 입던 면복·강사포·곤룡포 등 다양한 의복들을 겹겹이 입힌 후, 시신을 꽁꽁 묶고 관속에 자리한 시신의 주변에 있는 빈 곳에는 다른 옷들로 채워 넣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남은 유물이 거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존 퓨전 사극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곤룡포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 사진 11과 12는 한 때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던 사극 《해를 품은 달》과 《구르미 그린 달빛》이다. 비록 왕과 세자라는 차이가 있어 옷의 색깔은 차이가 있으나 흉배의 형태, 장신구가 거의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애초에 퓨전 사극이라는 설정이 가미된 만큼 어느 임금의 시대라는 역사적 고증절차를 생략하고 비교적 구하기 쉬운 의상과 소품들로 구성했기 때문에 사극에서 등장하는 조선 시대 시대별 왕의 곤룡포와 그 장신구에 대한 큰 차이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작가 역시 위와 같은 고증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기존 사극에서 많이 보이는 복식 양식을 차용 한 것이라고 짐작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담긴 곤룡포

 

앞서 언급했지만 선대 왕이 돌아가시면 염습 과정을 통해 평소 입고 있던 곤룡포를 같이 시신에 입히거나 혹은 관속에 넣어버렸기 때문에 남아있는 곤룡포 유물이 흔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정조 임금 대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세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염습 과정에 함께 넣어서 보낸 기록이 보인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의빈 성씨와 정조 임금 사이에 태어난 문효세자가 훙서(薨逝)하자 왕이 대렴을 친림하던 중에 갑자기 자신이 입던 곤룡포를 자신의 아들의 관 속에 넣어서 보냈는데, 이는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조의 경우엔 자신이 훙서할 때 재궁에 채워넣은 옷 중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진홍운문대단 곤포(眞紅雲紋大緞袞袍) 【금용 흉배. 영묘(英廟)가 입었던 옷이다.】,

아청 대단 곤포(鴉靑大緞袞袍) 【장헌 세자(莊獻世子)가 입었던 옷이다.】

 

여기에서 영묘(英廟)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을 가리키고, 장헌세자(莊獻世子)는 곧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말한다. 정조는 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신의 관 속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입던 곤룡포를 함께 채워 넣었던 것이다. 이것이 정조의 바람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후손들이 임의로 넣어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부자간에 파국으로 치달았던 그 관계를 직접 겪어야만 했던 정조가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녹아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며

이로서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에 대한 간단한 지식과 더불어 웹툰 《금혼령-조선혼인금지령》 속 왕의 곤룡포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더더욱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을 통해 《금혼령》을 보는 웹툰 독자들이 곤룡포에 대한 관심을 갖고 보다 쉽게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금혼령-조선혼인금지령》은 매주 금요일 네이버 웹툰을 통해 연재되니 많은 관심과 평점을 부탁드리며 글을 마친다.

필진이미지

권병훈

전통복식전문가, 전통복식재현단체 "오례" 대표